2024년 5월 9일 (목)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지] 발칸: 몬테네그로에서 만난 작은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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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2-24 ㅣ No.1530

[발칸의 빛과 그림자 속으로] 몬테네그로에서 만난 작은 성인


 

- 페라스트에 떠있는 두 개의 작은 섬. 사이프러스가 빙 둘러선 조지 섬은 슬픈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일반인의 출입이 허락되지 않는다.

 

 

하룻밤을 묵은 몬테네그로의 수도 포드고리차의 아침은 가랑비가 내리고 아련한 안개에 젖어있었다. 짙푸른 나무들 속에 하얀 미나레트의 기둥이 아련한 실루엣으로 다가왔다. 몬테네그로의 모슬렘(이슬람교도) 비율은 높지 않지만 세르비아에서 독립한 지 오래되지 않아 이슬람의 흔적이 아직 많다고 한다.

 

발칸의 여러 나라가 그렇듯 몬테네그로도 나라 이름이 수없이 바뀌었다. 고대 로마로부터 불가리아 제국, 베네치아 공화국, 오스만 제국을 거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그리고 세르비아-몬테네그로 시절을 거쳐 마침내 2006년 6월 몬테네그로라는 이름으로 독립국이 되었다. ‘검은 산’이라는 뜻의 ‘몬테네그로’는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을 때 얻은 이름이고, 자국에서는 ‘츠르나고라’(Crna Gora)라고 쓰는데 뜻은 같다.

나라 이름처럼 정말 검고 어두운 돌투성이 땅이었다. 몬테네그로에는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남은 돌덩어리들을 자기네 나라에다 버렸다는 (자조적인) 전설이 있다고 하는데, 정말 거칠고 황폐한 풍경이었다.


- 배를 타고 들어갈 수 있는 ‘바위 위의 성모 섬’은 뱃사람들이 오가며 돌을 던져 만들었다는 인공섬이다.

 

 

빗속에 아름답고 오래된 도시 코토르를 잠시 둘러보고 달리다가 조망이 좋은 자리에 버스가 멈췄다. 페라스트의 아름다운 정경을 만끽하는 곳이었다. 그러고는 저만치 보이는 작은 섬의 ‘바위 위의 성모님 성당’을 찾아 배를 타러 갔다.


동화 같은 섬의 작은 성당이었다. 아담하고 하얀 겉모습과는 달리 성당 안은 화려한 제단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인공 섬이라고 해도 벌써 오백 년의 역사를 살았으니 만만한 세월이 아니었다. 그동안 페라스트 사람들이 외적의 침입과 험난한 바다와 치르는 싸움에서 얼마나 성모님께 의지했는지 성당 안의 그림들이 얘기해 주고 있었다. 성모님께 전구해 응답을 얻은 이들이 걸어놓은 여러 봉헌물이 제단에서 옆방으로 들어가는 문 위에 걸려있었다.

바로 그곳이었다. 문턱을 넘기도 전에 한 평도 되지 않을 그 작은 공간의 벽이 나를 끌어당겼다. 거기에 낯익은 누군가가 있었다. 결코 익숙하지 않지만 분명히 알게 된 존재였다. 헤르체그노비의 레오폴드 만딕(Leopold Mandic, 1866-1942년) 성인. 그의 상반신 모자이크와 작은 전신 부조가 거기에 있었다. 살아있는 분을 만난 것도 아니지만 너무나 반갑고 기뻤다.


- ‘바위 위의 성모 섬’ 작은 성당에는 헤르체그노비의 레오폴드 만딕 성인의 모자이크와 전신 부조가 있었다.


뒤늦게 알게 된 그 ‘작은 성자’의 고향에서 어떻게든 그의 자취를 찾아보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어서 무척 아쉬운 참이었다. 그런데 페라스트의 섬에서 이렇게라도 만나게 되다니. 처음 계획대로 오스트로그 수도원으로 갔다면, 비바람이 심해 배를 탈 수 없었다면…. 분명히 어떤 이끄심이 있다는 생각에 마음 가득 기쁨이 젖어왔다.

1866년 성인이 태어났을 당시에는 카스텔누오보(Castelnuovo)라고 불리던 그의 고향에는 크로아티아, 그리스, 세르비아, 러시아, 터키 사람들이 한데 살고 있었다. 당연히 종교도 뒤섞여 있었다. 그는 카푸친회에 들어간 뒤 고향에 파견되어 갈라진 형제인 정교회와의 일치를 위해 살고자 했다. 선교사로 파견되려고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말까지 배우고 있었다.

하지만 심하게 작은 키에(성인이 되어서도 135센티미터 정도였다고 한다.) 언어 장애가 있는데다 위장병과 신경통에 자주 시달릴만큼 건강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수도회 장상들은 그를 고해성사 전담사제로 임명했다.

 

- 성인이 거의 평생을 살았던 이탈리아 파도바의 성소 작은 마당 벽에 그의 고향 ‘카스텔누오보’의 아름다운 풍경이 그려져 있다.


그는 이탈리아 파도바에서 40년 동안 고해신부로 살다가 선종했는데, 고해하는 이들에게 너무 관대하게 보속을 주는 것으로 유명하여 장상의 질책을 듣기도 했다고 한다. 그때 성인은 이렇게 항변했다고 한다. “제가 신자들에게 너무 착하게 군다고들 하는데, 사람들이 사제 앞에 와서 무릎을 꿇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하느님의 용서를 원한다는 충분한 증명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모든 것을 뛰어넘지요.”

그날 아침 그의 고향 바닷가에서 그를 기억했다. 성인은 가슴이 새카맣게 타들어간 적이 없었을까? 그를 품어 기른 검은 돌산 자락 어디쯤에서, 그가 들으며 자랐을 바닷소리를 들으며 그가 겪었을 아픔과 좌절, 절망과 슬픔 등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신뢰와 부활과 희망을 생각하며 기도했다. “주님, 제 마음의 어둠을 밝혀주소서.” 그의 사부 프란치스코가 다미아노 십자가 앞에서 드렸던 기도를 바쳤다.

- 파도바 성소 입구에 자리한 레오폴도 만딕 성인. 워낙 약한 몸으로 날마다 거의 열 시간을 좁은 고해소에 머물다 보니 허리는 점점 더 굽고, 관절염이 악화되어 손이 오그라들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꿈꿨던 갈망을 접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새장 안에 있는 새와 같아요. 하지만 내 마음은 늘 바다 저 너머에 있습니다.”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가 봉쇄 수도원에서도 기도 안에서 세상의 슬픔과 고통을 깊이 공감했듯이, 수십년 동안 그 작은 고해소에 머물면서 그는 기적의 씨를 뿌리고 있었다. “내 봉사직무를 통해 오직 한 목자 아래 단지 한 양떼밖에 없을 것이라는 하느님의 약속이 실현되도록, 나는 나를 은혜로이 뽑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선하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발칸을 다녀온 뒤 이탈리아 파도바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만딕 성인이 거의 평생을 산 곳을 찾아볼 수 있었다. 성인이 선종한 뒤 마침내 교회에 ‘봄바람’이 불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회의 닫힌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 것이다. 공의회는 ‘갈라진 형제’들에 대해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그리고 발칸 땅에 정치 경제의 봄바람도 불어오고 있다. 겨울이 매서웠으므로 쉽지 않을 그 길을 생각하며, 우리의 갈망과 계획 너머 모든 것을 선으로 이루실 주님께 그 땅을 위해 기도한다. 발칸의 빛과 그림자, 그 모두에 하느님의 은총이 늘 함께하기를.



- 성인의 기념관 벽에 걸린 그림. 성인이 선종한 뒤인 1964년, 1054년 교회의 대분열 이후 처음으로 예루살렘에서 만난 바오로 6세 교황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가 성인과 함께 기도하고 있다.

 

* 그동안 ‘발칸의 빛과 그림자 속으로’를 훌륭히 엮어주신 이선미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 이선미 로사 - 가톨릭교리신학원 성서영성학과를 수료했다. 여러 차례 해외성지를 순례하다보니 가까운 성지와 우리 전통에도 눈이 뜨여 조금씩 관심을 기울이는 중이다.

[경향잡지, 2015년 12월호, 글 · 사진 이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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