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금)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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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발칸: 세르비아 정교회 수도원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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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4-22 ㅣ No.1474

[발칸의 빛과 그림자 속으로] 세르비아 정교회 수도원에 가다



- 골리야 산자락에 자리한 스투데니차 수도원은 세르비아의 눈부신 한때였던 네마냐 왕조의 왕들이 안식을 취하고 있는 ‘거룩한 무덤’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지차(Zica) 수도원의 붉은색과 흰색은 강렬하고 순정해 보였다. 붉은색은 초기 교회 순교자들의 피를 상징하는 아토스 산 수도원의 전통에 따른 것으로, 바로 그 붉은 순교자들의 피 위에 그리스도교가 세워졌다.

세르비아 정교회는 1219년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했는데, 당시 교회를 이끌던 이는 왕의 아들로서 지차의 대주교이던 사바(1174-1237년) 성인이었다. 그가 머물던 지차 수도원에서는 1253년까지 세르비아 왕들의 대관식이 치러졌다. 여기서 ‘기름을 바른’ 뒤에야 왕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이 지역은 ‘왕의 도시’라는 뜻의 크랄레보로 불리게 되었다. 도심을 흐르는 강변에는 비록 시들어서 제대로 모양이 나오지 않았지만 ‘일곱 개의 왕관’을 형상화한 꽃밭이 있었다.

 

세르비아의 작은 도시 크랄레보에서 하루를 묵은 ‘호텔 크리스털’은 아주 작았다. 한 가족으로 보이는 호텔 직원들은 얼굴 가득 진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번쩍번쩍 가방을 들어 옮기던 길쭉한 청년들도 그랬고, 현관에서 인사하던 젊은 처자도 그랬다.

 

소박하지만 마음으로 환대하는 듯한 그들의 자세에 너무도 부실한 아침식사조차 모두 용서가 될 정도였다. 크랄레보의 붉은 지붕 위로 일출이 참 좋은 아침이었다.


- 스투데니차 수도원 왕의 성당 앞에 정교회 순례자 복장의 처자가 서있다.

 

 

가을이 깊은 세르비아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이바르 강줄기를 따라 구불구불 좁은 골짜기가 이어지는 길에 노란 꽃이 피고 단풍이 노랗게 물들고 있었다. 불가리아 사람들에게 릴라 수도원이 그렇듯 세르비아인들에게 영화로운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스투데니차 수도원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사바 성인의 아버지이자 네마냐 왕조(1168-1371년)를 연 스테판 네마냐는 자신들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성당을 지어 성모님께 봉헌하고자 했다. 1196년 그가 왕좌를 떠나 아토스 산의 수도승이 된 뒤 부칸 왕자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성당을 짓고 대대로 네마냐 왕조의 왕들이 안치되었다. 말하자면 스투데니차 수도원은 세르비아의 종묘이자 엘 에스코리알(El Escorial), 그들의 거룩한 무덤이었다.


골리야 산자락 한적한 들판에 자리 잡은 수도원은 성벽처럼 투박하고 단순한 외벽과는 달리 무척 다정다감한 공간이었다. 지금은 ‘성모 성당’과 ‘왕의 성당’만 호젓하게 남아있지만 과거에는 13개의 성당이 있을 만큼 대단한 위용이다고 한다. 수도원에는 정교회 순례자들이 많이 보였다. 스카프를 두르고 긴 치마에 기다란 외투를 걸친 젊은 처자들과 지긋한 연배의 아주머니들이 초를 사들고 귀가하고 있었다.

하얀 대리석으로 장식된 성모 성당의 나르텍스에서 미카엘과 가브리엘 천사를 양옆에 둔 성모님이 왕좌에 앉아있는 입구를 들어서니, 갑자기 무수한 성인들의 프레스코화가 다른 세계처럼 펼쳐졌다. 비록 색이 바래고 형체들이 아득해졌지만 많은 성인들과 함께 천상의 예배에 참여하는 야곱의 사다리였다. 나르텍스에서 왼쪽과 오른쪽으로 작은 경당이 있고, 거기서 바로 신랑(神廊)으로 들어갈 수 있는 구조였다. 신랑 가득 벽과 천장을 채운 프레스코화 가운데 그 푸른 골고타가 있었다.

인터넷에서 그 푸른 저녁 이미지를 봤을 때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비잔틴 모자이크에 흔히 쓰이는 황금빛 배경이 아니라 푸른 저녁이 표현된 프레스코화는 극히 드문 것이어서, 나는 내 영혼의 어느 골방에만 그 저녁이 새겨진 것일까 생각했다. 그 풍경을 스투데니차 수도원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청금석이 빚어낸 ‘푸르스름한 저녁’이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있고, 어머니 마리아와 사랑하는 제자와 또 다른 여인들이 그 발치에 서서 영원을 관조하는 정적인 고통의 절정. 실은 거기서 생명의 물길이 터져 나오고 있음을, 이미 모두 아는 듯 평정이 흐르고 있는 침묵의 순간이었다.

 

역시 왕의 묘지로 지어진 소포차니 수도원 성당 입구에는 나무로 만든 러시아 정교회 십자가가 오후의 빛을 받고 있었다. 1689년 오스만 투르크군의 방화로 수도원이 불탔다. 수도원은 서서히 폐허가 되어갔다. 우로슈 1세가 부모와 함께 안식을 취하던 지하 납골당은 파묻혔고, 돔은 무너져 내렸다. 돌무더기와 흙으로 덮여있던 수도원은 20세기가 되어서야 복원이 시작되었다.


- 소포차니 수도원. 삼위일체 하느님을 표현한 성화가 옷깃을 여미게 한다.



성당에 들어서자 기골이 장대한 세르비아 청년들과 흡사한 프레스코화의 거대한 인물들이 큰 품으로 순례자를 안았다. 그 오래된 프레스코화에서 사도들은 다시 길을 떠날 채비를 하고, 복음사가들은 여전히 자신이 기억하는 예수님의 복음을 선포하고, 성인들은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고자 다가올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형형한 눈빛으로 침묵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침묵 속에서 전하는 말을 누군가 알아듣기를 기다리는 눈빛이었다. 좋았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만이 아니라 그 오래된 사람들의 믿음과 만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성당 안 프레스코화 사진을 단 한 장도 찍지 못했다. 완전히 작전 실패였다. 인적 없는 수도원의 풍경을 찍은 다음 성당 안으로 들어가 찍으려고 했는데, 내가 들어서는 순간 수도승이 나타나 원천 봉쇄를 하였다. 전혀 여지가 없었다.


- 소포차니 수도원 성당 입구. 프레스코화가 가득 그려진 벽 아래쪽에 나무로 만든 러시아 정교회 십자가가 서있다.

 

 

보는 순간 깊이 있는 색과 서늘한 눈빛에 금세 매료되고만 판토크라토르, 그 예수님도 꼭 담고 싶었는데, 정말 낭패였다. 하지만 낙엽지는 수도원 뒤뜰에서 가을의 충만함을 보았고, 폐허로부터 또다시 시작되고 있는 어떤 시간들의 흔적을 보았고, 돌담 아래 어여쁘게 피어난 장미꽃을 보았으니 다행이다(고 애써 생각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주려는 듯 수도원을 나와 달리는 버스에서 바라본 낮은 산 위에 프레스코화의 길쭉길쭉한, 성인들 같은 바위들이 배웅해 주었다.

* 이선미 로사 - 가톨릭교리신학원 성서영성학과를 수료했다. 여러 차례 해외성지를 순례하다보니 가까운 성지와 우리 전통에도 눈이 뜨여 조금씩 관심을 기울이는 중이다.

[경향잡지, 2015년 4월호, 글 · 사진 이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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