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금)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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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일본 신자발견 150주년을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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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3-14 ㅣ No.1443

[특별기고] 일본 신자발견 150주년을 맞아 (상) 혹독한 박해에 ‘남은 자’ 기념



타카미 미츠아키 대주교


3월 17일 일본 신자발견 150주년을 맞아 나가사키대교구장 타카미 미츠아키 대주교가 ‘신자발견은 기념해야 할 일본교회의 사건’ 주제 기고문을 보내왔다. 일본 신자발견은 260년간 극심한 박해 중에도 믿음을 지켜온 ‘가쿠레 기리시탄’(잠복 그리스도인)이 드러난 사건이다. 본지는 타카미 대주교의 글을 두 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기념하다란 말은 과거의 일을 기억하여 지금, 여기에서, 어떤 방법으로든, 현실의 것으로 재조명해 보는 것이다. 신도발견 역시 그러한 사건이다.

지금부터 150년 전인 1865년 3월 17일 12시경, 10명 정도의 우라카미 기리시탄들이 오우라 천주당의 프티장 신부를 찾아가 같은 신앙을 갖고 있음을 고백했습니다. 당시 오우라성당은 축성을 끝낸 뒤였습니다. 기리시탄은 포르투갈어 Christao(그리스도교 신자)를 음역한 말입니다. 이 사건을 ‘신자발견’이라고 합니다.

이날은 일본 가톨릭교회의 ‘특별한 날’입니다. 그리고 ‘세계종교의 기적’이라 일컬을 정도로 전 세계 그리스도교인들을 놀라게 한 역사적인 날(P. 쥬르네)입니다.

예수회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일본선교를 시작한 후 26분이 순교하는 등 일시적 탄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는 일본 안에 확산되었고 현지인 사제도 배출되었습니다. 17세기 초 일본의 기리시탄은 40만 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1614년 이후 도쿠가와 막부의 엄격한 금교 정책으로 많은 순교자가 생겼고, 기리시탄의 모습은 사라져 갔습니다. 그러나 나가사키 현의 우라카미, 소토메, 고토, 히라도 그리고 후쿠오카 현의 이마무라와 구마모토 현의 아마쿠사 지역에는 몰래 신앙을 지키며 전수해준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일본교회에서 말하는 ‘남은 자’들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교회는 이 사건을 기념해야만 합니다.

박해의 결과로 기리시탄이 한명도 남아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메이지 시대 이후 선교사들이 입국해 그리스도교를 전한다 해도 사법 또는 사교로 간주되어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겉으로는 불교신자 행세를 하면서 몰래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해온 ‘잠복 기리시탄’들이 있었기에 교회 역사가 이어지고 일본교회는 부활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신자발견 이후 소토메와 고토 등의 기리시탄들은 계속해서 오우라 천주당의 사제를 찾아가 신앙을 드러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일본교회의 핵심인물이 되었습니다.

1614년 2월 도쿠가와 하데타다 쇼군은 배척 기리시탄문과 사제추방령을 전국적으로 발표했습니다. 이후 현상금 제도와 5인 제도 그리고 성화 밟기와 불교입적제도 등으로 기리시탄을 긍지로 몰아넣었습니다. 기리시탄 샤슈몬이라는 언어 자체가 ‘지명수배자’란 의미였습니다. 지명수배자라는 불안한 상태로 살면서 불교신자로 위장해야 했습니다.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그리스도교 성화를 밟아야했고 집에 와서는 ‘콘치리상’(통회의 기도)을 외우며 하느님께 용서를 청해야했습니다. 이 무거운 부담을 느끼면서 7대에 걸쳐 불변의 신앙을 필사적으로 전하고 또 지켰습니다.

그들 덕분에 새로운 역사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기리시탄 번영의 시대에 들어 복지활동과 신앙생활의 향상을 위해 ‘자비의 조’ ‘산타 마리아 조’ 등의 형제애 또는 신심회가 만들어 졌습니다. 박해가 심해지자 신심회는 순교로 신앙을 버리지 않도록 양성하는 조직이 되었습니다. 가난했지만 서로 도우며 성직자 없는 교회를 보충하는 조직으로 바뀌어 갔던 것입니다.

각 마을에는 공동체 책임자인 쵸가다와 세례 담당자인 미즈가다 그리고 상황을 파악하는 미즈가다의 보조자가 있었습니다. 세 사람의 역할이 연계되어 공동체와 그들의 신앙생활을 지켰습니다. 쵸가다는 교육을 책임졌습니다. 1592년 아마쿠사에서 발간된 그리스도교 교리서인 「토치리나 기리시탄」의 내용과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생명과 바꾸어도 ‘양보할 수 없는’ 신앙을 교육시키고 전승했던 것입니다. 또한 매년 예수 성탄과 부활 대축일을 알리는 1년 전례력을 만들었고 기도와 전례를 통해 신앙을 계승해 왔습니다. [가톨릭신문, 2015년 3월 15일, 타카미 미츠아키 대주교(일본 나가사키대교구장), 번역 이건숙 수녀(예수성심시녀회 나가사키분원)]

 

 

[특별기고] 일본 신자발견 150주년을 맞아 (하) ‘기리시탄’의 참 신앙 배우는 기회



로마 교황님이 파견하는 수도자, 고해를 들을 사제, 성모 마리아는 신앙생활에서 대단히 중요한 분으로 후대에 전했습니다. 기리시탄들은 교황님을 그리는 마음으로 일곱 세대가 지나면 죄의 고백을 들어주는 사제를 교황님이 파견해 주신다고 믿고 기다렸습니다.

한편 교황청도 박해 중의 일본교회에 대한 걱정의 시선을 잊지 않았습니다. 개국이 가까워지던 1846년에는 일본을 사도좌 대리구로 정해 재선교를 시작했습니다. 파리외방전교회의 지라이르 신부는 1862년 요코하마에 처음으로 교회를 건립했고 비오 11세 교황은 26복자를 시성하여 보편교회에 일본교회를 알렸습니다. 그리고 5년 뒤에는 205위의 순교자를 시복해 일본교회를 격려하였습니다.

에도 막부는 불교정신으로 서민사상을 통합하려 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기리시탄 적발에 힘썼고 1635년경부터는 매년 정월에 슈몬아라타메라는 것을 시행했습니다. 개개인의 종교를 기재하라는 제도였습니다. 이 제도로 모든 주민은 필수적으로 어느 종파에, 어느 사찰에 소속해 있다는 단카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단카는 기리시탄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책임을 절에게 지우는 제도로 발전되었습니다. 슈몬아라타메는 코사츠 제도의 철거와 함께 끝납니다. 하지만 단카 제도는 존속되었습니다. 쇄국은 해안 방비나 무역관리의 목적보다는 그리스도교의 전래로 막부정권이 전복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일본 종교와는 문화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훗날 그리스도교는 쇄국정책에도 개국정책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신자발견을 계기로 기리시탄들은 관리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공공연하게 표명했습니다. 그러자 메이지 정부는 기리시탄들을 다시 검거했습니다. 특히 우라카미 지역에 살던 300~400여 명의 신자들은 고젠카이기(메이지 헌법으로 천황출석 하에 국가 대사를 결정하는 회의) 결정에 따라 21개 장소로 유배당합니다. 이후 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메이지 정부를 비난하는 목소리를 높이자 1873년 2월 ‘기리시탄 사츠’라 부르는 고찰을 철거했습니다.

그리고 16년 후인 1889년(메이지 22년) 대일본제국 헌법 제28조를 통해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습니다. 이로써 일본인들은 처음으로 신앙의 자유를 자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리시탄들은 ‘바다에 보이는 아버지의 배’, ‘마루니야의 글씨 마리아가 적힌 돛이 보인다’ 등의 말을 흥얼거리며 성모님의 인도로 교황님께서 파견하는 사제가 올 날을 기다렸습니다. 250년간 보편 교회로부터 멀리 떨어져 고립되었던 신자들은 루르드의 성모 발현 7년 후 성모님의 인도를 받은 사제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제를 통해 성체 안의 예수님과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와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1969년 이후 3월 17일은 임의로 정한 ‘나가사키 신자발견 기념일’이었습니다. 그런데 2013년 10월 28일자로 교황청 경신성사성은 ‘일본 신자발견의 성모’라는 일본 고유축일의 제정을 인증해 주었습니다. 2015년 올해부터 3월 17일은 정식 축일이 됩니다.

50년 전 신자발견 100주년 축하가 있었습니다. 그해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개막되었고 이후 지금까지 교회는 공의회 정신에 따라 쇄신의 길을 걸어 왔습니다. 그러나 아직 공의회 정신은 교회 안에 충분히 침투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일본의 신자발견 150주년 기념을 계기로 처음으로 교구 신자 대표회의(시노드)를 작년에 개최하여 이제부터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의논하였습니다.

기리시탄의 용맹함에서 일관성 있는 신앙생활을 배우고 복음을 중심으로 쇄신과 새로운 복음화의 길을 가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전부터 사교, 사종교라 불리던 그리스도교의 ‘교회군’을 정부는 금년 1월 세계문화유산 후보로 유네스코에 추천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참모습을 이해하는 좋은 기회를 맞이하여 복음화를 위해 적극 매진할 은총을 청합니다. [가톨릭신문, 2015년 3월 22일, 타카미 미츠아키 대주교(일본 나가사키대교구장), 번역 이건숙 수녀(예수성심시녀회 나가사키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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