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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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기도로 걷는 길: 루르드 성모 발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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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10-03 ㅣ No.1373

기도로 걷는 길 (3) 루르드 성모 발현지



루르드에 도착하자 오던 길 내내 내리던 비가 주춤했다. 일행은 배낭을 잽싸게 메고 달렸다. 빙그레 미소 짓는 이들의 눈길을 살필 겨를 없이 뛰고 또 뛰었다. 붉은 신호등에 가로막힌 횡단보도 건너편 몇 발짝 되지 않는 길이 멀고 길게만 여겨져 동동거렸다. 푸른 등이 켜지고 다시 경주하듯 달음질쳤다. 오늘의 침수 시간이 거의 끝날 때란다. 성모님께서 ‘샘에 가서 물을 마시고, 몸을 씻어라’고 이르신 루르드의 기적을 까딱하면 놓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저 멀리 동방의 해 돋는 나라에서 온 우리가 아닌가. 언제 또 이 먼 길을 올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온 길인데, 침수를 놓치면 안 되지. 예까지 품고 온 바람이 쏜살같이 달리는 무리의 등에서 내뿜겼다. 억척스레 달리던 두 다리가 무거워질 즈음 저만치 줄지은 행렬이 보였다. 아, 다 왔구나. 거친 숨을 몰아쉬던 자매들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막 드러난 햇살같이 하하거렸다.

동정 마리아의 탁월한 혜안으로 선택된 성지 루르드. 프랑스 남서부 피레네산맥의 기운 찬 가브강과 아찔한 암벽, 초록 등성이와 넝쿨 우거진 골짜기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천연의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루르드에 왔다. 삼색기가 펄럭이는 고풍스런 성채가 마을의 소박하고 오래된 전통의 위엄으로 서 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택하셨고, 조약돌같이 보잘것없던 나를 사용하셨다”고 고백한 열네 살 베르나데트와 ‘원죄 없이 잉태하신’ 부인의 만남 이후 루르드는 세계 순례지의 중심도시가 된 것이다. 루르드를 거치는 철길이 이어지면서, 해마다 오백만 명이 넘는 순례자들이 가브 강가에 인파 행렬로 몰려들고 있다.

문득 꿈을 꾸고 나온 듯, 쏴- 한순간의 파도소리같이 이루어진 침수였다. 침수 직전 성모님께 청을 드리라고 했으나, 어떤 청을 드렸는지조차 기억 못할 벅찬 침수의 순간이었다. 감히 청을 아뢸 수도 없었다. 그동안 내게 신앙이란 미사를 드릴 때나 촛불 아래 주억거리던 기도에서 빠짐없는 청으로 이루어진 역사였다. 군대에서 신병 귀가조치 후 몇년째 재검 중인 아들의 붙잡힌 발목을 풀어달라고, 작은아들의 투덜이를 다스려 달라고, 눈물자국 훤한 이웃 아우들을 어여삐 여겨달라는 세간의 수다로 하느님께, 예수님께 그리고 성모님께 떼쓰던 나의 신앙모드였다. 그런데 막상 여기에 오니 수다 같은 청을 차마 드릴 수 없다. 나의 시답지 않은 청 하나가 가브 강가에 늘어선 수많은 병자들을 새치기하고, 그들의 간절한 바람을 채지나 않을까.

“샘에 가서 물을 마시고 몸을 씻어라”던 루르드 샘의 기적이, 오늘, 내게, 이루어지기를 간절한 바람으로 모여든 지구촌 사람들이다. 루르드 마사비엘 동굴의 샘가에는 두 발로 씩씩하게 걸어 나간 사람들이 짚고 온 목발이 기적의 표징처럼 걸려있다. 루르드 샘의 기적은 수없이 많으나, 노벨상을 받은 의사의 목격담은 과학자의 이야기라 신빙성 높게 회자한다.

프랑스 외과 의사 알렉시스 카렐은 루르드 성지 순례단에 의사 자격으로 참가했다. 그는 중증의 결핵환자들을 맡게 되었는데, 중병의 한 젊은 여성이 루르드 샘에 도착한 지 한 시간 만에 회복되는 걸 보았다. 죽어갈 듯 몸을 가누지 못하던 여성이 일어나 씩씩하게 걷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한 그는 놀라운 이 사실을 프랑스 외과 의사 학회지에 발표했다. 그런데 오히려 그 일로 외과의사회로부터 추방당했다. 모국에서 의욕을 잃어 미국으로 건너가 다시 연구를 시작한 그는 새로운 의료기술을 발표해 191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루르드 샘에서 일어난 기적으로 알 수 없는 인간의 미지세계에 대한 저작을 남기기도 했다. 한편 루르드 샘에서 병을 고친 여성은 그 후 수녀가 되어 삼십여 년을 건강하게 지내다 58세로 생을 마쳤다고 한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렇다면 내게 이루어질 기적은, 내가 정말 바라는 기적은 무엇인가.

성모님을 만난 베르나데트는 탈혼 상태에서 깨어나 곁에 있는 친구에게 “성모님께서 너를 보고 미소를 지으셨어”라고 전했다. 그런 성모님의 미소를 느낄 수만 있어도 내 청은 통하리라. 그 바람이 열 시간 넘는 하늘 길을 날아오게 한 것이다. 침수를 마치고 나온 밖은 햇살이 명랑하고, 가브 강가에 다시 생긴 긴 행렬에는 민족도 나라도 초월한 듯 하나같이 순한 눈빛이었다. 범람할 듯 부푼 가브 강이 기세 좋게 흘러내리는 뒤로 초록마을이 평화로웠다. “사제들에게 가서 이곳에 성당을 지으라고 전하거라!” 그리고 “성당을 지은 다음 그 성당으로 많은 사람들이 행렬을 지어 와 참배하기를 원한다”는 성모님의 당부로 지어진 루르드 대성당 높다란 절벽에 ‘샘에 가서 물을 마시고 몸을 씻어라.’라는 한글 표석이 온갖 언어 속에 눈에 띄었다. 마사비엘 동굴을 따르는 행렬은 절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한 방울에도, 푸른 띠를 멘 루르드 성모님께 온몸을 투신하듯 고개를 숙였다. 동굴의 맨 앞은 병자들의 자리다. 그들 옆은 간호사와 병원 수녀들이 한눈을 팔지 않고 그들을 돌본다. 자기 일을 밀쳐두고 여기에 자원해 병자를 위한 희생을 바치고 기도하는 분들이다. 이들은 기적이 샘솟는 물가로 병자를 옮겨주고, 그들의 침수를 도우며 세심히 보살핀다. 기적은 마법이 아니다. 지구 곳곳에서 먼 길을 내처 달려와 ‘샘에 와서 물을 마시고 몸을 씻는’ 순례자들의 겸손한 순명과 봉사자들의 희생이야말로 기적의 첫걸음이 아닐까.

현지에 상주하시는 모니카 수녀님의 잰걸음을 따라 도착한 비오성당. 노아의 방주를 본떠 건축한 성당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고, 파란 휠체어가 속속 들어서고 있었다. 이윽고 장대한 성가가 울려 퍼지고, 레지오마리에 깃발이 들머리에 선 긴 행렬의 입장으로 의식이 시작되었다. 프랑스어, 영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네덜란드어, 독일어 등의 언어로 독서를 바친 후, 성체 현양이 이어졌다. 배를 저어갈 노가 벽을 따라 지어진 성당 제대에 사른 향이 성전 안으로 부드럽게 퍼졌다. 수많은 병자와 순례자들의 간절한 바람에 제대 위의 성체는 주님의 신비롭고 장엄한 현존으로 내리었다.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예수님 말씀처럼 보지 않고도 믿는 것은 정말 행복할 것이다. 그런데 보지 않고 믿는 것보다, 보고서야 뒤늦게 후회하고 깨우치는 우리가 아닌가. 이런 우리를 내다보시고 하느님께서는 성체를 현양하게 하고 성모님을 여기저기에 발현하게 하신 것은 아닐까.

다시 비가 추적거리고, 낮은 구름 아래 가브 강은 더욱 거세게 몸을 부풀렸다. 하루 중 가장 빛나는 시간. 성체현양을 마친 순례자의 마사비엘 동굴 성모님을 모신 촛불행렬이 막 시작되었다.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모시듯 순례자들의 손에 든 환한 빛이 군중 속에 피어나는 이슥한 저녁이다.

피레네 산맥 야생의 숨을 담은 가브 강 다리 위로 파란 휠체어를 탄 병자와 봉사자 수녀님과 간호사들의 길고 긴 행렬이 루르드의 성모님을 뒤따랐다. 촛불을 든 군중은 병자들의 행렬이 지날 때까지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며 그들에게 힘을 실었다. 배려하는 마음은 거리와 시간, 공간을 초월해 과거에서부터 미래에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백오십 년이 지나도록 순례자의 간구를 따라 흘러내리는 가브 강의 세찬 리듬과, 다리 위를 구르는 파란 휠체어 바퀴소리와 순례자들의 기도가 또 다른 삼위일체를 이루는 루르드의 기적이다.

하느님만이 누가 자리를 털고 병석에서 일어나 목발 던지고 씩씩하게 걸어갈지를 알고 계신다. 전능하신 손으로 아픈 이의 고통을 덜어주시기를 청하는 성모님의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어찌 외면하시겠는가. 성모님이 앞장 선 촛불의 행렬은 루르드의 깊은 밤을 밝혔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 만일 당신이 원하신다면 저를 낫게 하실
수 있으리다.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다.
저로 하여금 보게 하소서!
저로 하여금 걷게 하소서!
루르드의 성모여,
성녀 베르나데트여.
저희를 위해 빌어 주소서.

[평신도, 제41호(2013년 가을), 류정호 데레로사(가톨릭생명연구소 연구위원 ·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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