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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생태신학과 생태영성은 왜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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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11-25 ㅣ No.1107

[지상의 평화] 생태신학과 생태영성은 왜 필요한가?



지금 인간과 창조물은 멸종이라는 엄청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지구의 역사를 살펴보면, 지구와 소행성의 충돌이나 화산 폭발 때문에 생명체 가운데 65%에서 95%가 멸종한 사례가 있다. 지구의 역사에는 다섯 번의 거대한 멸종이 있었다. 우리를 기다리는 또 하나의 거대한 멸종은 이상하고 독특하다. 처음으로 이 거대한 멸종은 어떤 생명체에 의해 야기되고, 그 생명체는 자신뿐 아니라 지구의 다른 생명체들이 대량으로 멸종하게 한다. 거대한 멸종을 이끄는 생명체는 자신이 의존하고 있는 지구를 파괴하므로 그 자체의 멸종을 초래한다. 그런데 이들은 지구의 파괴를 가져오는 활동을 늘리고 있다. 이처럼 죄를 짓는 생명체가 바로 우리들이다.


생태 위기의 원인들

어떻게 한 종(種)이 자기 파괴적인 방법으로 행동할 수 있을까? 예수 고난회 사제이며 문화역사가인 토마스 베리는 이러한 파괴를 일으키는 인류가 지구 공동체와 인간의 깊은 연관성에 대한 이해 그리고 창조물의 신성함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렸다고 대답한다. 우리가 하느님의 창조물과 얼마나 깊이 관련되어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새로운 우주 이야기를 짧게 살펴보고자 한다. 계시의 책으로서 창조, 그리스도의 우주적 차원, 창조물의 거룩한 차원에서 우리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싶다. 물론 생태위기에 대해 오로지 가톨릭교회만 응답하거나 그 응답만이 충분하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좋은 시작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구와 맺는 관계의 발전

몇 세기 전까지 우리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태양과 행성들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생각했다. 또한 우리가 지구에서 가장 중요한 창조물이기에, 우리 자신을 우주의 중심이라고 여겼다. ‘지구와 거기에 사는 모든 것들이 우리의 생명을 지탱하고 번영하게 해주는 자원이다.’ ‘우리가 모든 다른 피조물보다 우위에 있다.’ ‘우리만이 영적 차원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것은 그렇지 않다.’ 이러한 생각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지구의 자원들을 약탈하고 환경을 파괴하고, 우리를 자연 세계에서 분리하는 기술과 도시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지금은 과학을 통해 태양계에 속해 있는 지구와 다른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우리의 태양계는 은하수 안에서 돌고 있다. 게다가 그 은하수는 무수한 은하수들 무리 안에서 돌고 있다. 실제적으로 우주에는 수십 억 개의 은하계가 있으며 각각의 은하계는 수백 만 심지어는 수십억 개의 태양계로 차 있다. 과학자들은 우리의 우주가 약 138억 년 전에 매우 작고 밀도 높은 양의 에너지로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 이후로 우주는 점차적으로 진화하고 팽창하며 복잡하고 다양해졌다. 오늘날 존재하는 모든 것이 138억 년 전에 있었던 단 하나의 에너지원에서 진화했다. 에너지는 물질을 만들었고, 물질은 생명체를 구성하였다. 생명체들은 더욱 더 복잡해졌고 서로 다른 모습으로 분화해 나갔다. 우주 이야기에서 각각의 진행 단계는 이미 존재하는 것에서 생성되었다. 복잡하고 분화된 우주의 수준으로 성장하기 전까지는 어떤 새로운 단계도 출현할 수 없었다.

인류는 80억 년 전 우주 이야기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때는 인간이 출현하기에 알맞은 조건이 조성되지 않았고, 또한 현재 우리와 같은 생명출현은 지구의 탄생 이후에야 가능했는데, 80억 년 전에는 지구가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주 이야기에 출현하는 마지막 생명체의 하나로서 지구에 있는 모든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렇게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하는 과학은 우리가 다른 창조물들과 관계없이 존재하고 그것들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하여 우리가 원하는 대로 지구의 자원을 오용하도록 하는 낡아빠진 사고방식에 도전한다. 사유와 상상의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 독특한 장점이라면, 인간이 우수할 수도 있다. 그러나 햇빛을 저장된 형태의 에너지로 바꾸는 능력은 식물들이 우수하다. 생명체가 들이마실 산소를 만드는 능력은 나무들이 우수하다. 물을 정화시키는 능력은 습지가 우수하다. 지구의 온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능력은 바다가 우수하다.

우주는 공동체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그 공동체와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공동체 밖에서 모든 것들과 별개인양 행동한다면 우리는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되고 지구 안에 있더라도 외계인이 될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러한 태도들을 생태학적인 죄라고 규정하고, 생태학적인 회개를 촉구했다. “환경을 돌보는 것은 선택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환경 돌봄은 우리의 개인적인 삶과 사회생활에서 필수불가결한 부분이다. 환경을 돌보지 않는 태도는 모든 창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계획을 무시하는 처사이고 인간의 소외를 가져온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재발견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하느님의 창조물 안에서 우리 자리가 어디인지 다시 찾아야 한다. 교황 베네딕도 16세는 지구와 인류 사이의 깊은 관계를 역설하였고, 창조질서에 따라 살고 배울 필요가 있다고 말씀했다. “우리는 창조물과 지구의 내적인 법을 존경해야 하고, 이러한 법을 배우고 우리가 살아남기를 원한다면 그것들에 순종해야 한다. 지구 소리에 이렇게 순종하는 것은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 더 중요하다. 사실, 우리는 지구가 하는 말을 듣고 그것을 배워야 한다.”


창조물의 거룩함을 일깨우기

교황 베네딕도 16세가 말했듯이, 우리는 지구의 목소리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한다. 교회는 계시에 대한 두 권의 책이 있다고 가르쳐는데 ‘성경’과 ‘창조된 세상’이다. 성경에 대한 관심을 소홀히 해서도 안 되겠지만 우리는 창조된 세상에도 관심을 두어야 한다.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느님을 발견하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책을 읽는다. 그러나 창조된 것들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위대한 책이 있다. 당신 위를 보아라. 당신 아래를 보아라. 그것에 주목하여라. 그것을 읽으라. 당신이 찾고 싶은 하느님은 잉크로 그 책을 쓰신 것이 아니다. 그 대신에 그분이 만드신 것을 당신 눈앞에 놓아두었다. 더 큰 소리로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늘과 땅이 당신에게 소리친다. 하느님이 나를 만드셨다고.”

마찬가지로 체사리아의 성 바실리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수없이 감탄하며 창조물이 하느님 당신을 투영하기를 원합니다. 당신이 어디를 가더라도 가장 작은 식물도 당신을 창조주로 기억하게 하소서. 잎 먼지 하나도 당신의 온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나이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그러하셨듯이, 우리가 창조물을 통해 창조주를 보는가? 창조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보는가? 아니면 우리가 황폐하게 만든 환경과 파괴한 생태만을 볼 것인가?

창조라는 책을 더 능숙하게 읽기 위해서는 그것을 존경과 애정을 가지고 다루면서 그리스도께서는 구세주이시고 창조주이심을 상기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우리는 구세주로서 그리스도를 잘 알고 있는 반면에, 창조주로서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것에 소홀한 경향이 있다. 요한복음의 머리말을 상기해 보자.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마찬가지로 콜로새인들에게 보낸 바오로의 편지에서처럼 그리스도는 모든 창조물 중에 맏이로 태어나셨고, 그분을 통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창조되었다. 만물은 그분 안에 존속한다. 즉 그리스도는 창조물을 존재하게 하였고 존재를 통해 전 창조물을 유지한다.


그리스도의 우주적 자원

우주 이야기와 그리스도를 연관 지어 생각해 보자. 우리는 인류 역사의 한정된 시간 동안 나자렛 예수로서 우리와 함께 계셨던 그리스도의 강생에 대해서 뿐 아니라, 138억년 창조의 역사 내내 함께 하셨던 그분의 현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해 더 확장된 우주적인 이해이다.

요한 복음사가가 그리스도를 부른 이름, 즉 말씀에 초점을 맞추어보자. ‘말씀’이란 그리스 말 로고스(logos)를 옮긴 말이다. 그 의미는 질서 혹은 지혜이다. 하느님이 창조하실 때 우리가 식별할 수 있는 질서가 뒤따라온다. 우리가 이러한 질서를 보고 배우게 될 때 창조된 세상은 계시의 책이 된다.

우리는 하느님의 올바른 질서를 따라가는 것을 배우햐 한다. 우리가 이러한 질서를 위반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질서로부터 멀어지고 하느님의 창조물에 해를 입히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이런 경우에 우리는 생태계를 파괴하면서 지구에 해를 입힌다. 창조질서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한 가지 교훈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우주가 점점 다양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물의 다양성을 줄이는 것과 종의 멸종을 가져오는 행위는 창조의 질서에 반하는 일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음과 같이 상기시켰다. “하느님이 창조를 시작하실 때, 당신의 선하심이 한 피조물로만 표현될 수 없기에 다양한 피조물을 만드셨다. 하느님 안에서 선함은 단순하고 통일되지만 피조물 안에서는 다중적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므로 전 우주는 신적 선함에 더 완전한 방법으로 함께 참여하고 단 하나의 피조물보다 더 잘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아퀴나스에게 다음 내용을 배운다. 창조된 세상 안에 있는 모든 실재는 신적 선함의 표현이기에, 예를 들면 종의 멸종과 같은 창조물에 대한 고의적인 파괴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영원히 침묵하게 하는 것이다. 즉 창조물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하느님 계시의 목소리를 침묵하게 하는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우리는 우주 안에 있는 신성의 심오한 현존과 축복받은 동반자인 모든 창조물의 지지자로서 우리의 신원을 스스로 일깨울 필요가 있다. 하느님의 모든 창조물들과 맺는 연대성을 재발견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생태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는 영성을 계발하여 지구와 깊은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다.

3월 19일 취임미사 강론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난한 사람들과 지구의 보호자’가 되도록 우리에게 촉구했다. “창세기가 우리에게 얘기하고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보여주시듯이 보호자가 되는 소명은 모든 창조물과 창조된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호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느님 피조물 각자를 존경하는 것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을 존중하는 것이다. 인간이 이러한 책임감으로 살지 못할 때, 창조물과 형제자매들을 돌보는 일을 하지 못할 때, 파괴의 길로 가는 길이 열리고, 마음은 딱딱하게 무뎌질 것이다. 창조물을 보호하고 모든 남자와 여자를 보호하는 것 그리고 부드러움과 사랑으로 그들을 돌보는 것은 희망의 지평을 활짝 여는 것이다.” 이 희망의 지평은 우리가 지구 및 하느님의 선한 창조물이 지닌 신성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계속 인식하게 할 것이다.

[분도, 2013년 여름호(제22호), 글 데니스 오하라 교수(캐나다 토론토 대학교), 번역 임순희 다리아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관구), 사진제공 이인우(대구 환경운동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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