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종교철학ㅣ사상

철학 에세이: 타인은 나의 행복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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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9-17 ㅣ No.123

[가톨릭 철학 에세이 - 철학이 던지는 행복에 관한 열 가지 질문 9]

타인은 나의 행복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환희여, 아름다운 신들의 찬란함이여, 낙원의 여인들이여
우리 모두 황홀함에 취해 빛이 가득한 성소로 돌아가자!
엄한 현실이 갈라놓았던 자들을
신비로운 그대의 힘은 다시 결합시킨다.
그대의 고요한 나래가 멈추는 곳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노라
위대한 하늘의 선물을 받은 자여
진실한 우정을 얻은 자여
여성의 따뜻한 사랑을 얻은 자여
다 함께 환희의 노래를 부르자
(프리드리히 실러, ‘환희의 송가’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 4악장에서).

The road is long/ with many a winding turn
That leads us to who knows where
who knows when
But I'm strong/ strong enough to carry him
He ain't heavy, he's my brother
(더 홀리스, ‘그는 짐이 아니고, 나의 형제랍니다’).


타인! 지옥인가, 행복의 조건인가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타인, 그것은 지옥이다.”라는 말로써 인간이 다른 사람과 만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짐이 될 수 있는가를 강렬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가 인간이 ‘공동체적 존재’이자 ‘관계의 존재’라는 관점에서 이론적으로 논박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개인적 체험을 통해 그의 주장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증언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행복하다고 느낀 시간들의 많은 부분이 다름 아니라 다른 사람과 좋았던 관계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잘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사르트르의 이러한 ‘도발’이 의미를 잃지 않는 것은, 긍정적인 타인과의 체험을 통한 행복이라는 ‘빛’ 다른 쪽에 드리워진, 타인에 의해 초래되는 불행이라는 ‘그림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림자를 잘 응시하는 것이야말로 행복을 올바로 이해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는 것을 우리는 과거와 오늘의 다양한 행복론에서 배우게 됩니다.

가만히 보면 관계가 행복의 원천이라지만 그만큼이나 관계의 종말은 돌이키기 어려운 불행으로 느껴지곤 합니다. 우연히 만난 낯모르는 사람의 호의가 나를 행복하게 하는 만큼, 잘 알지도 못했던 누군가가 나에게 보여준 적대적 태도는 순식간에 삶의 소박한 행복을 앗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타인들과의 긍정적 만남이 행복의 조건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만큼 관계의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를 ‘이미’ 불행으로 이끌 수도 있습니다. ‘성과사회’라고 요약되는 현대의 문화풍토에서는 외적인 성과만이 아니라 타인과의 다양한 관계를 ‘소유’하는 것 역시 능력으로 평가되기에 ‘실용적인’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은 실패의 표시로 인식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인맥’으로 대표되는 과시적이고 피상적인 인간관계의 확대에 골몰하곤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타인에 대한 기대를 갖지 않고 가능한 타인에 대해 초연한 태도를 지니는 것이 ‘평정함의 행복’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 철학 이후로 이런 관점이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것은 타인과 함께 ‘지속적인’ 행복의 길을 걸어가는 것의 고단함과 지난함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타인과 함께 행복의 길을 찾는 것이 가진 소중함과 보람을 말해줍니다. 스토아 철학과 같은 초연함의 길이 고귀하고 존경받을 만한 방식으로 ‘자기애’를 실현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우리가 지난 호에서 생각해 본 것처럼 행복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자기초월에 비추어본다면 너무 일찍 우리의 한계를 그어놓는 태도일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행복임을 믿는다면 이제 우리는 타자와 함께, 타자를 통해, 타자를 위해 행복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기애와 이타주의의 대립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며 한시적인 것일 뿐’(프리도 릭켄)이라는 관점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행복의 길을 밝혀주는 세 개의 단어를 꼽자면 그것은 정의, 우정,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단어들이 비추어주는 타인과 이루는 행복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행복의 조건으로서의 정의, 덕으로서의 정의

정의가 행복의 조건이라는 주장에 우리는 모두 동의합니다. 그런데 그때 우리가 연상하는 내용은 아마도 불이익을 당하지 않고 능력에 따른 공평함을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체제가 나의 복리와 자아실현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일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는 국가 공동체의 국가 원리”라고 말한 것에서 우리는 그 시대의 사람들도 현대인과 마찬가지로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정치와 사회의 근본적인 원칙으로 존중하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리스 고전윤리학에서 정의는 공평함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사회와 개인의 차원에서 조화로운 상태를 칭하는 덕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정의로운 사회체제에서 행복을 가져다주는 외적 재화와 성공에 정의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정의 그 자체로도 덕으로서의 행복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정의롭지 않은 사회에 사는 사람이 행복하기 어렵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정의롭지 않은 이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의’가 ‘나의 행복’에 필수적이라는 명제는 그 자체로 당연한 것이 아니라 반성을 통해 도달할 수 있고 긴 시간의 도야를 통해 체화될 수 있는 진리입니다.

그 이유는 플라톤이 주장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요약하였듯이 ‘정의’는 ‘타인을 위한 선’이기 때문입니다. ‘타인을 위한 선’이 어떻게 ‘나의 행복’의 내용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사실 윤리학의 근본적인 고민입니다.

플라톤은 자신의 매혹적인 대화편 「고르기아스」에서 소피스트인 고르기아스, 폴로스, 그리고 권력을 믿는 야심만만한 젊은 정치가 칼리클레스와 소크라테스가 펼치는 논전을 통해 왜 정의가 한 사람의 행복을 내적으로 규정하게 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주려 합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폭군이 정의 대신에 권력에 힘입어 불의를 행함으로써 ‘그 자체로’ 가장 불행한 이가 된다는 사실을 논증하려 합니다.

우리는 다음 호에서 이러한 논증이 근거하는 ‘덕으로서의 정의’와 ‘행복’의 필연적 관계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왜 이러한 정의는 ‘우정’을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 최대환 세례자 요한 - 의정부교구 신부. 정발산본당 주임으로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과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연재하는 동안 행복에 대한 독자들의 견해와 질문을 열린 마음으로 기다린다(theophile@catholic.or.kr).

[경향잡지, 2012년 9월호, 최대환 세례자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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