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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발칸: 이름도 어여쁜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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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2-19 ㅣ No.1436

[발칸의 빛과 그림자 속으로] 이름도 어여쁜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 가다



 
- (위) 소피아 외곽에 있는 보야나 성당은 천 년 전에 지어진 불가리아 왕가 성당으로, 소박한 외관과는 달리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프레스코화가 가득하다. (아래) 옆쪽으로 돌아가면 세 번에 걸쳐 지어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지혜’라는 뜻을 가진 예쁜 이름 소피아(Σοφια)는 발칸 유럽의 한 나라, 불가리아의 수도이기도 하다. 이미 겨울이 시작된 소피아의 바람은 거칠고 차가웠다. 웅크러지는 몸을 감싸며 천 년 전 중세 불가리아의 자취가 남아있는 보야나 성당으로 향했다.


1048년 소피아 교외 비토샤 산자락 요새지 안에 왕가의 성당으로 처음 지어진 후 13세기와 19세기에도 증축된 이 성당은 중세미술을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출입인원과 관람시간까지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었다. 직원이 직접 열어주는 입구의 작은 문을 들어서자 거의 텅 빈 듯한 단아한 방이 나타났다.

그가 다시 열어준 두 번째 성당과 마지막 성당은 벽과 천장 가득 여백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 만큼 프레스코화로 덮여 있었다. 문이 열릴 때마다 와락 안겨들던 그 놀라움을 어떻게 표현할까. ‘중세 회화의 보고’인 성당 안에 가득한 것은 불가리아 사람들의 신앙이었다.

725년부터 동방교회에 불어닥쳤던 성화상 논쟁의 와중에, 제2차 니케아 공의회(787년)가 성화상 공경의 정당성을 확인한 후 마련된 규범에 따라 그려진 성화들은, 그들이 믿었던 대상, 그들이 알고 전하던 성경과 전승의 장면들, 성모님과 사도들과 순교자들과 교부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인물과 이야기들을 담고 있었다. 말하자면 성당은 불가리아 정교회의 가르침이 세세대대 전해진 생생한 교리실이자 진리의 길로 인도하는 교사 자체였다.

- 릴라수도원의 역사는 곧 불가리아의 역사이기도 했다. 불가리아 사람들은 오랜 세월 희로애락을 함께한 이 수도원을 영적인 고향으로 생각한다.


천 년 전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의미로 이해되는 거룩한 이야기들, 이미 낡고 색이 바랬지만 같은 마음, 같은 그리움, 같은 열망을 느끼기에 충분한 곳이었다. 차가운 돌로 만든 건축물이 너무도 아늑하고 그리움 넘치는 ‘돌의 집’이었다. 겨우 십여 분밖에 머물 수 없어 아쉬웠지만 보존과 복원 때문에 폐쇄되기도 했던 성당을 방문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햇빛이 조금씩 따뜻해지는 정오 무렵에 릴라수도원에 들어섰다. 10세기경에 이 수도원을 세운 이반 릴스키 성인(876-946년)은 ‘제1차 불가리아 제국’(681-1018년) 시절을 살았다. 864년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보리스 1세를 거쳐 그의 아들 시메온이 통치하던 불가리아는 황금기를 구가했다. 성 치릴로와 메토디오 형제의 제자들을 받아들여 현재 러시아어, 불가리아어와 세르비아어 등의 모태가 된 키릴문자를 발전시킨 것도 이즈음의 일이었다.

- 1833년 대화재 이후에 재건된 릴라수도원의 프레스코화는 아주 선명하고 생기 있다.


하지만 뒤를 이은 페타르 1세 때에 나라가 쇠퇴하기 시작했다. 외적의 공격으로 영토가 줄어들고, 기득권층과 민중들의 격차가 더 벌어져 혼란이 가속되었다. 사는 게 힘들어지고 사회가 흉흉해지자 보고밀주의(Bogomilism) 같은 세력이 혹세무민하기도 했다.

이런 혼돈 속에서 이반 릴스키는 릴라 산 작은 동굴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명성에 이끌려 추종자들이 모여들자 수도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수도원은 14세기 초에 큰 지진으로 완전히 파괴되고, 오백 년이나 계속된 오스만 제국 때도 몇 번이나 습격을 받는 등 거듭 시련을 겪었다. 현재의 수도원은 1833년 큰 화재 후 재건된 것이어서 상대적으로 프레스코화의 색들이 무척 생기 있었다.

- 수도승들의 방이 있는 건물은 오밀조밀 꽃까지 그려 넣어 어여쁘기까지 하다.


입구에 서자 말발굽 아치에 줄무늬를 그려 넣은 성모탄생성당의 회랑이 가장 먼저 안겨들었다. 장중하거나 엄격하기보다 경쾌해 보이기까지 하는 기둥과 아치와 회랑이었다. 검은 옷에 긴 수염, 검은 모자를 쓴 수도승들은 발칸 특유의 음울함을 자아내며 오갔지만 건물들은 무척 밝고 어여뻤다. 심지어 아기자기하게 꽃무늬까지 그려 넣어 자잘한 기쁨 속에서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가난하고 작은 수도승들의 일상을 보는 듯했다. 사람 사는 세상의 냄새가 나는 수도원 정경이 무척 편안했다. 보야나 성당도 그렇지만 릴라수도원이 불가리아 사람들에게 영원한 고향 같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다시 들어선 오후의 소피아는 더 추웠다. 냉전 시대에 살얼음 같던 ‘동구’의 뉘앙스처럼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몰려들었다. 오래된 도시 소피아에는 도심에만 해도 수백 년의 역사를 간직한 성당들이 여럿 있었다. 도시와 같은 이름을 가진 소피아 성당부터 가장 오래된 제오르지오 성당, 오스만제국으로부터 독립을 도와준 러시아에 감사의 마음을 담아 세운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성당과 네델리야 성당까지.


- 소피아에서 가장 오래된 제오르지오 성당의 촛대에 새겨진‘IC XC NIKA’는 “예수 그리스도는 승리하신다.”라는 뜻으로 정교회의 제병에도 새겨지는 인장이다.



그중에서도 네델리야 성당은 오래되지 않은 비극적 사건의 현장이기도 했다. 10세기경에 지어진 이곳은 1925년 국왕 보리스 3세를 노린 폭파로 크게 무너져버렸다. 정작 왕은 참석하지 않아 죽음을 면했지만 150여 명이 목숨을 잃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은 그 불행한 사건이 성당 입구 벽에 기록되어 있었다. 그로부터 몇 주 후, 요한 23세 교황이 된 론칼리 대주교가 교황사절로서 소피아에 도착했다. 그는 깊은 슬픔에 잠긴 테러 희생자들을 찾아 위로했다. 불가리아 사람들은 600년 만에 찾아온 교황사절을 미심쩍게 바라봤지만 그는 동방교회 신자들이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한 그들을 형제라고 생각했다. 성인은 불가리아에서 “동서방교회 여기저기에 쌓인 벽에서 벽돌을 한 장씩 떼어내려고 애쓰고 있다.”고 밝혔고, 1962년 문을 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갈라진 형제들’의 자리를 마련했다. 그리고 거룩한 공의회는, “…이 일을 온 마음으로 추진하여 동서방교회를 갈라놓은 장벽을 무너뜨리고 두 교회를 하나로 만드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견고한 주춧돌로 삼아 마침내 하나의 집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일치운동에 관한 교령, 18항)고 선언했다.


- 오스만제국 시절인 14세기경 지어진 세인트 페트카 교회는 교회 출입구가 지상 1미터를 넘을 수 없다는 당시 이슬람법에 따라 반지하로 지어졌다. 붉은 지붕 뒤로 네델리야 성당의 돔이 보인다.



너무 오랫동안 갈라져 있어서 낯설고 불편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동방교회의 숨결이 생생한 소피아에서 잠시 기도했다. “우리를 갈라놓은 것들 너머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우리의 발걸음이 온전히 하나였던 때로 향하는 은총의 시간이게 하소서.”

* 이선미 로사 - 가톨릭교리신학원 성서영성학과를 수료했다. 여러 차례 해외성지를 순례하다 보니 가까운 성지와 우리 전통에도 눈이 뜨여 조금씩 관심을 기울이는 중이다.

 
- 오스만제국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된 러시아-투르크 전쟁 전사자를 기리고자 지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성당은 발칸 반도 최대의 정교회 성당이었다가 이제 베오그라드의 사바 대성당에 그 자리를 내주었다.

 

[경향잡지, 2015년 2월호, 글 · 사진 이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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