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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법과 양심: 꽃밭에는 다양한 꽃들이 피어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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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2-18 ㅣ No.1222

[경향 돋보기 - 법에 따른 판결인가, 양심에 따른 판단인가?] 꽃밭에는 다양한 꽃들이 피어있어야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자. 뜬금없이 웬 카인과 아벨이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우리의 주제인 ‘다양성’을 바라보는 본질적인 시선이 숨겨져 있다. 잘 아는 것처럼 성경은 카인과 아벨을 인류의 첫 형제로 묘사하고 있다.

일부 주석가들은 이 이야기에서 ‘범죄의 보편성’을 끄집어내기도 한다. 누구라도 자기 형제를 죽이는 살인자가 될 수 있으며, 언제라도 공존이 적대로 바뀌고, 형제가 경쟁자요 라이벌이 될 수 있다는 해석이 그것이다. 형제 사이는 부자지간과는 달리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언제든지 다툴 여지가 마련되어 있다. 형제끼리는 가장 친근한 사이가 되기도 하지만,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되기도 한다.

카인과 아벨은 이 경쟁의 극단적 모델이다. 성경은 형제지간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경쟁과 다툼을 신화적으로 묘사하면서 인간이란 존재 안에 이미 뿌리박고 있는 라이벌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형제 살해야말로 가장 대표적인 살인이다. 이게 ‘범죄의 보편성’이란 개념이 품고 있는 내용들이다.

그러나 ‘형제’라는 사실만을 바탕으로 좀 더 단순하게 접근해보면 새로운 것이 보인다. 인간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우선적으로 형제자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말하고 있다. 형제로 관계가 맺어진 카인과 아벨은 그 시작부터 본질적으로 ‘다름’을 지닌 존재이다.

이 설화는 아담과 하와라는 ‘같은’ 부모 아래에서 태어난 형제, 하느님과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그들의 부모와 ‘같은’ 혈통과 존엄을 지니고 있는 형제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가 인간적 본질의 한 부분이며, 이 ‘다름’을 통해 인간사회가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 차이를 성경은 단순하게 농부와 목자라는 서로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고 표현한다. 직업적 차이는 그 직업을 선택하도록 이끈 또 다른 많은 차이들을 내포하기 마련이다. 인류가 번성하면서 이 ‘차이’가 더 많아졌다. 형제들이 늘어나면 그만큼 다양해지기 마련이다.


정치학자 토크빌의 생각을 빌려

이런 다양성을 기준으로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자. 다양성을 그 기준으로 삼는 까닭은 이 기준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형식적으로는 다양성이 존중되는 완벽한 민주주의 사회이다. 우리는 심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억압받지 않으며, 모두에게 자유로운 선택의 가능성 또한 열려있다. 그러나 이게 전부는 아니다.

우리 사회를 진단하는 데에 자유와 평등이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민주주의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한 19세기 프랑스 정치학자 토크빌(A. Tocqueville)의 생각은 큰 도움이 된다. 그는 대중들을 정치적 무관심으로 이끄는 길로 개인주의와 실용적 물질주의를 지적하고 있다.

토크빌이 민주주의 시대의 사회적 질병이라고 일컫는 이 사조들은 점점 더 느슨해지고 해체되어 가는 사회적 그물망으로 인해 그 자리를 확고히 하고 있는 실정이다.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에서 사회적 유동성은 증가하기 마련이며, 이런 사회에서 사회적 통제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그 속에서 구성원들은 점점 더 원자화되고, 익명화되어 가정 속으로 숨어들어 버린다. 이렇게 되면 대중들의 관심은 정치-사회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사적인 데에 매달리게 될 것이며, 이는 자연스럽게 시민의 비정치화와 정치적 무관심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 이렇게 숨어버린 개인에게 시민계급과 사회 전체에 대한 관심, 타협에 대한 준비된 자세 등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러나 토크빌은 이렇게 자유와 평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독재’가 펼쳐질 가능성이 더 크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독재는 다름 아닌 ‘다수의 독재’이다.

오늘날 우리는 매체를 통해 외부로 공개되는 여론의 압력이 지나치게 커져버린 사회에 살고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단지 소수의 자유로운 영혼들만이 이견을 피력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소수의 자유로운 영혼들은 사회 안에서 이상한 사람으로 대접받기를 감수해야 한다. 이상한 사람 정도면 그나마 괜찮다. 이견이 우리나라처럼 이데올로기로 인한 분단현실 앞에서는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위험한 사상’이 되어 물리쳐야 할 ‘공공의 적’으로 전락한다. ‘다수의 폭압’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이게 토크빌이 말하는 독재다.

이게 가능한 가장 큰 이유는 평등에 의한 자유의 잠식 때문이다. 좀 풀어 말하면 ‘다른’ 의견이나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동일화와 획일화의 압력에 의해 희생되는 사실을 말한다. 토크빌은 이를 민주주의의 가장 큰 위협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다수의 폭압이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하는 이유는 그것이 개인적 자유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의 정치적 토대 가운데 하나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다수의 의견이 허용되는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지만, 그것에서 멀어지는 사람에게 다수 독재의 도덕적인 압력은 공포와 고통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다양성의 인정과 다툼의 문화

다양성을 인정하는 일은 ‘관용’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우리는 흔히 ‘관용’이라고 하면 종교적 관용을 먼저 떠올린다. 이는 아마도 서양의 톨레랑스의 출발이 종교적 영역에서 기인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관용이란 사회적 덕목은 비단 종교에만 국한되지도, 국한되어서도 안 된다. 오히려 종교적 관용이 훨씬 더 분명한 한계가 있다고 해야 한다. 그 까닭은 이렇다. 모든 종교적 신념은 각기 나름의 진리 요청을 담고 있기 마련이며, 이러한 진리 요청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예컨대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만이 그리스도라고 고백되어야만 그리스도교 신앙이 의미가 있다.

이 전제를 인정한다면 종교적 영역에서 관용이란 기껏해야 다른 신앙고백을 지닌 신앙인들에게 그들이 속한 공동체에 존경의 예를 표하거나 다른 모든 차이가 있음에도 ‘참아내는 것’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신앙에서 결단은 그것의 본질에 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요청은 학문에서나 사회-정치적 분야에서는 주어질 수 없다. 이 분야에서는 아무도 진리를 지니고 있지 못하며 그저 끊임없이 진리를 찾아나서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이 영역에서 나와 다른 의견들은 존중되고 수용되며, 토론과 논증을 통한 다툼은 필연적인 과정이다. 이처럼 학문과 사회-정치적 영역에서 나와 다른 ‘상대방’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관용의 자세는 열린 토론과 진정한 ‘다툼의 문화’를 위한 전제로 자리하고 있다.

이런 토론과 다툼은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이요 본질적 가치이다. 이런 관점에서 관용은 무엇보다 자기통제를 위한 덕, 다시 말해 완고한 교조주의와 아무것이나 상관없다는 무차별주의 사이에서 중용을 지키고자 하는 태도라 할 수 있다.

또한 관용은 민주주의의 또 다른 본질적 가치인 자유와도 깊은 연관을 지닌다. 자유는 때때로 서로 모순된 의견들을 한꺼번에 모아들이는 혼돈으로, 때로는 타인의 자유에 대한 공격으로, 심지어 사회 전체 시스템을 붕괴시키는 방향으로 이끌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자유는 스스로를 제어하는 자기통제가 필요하며, 관용과 인내가 요구된다. 관용도 자유도 무제한적이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은 기둥이 되는 추덕(樞德)이며, 모든 민주주의 가치를 재는 시금석이다. 민주주의 안에서는 모든 생활양식과 모든 가치를 확장시키는 평등의 원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자신의 고유한 도덕관념을 모두에게 적용시킬 수 없고, 아무에게도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며, 어떻게 행복을 실현하고자 하는지를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위한 전제는 소수에 대해 참아내는 것이다. 의회정치에서는 다수결의 원리가 적용되지만, 이것은 그저 형식적 원리일 뿐이며, 내용적 가치까지 건드려서는 안 된다.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근거에 의해 다수는 결정을 내리지만 소수의 의견을 존중하며, 소수 역시 내용적으로는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수의 결정을 수용한다. 소수의 보호는 의회 민주주의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 체험이 가르쳐주는 바는 다수는 늘 불관용과 폭압으로 기울고, 소수는 자신의 위치에 대한 존중과 관용을 요구할 권리를 주장했다는 점이다. 이 소수들이 언젠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이들은 완전한 인정을 요구했고, 그들의 제안을 일반적인 구속력을 가질 수 있도록 밀고 나갔다.

우리가 다양성을 인정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진리의 속성에서 찾을 수 있다. 진리는 인간 안에 늘 제한적으로 현존하고 있을 뿐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처럼 인간은 그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이 불완전한 인간 안에 완전함을 속성으로 하는 진리가 온전히 담긴다는 것은 그 자체로 ‘자가당착’이다. 이 말은 거꾸로 해석하면 분명히 오류라고 보이는 것들에도 한 조각 진리가 담겨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인간존재의 ‘불완전성’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단초는 ‘관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은 각기 나름의 관점을 지닌다. 저마다 인간을 보는 관점, 세계를 보는 관점, 사회를 보는 관점, 가치를 보는 관점이 다르다. 그런데 ‘관점’이라는 개념 안에는 이미 ‘전체’가 아니라 ‘어느 한 부분’에 대해 본다는 한계성을 담고 있다. ‘보는 점’이 관점이다. 본다는 행위는 늘 일정한 때와 일정한 곳을 필요로 한다. 그 점에서 인간은 본다.

이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어 모든 부분을 본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한계에 대한 인정이기도 하다. 어차피 전부를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진리의 한 조각이나마 조금이라도 더 보고자 한다면 타인이 본 것을 필요로 한다. 다양하게 보는 것이 조금 더 낫다. 이런 점에서 ‘다양성’은 진리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디딤돌이 된다.


타협을 위한 준비된 자세

마지막으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능동적 참여, 상대방과 감정을 공유하고자 하는 공감, 그리고 대화와 일치를 이루고자 하는 커뮤니케이션이다. 대화에서 상대방을 설득시키는 능력은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을 굴복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의 일치를 염두에 두고 변화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제대로 된 사회가 되려면 그저 이성적인 셈법에만 몰두하고, 개인주의적이고 심지어 이데올로기적인 희망만을 염두에 두어서는 안 된다.

이런 시스템은 오래가지 못한다. 능동적인 참여와 통교의 능력 배후에는 의지가 필요하다. 파트너를 이해하고자 하는, 곧 다른 사람의 다름을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의지, 낯선 상황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자신을 그 안으로 밀어 넣으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그렇기에 여기서 함께 느끼고, 자신의 처지로 만들고자 하는 공감은 필수적인 능력이 된다.

물론 어느 누구도 동료가 처한 상황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한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모두가 자신의 고유한 처지와 고유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지난 세기 최고의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카를 라너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언제나 마지막까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있다. … 다른 사람의 심성은 … 오직 사랑, 인내, 곧 관용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는 전적으로 낯선 것이다. 인간은 그저 자신의 고유한 것으로 스스로 받아들인 것만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전적으로 낯선 것을 받아들이려면 겸손한 자기비판이 필요하고 선입견과 적대감의 해체가 요구된다.

겸손의 덕은 여기서도 빛을 발한다. 상대방 역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견해를 무조건적으로 강요하기를 포기하도록 이끌 수 있는 권리 또한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 역시 겸손의 다른 차원이다.

이 모든 것들은 분쟁, 그것도 적대적인 분쟁을 해결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준다. 그 준비란 타협을 위한 준비이다. 우리에게 타협은 대개 ‘적당한 선에서’ 대충 양보하면서 해결한다는 부정적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마치 ‘기회주의적인 적응’이나 ‘거짓된 조화’를 이루려는 전략적 포기로 비춰지기도 한다. 그것은 올바른 타협이 아니다. 제대로 된 타협은 상대방의 주장 또한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수용 가능한 해답을 담고 있다고 인정할 때에만 가능하다.

타협의 어근인 com-pro-mittere는 로마법에서 기인하는데, 이 말은 서로 약속을 주고받을 때 그 결정권은 심판관에게 양도한다는 의미이다. 이 말이 의미를 지니는 것은 타협의 당사자 모두 중요한 한 부분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타협은 아주 고차원적인 가치를 지닌 높은 도덕적 행위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타협은 단지 필수적인 요소이거나 필요악이 아니라, 하나의 덕이요 가치이며, 상대방의 처지를 무시하여 모든 토론을 배제시키는 독재와 폭력적 사고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으로 자리해야 한다.


다양성과 근본주의

다양성의 인정은 근본주의의 싹을 자르는 효과도 있다. 자살 테러와 같은 사회의 커다란 위협인 ‘근본주의’는 다양성의 토양에서는 자라기 어렵다. 획일화와 근본주의는 동전의 양면이다. 근본주의적 사상은 두 가지 서로 상반된 극단적인 환경에서 쉽게 만들어진다.

그 하나가 무분별하고 무차별적인 상대주의의 환경이라면, 다른 하나는 다수의 폭압 상황 아래 처한 ‘정치적 극단주의’를 추구하는 소수에게서 나온다. 근본주의는 종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정치적인 근본주의는 더 무섭다. 제2차 세계대전을 가능하게 한 파시즘이나 나치즘 등은 차치하고서라도 우리 사회에 만연한 레드 콤플렉스 역시 근본주의적 사고가 그 바닥에 자리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시 카인과 아벨

다시 카인과 아벨 이야기로 돌아가자. 카인은 동생을 없애버림으로써 혼자 남게 된다. 차이를 견디지 못하면서 저지른 범죄의 결과이다. 그 카인에게 하느님이 묻는다. “너는 네 형제에게 무슨 짓을 하였느냐?” 다양성을 무시하고 제거해 버린 카인에 대한 준엄한 질책이다. 그 질책에 귀 기울여야 한다.

따지고 보면 다름이 문제가 되는 곳에는 언제나 다름보다 더 많은 같음이 있다. 같음이 많기 때문에 같지 않은 조금 다른 것들이 더 크게 보이는 법이다. 완전히 다른 것은 더 이상 다른 것이 아니라 그저 ‘낯선 것’일 뿐이며, 그 낯선 것은 우리의 관심조차 끌지 못한다.

“모든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그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지닌다.” 앞서 인용한 프랑스 정치학자 토크빌이 남긴 유명한 말이다. 이 말은 우리 사회와 그 구성원인 우리 모두를 발가벗겨 놓고 있다. 못난 정부만을 탓할 것이 아니다. 오십보백보, 그 수준이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꽃밭에 다양한 꽃들이 피어 아름다울 수 있도록 우리 신앙인들이 앞장서야 할 때다.

* 홍경완 메데리코 - 부산교구 신부. 1994년 사제품을 받고, 독일 뮌헨예수회철학대학교에서 사회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학장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5년 2월호, 홍경완 메데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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