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지] 기도로 걷는 길: 파티마 성모 발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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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10-03 ㅣ No.1372

기도로 걷는 길 (2) 파티마 성모 발현지


‘주님의 종 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아름다움이란 들꽃의 화르르한 웃음 같은 것이라 여길 때였다.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말을 전하는 눈빛의 여인 사진을 생일선물로 받았다.

친구는 세상의 이치로 가늠할 수 없는, 여인의 기적은 말하지 않았다. 다만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었노라, 액자에 넣은 사진만 건넸을 뿐이었다.

꽃들이 별처럼 피어나고, 먼 향기가 다가오듯 그윽한 눈길의 여인은 책상머리에서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건네곤 했다. 내가 천주교 신자가 된 까닭에는 사진 속 여인의 덕이 컸으리라 믿곤 한다. 그 여인의 이름은 ‘파티마의 성모님’이다.

성당에 다니게 된 후, 극진한 아름다움 속의 여인이 ‘동정녀로 잉태’한 성모님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한마디 답으로 어찌 원죄 없는 잉태가 가능한가. 납득할 수 없는 신비요, 순명이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느님 모상으로 인간을 만드셨다는 것부터, 예수님의 부활에 이르기까지 ‘믿음’ 하나만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벅찬 성경 말씀이 어디 한 둘인가. 그런 중에 부대끼는 사람들 눈치 살피기에 급급한 내게 성모님의 절대 순명은 가히 충격이었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책상머리의 벗인 ‘파티마의 성모님’은 이미 내게 깊이 들어와 있었다.

내가 다니는 성당의 성모발현 성지순례팀을 따라 마침내 포르투갈에 왔다. 사진 속에서 넘겨짚던 수많은 이야기를 이제는 들을 수 있을까, 두근두근 설렘을 눈치라도 챈 걸까, 파티마로 달리는 차창에 빗방울이 후드득거린다. 잿빛 유칼립투스 나무도 머리채를 파르르 떨며 따랐다. 어찌하여 가난한 산골의 목동 아이들에게 그리고 무엇이 그리도 안타까워 나타나셨는지, 그 까닭의 꼬리도 함께 달렸다.

빗속에 도착한 파티마는 떡갈나무 아래 금작화가 노랗게 피어나던 산골마을이 아니다. 덥고 축축한 초여름, 세 아이들이 양을 몰던 이낀 낀 올리브나무 숲길을 기대했음인가. 눈길 한번으로 스치기에 너무 광활한 광장이다. 하늘만큼 장엄한 구름 아래 대광장은 의식의 전야인 듯 경건한 숨을 고르고 있다.

광장의 한편에 둘러선 파티마 대성전은 하늘의 성이 저러리라 싶을 만큼 거룩한 위용이다. 저격을 예고했던 파티마의 성모님이 자신을 구했다며, 총알을 성모님 왕관에 봉헌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추적이는 빗속에 어깨를 굽히었다. 그 뒤로 십자가가 하늘에 닿은 양 높다. 파티마 대성전과 대칭 구도로 선 교황 기념관 성당이 역시 광장의 한쪽 병풍으로 너르다.

숨을 크게 한번 내쉬고서야 기념관 성당에서 파티마 대성전까지 선을 그은 길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묵주를 한 손에 들고 무릎걸음으로 긴 길을 따르는 이들에 시선이 멈추었다.

묵주기도를 마치고 집짓기 놀이하던 열 살의 루치아, 일곱 살의 히아친타, 아홉 살의 프란치스코에게 어느 곳에서도 본 적 없는 가장 아름다운 성모님이 나타나셨다.

“전쟁이 끝나고 세상에 평화가 오도록 매일 묵주기도를 바쳐라. 인류가 계속해서 하느님의 마음을 상해 드린다면 더 무서운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러시아를 내 성심에 봉헌하고, 매달 첫 토요일마다 죄인들의 회개를 위한 기도와 티없이 깨끗하신 마리아의 성심께 대한 신심을 바치고, 고백 성사와 성체를 영하라. 결국 성모 신심이 승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묵주기도를 바칠 때 매 신비가 끝난 다음에는 “예수님, 저희 죄를 용서하시며 저희를 지옥 불에서 구하시고, 모든 영혼들을 천국으로 이끌어주시며, 특히 자비를 가장 필요로 하는 영혼들을 돌보소서.”라는 구원송도 함께 바치라고 하셨다. 바로 ‘파티마의 비밀’이다.

아이들은 성모님의 기도와 고행을 당부 받은 뒤로 굵은 밧줄을 맨살의 허리에 단단히 묶고 다니고, 더운 날에 물을 마시지 않는 등 고행을 위한 여러 일들을 하였다. 그중에서도 개인과 세계평화를 기원하며 묵주기도를 자주 바치는 것을 가장 중시했다고 한다. 한눈에 따라잡을 수 없는 드넓은 파티마 광장 길에 묵주 한 알, 무릎 한 걸음으로 드리는 온몸의 보속이 찡하다. 젖은 빗길에 엎디는 그들에게, 바라보는 내 무릎마저 절여오는 고행의 묵주기도다.

푸른 어둠이 짙어지자 대성전 종탑에서 종이 울리고. 성모님 발현 소성당에 세계 각처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각 나라의 언어로 아뢰는 성모송이 제대 위 성모님의 두 손에 모아진 후, 짙은 밤으로 퍼져나갔다. 온 나라의 성모송이 끝나자 간절한 염원의 빛이 촛불로 전해지고, 제대 위의 성모님이 촛불의 행렬 속에 내려왔다.

“반짝거리는 물로 채워진 수정 유리보다 더 강하고 밝은 빛을 쏟아내는 찬란한 옷이, 발밑까지 늘어뜨려졌으며, 그 경계 부분은 별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나이는 열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며 표현할 수 없이 아름다운, 천상의 빛으로 가득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인지 생각에 잠긴 듯한 슬픔도 배어 있었다. 가늘고 섬세한 그 부인의 손은 진주 같은 것으로 엮어진 묵주를 들고서 가슴 부분에서 서로 맞잡고 있었다.”라고 루치아가 회상하던 모습의 성모님이 앞서고, 아베 마리아를 부르며 뒤를 따르는 촛불의 행렬이다.

러시아를 봉헌하라던 그때로부터 백 년이 흐른 지금, 대다수 방문객들은 세계 유일 분단국이자 전운이 감도는 코리아를 위해 기도한다고 했다. 정작 나는 한 민족 두 나라의 우리 땅을 위한 기도를 몇 번이나 했던가. 일본 강점기를 거쳐 한국전쟁을 치른 내 어머니도 기도 중에 세계 평화를 간구하지는 않았다. 내 어머니에게 세계는 오로지 자식이었다. 기도 시작과 끝에 자식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가며 곡진히 엎드리던 내 어머니였다. 매일 아침 촛불 아래 기도 드리던 어머니의 염원이 촛불 행렬과 같은 길을 내어, 지금 내가 파티마의 성모님을 알현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파티마의 성모님께서 매일 기도하라, 이르던 세계 평화를 위한 기도의 현장에 있는 것일 테다.

기도란 본능으로 집착하는 안위를 아뢰는 일이 아니다. 흑백의 사진 속 양치기 세 아이들은 보잘것없이 초라하다. 가난한 만큼 바람도 소박하고, 남루한 만큼 티 없는 아이들에게 세상의 어머니는 나타나셨다. 아이들은 성모님께서 하라고 이르는 대로 온전히 따랐다. 기도도 믿음도 마름질하지 않고,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던 성모님의 순명을 본받았다.

나의 기도는 어떠한가.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구호를 앞에 두고, 복권 당첨되듯 이로운 것만 바람으로 아뢰며 기도를 가장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파티마의 성모님조차 왜곡된 아름다움의 척도로 재단하지 않았는가. 아름다움의 표상인 양 책상머리에 모셔두고 관념 속 아름다움으로 지켜봐온 파티마의 성모님이다. 아름다움은 관념이 아니다. 지극한 사랑이 차오를 때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이 되는 것이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고 했다. 하느님의 모상이며 생명까지 아무런 보상 없이 받은 인간이 가책없이 죄를 짓고 또 짓자, 하느님의 맘을 헤아린 어머니가 끝내 나타나신 것이다. 세 아이들을 믿지 못하고 감금 유괴하며 비밀 설토를 협박하던 사람들에게 ‘묵주기도의 모후’로 ‘태양의 기적’을 보여주셨다.

기적을 지켜보고서야 무릎을 꿇은 군중의 파티마 광장이다. 이윽고 촛불 행렬이 잦아든 성모님 발현 소성당에 몇 명은 파티마의 성모님 앞에서, 몇 명은 남은 촛불 곁에서 서성인다. 이 밤이 지나고 새아침이 오도록 세상 어디선가 묵주 알을 굴리며 기도는 멈추지 않는다. 묵주의 기도야말로 세상의 평화를 이어가는 힘이 아닌가.

인간이 무엇이기에, 하느님의 맘을 헤아린 파티마 성모님은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곡진한 사랑을 베푸셨는지…. 오래전 아름다움으로 만난 여인은 이제, 확실한 언어로 내게 이른다.

“기도로 순명하라.” 아침마다 기도를 드렸던 내 어머니처럼, 묵주기도로 새아침을 맞으리라. 그리고 낮은 이의 눈길로 가장 아름다운 파티마 성모님의 순명과 사랑을 닮으리라, 묵주를 두 손에 모으는 파티마의 밤이다.

[평신도, 제40호(2013년 여름), 류정호 데레로사(가톨릭생명연구소 연구위원 ·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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