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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정] (11) 고통의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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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9 ㅣ No.41

제11강의 : 고통의 신비(5월 13일 오전)

 

 

자비로우신 주 하느님,

오늘 다시 저희에게 유익한 시간을 주심에 감사드리오니 주님 안에 살고자 하는 저희들이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게 하여 주소서. 주님께서 겪으신 그 고통에 저희도 함께 참여할 수 있게 하심으로써 주님의 수난과 십자가의 의미를 더 깊이 깨달을 수 있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우리는 어제 주님의 십자가의 신비에 대해서 나름대로 묵상해 보았습니다. 또 우리 자신이 주님의 뒤를 따르기 위해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일은 정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음으로써 실감나게 될 수도 있겠지만, 비록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 자신의 매일의 삶을 있는 그대로, 주어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또한 주님의 길을 따르고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매일의 삶이 어떤 때는 지루할 수도 있겠고, 무의미해 보일 수도 있겠고, 어떤 때는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는 그런 소외감 속에 있을 수도 있겠고, 어떤 때는 '왜 하필 내가 이 자리에?'하는 것처럼 웃어른에 대한 어떤 원망 섞인 마음도 가질 수 있겠고, '왜 내가 내 나름대로 노력하는데 인정을 받지 못하는가?'하는 마음도 생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밖에도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따를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줄 아는 것 이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그런 믿음에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편으로는 하느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믿음이 있으면서도, 어떤 때는 '정말 하느님은 계시는가?'하는 의문을 품게 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특별히 무고한 사람이 난데없는 사고나 병으로 고통을 겪는 것을 볼 때 '과연 하느님은 계시는가?'하는 그런 의심을 가지는 사람 앞에서, 우리 자신도 의심을 가질 수 있고, 그런 사람 앞에서 무어라고 말을 하면 좋을 지 모르는 경우가 자주 있지요.

 

제가 여기 오기 불과 며칠 전에도 저를 찾아온 어떤 부인으로부터 당신의 장성한 대학생 외아들을 갑자기 교통 사고로 잃었다는 이야기와 설상가상으로 딸이 또 무슨 정신적인 병고를 일으켰는지 미국에 유학을 가 있는데 7층에서 뛰어내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딸은 7층에서 뛰어내려서 죽었는가 했더니 죽지는 않고 병원으로 실려갔는데,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지 아니면 평생을 누워서 살아야 할 지 모르는 그런 상황이라고 합니다. 그 부인이 어머니로서 겪는 고통을 말할 때 제가 듣고 있었습니다만 정말 무어라고 위로해야 좋을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한 불행을 겪은 것 때문에 그분이 신앙을 잃은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역시 '하느님, 주님, 왜?'하는 그런 마음은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언젠가 신문에도 보도된 이야기 같은데, 어떤 부인이 남편을 잃고 세 자녀를 데리고 서울로 왔습니다. 서울에 와서 생활 근거는 없고 그냥 막노동을 하였습니다. 공장의 허드렛일도 하고 파출부도 하고 온갖 고생을 다 하면서도 오직 세 자녀를 키우는 재미로 살았습니다. 딸들을 적어도 고등학교까지 보내는 것이 그 어머니의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가 일찍 일터로 나간 다음에 세 딸만 집에서 자고 있다가 누전으로 화재가 나서 세 딸이 모두 죽었습니다. 이런 경우를 당해서 그 어머니에게 무슨 말을 해 줄 수 있겠습니까? 이런 때 '참으로 하느님은 무심하시다'고 말하더라도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것 때문에 무신론자가 되는 경우도 있지요.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들이라고 말하는 까뮈(A. Camus)나 사르트르(J. P. Sartre) 같은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참으로 계시다면 무고한 사람들이 왜 고통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시는가?"라는 말을 합니다. 시편 10편에 보면, "벌은 무슨 벌이냐?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4절)하며 악인들이 고통을 받으면서도 하느님께 의지하는 사람을 비웃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고통이나 죽음이 끝이고, 그것이 전부냐는 것입니다. 만일 인생에 있어서 고통과 죽음이 전부이고 끝이라면 아무도 그런 불행에 대해서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앞에 예를 든 졸지에 세 딸을 잃은 부인에게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병원 중환자실에서 죽어가는 말기 암환자, 또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교수대에 올라 처형되는 것밖에 기다릴 것이 없는 사형수, 또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평생을 누워서 지내야 하는 전신마비의 젊은이, 이런 사람들에게 현세가 전부이고 그 뒤에 아무 것도 없다면 우리는 아무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위로할 말도 없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현세가 전부이고 끝이면 이러한 세상, 이렇게 불행과 고통이 많은 세상을 만든 하느님, 그런 인생밖에 살 수 없게 만든 하느님은 결코 선한 하느님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도대체 그런 하느님은 처음부터 없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 것이고, 그리고 현세가 전부이고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나고 만다면 우리 인생은 그 자체가 모순이며 부조리입니다. 그런 경우 무엇 때문에 양심을 지켜야 하며, 무엇 때문에 선을 수호하고 악을 피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도 없지요. 모든 것이 모순입니다.

 

그러나 결코 현세가 전부가 아니며, 또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믿습니다"라고 우리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 계시하시는 말씀을 통해서 볼 때, 오히려 죽음은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그럴 때 우리 모두가 맞이해야 하는 죽음은 참으로 신비스럽습니다.

 

살아있는 우리 중에서 어느 누구도 완전한 의미에서 죽음을 체험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 때문에 죽음이란 것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계시를 통해서 약속하신 새로운 생명,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는 부활 생명은 이 죽음 뒤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죽음은 참으로 우리에게 부활의 새 생명,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문이 되는 것입니다.

 

이미 인용한 바 있는 고린토 전서 2장 9절의 말씀은 이러합니다 :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신 것은 이렇게 우리의 모든 상상과 우리의 모든 지식을 초월하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답고 좋고 복된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느님 당신 자신의 영원한 생명에 우리들을 참여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로나 글로써 표현할 수 없는 좋은 선물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죽음은 바로 그 선물을 받는 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름답게 포장된 그 선물 보따리를 푸는 순간이 죽음인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기대가 되지요. 죽음은 마치 터널처럼 그 터널을 지나면 빛이 아름답게 비추는 아름다운 세계로 연결하는 길이라 기대가 됩니다.

 

죽음 뒤의 삶에 대해서 까를로 까레또는 어느 책에서 "우리의 현재는 우리가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그것을 향하여 자라는 태(fetus, 胎)와도 같다"고 말했습니다. 태 중에서 어린이가 자라듯이 우리도 현세라는 큰 태(胎) 안에 있으며, 이 태를 벗어나면 새로운 세계, 영원한 세계, 끝도 없는 세계, 하느님의 영광으로 가득 찬 그 세계로 가는 것이지요. 이렇게 볼 때에 모든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는 철칙인 죽음은 우리에게 불안과 공포만을 주는 불행하고 절망적인 운명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를 현세의 고통에서, 묵시록의 말씀처럼 고통도 슬픔도 눈물도 없는 그런 아름다운 세상, 빛나는 세상,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 찬 생명으로 우리를 옮겨주는 다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드리는 위령 미사의 감사송에서도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몸소 그것을 믿을 뿐 현재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 '이것이다'라고 보여줄 수는 없기 때문에 그런 사람을 대하게 되면 여전히 할 말을 찾기가 힘듭니다. 고통을 실제로 겪고 있는 사람, 더구나 그가 깊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닐 때에는, '여보게, 천국의 축복이 크니까 잘 참게'라고 이렇게만 말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고통과 시련은 참으로 신비스럽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무신론자가 된 사람이 없지 않지만, 또 그러한 고통과 시련을 겪은 다음에 오히려 신앙을 가지게 된 사람도 훨씬 더 많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실제로 신부님들도 본당에서 그런 경험을 많이 하셨으리라 믿습니다만, 제가 서울교구장으로 오자마자 우리 의과대학에서 그런 사고가 났습니다. 설악산에 가서 학생들이 설악산 계곡에서 야영을 했는데, 그 해 비가 많이 와서 갑자기 계곡 물이 불어서 일곱 명인가 여덟 명인가가 한꺼번에 죽었어요.  그런데 그 때 우리 학교에서 우리가 해줄 수 있었던 것은 공동으로 장례를 해 주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계기로 두 가정이 영세를 받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한 가정은 온 식구가 다 영세를 받았습니다. 한 가족은 전부 다 영세를 받았고, 다른 가정은 어머니하고 죽은 사람의 누이동생이 받았는데 그분들은 지금도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상하게도 졸지에 자식이나 가족을 잃은 그런 불행을 겪고 나서 그런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또 미얀마의 아웅산에서도 폭탄 테러로 인해 많은 분들이 희생되셨지요. 이상스럽게 그 사건 이후 그 자리에서 희생되신 분들의 부인들 가운데 여러 사람이 신자가 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함병춘씨의 부인의 경우가 특별합니다. 원래 함병춘씨가 함부통령의 손자인데, 함부통령은 목사님이었기 때문에 그분들은 목사님의 가정에서 자란 아주 철두철미한 개신교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함병춘씨의 부인도 아주 열심한 개신교 신자였는데, 남편이 그렇게 된 다음에 많은 목사님들이 와서 위로의 말을 하였는데도 한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답니다. 이 이야기는 그 부인이 먼저 영세를 하시고, 아들 둘이 나중에 영세를 한 뒤에 세 분이 같이 저에게 찾아와서 직접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하여튼 그 사건이 나고 나서 처음 몇 달은 그야말로 '주여, 왜?'라는 질문을 하듯이 '왜, 왜, 왜 하필 내 남편에게'하는 말만 나오지, 누가 와서 위로해 주는 신앙의 말은 한 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몇 달 동안은 매일 국립묘지에 가서 우는 것이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앞이 캄캄했답니다. 몇 달이 지나고 그 다음 해 2월 8일이라고 제가 기억하는데, 여전히 알아듣지는 못하겠지만 그러나 받아들이게 되더랍니다. 바로 그 날 자기 집안에서 유일하게 있는 가톨릭 신자가 한 분 있었는데, 그분에게서 '아주머니, 제가 아주머니께 무엇인가를 도와드리고 싶은데 도저히 도와드릴 길은 없고 그래서 생각난 것은 혹시 원하신다면 어느 신부님을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만나보실 생각은 없습니까?'라는 내용의 전화가 걸려왔답니다. 그런데 이 분은 아주 어려서부터 개신교 분위기에서 살았기 때문에 가톨릭 교회와는 도대체 인연이 닿지 않았고, 가톨릭은 전혀 다른 세계이며 신부는 자기가 좋다 싫다 할 것도 없이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답니다. 그래서 그냥 '목사님을 만나시겠어요?'라고 했으면 '그러지요'라고 대답을 했겠는데, 신부라고 해서 싫다고 그랬답니다. 그래서 전화를 끊었는데, 전화를 끊고 난 다음부터 시간이 갈수록 이상스럽게 '그 신부를 만나볼까?'하는 생각이 자꾸 나더랍니다. 그래서 결국은 나중에 자기편에서 먼저 전화를 걸어서 만나게 해달라고 했고 그렇게 해서 신부님을 만나게 되었답니다. 그 신부님이 바로 정의채 신부님이시지요. 정의채 신부님이 불광동에 계실 때인데, 한번 만난 후 두 번 만나게 되고, 세 번 만나게 되면서 그 만남이 쌓였어요. 결국은 그분으로부터 교리도 배우게 되고 그래서 가톨릭으로 개종할 결심을 하게 되었는데, 자기 자녀들한테 아무 말 안하고 할 수는 없고, 그 때 아들들이 미국에 있을 때인데, 큰아들한테 편지를 썼대요. '나는 이제 가톨릭으로 가고 싶은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때 그 자리에 아들들이 같이 있었으니까 함께 이야기를 나눈 것입니다. 그 때 아들의 말이, 어머니한테 그런 내용의 편지가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너무 괴로워서 아마도 돌으셨나 보다'하고 생각했답니다. 가톨릭은 자기에게도 다른 세계였는데 그 가톨릭에  어머니가 가시겠다니 정신이 이상하게 되셨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답을 못했대요. 그리고 몇 달이 흘렀는데, 어머니는 몇 달을 기다려도 답이 없고 아들은 어떻게 답을 드려야 할 지를 모르겠고 하는 처지였는데, 어머니 편에서 일방적으로 통고를 했답니다. '나는 가톨릭으로 간다'. 어머니에게서 그런 전화가 온 날, 아들도 갑자기 그런 생각이 났다고 합니다. '오늘은 어머니께 전화를 해드려야지. 어머니 하시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대요. 그래서 '저도 오늘 마침 그런 생각이 났습니다. 어머니 하시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라고 응답했답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가 세례성사를 받으시게 되었는데, 정의채 신부님이 그 때 저보고 와서 세례성사를 주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가서 세례성사를 그분께 드렸고, 그때 두 아들이 거기에 합석을 했습니다. 그 때 두 아들을 보고 제가 '언제 두 아드님도 어머니와 같이 할 뜻은 없습니까?'했더니, '있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어요. 그리고 그 이듬해 성모승천 대축일에 두 아들도 세례성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세 분이 와서 그 이야기를 하는데 그 때 그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은 모든 것을 다 하느님이 주신 은혜로 알고 감사하고 있습니다'라고 말이지요. 언뜻 이해하기 어렵지만 고통을 통해서 하느님을 보다 더 깊이 알고 감사하게 된 것입니다.

 

여담이 길었습니다. 아무튼 고통이 없는 인생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어떤 인생이겠습니까? 사람은 너무 고통을 겪고, 또 고통에 짓눌려도 비인간화될 위험이 없지 않지만, 반대로 인생에 고통이 없다면, 고통이 무엇인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아픔도, 시련도, 수고도, 슬픔도 그 어떤 어려움도 없다면 그런 인생은 참으로 어떤 인생이겠습니까? 깊이기 없는 인간, 인간의 모습을 지니기는 했어도 인간의 정과 마음이 없는 비인간의 상태일 것입니다. 우리는 다행히도 고통이 없는 이런 인간이 현실에는 없기 때문에 상상해볼 뿐입니다.

 

고통은 우리 개개인에게 있어서도 한편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기 때문에 싫은 것이고, 피하고 싶은 것이고, 그래서 고통에서 구하여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고통이 우리를 더욱 깊이 있는 인간, 더욱 신앙적인 인간으로 만들어주고 우리로 하여금 더욱 하느님께로 향하게 하고, 그리스도를 닮게 해서 참된 신앙의 삶을 살게 해 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정말 고통 속에서도 사랑의 하느님으로 현존하시면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사도 바오로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 20)라고 하였을 때, 그 그리스도는 바로 바오로 사도가 겪고 있는 고통도 함께 겪고 있는 그리스도이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오로께서 그 말을 하기 바로 전에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서 죽었습니다"(19절)라는 말을 하고, 이어서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필립비서 3장 10절에 보면,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늘 희망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고린토 후서 4장 17절을 보면, 바오로 자신이 굉장한 고난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벼운 고난'이라고 표현하면서, "우리는 지금 잠시동안 가벼운 고난을 겪고 있지만 그것은 한량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앞에 인용한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마련하고 계십니다"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고통의 인간'에 대해 말한다면, 누구보다도 아마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그분이야말로 참으로 고통의 대표적인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J. 몰트만의 말대로 그분은 참으로 인간에게 닥쳐올 수 있는 모든 고통을, 또는 그 이상을 이미 다 겪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참으로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이 누구이든지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부탁할 수 있는 형제요 친구가 되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확실히 고통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그분과 깊은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물론 고통에도 참으로 무서운 고통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소화 데레사 성녀가 그 병중에서 체험한 하느님이 없는 고통, 하느님 부재의 고통은, 그분 자신의 표현을 따른다면, 무신론적 고통, 무신론적 밤이었습니다. 개신교 신학자인 본 회퍼(D. Bonhoeffer)는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 "우리는 하느님 앞에 있고, 하느님과 함께 있고, 또 하느님 없이 있다". 이 세 가지는 함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하느님과 함께 있고, 또 어떤 때는 하느님 앞에 있는 것 같은데, 어떤 때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과 같은 상태에 있기도 합니다. 또 시몬느 베이유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 "그리스도교가 월등하게 위대한 것은 고통을 없애주는 약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고통을 올바르게 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 말처럼 그리스도교는 분명히 우리로 하여금 고통을 면할 수 있게 해주지는 않습니다. 복음은 절대로 우리가 고통을 겪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리스도는 영광을 차지하시기 전에 고통을 겪어야 한다고 말하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자기 목숨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어떤 분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기억하면서 상본을 만들었는데 그 상본 뒤에 "주님께서는 우리 고통 중에 함께 계신다"고 써 놓은 글귀가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우리 고통 중에 함께 계십니다. 그것을 잘 드러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 어느 날 나는 꿈에 주님과 함께 바닷가 백사장을 걸었습니다. 모래 위에는 지나온 길을 따라 두 개의 발자국이 쭉 찍혀 있었습니다. 내 생애의 마지막이 되어 지나온 길을 회상하면서 모래 위에 찍힌 발자국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여러 번 발자국이 한 개 밖에 없는 것이 보였고, 그 때는 내 생애에서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순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언짢은 마음이 되어 주님께 여쭈었습니다. "주님,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하면 끝까지 저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제가 가장 고통스럽고 어려웠을 때는 발자국이 한 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왜 그 순간에 저와 함께 계시지 않았지요?"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나는 너를 결코 떠난 적이 없다. 네가 고통 중에 있었을 때 발자국이 하나밖에 없는 것은 내가 너를 업고 있었기 때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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