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금)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노동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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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9-24 ㅣ No.1188

[복음살이] 노동의 영성 (1)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3년 9월22일 지중해에서 시칠리아 다음으로 큰 섬인 사르디니아의 주도인 칼리아리에 사목방문을 한 자리에서 활력을 잃은 지역경제로 인해 실업상태이거나 일자리가 불안정한 상태인 수천 명의 노동자와 지역주민들에게 “희망을 강탈당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일자리가 없으면 인간의 존엄성도 없어지게 된다”고 지적하였습니다.

 

또한 교황은 기업인들이 인간보다 돈을 섬기고 우상화하는 세태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난하면서,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보장하기 위해 전 사회적으로 최선을 다해야 하며, “비인간적 노동, 노예화된 노동, 재산권에 대한 보호나 창조를 존중하지 않는 노동, 반드시 그래야 할 이유가 없는데도 주일에 일하는 것처럼 휴식과 휴가, 가족을 배려하지 않는 노동” 등이 만연하지 않도록 경계하면서 “기품 있는” 일자리를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한상봉, 2013.9.25. 참조).

 

이처럼 가톨릭교회는 노동자들의 인권과 노동의 권리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1891년에 레오 13세는 회칙 <새로운 사태(노동헌장)>를 발표하여 산업혁명으로 말미암은 임금 노동자들의 양산과 노사간의 계급갈등, 그리고 비인간적인 노동자들의 현실에 대해 다루었고, 이후 인간 노동과 인간의 존엄성의 문제는 역대 교황들의 회칙에서 핵심적인 주제로 다루어져 왔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1960년대 산업화 정책이후 서구와 비슷한 노동문제를 겪어왔고, 여전히 쌍용차, 한진중공업, 콜트 등에서 벌어졌던 정리해고와 노사갈등, 현대차와 이마트의 불법 파견, 비정규직 차별 등 많은 노동 현안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톨릭 신자들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노동 문제들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 인간 노동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간추린 사회교리> 6장 ‘인간 노동’을 중심으로 교회의 가르침을 살펴보겠습니다.

 

 

노동은 구원의 도구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은 당신 모습대로 인간을 지으시고 땅에서 일하게 하셨고, 특히 에덴동산을 가꾸고 돌보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노동’을 통해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맡겨주신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을 제대로 돌볼 책임이 주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노동은 ‘인간의 본래 상태에 속하는 것’이지 그 자체로 형벌이나 저주가 아닙니다.

 

창조주의 뜻에 복종하지 않은 아담과 하와의 죄 때문에 노동이 고생스럽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수확을 얻을 수 있게 되었지만 본래 창조주의 계획에서 인간이 피조물을 가꾸고 돌보도록 부름 받은 사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255-256항 참조).

 

교회는 비록 노동이 부를 얻고 품위 있는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효과적인 도구이지만, 노동을 숭배하고 이익을 내는 데에 우선적인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인간 삶의 궁극적인 의미는 노동이 아니라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노동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의 정점은 안식일의 휴식에 대한 계명”인데 “안식일을 기념하고 지키는 것은 자의로든 강제로든 일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고... 모든 종류의 착취에서 인간을 막아주는 방패”가 됩니다. 따라서 안식일은 하느님을 생각하는 날이면서 동시에 가난한 이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258항).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도 목수로서 노동자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아버지의 일을 하는 사명을 받았음을 설명하시며(요한 5,17) 제자들도 주님의 수확, 즉 인간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꾼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 9.37-38 참조).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선 인간은 일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온갖 일에 마음을 쓰며 중요한 것을 소홀히 하기 쉽기에,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을 먼저 추구하고, 육신 뿐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돌보며, 천상의 보화와 영원한 가치를 지향해야 합니다.

 

한편 예수님은 인간 해방을 위해 끊임없이 일하셨는데 안식일에도 사람을 고쳐주심으로써 안식일은 당신의 날이며 인간은 하느님과 서로에게 헌신하는 날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세상을 풍요롭게 하고 변화시키려는 인간의 활동은 결국 세상 질서를 만드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 됩니다(259-262항 참조).

 

노동은 또한 구원의 도구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과 일치하여 노동의 수고를 견디는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 아드님의 구원 활동에 협력하는 것이며, 그들이 부름 받고 있는 노동을 통하여 날마다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노동은 성화의 한 수단이며 세상사에 그리스도의 정신을 불어넣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노동의 과정에서 자신의 자유를 통해 책임 있게 행동할 때, 눈에 보이는 세계의 질서를 만드시는 창조주 하느님을 만나고 따르는 것이 되며, 그 분이 주신 능력에 아주 밀접하게 관계 맺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262-263항). 

 

노동은 또한 피할 수 없는 인간 조건의 필수적 부분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도 일하지 않고 타인에게 폐를 끼치며 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2테살3,6-12참조). 바오로 사도는 “남에게 신세지는 일 없이”(2테살 4,12) 자기 노동의 열매를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 ‘연대’를 실천할 수 있게 직접 노동을 하는 것을 장려합니다.

 

또한 야고보 성인은 불의에 짓밟힌 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합니다. “보십시오, 그대들의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곡식을 거두어들인 일꾼들의 아우성이 만군의 주님 귀에 들어갔습니다”(야고 5,4).

 

 

자신의 노동이 하느님 뜻에 맞는지 늘 살펴야

 

교회의 교부들은 노동을 ‘노예의 일’이 아니라 언제나 ‘인간의 일’임을 간주하며, 다양한 형태의 모든 노동을 존중합니다. 노동을 통해 인간은 하느님과 함께 세상을 다스리며  자신과 타인에게 유익한 것을 성취합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우리가 인간 존재에 해로운 ‘게으름’에서 벗어나 몸과 정신에 유익한 ‘활동’ 또는 ‘노동’을 통해 자신과 가난한 이웃을 받아들이고 ‘창조와 선행’을 계속 하라고 권고하였습니다.

 

성 바실리오는 우리의 노동이 자신 뿐 아니라 가난한 이웃들을 보살피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아들이기 위한 것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성 암브로시오는 “모든 노동자는 그리스도의 손이 되어 창조와 선행을 계속해 나간다”고 말했습니다(265항). 성 이레네오는 인간은 하느님의 솜씨와 지혜를 나누어 받았기에 자신의 노동으로 하느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피조물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고 하였고, 성 베네딕토는 “기도하고 일하라!”는 말로 노동이 종교적인 요소와 관련되어 있음을 표현했습니다. “종교적 요소는 인간 활동에 활기를 불어넣는 구원의 영성을 부여”하고, 노동과 종교의 이런 관계는 “인간 활동과 하느님 섭리의 활동 사이에 있는 신비롭고도 실제적인 결합”을 보여줍니다(256항).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인간 본질을 구성하는 노동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귀족들은 노동을 ‘노예의 일’로 여겼고, 가난한 노동자들의 권리를 존중하기보다는 무시하고 노동자로 사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의 존엄성과 노동자들의 인권을 강력하게 제기한 레오13세의 회칙 <새로운 사태>는 산업혁명 이후 사용자와 노동자들 간의 갈등이 극도로 심각해진 현대 사회에 예언자적인 목소리였습니다.

 

“교회는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처지와 가난이 하느님 앞에 결코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르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모범을 보이시어 이 진리를 확인하셨다. 그분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부유하셨지만 가난하게 되셨고’,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하느님 자신이지만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시고 사람들에게 그렇게 인정받기를 원하셨다. 더욱이 그분은 노동하심으로써 생애의 대부분을 보내시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셨다”(새로운 사태 17항.)

 

성경과 교부들의 가르침에 비추어볼 때 우리는 누구나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맡겨주신 세상을 돌보고 땀을 흘려 일함으로써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키우고 완성해 가는 ‘노동자’입니다. 인간 노동에는 영적인 차원이 있어서 창조 때부터 일하시는 하느님의 활동에 협력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길이며 영원한 생명을 지향하는 종교적 행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이 하는 ‘활동’ 혹은 ‘노동’이 하느님의 뜻에 맞는지 늘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노동이나 노동자를 폄하하는 세태에 강력하게 대항하면서, 특히 권력이나 자본의 행포 때문에 자신의 권리를 침해당하는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3년 11월호, 박정우 후고(신부, 가톨릭대학교 종교사회학 교수)]

 

 

[복음살이] 노동의 영성 (2)

 

 

1981년 9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레오 13세의 <새로운 사태> 반포 90주년을 기념하여 자신의 첫 번째 사회회칙인 <노동하는 인간>을 반포하였습니다. 교황은 동유럽 폴란드 출신이기에 사회주의 국가들의 상황은 물론 제3세계 개발도상국가들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고, 스스로도 청년 시절 육체노동을 개인적으로 체험했으므로, 이전 사회 회칙보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구체적인 현실에서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노동 현실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교황은 노동에 대한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성찰을 전개합니다.

 

이 회칙에서 교황은 노동은 인류가 온 땅에 퍼져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창세기의 표현을 들어 인간 노동은 “인간의 지상 실존에 있어 근본적인 차원이라고 확신”(4항)하면서, 모든 인간은 노동을 통해 창조주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그는 노동이 ‘객관적 의미’와 ‘주관적 의미’를 지닌다며 두 가지 차원으로 구분합니다. 객관적 의미에서의 노동은 땅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사용하는 인간의 활동, 자원, 도구, 기술의 총체를 말합니다 (5항). 주관적 의미에서의 노동은 인격체로서의 인간이 노동의 주체가 되어 이성적 방법과 자신의 결정을 통해 완성을 이루어가는 소명으로서의 활동을 말합니다. 노동의 윤리적 본질은 바로 인간이 인격체이며 자신에 대해 결정하는 주체라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황은 여기에서 노동의 가치가 부여되는 것이며, “노동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이 ‘노동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지적합니다. 따라서 아무리 보잘 것 없는 노동일지라도 “노동의 목적은 항상 인간”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6항). 노동의 주관적 차원은 객관적 차원에 우선해야 하며, 인간보다 노동 활동 자체와 사용된 기술이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면 인간의 존엄을 해치는 것이 됩니다. 특히 교황은 산업 시대에 들어와서 여러 가지 사조들, 특히 인간 노동을 “비인격적인 힘”이나 “재화 생산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취급”하는 것을 경계합니다(7항).

 

 

“노동의 목적은 항상 인간”을 지향

 

요한 바오로 2세는 10년 후인 1991년에 반포한 <백주년>에서 노동이 고유한 사회적 차원을 지닌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개인의 노동이 다른 사람의 노동과 관련된다는 것입니다. “노동은 다른 이들과 더불어 일하는 것이고, 다른 이들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며, 다른 누군가를 위하여 무언가를 하는 것이다”(31항). 인간은 스스로 땀을 흘려 취득한 결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권리가 있지만, 하느님께서 모든 인류에게 땅을 주시어 모든 구성원들의 생계를 유지하게 하셨다는 ‘지상 재화의 보편적 목적’을 항상 고려하여 다른 이들과 협력하고 타인의 욕구에도 민감할 때 노동이 더욱 풍요로워진다는 것입니다(31항). 따라서 사회는 노동의 열매를 적절하게 교환하고, 지식과 자본과 노동이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유기적인 조직체가 되어야 하며, 노동은 법적인 질서로 보호받아야 합니다(간추린 사회교리 273항). 

 

가톨릭 사회교리는 레오 13세의 회칙 <새로운 사태>에서부터 노동과 자본의 관계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언급하며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로서 서로의 권리를 존중하고 화합을 이루도록 권고해왔습니다. 레오13세는 자본과 노동의 상호보완을 말하면서 “자본은 노동 없이 있을 수 없고 노동은 자본 없이 있을 수 없다”고 선언하였습니다(14항). 또한 하느님은 만민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 아무런 차별이 없이 동등하며, 특히 인간 존엄성을 부당하게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였습니다(30항).  

 

요한바오로 2세는 <노동하는 인간>에서 노동과 자본의 상호 보완성을 말하면서도 자본에 대한 노동의 우위를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선 교회가 항상 가르쳐왔던 원칙, 즉 노동이 자본보다 우위에 있다는 원칙을 무엇보다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생산 과정에서 노동은 항상 주요 동인(Efficient Cause)이 되지만, 생산 수단의 집적인 자본은 다만 하나의 도구 또는 도구인이 될 뿐이다. 이 원칙은 인간의 역사적 체험의 총체에서 얻은 명백한 진리이다”(12항).

 

 

인간의 노동은 도구인 자본보다 우선

 

노동은 인간의 권리이며 동시에 의무입니다. 창조주께서 노동을 명령하셨기 때문이기도 하고, 인간이 자신의 인성을 완성시키기 위해 필요하며, 자신의 가족, 사회, 인류를 포함하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요청되는 도덕적 의무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닮은 존재로서 자신의 노동을 통해 땅의 주인이 되고, 그들의 원형이신 창조주의 모습을 드러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이처럼 노동은 노동의 주체인 인간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고, 인간은 노동을 통해 인간의 생활을 풍부하고 하고 자신을 완성하기에 하나의 도구인 자본보다 우선하는 가치를 지닙니다.  노동은 비록 노고가 따른다고 해도 “철저하게 긍정적이고 창조적이며, 교육적이고 가치 있는” 것이며 인간은 노동을 통해 성장하고 자신을 완성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노동법이나 노동 규약 등에서 다루는 인권에 대한 판단에서도 이러한 노동 개념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11항). 

 

더구나 생산 수단을 포함하여 경제적인 생산의 바탕이 되는 부와 자연 자원 역시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에 의해 마련된 선물이 인간의 노동에 의해 발견되고 발굴되는 것이므로, 인간 노동에는 창조의 신비가 처음부터 작용함을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모든 자본의 수단 역시 “인간의 노동이 이룬 역사적 유산의 결과”이며, 이런 의미에서 자본에 대한 인간 노동의 우위성이 더욱 확실히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현대 기술 발전의 시대에서도 모든 인간은 “생산 과정에 있어서 진정하고도 유효한 주체”이며, “모든 도구는 아무리 완전하다 해도 그것은 단지 인간의 노동에 종속되는 도구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교황은 “생산 과정에 있어서의 인간의 우위, 즉 사물에 대한 인간의 우위성”이라는 진리를 교회가 남긴 유산으로서 강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12항).  

 

과거 노동과 자본의 관계는 적대적 특징을 보여 왔고 사회 경제적 변화에 따라 새로운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자본과 노동의 대립 원인은 주로 기업주들이 최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노동에 대해 가능한 한 최저 임금을 책정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전통적인 저임금 노동, 노동자 착취 뿐 아니라 새롭고 미묘한 형태의 노동 착취가 생겨나서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현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이 소유권과 경영, 이익에도 참여하도록 권장

 

교회는 이러한 노동과 자본의 관계를 개선시키기 위해 노동자들이 소유권과 경영, 이익에도 참여하도록 권장합니다. 노동자들은 “경제, 사회, 문화적인 목적을 지닌 광범위한 중간 집단을 형성”하여 자본과 관련을 맺음으로써 자신도 공동 소유자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노동헌장 14항). 사목헌장에서도 생산 과정에서 노동의 적절한 위치를 평가하고 여러 구체적인 상황에서 노동의 주관성에 부합하는 참여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이런 인식이 자리 잡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9항).

 

이러한 교회의 가르침은 한국 현실에서 너무나 거리가 먼 이야기로 들립니다. 한국의 자본 중에는 노동을 한낱 생산의 수단으로 여기며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부품처럼 취급하는 회사들이 적지 않습니다. 2012년 3월 8일 등산화, 아웃도어 전문브랜드인 k2코리아는 생산직 93명 전원에 대해 정리해고 통보를 하였습니다. 2010년 순이익 450억, 2011년 매출액은 5000억 원이 넘는 이 회사는 10여 년 넘게 흑자를 내는 기업이었는데, 인도네시아 공장을 만들어서 더 싼 노동력으로 이익을 더 늘리기 위해 그동안 저임금과 악조건 속에서도 열심히 일하여 회사를 키워왔던 한국의 노동자들을 정리해고 한 것입니다. 결국 노조와의 협상 끝에 신발 A/S 센터로 옮겨 고용보장을 해주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지만 노동의 존엄성에 대한 자본의 저열한 인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11년 1월 한진중공업이 영도조선소에서 생산직 172명에 대한 정리해고를 실시한 것 역시 비슷한 양상이었습니다. 필리핀에 세운 조선소의 싼 노동력을 이용하기 위해 선박 수주를 몰아주고 한국에는 물량이 없다는 이유로 노동자들을 정리해고 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회사는 그 해 주주들에게는 174억 원의 주식 배당을 결정했고, 사내 이사들은 고액의 봉급을 챙겨가서 더욱 불신을 가중시켰습니다.

 

노동의 존엄성, 자본에 대한 노동의 우위라는 사회교리의 확산이 한국 사회에는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는 현실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3년 12월호, 박정우 후고(신부, 가톨릭대학교 종교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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