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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사목] 전통 가정과 가톨릭 가정2-3: 부부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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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7-07 ㅣ No.1106

[전통 가정과 가톨릭 가정] (2) 부부의 사랑 (상)


혼인의례에 담긴 ‘예’와 ‘도리’는 결혼생활 준비하는 마음가짐

 

 

‘부부가 있은 뒤에야 부자가 있으니, 부부는 사람 된 도리의 시초이다. 그러므로 옛날의 성인이 혼인하는 예를 만들어 그 일을 중하게 한 것이다.’(「계몽편」〈인편〉)

 

혼인은 일정한 의례를 통해 남녀의 결합을 사회적으로 공인받는 일이었으므로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라 하였다. 남녀가 혼인으로써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아 가정공동체를 만드니 그러한 표현이 지당하였다. 혼례를 올린 부부는 서로의 부족한 면을 사랑으로 채워가는 상호보완적 존재로, 새 생명을 만드는 온전한 존재로 거듭 나는 계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예로부터 우스갯소리로 귀신도 등급이 있다고 했다. 가장 한이 맺힌 귀신이 바로 혼인하지 못하고 죽은 손말명(처녀귀신)이나 몽달귀(총각귀신)이라는 말에서도 부부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혼인의례의 시원은 우리의 건국신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조선 단군신화의 곰은 어두운 동굴에서 삼칠일간 쑥과 마늘만을 먹으며 햇빛을 보지 않고 금기하였기에 여인으로 재생할 수 있었다. 결국 웅녀는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과 혼인해 아들을 낳아 단군왕검이라 불렀다. 또한 고구려 주몽신화의 유화는 하늘에서 내려온 해모수를 만나 정을 나눈 뒤 어두운 방에 격리되었다. 그러자 햇빛이 유화의 복부에 비쳐 그로 인하여 잉태하여 주몽을 낳았다. 신화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처음에는 불완전하고 미미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공히 혼인의례에 수반되는 시련을 이겨냈기에 신화주인공의 배필이자 건국시조를 낳은 신모가 될 수 있었다. 

 

우리의 전통적인 혼인의례에서는 신랑이 초례(醮禮)를 올리기 위해 신부 집을 찾아갔다. 혼례 때의 대례상 위에는 신랑과 신부의 금슬을 의미하는 청색과 홍색으로 꾸민 촛대를 세웠다. 또한 굳은 절개를 지키라는 뜻에서 소나무나 대나무 화병을 놓았다.

 

그리고 부부의 복을 비는 밤, 풍요로움을 비는 쌀, 수명을 비는 대추를 진설하였다. 그 곁에는 흰떡을 용 모양으로 만든 용떡을 놓아 출세를 빌었다. 닭도 올려 자손이 많기를 빌었다. 신랑은 혼례를 마친 뒤 신부 집에서 첫날밤을 보내고 나서 신부를 집으로 데려왔다. 신부는 시부모를 비롯한 집안 어른들에게 차례로 인사하고, 조상을 모신 사당에 참배하였다. 다소 복잡하고 어려운 절차마다 부부의 사랑에 대한 소중한 뜻이 담겨 있었고, 양쪽 집안어른들과의 관계에 대한 예법이 있었다. 

 

그럼 오늘날의 혼인의례는 어떠한가. 황금만능주의 시대에 걸맞게 혼례 역시 물질적·외부적 조건이 정신적·내부적 조건보다 앞서고 있는 듯하다. 신랑은 부부가 거처할 크고 넓은 집을 지니고 있어야 하고, 신부는 그에 걸맞은 호화롭고 풍성한 혼수를 준비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화려한 예식장에서 최고급의 결혼 예복을 입고 하객들에게 고가의 음식을 내놓아야 하며, 신혼여행은 해외의 유명한 관광지로 다녀와야 남부끄럽지 않다고 여기는 분위기가 만연하다. 새 생명을 잉태하고 단란한 가정공동체를 꾸리기 위한 마음가짐에 앞서 명품과 이벤트와 외양을 갖추는 데 전력투구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남에게 보란 듯이 살아갈 만한 경제적인 여유가 없으면 혼인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혼인해서도 안 된다는 생각마저 넓게 퍼져 있는 듯하다. 결혼적령기가 돼도 혼인하지 않고, 설령 혼인한다 하더라도 초혼연령이 남녀 공히 30세를 넘기고 있는 현상이 이를 대변한다. 

 

결혼적령기의 남녀는 혼인하여 자식을 낳아 단란한 가정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자부심과 책임감이 있는지 스스로 물을 일이다. 모든 통과의례가 그러하듯이 혼인의례에 따르는 시련을 이겨낼 각오가 되어있는지부터 자문해 보아야 한다. 혼인하고, 출산하고, 가정을 이끌어가는 데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고난과 장애를 감내할 의향이 있는지 되짚어봐야 하는 것이다. 혼인은 달콤하고 즐겁기만 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와 환상이 있기에 부부가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맞닥뜨려야 하는 시련 앞에서 쉽게 좌절하는 것이 아닐까.

 

아울러 집안과 집안이 만나 엄중한 예를 갖추어 혼인의례를 치렀던 예전과 달리, 혼인 당사자의 의사가 무엇보다 중요시된 오늘의 현실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혼인 당사자인 남녀가 사랑하면 그만이라고 여기기에 귀찮고 거추장스러워 보이는 예법이 생략되거나 뒷전으로 미뤄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의례에 수반되는 복잡하고 어려운 형식과 절차를 무시하기에 그에 따르는 예법도 대충 넘겨버리고 만다. 혼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예의와 도리를 간과하였기에 배우자와 그 집안에 대해 예의를 갖추지 않게 되는 것이다. 

 

‘남편 된 사람은 자기 아내를 자기 몸같이 사랑하고, 아내 된 사람은 자기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에페 5,33)라는 말씀이야말로 혼례를 앞둔 남녀가 우선 지녀야 할 마음가짐이다. 집과 혼수와 결혼예복, 예식장과 접대음식과 신혼여행지에 앞서 준비해야 하고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이 바로 부부의 사랑하는 마음이다. 상호 의존적이고 보완적인 관계 속에서 성가정을 본받아 온전한 가정공동체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부부의 진실한 마음 말이다.

 

김문태 교수(힐라리오) - 서울디지털대학교 교양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우리의 전통문화가 살아 숨 쉬는 현장과 강단에서 고전문학과 구비문학을 연구해왔으며, 중국선교답사기인 「둥베이는 말한다」등 다수의 저서를 펴냈다. [가톨릭신문, 2018년 7월 8일, 김문태 교수]

 

 

[전통 가정과 가톨릭 가정] (3) 부부의 사랑 (하)


남편은 아내 하기 나름, 아내 역시 남편 하기 나름

 

 

인간은 관계적 존재이며, 부부 역시 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는 곧 인간이 상대적인 존재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진 부인은 남편을 귀하게 하고, 간악한 아내는 남편을 천하게 한다’(「명심보감」 ‘부행편’)는 말이 있다. 남편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아내가 변하듯이 아내의 태도에 따라 남편의 위상도 달라지는 것이다. 어지거나 악한 아내는 남편에게 그렇게 대할 것이고, 그 영향으로 자연히 남편이 귀하거나 천박하게 된다. 남편은 아내의 태도에 따라 응대할 것이고, 주위 사람들 역시 그런 아내의 태도를 보며 그 남편을 평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치는 입장을 바꾸어도 마찬가지다.

 

부부는 협력자의 관계다. 가정의 대소사를 서로 의논하여 원만하게 해결하는 한편, 상대방의 단점과 결점을 메워주는 상생의 관계인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보면 부부는 함께 도를 닦는 벗인 도반과 같다. 그래서 부부는 닮는다고 하는 모양이다. 함께 한 공간에서 지내다 보니 식성과 차림새가 비슷해지고, 심지어 생각과 말과 행위마저 닮아간다. 결혼하여 함께 오래 산 부부를 마치 오누이와 같다고 하는 말이 그르지 않다. 부부는 같은 향기와 냄새를 뿜어내는 것이다.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말이다. 하느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던 때의 일이 이와 다르지 않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창세 2,18-24)

 

아담과 하와는 협력자의 관계로 세상에 태어났다. 우월적이고 종속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 대등한 존재로 이 땅에 섰던 것이다.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살아가는 존재이므로 남편은 아내가 하기 나름이고, 아내 역시 남편이 하기 나름이다. 서로 기대고 사는 부부는 상대방의 태도에 따라 긍정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변화해가는 것이다.

 

부부가 긍정적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배우자에 대한 신뢰가 우선이다. 상대방을 믿을 수 있을 때 진심으로 사랑할 수도 있고, 공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부부간의 신뢰가 깨지는 순간, 공연히 상대방을 의심하고 증오하는 병리적 현상에 빠지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공경은커녕 더 이상의 애정도 있을 수 없다. 부부의 협력과 신뢰는 혼인 불가해소성(마태 19,5-6)의 전제 조건이 된다.

 

부부는 정신적인 교감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관계를 통해 사랑을 나눈다. 그러므로 자녀는 부부 사랑의 결실이다. 부부는 새 생명을 탄생시킨다는 점에서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한다. 부부의 사랑만큼이나 자녀출산이 중요한 까닭이다. 부부에게 있어서 자녀의 위상은 태교에서 잘 드러난다. 태교는 산모가 태아에게 좋은 감화를 주기 위해 행실을 바르게 하는 일이다. 속설에 태어날 아기의 피부가 닭살처럼 될까 우려해서 닭고기를 먹지 않고, 손가락이나 발가락이 붙어 태어날까 걱정해서 오리고기를 먹지 않는단다. 이처럼 유사한 행위가 유사한 결과를 부른다는 유감주술적인 발상에서 나온 터무니없는 생각도 장차 태어날 아기에 대한 애정 앞에서는 당당하기만 하다. 태임의 태교가 눈길을 끈다.

 

‘태임은 문왕의 어머니이다. 임신을 한 뒤에는 눈으로 악한 빛을 보지 않고, 귀로 음란한 소리를 듣지 않고, 입으로 오만한 말을 내지 않았다. 옛날에는 부인이 아이를 임신하면, 몸을 기울여 자지 않으며, 가장자리에 앉지 않으며, 비뚤게 서지 않으며, 사특한 맛을 먹지 않으며, 반듯하게 자르지 않으면 먹지 않으며,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았다. 이렇게 하면 자식의 형용이 단정하고 재주가 남보다 뛰어나게 된다.’(「삼강행실도」 ‘열녀’)

 

진정한 태교는 부부가 바르게 생활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선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해야 한다. 그리고 선한 사람을 만나 정당한 일에 대해 대화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태아가 그 영향을 받아 바른 성품을 지니고 태어나게 된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처럼 순수하고 흠 없는, 단정하고 총명한 새 생명이 탄생하는 것이다.

 

오늘의 현실은 어떠한가. 혼인과 출산은 저하되는 반면 이혼과 낙태는 증가하고 있다. 날이 갈수록 혼인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정을 꾸렸다 하더라도 자녀를 낳지 않겠다는 추세다. 부부는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하는 조력자라는 사실이 무색해진다. 진정한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되새겨볼 대목이다. ‘혼인제도 자체와 부부 사랑은 그 본질적 특성으로 자녀의 출산과 교육을 지향하며, 그로써 마치 절정에 이르러 월계관을 쓰는 것과 같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652항)는 교회의 가르침이 오늘도 새롭다. [가톨릭신문, 2018년 7월 15일, 김문태 교수(힐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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