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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인문학 강좌: 종교와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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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10-04 ㅣ No.227

김문태 교수의 인문학 강좌 (1) 종교와 인간

 

 

종교는 초인간적ㆍ초자연적인 힘에 대해 인간이 경외하고 숭배하고 신앙하여 선악을 권계하고 행복을 얻고자 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믿음을 지닌 이들이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 초월적인 존재를 숭앙하는 의례를 행하는 한편, 신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기를 권고한다. 흥미로운 것은 영성적인 삶을 추구하는 종교적인 인간은 신의 존재에 대한 탐구뿐만 아니라 인간이 누구인가에 대한 성찰을 끊임없이 해왔다는 점이다. 종교의 근원적 속성인 영성은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교에서는 인간만이 지닌 본성으로 인의예지 사단을 들고 있다. ‘맹자’에 따르면 “사람은 모두 차마 어찌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측은해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人皆有不忍人之心 無惻隱之心非人也)”,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니 부끄럽고 미운 마음은 의로움의 실마리이다.(無羞惡之心非人也 羞惡之心義之端也)”,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니 사양하는 마음은 예의의 실마리이다.(無辭讓之心非人也 辭讓之心禮之端也)”,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니 시비를 가리는 마음은 지혜의 실마리이다.(無是非之心非人也 是非之心智之端也)”라고 한다. 인의예지야말로 사람이 사람인 까닭인 것이다. 이로써 본다면 인간은 하늘이 내려준 본성을 지니고 태어난 온전한 존재이다.

불교에서는 일체의 중생이 부처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설법한다. 이러한 여래성(如來性)에 의하면 인간은 누구나 자가 성불(成佛)할 수 있는 가능태이다. 중생도 불성을 지니고 있으나 미망에 가려져 나타나지 않을 뿐이며, 이 미망을 없애면 자연히 불성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열반경’에서 “일체의 중생은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고 한 것이 바로 그러하다. 이에 따르면 심지어 개에게도 불성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노력 여하에 따라 열반의 경지에 들어 부처가 될 수 있는 귀한 존재인 것이다. 불자들이 상대방에게 성불하라고 덕담하고, 상대방을 높여 불도를 닦아 보리를 구하고 뭇 중생을 교화하여 성인이 된 '보살'이라고 칭하는 것이 마땅한 까닭이다. 불성을 지니고 있는 인간을 마치 부처처럼 대접하는 큰마음이다.

이 땅에서 발원한 천도교의 사상을 한마디로 집약하면 인내천(人乃天)이다. ‘동경대전’에 의하면 “한울님의 마음이 곧 사람의 마음(天心卽人心)”이다. 인간은 곧 하늘과 같은 존재로서 천도교에서 칭하는 한울님인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가슴 속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기에 사람 섬기기를 마치 한울님과 같이 해야 한다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근거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경지에서는 인간이 모두 평등하고, 근본적으로 귀천이 있을 수 없게 된다. 결국 한울님과 사람과 자연이 모두 공경의 대상으로서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지(敬地)의 넓은 마음을 펼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궁극적인 존재와 동일한 대접을 받으니 그 존귀함이 그야말로 하늘을 찌르고도 남는다.

한편 그리스도교에서의 인간은 하느님이 직접 빚어 숨결을 불어넣은 존재이다. ‘성경’에는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고 명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명은 누구를 막론하고 고귀한 대접을 받아야 하며, 어느 누구도 그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 심지어 자신의 생명마저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어 자살이 대죄(大罪) 또는 사죄(死罪)로 규정되고 있다. 생명을 거스르는 일은 하느님의 뜻을 분명히 인식하면서 완전한 자유의지로 하느님을 거역하고 범한 큰 죄이자 생명과 은혜의 하느님을 배반하는 행위인 것이다. 오늘날 독버섯처럼 번지고 있는 죽음의 문화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이다.

또한 그리스도교에서의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Imago Dei)대로 창조된 존재이다. ‘성경’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세 1,26-27)고 기록하고 있다. 하느님의 형상을 본받은 인간은 그 자체로 존엄한 존재이며, 그에 합당한 대접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타인을 ‘주님(Domine)’이라고 부르고, 타인을 주님 대하듯 해야 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정곡을 찌른다.

대부분의 종교에서 본 인간은 존귀한 존재이다. 인간은 누구나 그 종교에서 숭앙하는 초월자의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 자아에 대한 성찰과 행복을 추구하고자 하는 바람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매슬로(A. H. Maslow)는 하위 욕구가 충족되어야 상위 욕구가 출현한다는 욕구단계설를 주장한 바 있다. 1단계 생리적 욕구, 2단계 안전의 욕구, 3단계 소속감의 욕구, 4단계 존중의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 비로소 5단계인 자아실현의 욕구가 생긴다는 것이다. 인간의 최상위 욕구인 자아실현은 바로 자신이 신을 닮은 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경우, 자신을 비롯한 인간은 모두 하느님이 당신의 모습대로 직접 만들어 생명을 준 존엄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그리고 그러한 인식에 합당하게 살 때 진정한 자아실현에 따른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나서는 동자를 묘사한 사찰 대웅전 벽의 심우도(尋牛圖)가 새롭다. 방만한 사이에 사라진 누런 소, 이어 밧줄을 들고 소로 형상화된 자아를 찾아 나서서 마침내 서방정토를 상징하는 흰 소를 타고 돌아오는 동자 그림이 절묘하다.

또한 대부분의 종교에서 본 인간은 서로 평등한 존재이다. 인간은 누구나 신이 상하귀천의 구별 없이 공평무사하게 창조한 피조물이자 신으로부터 인격을 부여받은 개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1863년 노예 해방의 주역이었던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오늘날까지 위대한 인물로 존경받는 연원이 여기에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그보다 앞선 시기에 인간 불평등의 극치인 노비제도를 철폐하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조선의 정조는 영조의 뒤를 이어 노비제 폐지에 전력을 다해 마침내 승하 직후인 1801년에 공노비를 비롯한 일부 사노비 66,067구를 면천(免賤)하게 하였다. 인간의 평등권에 대한 지극히 순수한 인간애의 발로라 아니 할 수 없다. 오늘날 부귀빈천(富貴貧賤)에 의해 사람을 평가하는 무소불위의 물질만능적ㆍ권력만능적 세태가 부끄럽다.

결국 신 앞에서 존엄하고 평등한 인간은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누구나 잠재적인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하며, 자유의지에 의해 가치를 선택할 수 있도록 존중받아야 한다. 나 자신이 궁극자 내지 초월자로부터 특별한 소명을 받은 귀한 존재이므로 내 곁의 가족친지와 이웃도, 저 멀리 있는 타 민족과 타 국가의 이방인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인류의 공존과 평화, 그리고 참된 행복이 실현될 것이다. 교회의 가르침이 새롭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 영혼과 지성과 의지를 지닌 인간은 임신되는 순간부터 이미 하느님을 향하고, 영원한 행복을 향하게 되어 있다. 인간은 진리와 선을 탐구하며 사랑함으로써 자신의 완성을 추구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702, 1711항)

[평신도, 제43호(2014년 봄), 김문태 힐라리오(가톨릭대 ELP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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