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 (일)
(홍) 성령 강림 대축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교의신학ㅣ교부학

[성령] 성령과 기: 성사 안에서의 성령의 활동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1-10 ㅣ No.219

성령과 기(氣) : 성사 안에서의 성령의 활동 (1)

 

 

성령께서는 교회의 성사들 안에서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시는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성사신학에서는 성령의 역할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소홀함을 보였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성사의 원리가 되신다. 그분은 성사 안에서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이신 것이다. 즉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은총이 사람에게 내려오고, 그분 안에서 사람의 기도가 하느님께 도달하게 된다. 그러기에 교회는 성령의 임재를 비는 기도문인 ‘성령청원기도(Epiclesis)’를 통하여 성령께서 성사 안에서 활동하시기를 청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성사론은 성령께서 성사들 안에서 어떻게 활동하시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공의회 이전과 비교하여 여러 가지로 풍부하게 성찰하고 있다.

 

 

1. 성사의 원천이신 성령

 

가. 성사의 원리

 

‘성사’는 그리스도의 성사이고 동시에 성령의 성사이다.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항상 교회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교회 안에 성사를 세우시고, 그리하여 교회로 하여금 당신의 현존을 경축하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사 안에서 인간에게 향하시고, 그럼으로써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의 거룩하게 하는 통교를 항상 새롭게 일으키신다. 성령께서는 전례와 성사 안에서 활동하시고(5장 1항 참조), 전례와 성사들을 다스리시며, 전례와 성사들 안에서 당신의 선물을 주신다. 그분께서는 성사들의 힘의 원천이요 근원이 되실 뿐 아니라, 모든 성사적인 행위들의 기초가 되는 원리이시다. 그러므로 모든 성사는 ‘성령의 성사’인 것이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성사들 안에서의 성령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 신비를 성사적으로 베푸실 때에도 구원 경륜의 다른 때와 같은 방식으로 일하신다. 성령께서는 교회가 자기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준비시키시고, 믿는 회중에게 그리스도를 상기시키고 나타내 주시며, 당신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신비를 현존하게 하고 실현하신다. 그리고 끝으로 친교의 성령께서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명에 결합시키신다.”(1092항)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사람을 성사들 안에서 사로잡으시고, 그를 통해서 사람을 그리스도와의 친교에로 이끌어 가신다. 

 

나. 성사 안에서의 은총의 중개자

 

성사는 그를 통해 하느님의 은총이 중재되는 교회의 전례적인 표징이다. 왜냐하면 성사들의 내적인 작용은 인간을 죄로부터 정화하고 은총을 통하여 조명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은총, 바로 그 안에서 아버지(성부)로, 아들(성자)로 그리고 성령으로 사람들에게 구원을 선사하시는 사랑의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활동하신다. 트리엔트 공의회에 따르면 성사는 보이지 않는 은총, 곧 성령의 은총의 표지이다. 말하자면 이 성사 안에서 보이는 표지를 통해서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은총이 분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놀라운 일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니, 그분은 교회의 모든 성사 안에서 구원을 주는 은총을 선사하신다. “[그런 까닭에] 성사 혹은 말씀 안에서의 은총의 작용은 영으로 말미암은 작용이며, 성령의 내적인 파견을 부르는 것이다.”

 

성사적인 전례 안에서 교회는 하느님께 축복을 청하는데, 이는 하느님께서 그 청하는 이를 성령께서 이끄시도록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의 성사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사람에게 내려오며, 사람의 기도가 성령 안에서 성자를 통하여 성부께로 올라간다. 성사는 인간을 하느님과 연결한다. 즉 성령을 통하여 교회에 속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교회가 베푸는 성사들을 통하여 성자와 성부와 일치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사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대화이고 사귐이다.

 

다. 성사 안에서의 성령청원기도

 

교회는 성령의 작용을 소위 ‘성령청원기도(Epiclesis)’로 요청한다. 이는 성사 집전에 있어서 성령의 임재를 비는 최고의 기도형태이며, 삼위일체적인 기도를 드러내는 교의의 전례적인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기도문은 성부께 향해진 기도로, 성부께서 아들을 통하여 성령을 보내 주시기를 청하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성령청원기도는 성령의 활동만을 청하지 않고, 성부·성자·성령이라는 하느님의 모든 위격들의 공통된 활동을 청하는 것이다. 

 

“성령청원기도는, 모든 전례적인 행위에서 신적인 생명의 충만함에 대한 인간의 참여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기도이며,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나오는 기도문으로서, 교회의 거룩한 행위들에 대한 인간의 시공간적인 참여를 가져오는 기도이다.” 

 

가톨릭교회교리서의 설명에 따르면, 성체성사에 있어서의 성령청원기도는 봉헌물의 변화와 관련된 것일 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변화와도 관련되는 것이다. :

 

“성령청원기도(Epiclesis)는 사제가 성부께, 성화하시는 영을 보내시어 봉헌 제물을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되게 하시고 또 신자들이 그 살과 피를 받아 모심으로써 그들 스스로 하느님께 드리는 산 제물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간청하는 기도이다.”(1105항) 

 

결국 모든 성사 안에 성령께서 새로이 임하시고 활동하신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성사는 나름대로 고유한 또 하나의 새로운 성령강림이라 할 수 있겠다.

 

 

2. 개별 성사들 안에서의 성령의 활동

 

성령께서는 성사들 안에서 활동하신다. 각각의 성사가 보이는 성령론적인 국면은 다음과 같다.

 

가. 세례성사 : 성령을 통해서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는 기초성사

 

* 영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교회의 일원이 됨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 

 

마태오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이 세례명령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함께 부르는 삼위일체적인 세례정식을 사용하고 있지만, 사실 처음에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베풀어지다가(사도 2,38 참조) 후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 곧 삼위의 이름으로 베풀어졌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서에서 보이는 예수님의 세례명령은 예수님 자신이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전통에서 유래하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방식은 어쨌거나 ‘세례’가 예수님의 부활 후에 초기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일반적으로 행하였던 교회의 기초성사였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신약성서 밖에서도 비슷한 의식들을 볼 수 있는데, 벌써 고대에 일종의 단체가입식이었던 물의 의식이 있었고, 또한 예수 시대의 유대교 안에서는 세례와 같이 여러 가지로 구원의 의미가 있는 행위들이 있었다. 이러한 의식들 가운데서 그리스도교의 세례는 무엇보다도 요한의 세례에서 유래하게 되었다. 즉 요한의 세례는 ‘죄의 용서와 회개를 위한 세례’(마르 1,4)였던 것이고, 예수님 스스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으니, 요한에게 받은 예수님의 세례는 당신 제자들과 초기 교회에 있어서 큰 의미를 지녔던 것이었다.(마르 1,9-11 참조)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베풀라는 사명을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리하여 그들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다.

 

한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세례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세례는 세례자 요한이 말한 것처럼 성령 안에서 베풀어지는 세례였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태 3,11)

 

부활하신 예수님의 선포와 연결되어 세례는 성령강림 이후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하여 베풀어졌는데, 바오로 사도는 성령 안에서의 세례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1코린 12,13)

 

성령께서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건설하시려고 세례를 통하여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 받아들이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물을 축성할 때에 (특히 부활성야에서 세례수를 축성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 성령의 능력이 물위에 임하시기를 청한다. 그래서 세례예식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을 함께 부른다. 이렇게 하여 세례를 통하여 사람은 교회의 일원이 된다. 그러므로 세례집전자는 크리스마 성유를 바르면서 이렇게 기도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전능하신 천주여, 주께서 이 형제 자매들의 죄를 사하시고,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게 하셨으니, 몸소 구원의 성유를 바르시어, 주의 백성이 된 이 형제 자매들로 하여금 사제이시요 예언자이시며 왕이신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살다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어른입교예식, 224항)

 

* 재생과 새 삶을 위한 성령의 오심

 

세례는 성령의 성사로서, “세례는 세례를 통하여 새로 태어난 모든 사람을 묶어주는 일치의 성사적 끈이 된다.”(일치교령 22항) 신약성서에 따르면, 세례를 통하여 성령께서 전달되시고, 죄가 사해지게 되며, 따라서 성령의 중재는 회개와 믿음과 용서와 더불어 세례의 본질적인 내용을 결정짓는다. :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 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사도 2,38)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통하여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고,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된다. ‘티토에게 보낸 서간’은 세례를 재생의 씻음과 성령 안에서의 쇄신으로 이해하며 성령의 파견과 전달에 따르는 의화를 말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 성령을 하느님께서는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의 은총으로 의롭게 되어,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따라 상속자가 되었습니다.”(3,5-7)

 

생명을 주시는 영이신 성령께서 사람을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나도록 하신다. 그러므로 세례는 성령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도록, 즉 성령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도록 은총을 선사하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의 새로운 삶에 대한 비슷한 이해는 세례성사의 예식문 안에도 나타나고 있는데, 세례수 축성 때에 드리는 세례집전자의 기도는 이러하다.

 

“주님, 주의 교회를 굽어보시고 이 교회 안에 세례의 샘을 솟아나게 하시고, 성령을 통하여 독생성자의 은총을 이 물에 부어주심으로써, 천주의 모습을 따라 창조된 사람으로 하여금 온갖 묵은 허물을 씻어버리고 물과 성령으로 새로이 태어나게 하소서.”(어른입교예식, 258항)

 

세례 안에서 이루어지며 재생으로 이끄는 그리스도인의 내적인 변화(회심) 역시 성령과의 만남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된다.

 

“내적인 변화 혹은 회심은 하느님의 영 나아가 하느님 자신과의 만남이다. 이러한 만남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선사하는 세례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세례자가 하느님께 자신을 개방할 때면 항상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세례자 안에 하느님께 향하는 움직임을 일으키시고, 또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성부를 향하여 살아가도록 힘을 주시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그를 흠숭과 사랑과 순종이 하나가 되어 있는 기도의 자세를 갖도록 이끄신다.”

 

*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날인(捺印) - 인호(印號)

 

세례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령의 파견과 전달은 아주 초기교회 때부터 ‘날인(捺印)’으로 이해되었다. 즉 교회는 성령께서 세례자에게 임하심을 일찍부터 세례자에 대한 성령의 날인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위한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게 되었을 때, 약속된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에페 1,13)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속량의 날을 위하여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에페 4,30)

 

“우리를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세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어 주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인장을 찍으시고 우리 마음 안에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습니다.”(2코린 1,21-22)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3세기 중엽에는 이단자가 받은 세례의 유효문제를, 이후에는 배교자들에 의해 주어진 성품성사의 유효성을 논하는 과정에서 인호교리가 나오게 되었고, 이는 피렌체 공의회(1439)와 트리엔트공의회(1545-1563)에서 확립되었다. 즉 유효하게 세례·견진·성품성사를 받은 신자들에게는 소멸되지 않는 영적인 표지가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세례자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영의 날인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하게 되며, 축성되고 날인된다는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를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세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어 주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인장을 찍으시고 우리 마음 안에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습니다.”(2코린 1,21-22) [월간 빛, 2006년 4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의신학 교수)]

 

 

성령과 기(氣) : 성사 안에서의 성령의 활동 (2)

 

 

나. 견진성사 : 성령을 파견하는 성사

 

* 영을 중재하는 성사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힘을 지니고”(루카 4,14) 당신의 공적인 활동을 시작하시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주시리라고 가르치신다.(루카 11,13 참조) 사도행전에서는 ‘물의 세례’와 안수라는 외적인 표지를 통해 하느님의 영이 임하시는 ‘성령의 세례’를 구별하여 전하고 있다.(8,12-17 참조) 하지만 이 성령의 세례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견진성사와는 다른 것이었다. 고대교회에서 중세초기까지는 아직도 고유한 견진성사가 따로 집전되지 않았는데, 그것은 이미 세례성사 안에 성령을 받게 하는 성사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독립적인 견진예식은 9세기가 되어서, 그러니까 유아세례가 일상화된 후에야 나타난다. 이러한 견진예식은 이제 세례예식 안에 표현되고 완성된 구원의 전망을 특별히 표현하는 것으로,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선사된 성령의 은혜로서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드러낸다. 이렇게 견진예식은 세례와 마찬가지로 분명하게,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구체적인 방식으로 “성령의 은혜로서의 성사”이다.

 

그러므로 견진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드러나게 오시고 파견되신다. 그래서 견진성사에서 집전자 주교는 견진자의 머리 위로 손을 펼치고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전능하신 하느님, 여기 있는 이 교우들을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게 하시고 죄에서 해방시키셨으니, 이 교우들에게 빠라끌리또 성령을 보내 주소서.”(견진예식, 25항)

 

*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날인됨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아들과 딸이 된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로마 8,14-16)

 

성령을 통하여 세례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그리스도인은, 이제 그 자녀임을 견진성사 안에서 성령의 은혜와 함께 날인 받는다. 그래서 견진예식에서 주교는 견진자의 이마에 크리스마 성유를 바르며 “성령 특은의 날인을 받으시오!”(견진예식, 27항) 라고 말한다. 또한 파견강복은 다음의 기도로 이루어진다.

 

“저희를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게 하시고 당신 자녀로 삼으신 전능하신 천주 성부께서는 저희에게 강복하시고, 저희를 아버지의 사랑으로 길이 지켜 주소서.”(견진예식, 33항)

 

* 성령 안에서 완전하게 교회의 일원이 됨

 

견진의 유래에 대한 사도행전의 보고는 견진성사를 의미 있게 하는 두 가지의 특별한 동기를 보여주고 있는데, 하나는 교회와의 더 밀접한 연결이고, 또 하나는 성령의 힘을 통한 강화(强化)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따르면, 견진성사는 그리스도인을 완전한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한다.

 

“견진성사로 신자들은 더욱 완전히 교회에 결합되며 성령의 특별한 힘을 받아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으로서 말과 행동으로 신앙을 전파하고 옹호하여야 할 더 무거운 의무를 진다.”(교회헌장 11항)

 

이를 위해서 예식을 마감하는 축복의 기도는 이렇게 바쳐진다.

 

“진리의 성령께서 교회 안에 머무실 것을 약속하신 독생 성자께서는, 저희에게 강복하시고, 당신 능력으로 굳세게 신앙을 증거하게 하소서. 사도들 마음에 사랑의 불을 놓으신 성령께서는 저희에게 강복하시고, 여기 함께 모인 저희를 기쁨이 충만한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소서.”(견진예식, 33항)

 

* 성령을 통하여 믿음이 강화됨

 

“견진은 신앙을 증거하는 성사이고, 카리스마(은사)를 충만하게 하는 성사이며, 영에 의해서 날인되어 그를 증거하는 이들이 하느님의 통치를 받아 세상에 파견되도록 하는 성사이며, 믿음을 강화하는 성사이다.”

 

견진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은 은총 안에서 성장하고 믿음 안에서 굳세게 된다. 도유와 안수는 견진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이 굳세어지고, 축복을 받고, 힘을 얻게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견진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 즉 기름부음을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파견에 더 효과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공적인 믿음의 증인들로 뽑히었고, 교회 안에서 함께 책임을 지는 사람으로 파견된다. 성령을 통하여 견진자에게 믿음과 그리스도교적인 생활을 위한 용기와 힘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 견진성사의 효과는 그 안에서 성령께서 성령강림 날에 사도들에게 주어진 것처럼 강화를 위해서, 즉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용감하게 고백할 수 있도록 굳세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다는 데에 있다.” 이러한 지향으로 새 견진자들을 위해서 다음의 기도들이 바쳐진다.

 

“성령의 특은으로 견진성사를 받은 우리 형제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주님, 새 견진자들이 신앙 안에 뿌리를 박고 사랑을 터전 삼아 일상생활 안에서 주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하소서.”(견진예식, 30항)

 

“하느님, 저희에게 행하신 업적을 완성하소서. 또한 신자들 마음 안에 성령의 은혜를 보존하시어, 신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세상 사람들에게 부끄러움 없이 증언하며, 사랑과 정성으로 그리스도의 명령을 완수하게 하소서.”(견진예식, 33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전능하신 하느님, 여기 있는 이 교우들에게 지혜와 깨달음의 성령과 의견과 굳셈의 성령과 지식과 효경의 성령을 보내 주시며, 주님을 두려워하는 경외심의 성령을 보내 주소서.”(견진예식, 25항)

 

다. 성체성사 : 교회 공동체를 위한 성령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성사

 

* 성령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성사

 

“성사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성사 중의 성사인 성체성사에서 가장 잘 알 수 있다.” - ‘성체성사’는 성사 중의 성사이고, 모든 성사의 어머니이다. 그리스도 친히 당신 몸과 피의 성체성사적인 봉헌을 이루시고, 모든 성체성사예식에 현존하시며, 또 스스로를 봉헌하신다.(전례헌장 47항 참조) 성체성사는 성령의 힘 안에서 성부께 드리는 그리스도의 봉헌이며, 또한 교회의 봉헌이다. 성체성사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은 당신의 거룩한 영, 신적인 영을 통하여 계시된다.

 

“간구하오니 성령의 힘으로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소서.”(미사통상문 감사기도 제2양식) - 성찬제정말씀 전에 바쳐지는 성령청원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성체성사 안에서의 그의 현존이 하느님의 영으로 충만하게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러므로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의 성사이며, 교회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힘 안에서 영광스럽게 되신 주님의 행위이다. 성령께서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항상 새롭게 인간에게 오시고, 선사되신다. 성령께서는 성체성사를 생기 있게 하고 그 성사에 생명을 주신다.

 

* 성령 안에서의 교회적인 친교의 축제

 

성체성사는 신자 개개인의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물론이고 모든 신자들의 일치,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회의 일치를 드러내고 실현한다. 따라서 성체성사는 공동체의 성사이다. 왜냐하면 성체성사는 “자비의 성사이고 일치의 표징이고 사랑의 끈”(전례헌장 47항)으로서 교회적인 친교를 이루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 구성원 모두가 함께 성체성사를 드리는 하나의 공동체이고, 그래서 교회는 성체성사적인 친교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 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성령께서 성사들의 기초로서 활동하시고, 하느님과의 개별적인 만남과 교회적인 친교를 이루시는 것이다. 교회는 효과있는 방법으로 성체성사를 지낼 힘을 성령으로부터 받는다. 교회는 성령의 힘을 통하여 파스카신비를 거행하기 위하여 한데 모이며(전례헌장 6항 참조), 성찬례 안에서 이렇게 기도한다.

 

“간절히 청하오니 저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어 성령으로 모두 한 몸을 이루게 하소서.”(미사통상문 감사기도 제2양식)

 

“주님, 몸소 교회에 마련하여 주신 이 제물을 굽어보시고 같은 빵과 같은 잔을 나누어 받으려는 저희가 모두 성령으로 한 몸을 이루고 그리스도 안에서 산 제물이 되어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소서.”(미사통상문 감사기도 제4양식)

 

* 성령을 통한 사랑의 나눔

 

성체성사 안에서 성령의 활동을 통하여 우리 신자들 안에 사랑의 불이 붙여지고 더욱 커지게 된다. 성체성사는 우선적으로 신적인 사랑의 축제로서, 그 안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그들의 사랑을 서로 나누신다. 성체성사는 또한 인간적인 사랑의 축제로서, 그 안에서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을 인간에게 선사하시고, 인간도 그들의 사랑을 하느님께 전해드리게 된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니, 그분은 아버지와 아들의 위격을 지닌 사랑이시다. 이렇게 성체성사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인간에게 전달되고, 인간의 사랑 역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께 전달된다. 동방교회 전통에서 유래하는 미사통상문 감사기도 제4양식은 성체성사를 특별히 성령과의 관련 하에서 사랑의 축제로 나타내고 있다. “또한 이제는 저희가 저희를 위하여 살지 않고 저희를 위하여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분을 위하여 살도록 믿는 이들에게 성령을 첫 열매로 보내셨나이다. 성령께서는 성자의 구원사업을 세상에서 이루시며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하시나이다.”

 

라. 고해성사 : 성령 안에서의 용서의 성사

 

* 성령을 통한 죄의 용서

 

인간이 범하는 모든 죄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파괴하거나, 자신의 삶 혹은 다른 이들과 함께하는 삶을 파괴하는 하느님께 대한 모욕이다. 죄는 하느님과의 화해를 필요로 하는데, 이러한 화해는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베풀어진다. 일찍이 교부들은 죄의 용서를 성령의 은총으로 보았고, 트리엔트 공의회는 보속 역시 성령의 은총이라고 강조한다. 이렇게 성령과 죄의 용서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성령은 심지어 ‘죄의 용서’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지기도 했다.

 

화해의 축제인 참회의 성사는 성령을 통한 하느님과의 화해를 이룬다.

 

“참회의 성사는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을 하느님과 새로이 결합시키는 것이니, 인간을 그리스도의 성체성사적인 몸에,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교회적인 몸에 신성하게 일치시킨다.”

 

따라서 이 화해의 성사 안에서 죄의 용서가 베풀어지는 것은 성령을 통하여서이다. 성령께서 고해성사 안에서 일하신다는 것은 고해성사의 예식문 안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사죄경에 따르면 죄의 용서를 위해 성령께서 파견되신다.

 

“인자하신 천주 성부께서 당신 성자의 죽음과 부활로 세상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시고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주셨으니, 교회의 직무 수행으로 몸소 이 교우에게 용서와 평화를 주소서. 나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교우의 죄를 사하나이다.”(고해성사예식, 45항)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2,10) 성령을 모독하는 죄인 안에서 성령께서는 더 이상 활동하시지 않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화해를 위한 가장 중요한 원천이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죄의 용서를 위하여 선사되신 바로 그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께 저항하는 것은 바로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뜻에 저항하는 것이다.

 

* 성령 안에서의 교회의 사죄권

 

고해성사는 죄를 사하는 권한을 가진 교회의 성사이다. 이 권한은 또한 죄사함을 위하여 주님으로부터 파견된 성령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3) 따라서 교회는 죄를 용서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분명히 한대로, 성령께서 주님으로부터 교회에 파견되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해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죄인의 화해도 그리고 교회 자체에 대한 죄인의 화해도 모두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주교서품기도에서도 나타난다.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시는 아버지, 아버지께서 명하시는 대로 성령의 능력으로 죄를 용서하는 대사제의 권한을 갖게 하소서.”(주교서품예식, 47항) [월간 빛, 2006년 5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의신학 교수)]

 


성령과 기(氣) : 성사 안에서의 성령의 활동 (3)

 

 

마. 병자성사 : 성령께서 베푸시는 은총의 성사

 

* 예수님의 병자치유와 그분의 명령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은 많은 경우에 ‘병자에 대한 치유’였다. 예수님은 고통 중에 있는 사람과 병으로 신음하는 사람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을 낫게 하시고, 아울러 그들의 믿음을 강조하시거나, 치유를 위해 그들의 믿음을 요구하셨고 그들을 회개에로 부르셨다. 그분의 치유는 구원의 표지로서, 하느님의 자비를 통하여 베풀어지는 죄의 용서와 연결된 행위였다. 이는 병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임무였고, 이러한 임무는 병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을 따르는 모든 이를 위한 것이었다. “예수에 대한 추종은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수난의 길일 수 있고, 특히 병고(病苦)의 길일 수 있으니, 어떠한 경우라도 그 길은 죽음으로써 사멸에 이르게 될 [그리하여 마침내 부활의 생명을 누리게 될] 길인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복음선포의 임무 외에도 병자들에 대한 치유를 명하시고 그에 대한 권능도 함께 주셨다.(마태 10,1.7-8) 그분께서는 최후의 심판에 관한 말씀에서 심지어 자신을 병으로 앓는 사람과 동일시하셨고(마태 25,31-46), 병자의 방문을 이웃사랑의 한 실천으로 여기셨다. 이렇게 교회의 병자성사는 그 원천과 모범을 예수님의 선포와 행위에 두고 있다. 이에 상응하여 병자성사를 위하여 봉헌된 기름을 축성하기 위한 감사기도가 바쳐진다. “우리의 인성을 취하시고 우리의 병고를 덜어주시려 하신 천주의 외아들 성자님, 찬미받으소서.”(병자예식, 75항)

 

* 성령의 은총

 

“여러분 가운데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야고 5,14-15)

 

원시교회는 병자들을 위하여 봉사하였으며, ‘병자의 도유’, 곧 ‘병자성사’를 베풀었는데, 이 성사에서는 도유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성서적으로 볼 때 기름을 바름을 뜻하는 도유는 ‘영(靈)의 바름’이니(1사무 16,13; 루카 4,18 참조), 기름을 바르는 도유는 성령청원기도로써 요청되는 성령을 통하여 그 힘을 갖는다. 그러므로 병자를 치유하고 굳세게 하는 구원을 위한 도움을 베푸는 병자성사의 작용은 성령의 은총에서 나오는 것이다. 병자성사는 성령의 은총을 통한 병자를 위한 도움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때 성령께서는 병자의 죄를 사하시고, 그의 영혼을 일으켜 세우시며 굳세게 하시고, 그리하여 병자가 믿음 안에서 하느님의 뜻에 헌신할 수 있도록 하신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분명히 말하였다. “병자성사의 내용은 성령의 이러한 은총으로서, 성령께서는 도유를 통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아직 속죄 중인) 위반이나 과실과 죄의 찌꺼기를 없애주시고, 병자의 영혼을 일으켜 세우신다.(까논 2) 이는 성령께서 하느님의 자비에 관한 크나큰 신뢰를 일깨워주심으로써 이루어진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병자성사의 전례문은 병자성사가 성령의 은총의 성사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천주 성령님, 찬미받으소서. 주님, 당신 종에게 이 성유를 바르오니 그의 고통을 덜어주시며 그의 약한 마음을 견고케 하소서.”(병자예식, 75항)

 

“주님께서는 당신의 자비로우신 사랑과 기름 바르는 이 거룩한 예식으로 성령의 은총을 베푸시어 이 병자를 도와주소서. 또한 이 병자를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구원해 주시며 자비로이 그 병고도 가볍게 해주소서.”(병자예식, 76항)

 

그리하여 성령의 은총을 통하여 수난하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마침내 병자성사 안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바. 성품성사 : 성령을 통한 사도적인 봉사의 성사

 

* 성령강림과 교회의 사도적인 봉사

 

교회 안에서의 사도적인 봉사의 직무는 ‘성품’의 성사와 밀접히 관련되어있다. 왜냐하면 봉사의 직무는 예수 추종에 있어서 확실한 요소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성령강림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즉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려오시자 ‘참된 사도들’(세상에 파견된 사람들)이 되었던 것이다. 교회는 자신의 봉사직무를 성령의 선물로 보았다. 그러기에 이 성품의 본질적인 부분은 처음부터 주교를 통한 안수로서, 이는 하느님의 영이 내리시길 청하는 뜻을 지닌 행위였고(사도 8,18 참조), 이렇게 성령을 통하여 직무의 행사가 최종적으로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 목자(주교)들에게는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전하는 증언(로마 15,16; 사도 20,24 참조) 그리고 성령과 의화의 영광스러운 봉사 직무가 맡겨졌다.(2고린 3,8-9 참조)

 

이렇게 중대한 임무를 다하도록 사도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내려오시는 성령의 특별한 분출로 충만해졌다.(사도 1,8; 2,4; 요한 20,22-23 참조) 사도들은 자기 협조자들에게도 안수를 통하여 영적 선물을 전해 주었으며(1디모 4,14; 2디모 1,6-7 참조), 그것은 우리에게까지 주교 축성 안에서 전해 내려온다.”(교회헌장 21항)

 

안수를 통하여 서품 후보자들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일치하며, 성령의 선물을 통하여 축성된 이들은 마침내 자신의 특별한 봉사의 직무를 행사하고 그에 상응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러므로 이러한 안수는 단지 부수적인 동작이 아니라 성령께서 베푸시는 은총의 선물을 현실화하는 표지이며, 결국 교회의 봉사직무에 대한 자격을 주는 것이다.

 

*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르는 교회의 서품

 

성품성사는 교회에 맡겨져 있다. 그러나 교회는 서품을 제 마음대로 혹은 함부로 베풀 수 없고 항상 주님의 뜻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야 한다.

 

“(성품성사에 대한) 교회의 허가조건은 교회가 마음대로 규정할 수가 없는 것으로서, 성령의 활동을 억압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 성사의 수령자 스스로가 성품성사를 받을 수 있기 위해 하느님의 활동에 자신을 내맡겨야 하고, 그분의 말씀에 사로잡혀야 하며, 하느님 영에 의해 움직여야 한다.”

 

성품성사 안에서의 성령의 인도하심은 그 성사의 예식문 안에 나타나는데, 주교서품 때의 강론을 위한 예시는 다음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성부께서 파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성령의 능력을 가득히 부어주시어 열두 사도들을 친히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선포하고, 모든 민족을 모아 거룩하게 하며 다스리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사도들은 이 임무를 세상 끝까지 지속시키고자 협조자들을 뽑아, 그리스도께 받은 성령의 은사를, 안수를 통하여 그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이 안수는 성품성사를 완성시켰습니다. 이렇게 하여 주교직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온전히 계승되었고, 구세주의 구원 업적은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보존되고 성장하였습니다.”(서품예식, 75항)

 

사. 혼인성사 : 성령 안에서의 사랑의 공동체의 성사

 

* 성령 안에서의 사랑의 공동체

 

‘혼인’은 자연적인 창조의 질서에 속하는 것으로서, 성(性)적인 공동체에 기인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친교이다. 혼인에 내포된 사실은, 특히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이 공동체에서 유래하고, 공동체에서 성장하며, 공동체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적인 혼인은 처음에는 고대의 유대교적이고 이교적인 혼인예식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의 혼인은 ‘주교의 동의’로 이루어지도록 되어있었으니, 이는 욕망을 따르지 않고 주님의 뜻에 따르는 혼인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하여 고대 교회에서는 신부에 대한 축복과 성찬례가 결혼식에 포함되었다. 그 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유효한 혼인은 세례를 받은 두 명의 그리스도인들 앞에서 행해지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베푸는 일곱 성사 중의 하나인 성사임이 분명하게 되었다. 여기에 대하여 교회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풍요로운 사랑과 일치의 신비를 드러내고 그 신비에 참여하는 혼인성사의 힘으로(에페 5,32 참조), 그리스도인 부부는 부부 생활은 물론 자녀 출산과 교육을 통하여 성덕에 나아가도록 서로 도와주며, 또한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에서 자기 생활 신분과 영역에 고유한 은총을 받는다. 실제로 이 혼인에서 가정이 생겨나고, 가정에서 인간 사회의 새로운 시민들이 태어나며, 성령의 은총을 통하여 그들은 하느님 백성을 역사의 흐름 속에 영속시키도록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교회헌장 11)

 

그러므로 혼인을 통하여 남자와 여자는 서로에 대한 사랑의 계약으로 이루어지는 생활 공동체를 이루는데, 가톨릭적인 이해에 따르면 이 사랑의 생활 공동체가 성사이다. 이 공동체에 사랑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니, 그분께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그 안에서 일하시고, 공동체적인 생활을 위하여 당신의 은총을 선사하신다. 이미 세례 때에 오시어 계시고, 하느님과의 사랑을 시작하는 공동체를 선사하신 성령께서 계속 도움을 주시어, 혼인의 공동체가 사랑 안에서 지속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다. 사람 안에서의 하느님의 내주(內住)와 하느님과 인간과의 살아있는 만남을 선사하시는 하느님의 영께서 혼인의 공동체 안에 머무르시면, 혼인의 남여는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은 그들 안에 계신다. 이러한 관점에서 혼인성사의 주례자는 혼인을 확인한 후, 신랑·신부에게 팔을 펴들고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

 

“저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비오니, 당신 성령께서 이들에게 일치를 선사하시고, 이들 생활의 계약을 거룩하게 하소서. 성령께서 이들의 사랑을 모든 위협에서 지켜주시고, 그 사랑을 자라게 하시며, 열매를 맺게 하시고, 모든 선한 것을 서로 추구하게 하소서.”

 

* 혼인성사의 집전자

 

서방교회는 혼인의 성사가 혼인당사자들 자신에 의해 베풀어진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혼인을 체결하는 전례에서 혼인하는 남녀 간의 의식적인 동의가 요구되는 것이다. 하지만 혼인성사는 혼인의 체결에만 베풀어지는 것이 아니라, 결혼에서 시작하여 혼인생활 전체를 통해서 완성되는 것이다. 혼인의 남녀가 계속 서로 사랑함으로써, 그들은 계약을 굳게 지키는 것이고, 지속적으로 혼인의 성사를 베푸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혼인의 성사는 ‘지속의 성사’ 혹은 ‘생활의 성사’로 표현된다. 그래서 혼인은 “참된 성사이고 생활한 상태로서의 성사”이다. 이 지속의 성사를 위해서 성령 안에서의 하느님의 축복이 필수적이니, 혼인 체결은 성령의 임재를 청하는 기도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서방교회에서 혼인당사자들에 의해 베풀어지는 혼인성사가 강조되는 반면, 동방교회의 혼인 이해에 있어서는 혼인을 주례하는 사제에 의해서 혼인성사가 베풀어진다는 점이 특이하다. 즉 동방교회에서는 사제가 하느님으로부터 성령께서 내려오시기를 청하는 기도로써 혼인이 이루어지도록 한다는 것이다.

 

“사제는 혼인의 자연적인 끈을 거룩하게 한다. 그는 혼인남녀의 손을 서로 포개놓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를 하고, 그 기도를 통해서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은총을 전달하며, 혼인을 들어 높이고 성사의 품위로 축성한다.”

 

“서방교회가 […] 혼인당사자들을 혼인성사의 집전자로 여기는 반면, 동방교회는 사제를 혼인성사의 집전자로 여긴다. 동방교회에 의하면, 사제는 (그러기에 포기할 수 없는) 전례적인 행위 안에서 - 혼인당사자들의 혼인의지로써 이루어진 - 자연혼(自然婚)을 성사의 품위로 들어 높이는데, 이는 성령의 임재를 간청하는 축복(혹은 축성)에 의한 것이다.”

 

결국 성령청원기도를 통하여 혼인이 성사가 되는 것이므로, 혼인을 성사로 만드는 혼인의 참된 집전자는 결혼을 하는 당사자들도, 그 혼인을 주례하는 사제도 아닌 바로 성령이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리스도와 교회,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혼인

 

성서와 고대교회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혼인을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혼인과 비교하였다.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풍요로운 사랑과 일치의 신비를 드러내고 그 신비에 참여하는 혼인성사의 힘으로(에페 5,32 참조), 그리스도인 부부는 부부생활은 물론 자녀 출산과 교육을 통하여 성덕에 나아가도록 서로 도와주며, 또한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에서 자기 생활 신분과 영역에 고유한 은총을 받는다.”(교회헌장 11항)

 

그리스도의 영이 교회 안에 계시기 때문에, 교회는 그 구성원들이 언제나 다시 죄를 범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신부일 수가 있으며, 신적인 삼위의 사랑이신 하느님의 영께서 사람들에게 오시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느님의 신부일 수가 있다. 이렇게 혼인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 안에 하느님이 가까이 계신다는 표지로서, 사랑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신다는 표지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리스도교적인 혼인을 떠받치고 있으며, 그와 더불어 이러한 혼인은 그 자체로 항구하고 신실하게 세상을 향하신 하느님 사랑의 표지가 된다. 신약성서에서 새롭고 영원한 계약으로 표현되는 남자와 여자의 생활 공동체와 하느님과 인류의 생활 공동체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상호관계에 있으므로, 한 공동체는 항상 다른 공동체에 의존하고, 한 공동체는 다른 공동체를 현존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의 사랑은 부부간의 사랑을 떠받치고 있으며, 부부간의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의 증거가 된다.”

 

혼인의 성사가 진실로 인간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효과적인 표지로 생활화하는 곳에 하느님의 구원의지는 인간 안에서 드러나게 나타날 수 있다.

 

혼인의 사랑은 교회의 결합하는 사랑을 현실화하고, ‘가정교회(ecclesia omestica)’로서 전체 교회의 한 부분을 구성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러한 이유에서 이렇게 가르친다.

 

“바로 이 가정교회에서 부모는 말과 모범으로 자기 자녀들을 위하여 최초의 신앙 선포자가 되어야 하며, 각자의 고유한 소명을 특별한 배려로 육성하여야 한다.”(교회헌장 11항)

 

성사적인 혼인을 이러한 가정교회로 간주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사가 무엇인지 알고 싶은 사람은, 신앙으로 살고, 신앙 안에서 살며, 신앙을 증거하는 삶을 이룬 하나의 성공한 가정을 볼 필요가 있다. 하느님은 당신의 은총을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공동체로서, 한 가정 안에서, 드러나게 하셨으니, 이러한 가정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다시금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역시 가정 안에서 복음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고귀함도 나타난다. 그리하여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교회적인 영이해와 기의 비교

 

성령께서는 성사들 안에서 무엇보다도 하느님이 베푸시는 은총의 중개자로 일하신다. 즉 그분께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으로부터의 은총을 선사하심으로써,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며, 신앙을 굳세게 하고,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된다. 또한 그들은 성령께서 베푸시는 은총으로써 하느님과 화해를 하고, 고통과 병고에서 치유되며, 동료인간과 교회에 봉사하고, 서로 사랑으로 일치하는 가운데 하나의 생활공동체를 체결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교회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을 가져다주시고, 그들을 하느님과 결합시켜 주신다. - 그런데 이러한 전망은 기개념(氣槪念)에서도 발견되는 것으로, 하늘(하느님)과 땅(인간)을 연결하여 결합시키는 것이 바로 기(氣)인 것이다.

 

거의 3년 반에 걸쳐서 “교회와 신학 안에서의 성령의 망각”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의 성령의 재발견”에 관하여 알아보았다. 그간의 고찰에 따르면, 성령께서는 특별히 생명력 혹은 삶의 힘으로 이해되시며, 그분께서는 먼저 교회와 신학(특히 교회론과 성사론) 안에서 소홀히 여겨졌으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전·후해서 재발견 되셨다.

 

이 글 제목이 “성령과 기(氣)”인데. 그동안은 성령에 대하여 알아보았고, 다음 호부터는 교회적인 영이해(靈理解)를 위한 토착화(土着化)개념인 “생명력으로서의 기개념”을 통해서 성령께 대한 그리스도교적 이해의 폭을 넓혀보고자 한다. 이리하여 극동 아시아의 성령론을 위한 토착화개념으로서의 기개념은 생명력이라는 관점에서 약화된 성령의 의미를 다시 강조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월간 빛, 2006년 6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의신학 교수)]



2,223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