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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일상 속 영화 이야기: 송새벽의 내 탓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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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7-11 ㅣ No.1107

[일상 속 영화 이야기] 송새벽의 내 탓이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십년 전에는 천재감독으로 불리었지만 지금은 청소 일을 하고 있는 ‘박기훈’(송새벽 역)이 자신의 연기력 때문에 영화제작이 중단되어 버린 줄 아는 여배우에게 그때의 일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장면이 나온다. “십년 전에 너랑 찍던 그 영화. 찍으면서 알았어. 망했다…큰일났다. 찍어서 걸면 100% 망하고 난 재기도 못할 것 같았어… 그래서 네 탓하기로 한 거야. 내가 구박하면 할수록 네가 벌벌 떨면서 엉망으로 연기하는 거 보면서 안심했어. 더 망가져라. 그래서 이 영화 엎어지면 내가 무능한 게 아니라 쟤가 무능해서 그렇다.”

 

영화를 만들어 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장면이다. 영화를 공부할 때 비슷한 일이 있었다. 반 친구의 작품에 함께하게 되었는데 배우의 연기가 감독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몇 번이나 다시 촬영했지만 결국 감독이 만족하지 못했다. 촬영 후 감독을 한 친구가 배우의 연기력에 대해 답답해했다. 하지만 감독도 학생이라 연기지도가 초보였고 시나리오도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더구나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외국인이 미국인 배우를 상대로 연기지도를 하기에는 제약이 굉장히 많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배우의 연기력만을 탓하는 외국인 학생 감독의 모습이 참 민망하게 보였다. 영화에서 우리가 보는 인물은 감독이 아니라 배우이기 때문에 연기력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 연기는 배우가 홀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배우가 역할에 몰입할 수 있도록 감독이 그 캐릭터에 대해 충분히 이해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감독을 디렉터(Director, 연기 지시를 하는 사람)라고 하고 배우를 엑터(Actor, 행동을 하는 사람)라고 한다. 배우가 연기를 못하는 것이 단순히 연기자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캐릭터에 맞는 연기자를 선발하고 자연스럽게 그 인물이 되도록 하는 것은 감독의 역량이기 때문이다. 결국 연기에 대한 책임도, 영화에 대한 책임도 감독에게 있다. 만약 감독이 그 영화에 대해 책임지려 하지 않을 때 어떤 배우도, 어떤 촬영 팀도 그를 따르지 않으며 더 나아가 어떤 제작자도 그에게 일을 맡기지 않는다.

 

창세기는 죄의 시작이 ‘교만’이었고 그 교만은 ‘남의 탓’으로 이어졌다고 우리에게 전해준다. 선악과를 따먹은 후 ‘너 어디 있느냐?’는 하느님의 물음에 아담은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 다.”라고 하고 하와는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 먹었습니다.”라고 대답한다.(창세 3, 9-13) 내 탓은 없다. 결국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의 탓이고 유혹한 뱀의 탓이다. 우리 인간은 이렇듯 책임을 회피하고 싶어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미사를 찬미와 감사의 기도가 아니라 ‘내 탓이오.’로 시작하는 이유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단절이 교만과 남의 탓에서 비롯되었음을 고백하며 아직도 그러한 자세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약화시키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살펴보는데 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우리는 늘 남의 탓만 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아이디어와 의도는 좋은데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주지 못한다. 나는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내 마음을 몰라준다. 다른 사람들은 적극적이지 않다.’며 나의 책임에 대한 무게를 타인에 대한 편견과 무시로 위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도 내 마음을 모를 때가 있는데 어떻게 사람들이 내 의도를 다 알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목적이나 취지의 정당성만 강조하는 것은 아닌지,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타인들이 합리적이라고 납득할 수 있는 것인지를 되돌아 보아야 한다. 나의 의도는 좋았는데 상대방이 그것을 알아주지 못했다는 생각은 결국 내가 다 옳다는 ‘교만’에서 비롯된 것이며 결과에 대한 책임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행위로 이어진다. 이럴 때 신앙은 위선이 되고 삶의 모습은 민망해진다.

 

‘내 탓이오.’ 하느님과 나, 나와 사람들의 관계를 지켜주는 신앙의 자세, 삶의 자세이다.

 

[월간빛, 2018년 7월호, 한승훈 안드레아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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