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광화문, 그 후 일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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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8-09 ㅣ No.412

[레지오 영성] 광화문, 그 후 일 년…

 

 

저는 강원도 시골에 있는 피정의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피정의집은 본당이 아니므로 고정된 교우가 없습니다. 그래서 피정자가 계실 때는 나름 번다스럽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아주 한적하고 조용합니다. 특히 교우들은 본당의 일정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으니, 당연히 본당이 바쁘거나 일정이 많으면 피정의집은 반대로 한가해지곤 합니다. 

 

작년 8월이 그랬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잘 아시지요? 바로 교황님의 방한 때문이었습니다. 작년 여름, 우리 한국 천주교회는 교황님의 방한과 시복식이라는 영광스러운 잔치를 준비하느라 아주 바빴습니다. 

 

전국의 모든 교구와 본당들도 시복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미 봄부터 명단 파악하고 교통편을 마련하고, 일정 확인하고 사전교육 하느라 매우 분주하였습니다. 그러니 피정의집에 피정 오는 교우들이 있겠습니까? 피정의집은 본의 아니게, 그러나 기쁘고 행복하게 파리를(?) 날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황님이 주신 특별 휴가라 생각하며 한여름을 느긋하고 여유 있게 지내다가, 시복식 당일 인근 본당의 버스에 편승하여 저도 광화문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새벽 두시에 모여 버스에 오르는 교우들의 표정에는 피곤함이나 힘든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날 밤에 거의 잠을 자지 못하고 나왔음에도, 화장실 가는 것이 힘들까봐 어제 저녁부터 물을 마시지 않았다는 말 속에도 행복한 열정이 묻어 있었습니다. 광화문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고, 어쩌다 서울에 가면 길을 잃을까 무서워 혼자서는 지하철도 타지 못한다는 강원도 산골짜기 본당의 할머니도 마치 어릴 적 소풍을 가는 것처럼 설레 하고 계셨습니다. 과거 두 차례의 교황 방한 행사 때에 신학생으로 모두 참석했고, 비교적 지근거리에서 교황님을 직접 뵈었던 저도 간만에 교황님을 뵙는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뜨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교황님 방한과 시복식의 그 뜨거운 감동과 기쁨 

 

광화문에 도착할 즈음 동이 트기 시작했고, 광장에는 이미 전국에서 모여든 신자들의 물결이 넘치고 있었습니다. 여름이 한복판인 즈음, 딱딱한 길바닥에서 몇 시간을 기다리며 앉아 있어야 했지만 누구도 불평하거나 짜증스러워 하지 않았습니다. 얼굴을 모르는 옆자리의 누군가와도 신앙의 동질감을 느끼며 이미 마음으로 하나 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제단 옆 사제석에 있었지만 그 이후의 체험과 기억은 여러분의 그것과 같습니다. 

 

흥분과 감동, 입당성가로 ‘순교자 찬가’를 부를 때와 교황님의 선언으로 우리 순교자들이 복자위에 오르시고 커다란 걸개그림이 펼쳐질 때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감격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아침을 거른 상태에서 점심도 오후 세시가 넘어서야 먹을 수 있었지만 배가 고프다는 것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한 장으로 기록된 그날, 2014년 8월16일, 그곳 광화문 광장에 저도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제가 있었다는 것이 행복하고 기쁩니다. 여러분도 그러하십니까? 

 

일 년이 지났고, 다시 8월이 왔습니다. 지난 5월29일에 순교 복자들의 첫 번째 축일을 지냈고, 이달 16일은 광화문 시복식 일주년입니다. 저는 여전히 시골 피정의집에 살고 있습니다. 지난 몇 달 동안 우리 사회를 공포에 떨게 한 전염병 탓으로 여름 피정이 많이 취소되었고, 덕분에 지난여름에 이어 금년에도 한가한 여름, 조용한 8월을 지내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이런 여유를 누리도록 만들어 준 메르스에게 감사(?)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고요한 피정의집에는 시간도 고요하게 흘러갑니다. 메르스 못지않게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 극심한 가뭄 중에도 자연은 놀랄 만큼 정확하게 자신의 길을 갑니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변했다고도 하고 변하지 않았다고도 하지만, 저의 일상도 그렇게 흘러갑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합니다. 

 

“어! 벌써 일 년…?” 

 

21세기의 삶은 천 년 전에 비해 천배는 빨리 변하다고 합니다. 누구는 그 변화의 속도를 ‘LTE’ 급이라 했고, 누구는 ‘광배속’이라고 했습니다. 하도 복잡하고 다양하여 빨리 기억하고, 빨리 소비하고, 빨리 잊어버리는 세상, 그렇게 빨리 변하는 세상에서 일 년 전이면 이미 기억 저 편의 먼 시간인지도 모릅니다. 컴퓨터의 저장 공간에서 불필요한 것들은 즉시즉시 삭제하듯, 우리의 기억 속에서도 지난 것들을 빨리 삭제해 버려야 또 다른 무엇을 기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쉽게 망각하고 있습니다. 세례 때의 믿음과 열정, 레지오 단원으로서 입단 선서할 때의 다짐과 각오, 그리고 일 년 전 광화문 광장에서 느꼈던 감격과 영광스러운 기억마저도…. 

 

 

우리 모두가 ‘기억의 지킴이이자 희망의 지킴이’ 돼야 

 

신앙은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던 이들, 주님의 부활을 목격했던 제자들, 바로 그들의 기억과 체험의 전달입니다. 그 기억과 체험은 너무나 크고 강렬하여 시간과 공간을 넘어, 심지어는 침묵을 강요하는 박해와 죽음을 넘어 우리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미사 때마다 사제의 입을 빌어 이렇게 선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과 행적을 기억하고 행하며 전하는 삶, 그것이 신앙이며 그렇게 사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빨리 변하고 바뀐다고 해도 잊을 수 없고, 잊어서는 안 되는 기억이 있습니다. 신앙과 참된 진리에 대한 기억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작년 우리를 찾아 오셨던 교황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기억의 지킴이이자 희망의 지킴이’가 되어야 함을 알려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국의 천주교인 여러분이 모두 하느님께서 이 땅에 이룩하신 위대한 일들을 기억하며, 여러분의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신앙과 애덕의 유산을 보화로 잘 간직하여 지켜나가기를 촉구합니다”(광화문 시복식 미사 강론 중에서). 

 

사랑하는 레지오 단원 여러분. 

 

일 년 전 광화문, 기억나십니까? 뜨거운 날씨보다 더 뜨겁고 행복했던 그 날의 감격을 설마 잊으신 것은 아니겠지요? ‘벌써 일 년이나’ 지나 기억이 가물가물 하십니까? 혹시 그러시다면 부디 기억을 복원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날의 열정과 다짐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여전히 많은 문제와 상처로 아파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여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 갈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오직 주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의 군사들인 레지오 단원 모두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참된 복음의 증인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5년 8월호, 신호철 토마스 신부(춘천교구 겟세마니 피정의집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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