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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인문학 강좌: 가족과 가정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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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10-05 ㅣ No.229

김문태 교수의 인문학 강좌 (2) 가족과 가정공동체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가장 먼저 만나는 타인은 가족이며, 가장 먼저 접하는 사회는 가정공동체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족과 가정이 무엇보다 소중하고 우선적으로 여겨진 까닭이다.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하기에 앞서 가정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한 『대학』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가 오늘도 새롭다.


하나의 가정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성인 남녀가 혼인의례로 결합하여야 한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단군신화의 웅녀(熊女)는 어두운 동굴에서 삼칠일간 쑥과 마늘만 먹으며 햇빛을 보지 않고 금기하는 시련을 이겨낸 뒤 환웅과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 주몽신화의 유화(柳花) 역시 어두운 방에 일정 기간 격리되는 한편, 새의 부리처럼 세 자나 늘어난 입술을 가위로 세 번 자르는 시련을 겪은 후 해모수와의 사이에서 주몽을 낳았다. 공히 신모(神母)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무적(巫的) 시련을 수반한 통과의례를 치렀던 것이다. 성인의례나 혼인의례에 수반되는 시련은 마한의 젊은이들이 등가죽에 끈을 꿰어 큰 나무에 붙들어 매고 소리 지르며 잡아당기는 행위(『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무적 시련을 이겨냈을 때, 소년 소녀는 성인으로 재생하여 가정을 이룰 수 있었다. 『사례편람』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열다섯 살이 된 남자는 상투를 틀고 갓을 쓰는 관례(冠禮)를, 여자는 쪽을 찌어 비녀를 꽂는 계례(?禮)를 치렀다. 독립된 인격체로서 자유와 책임을 부여하고, 자긍심과 자존감을 드높이는 의례였다.

성인이 된 처녀 총각은 혼인의례를 통해 사랑으로 맺어진 완전한 상호보완적 존재이자 온전한 인간으로 거듭났다. 오죽하면 혼인하지 못하고 죽은 손말명(처녀귀신)이나 몽달귀(총각귀신)를 가장 한이 맺힌 귀신이라 하였을까. 지금도 혼인을 하지 못하고 죽은 혼백을 위로하기 위하여 영혼결혼식을 올려주고 있지 않은가. 옛 풍속을 보면 한 인간의 삶에 있어서 혼인이 얼마나 중대한 일이었는지, 그리고 그 대사를 치르고자 하는 집념이 얼마나 컸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민요와 가사로 전승되어오는 ‘노처녀가’의 내용이 절절하다.

‘어떤 처녀는 팔자 좋아
이십도 되기 전에 시집간다
남녀자손 시집장가
떳떳한 일이건만
이내팔자 기험하여
사십까지 처녀로구나
앞집 김동이도 상처하고
뒷집 이동이도 기처로다.’

마음이 급한 노처녀는 아내가 죽은 남자[喪妻]든, 아내를 버린 남자[棄妻]든 가리지 않겠다고 스스럼없이 토로하고 있다. 혼인에 대한 열망과 의지가 여과 없이 드러난다.

그렇게 혼인에 성공한 여인은 암환자가 겪는 아픔보다 한 단계 위라는 산고를 이겨내고 마침내 새 생명을 낳는 기쁨을 맛보았다. 자손이 귀한 가정에서는 우뚝 솟은 기자석(祈子石) 앞에서 기도하였고, 그도 안 되면 석상의 코라도 깨어다 갈아 마시기까지 하며 출산하고자 하였다. 아이를 낳으면 삼칠일 동안 삼신할머니에게 흰쌀밥과 미역국을 올렸다. 아울러 대문에는 숯과 고추와 솔가지 등을 매단 금줄을 자랑스럽게 내걸어 자식의 탄생을 온 동네에 알리고, 새 생명에 대한 친지와 이웃의 관심과 애정을 불러일으켰다.

사정이 이러하였으니 혼인을 통해 가정을 꾸린 부부가 어찌 다정한 단짝이 되지 않을 수 있었으며, 사랑으로써 새 가족이 된 자녀들이 어찌 소중한 분신이 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부모와 자식은 생명을 주고받은 관계로서 자애와 효도로 부자유친의 도리를 지키고, 형제와 자매들은 그 생명을 공유하는 관계로서 서로 돕고 기대어 우애를 나누며 행복을 누렸다.

오늘날 우리의 가족과 가정공동체 현실은 어떠한가. 성인의례, 혼인의례, 출산의례는 상업화의 물결을 타고 겉치레 행사가 된 지 오래다. 무적 시련을 수반한 - 물론 후대에는 시련이 상징화되었지만 - 의례를 통해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혼인과 출산은 줄고, 이혼과 낙태와 자살은 증가하고 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최근 6개월간(2013. 9 - 2014. 2) 혼인은 164,028건인 반면, 이혼은 58,095건으로 이혼율이 무려 35.4%에 달하고 있다. 평균초혼연령은 남자가 32.2세이고, 여자가 29.6세로 점차 늦어지는 추세이다. 날이 갈수록 혼인율은 낮아지고, 이혼율은 높아지고 있다. 혼인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정을 꾸렸다고 하더라도 자녀를 낳지 않겠다는 추세이다. 2013년의 경우 한 여자가 가임기간(15-49세) 동안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인 ‘합계출산율’은 1.19명에 불과하다. 출산율이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국가로 보고되고 있는 반면, 가임여성 1천 명 중 29.3명이 낙태 경험이 있어 OECD 국가 중 낙태율 1위를 차지하고 있는 해괴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자살률 역시 놀랍기 그지없다. 우리나라 통계청 보고서의 2002년과 2012년을 비교해 보면, 사망원인 순위 중 자살이 8위에서 4위로 급상승하였다. 자살 사망자 수를 10년 전과 비교해 보면, 인구 10만 명당 17.9명이었던 것이 28.1명으로 무려 57.2퍼센트의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OECD 표준인구 10만 명당 평균 자살률이 12.5명이라는 사실에서 그 심각성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주목되는 것은 나이가 들수록 자살률이 높아진다는 점이다. 80세 이상 노인의 자살이 50대에 비해 세 배나 된다. 최근 황혼 이혼이 급증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강력범죄의 70%가 이혼, 가정폭력, 부모의 무관심과 과잉보호, 경제적 빈곤 등 가정의 위기로부터 발생하는 ‘홈 메이드 크리미널’이라는 보고에 아연실색하게 된다.

오늘날 가족과 가정공동체 안에서 야기되는 혼인율, 이혼율, 출산율, 낙태율, 자살률 등을 살펴보면, 우리 사회는 생명의 문화가 아닌 죽음의 문화에 경도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자는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이 될 것이니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5-6)는 혼인의 불가해소성에 대한 말씀, 또한 어버이들은 자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말고 주님의 정신으로 교육하고 훈계하며 잘 기르라(에페 6,4)는 자녀교육에 대한 말씀, 그리고 자식들은 생명의 근원인 어버이에게 효도하라는 제4 계명이 무색하다.

‘혼인제도 자체와 부부 사랑은 그 본질적 특성으로 자녀의 출산과 교육을 지향하며, 그로써 마치 절정에 이르러 월계관을 쓰는 것과 같다.’(<가톨릭교회교리서> 1652항)는 가르침이 새롭다. 남편과 아내, 아들과 딸로 이루어진 가정공동체는 참된 인간공동체로 발전하고 성장하는 기반이 된다. 가정은 창조주의 협력자인 부부가 사랑으로써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지성소이자 자녀를 양육하는 못자리인 것이다. 오늘날 ‘대박’이라는 말로 대체되어 버린 ‘다복’(多福)은 원래 자녀가 많은 가정을 지칭할 때 쓰던 말 아니었던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죽음의 문화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랑으로 맺어진 가족과 생명으로 이루어진 가정공동체의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가정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혼인 위에 세워진 생명과 사랑의 친밀한 친교에서 태어난다.’(<사목헌장> 48항)는 가르침에 눈을 돌려야 한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으로 이루어진 가정공동체의 구성원은 서로를 독립된 인격체로서,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로서 존중해야 한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고 책임 있는 존재로 인정받을 타고난 권리를 지니고 있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이러한 권리를 존중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738항)는 가르침이 따끔하다. 가족 간 사랑의 친교는 방법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다. 생명으로 맺어진 가족들의 심정을 헤아리고자 하는 마음이 성가정을 닮은 사랑의 가정공동체를 이루는 핵이 아닐까.

‘내 마음에 드는 것이 세 가지 있으니 그것들은 주님과 사람 앞에서 아름답다. 형제들끼리 일치하고 이웃과 우정을 나누며 남편과 아내가 서로 화목하게 사는 것이다.(집회 25,1)

[평신도, 제44호(2014년 여름), 김문태 힐라리오(가톨릭대 ELP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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