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100여 년 신앙의 역사를 간직한 행주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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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1-09 ㅣ No.618

[한국 교회 사적지 순례] 100여 년 신앙의 역사를 간직한 행주 성당


소박하고 아담한 성당

처음 봤을 때 이곳이 성당인가 싶었다. 성당이라 하기에는 작고 아담했다. 어느 일반 가정집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성당 안에 들어섰을 때 비로소 이곳이 성당이 맞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당 내부는 마치 오래된 시골 공소의 모습이었다. 예스러운 멋이 깃든 성당 내부를 보면서 100여 년 신앙의 역사를 느낄 수 있었다. 천주교 신자라면 한 번 찾아가 볼 만한 이곳은 행주 성당이다.


행주 공소의 설립

행주 본당의 모태인 행주 공소가 설립된 것은 1899년경으로 추정된다.1) 공소가 설립된 이유는 행주 지역의 입교자가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다음의 자료는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준다.

서울에서 40 내지 50리 떨어진 고양과 김포에는 20명가량의 우리 신자들이 비신자들 사이에 흩어져서 살고 있는데, 모두들 1년 전에 영세한 입교자들입니다. 행주에는 교리 공부를 시작한 가정이 30가구 이상이라고들 합니다. 계속해서 이런 추세로 나간다면 이곳은 가장 모범적인 신자 마을로 곧 저의 사목 담당 지역 중에서 중심지가 될지도 모릅니다. 한데 입교자들이 이처럼 늘어나게 된 연유는 개신교인들로 인한 사건 때문이었으니 결국 그들 덕분이라고 말해야겠지요! 영세한 지 몇 개월밖에 안 되는 이들은 모두 일무일과를 엄격한 의무로서 이행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이들이 모일 적당한 장소를 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제가 공소 방문을 하지는 못하고, 그들이 서울로 성사를 받으러 오고 있습니다.2)

위 자료는 약현 본당(현 중림동 본당)의 두세(C. E. Doucet, 정가미) 신부의 1898년도 보고서를 인용한 것이다. 약현 본당은 1891년에 설립된 본당으로, 종현 본당(현 명동 본당)에 이어 서울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곳이었다. 관할 구역은 서울 사대문(四大門) 밖의 전 지역과 양주 · 교하 · 과천 · 광주 · 개성 등 경기도 일대, 황해도 배천이었다.3) 행주도 약현 본당의 관할 하에 있었다.

위에서 보듯이 1898년 당시, 행주 지역의 개종 열기는 뜨거웠다. 교리 공부를 시작한 가정이 30가구 이상이었다. 두세 신부는 이런 추세라면 머지않아 행주가 사목 중심지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개종의 열기는 뜨거웠지만, 두세 신부는 그곳에 사목 방문을 할 수 없었다. 신자들이 모일 수 있는 마땅한 장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자들은 불편한데도 약현 본당에 가서 성사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두세 신부는 이러한 신자들의 고충을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개종운동을 좀 더 촉진하기 위해 1899년경 행주에 전교회장을 보냈다. 이때쯤에 행주 공소가 설립된 듯하다. 전교회장은 비신자들을 대상으로 입교를 권유하는 한편, 공소의 학교일도 아울러 맡았다. 그의 부인도 여성 교리반을 지도했다.4) 그 결과, 행주 공소의 신자 수는 크게 늘었다. 1899-1900년에는 52명이었던 신자 수가 불과 1년 후에는 102명으로 늘어났다.5) 이에 대해 두세 신부는 1901년도 연말 보고에서 “행주의 신자 마을이 제게 가장 많은 위로를 안겨 줍니다. 2년 전부터 계속적인 약진을 보이고 있습니다”라고 평가했다.6)


본당 승격

한편 1890년대 후반, 경기 북부 지역에 본당 설립이 추진되었다. 두세 신부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기 위해서였다. 당시 두세 신부는 사목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약현 본당의 관할 구역은 매우 넓었고, 공소들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사목 방문이 녹록하지 않았다. 게다가 두세 신부는 조선 대목구장 직무 대행(provicarius)이어서 교구의 일도 맡아야 했다. 그래서 교구장인 뮈텔(G.-C.-M. Mutel, 민덕효) 주교는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1900년 개성 본당을 설립하였다.7)

이어 뮈텔 주교는 개종운동이 활발한 고양과 김포 지역에 본당 설립을 계획하였다. 고양과 김포는 1908년경 새 영세자가 100명 이상일 정도로 개종운동이 활발했다. 새 본당의 중심지는 행주로 결정되었고, 1909년 행주 공소는 본당으로 승격되었다.8)

서울 문안 본당(인용 주 : 종현 본당)에는 일본인 140명을 합쳐 1,743명의 교우가 있고, 문밖 본당(인용 주 : 약현 본당)에는 1,749명의 교우가 있습니다. 문밖 본당을 맡고 있는 대목구장 직무 대행인 두세 신부는 또한 근처 여러 개의 공소를 돌보고 있는데, 이 때문에 신자 총수는 2,800명을 넘습니다. 지난봄부터 대목구장 직무 대행의 일을 덜어 드리기 위해 700명의 교우들을 한국인 신부에게 맡겼습니다.9)

초대 주임으로 김원영(金元永,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부임하였다. 설립 당시 관할 구역은 고양 · 김포
· 양주 · 통진 · 양천 등으로, 공소는 고양의 용머리 · 미역절, 김포의 고잔말 · 거래 · 홍두평 · 은행정리, 양주 고태골, 통진 원산리, 양천의 읍내 · 염창 · 상사골, 부평의 오시 등 12개였다. 이 지역은 현재의 고양시, 김포시 걸포동 · 고촌면 신곡리, 인천시 서구 오류동, 서울시 은평구 신사동, 강서구 가양동 · 염창동 등지이다. 신자 수는 행주 본당이 141명, 공소가 541명으로, 총 682명이었다.10)


행주 본당의 신부들과 신자들

김원영 신부는 본당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본당과 사제관을 건립하여 1910년 8월 17일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8월 17일 신부들(인용 주 : 김원영
· 두세 · 시잘레 · 손성재 신부)이 네 대의 미사를 드린 후 나는 6시 반에 의식을 시작했다. 신부댁과 새 성당의 축성, 미사와 200명의 영성체, 그리고 80명의 견진이 있었다. 의식은 8시에 끝났다. 10시경에 김(원영) 신부가 만든 복권(福券) 때문에 교우들이 모두 다시 모였다. 11시 반에 성체 강복을 거행했다.11)

또한 김 신부는 1912년 2월 26일 “회장필지”(會長必知)를 저술했다. 이 책은 관할 공소 회장들을 가르치기 위한 지침서였다. 김 신부는 이 책에서 회장의 직무와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책은 8쪽 분량의 짧은 책이었지만, 한국 교회 내에서 회장의 직무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12)

이처럼 본당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던 김원영 신부는 1914년에 신부가 공석이 된 경기도 화성의 갓등이 본당과 의왕의 하우현 본당의 사목도 아울러 맡게 되었다.13) 그러다가 3년 후인 1917년부터 갓등이 본당을 전담하게 되었다.14) 그의 뒤를 이어 1917년 9월 22일에 사제품을 받은 김휘중(金輝重, 요셉) 신부가 행주 본당의 2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김 신부는 부임한 지 불과 1년 후인 1918년 11월 12일에 선종하고 말았다.15) 이후 몇 달 동안 신부가 공석인 채로 있다가 1919년 5월에 3대 주임으로 황정수(黃貞秀, 요셉) 신부가 부임하였다.16)

이 당시 행주 본당은 여러 가지로 힘겨운 상황이었다. 성당은 높은 언덕에 있어서 비바람으로 인해 많이 낡았고, 성물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다. 신앙생활을 위해 성당을 보수하고 성물도 갖추어야 했지만 신자들이 매우 가난했기 때문에 그럴 엄두를 내지 못했다.17)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성당이 더욱 낡아 급기야 붕괴될 위기에 처했다. 이처럼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자 제5대 주임 박우철(朴遇哲, 바오로) 신부와 신자들이 힘을 모았다. 그들은 새 터에 성당을 이전하였다. 이전된 성당은 옛 성당의 목재 등을 이용하여 중수한 것이었다. 1928년 10월 7일, 서울 대목구장 라리보(A. J. Larribeau, 원형근)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거행하였다.18)


본당의 폐지

1942년 5월 하순, 서울 대목구는 사제 인사이동을 발표하였다. 9대 주임 이철연(李喆淵, 프란치스코) 신부가 안성 본당으로 떠나게 되었으나 후임은 임명되지 않았다. 서울 대목구는 행주 본당을 폐지하고 “이웃 지방에서 분할하여 관리”하도록 했다.19) 행주 본당이 폐지된 이유는 일제의 탄압으로 신부의 수가 크게 부족했기 때문인 것 같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평양 대목구의 메리놀회 선교사들을 적국민(敵國民)으로 규정하고 미국으로 강제 추방했다. 또한 춘천 지목구의 골롬반회 선교사들의 사목도 금지시켰다. 이렇게 되자 서울 대목구장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주교는 사목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서울 대목구의 신부들을 평양 대목구와 춘천 지목구로 파견하였다.20) 이로 인해 신부들의 수가 크게 부족하게 되었고, 몇몇 본당이 폐지되었다. 행주 본당의 폐지도 이러한 이유 때문인 것 같다.

그로부터 6년 후인 1948년 행주 본당에 다시 신부가 부임하였다. 서울 대목구는 1948년 2월 28일자로 김성환(金成煥, 빅토리오) 신부를 행주 본당의 신부로 임명하였다.21) 원래 김 신부는 연길교구에서 사제 생활을 하던 신부였다. 1945년 용정 상시 본당 주임으로 재임하던 김 신부는 간도를 점령한 소련군과 중국 팔로군의 탄압으로 고초를 겪었다. 1946년 중국 공산당이 연길교구의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체포하였으나 김 신부를 비롯한 한국인 신부와 수녀들은 적국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1947년 8월 1일 공산당이 한국인 신부들을 체포하자, 김 신부는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한국으로 피신했다.22) 그해 11월에 남한으로 온 김 신부는 서울 대목구의 지시에 따라 행주 본당에 부임하게 된 것이었다.23)

김성환 신부는 연길에서 월남한 성 베네딕도 수녀회의 수녀들을 본당으로 초청하였다. 이에 1948년 3월 서인화 베르나뎃다
· 안금례 룻 · 이갑진 에와 수녀가 행주 본당에 파견되었다. 이 행주 본당 지원은 성 베네딕도 수녀회가 설립한 남한 최초의 지원이었다. 수녀들은 김 신부를 도와 선교 활동도 했고, 의료 활동도 전개했다. 하지만 당시 행주 본당의 사정이 어려웠기 때문에 수녀들도 생활하는 데에 곤란을 겪어야 했다. 그러던 중 1950년 1월, 수녀들의 소망이었던 수녀회 본원이 소사에 마련되자, 행주 지원의 수녀들은 본원으로 돌아갔다.24) 수녀들이 되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김성환 신부도 본당을 떠났다.25) 이에 행주 본당은 다시 목자 없는 교회가 되었다.

신부가 다시 부임한 것은 1953년 휴전 직후였다. 서울 대목구는 1953년 11월 인사이동을 단행하여 임충신(林忠信, 마티아) 신부를 행주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했다.26) 임 신부는 본당의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남북 분단으로 내륙과 남북 서해안을 이어주던 한강 수로가 차단되었고, 급격한 도시화로 인구 감소 현상까지 겹치면서 행주 본당의 신자 수는 급격히 감소하였다.27) 이에 서울 대목구는 1957년 6월 14일부로 본당을 서울 수색으로 이전했다.28) 이에 따라 행주 본당은 공소가 되어 수색 본당의 관할 하에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82년 8월 26일자로 수색 본당 능곡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자, 그 관할이 되었다.29)


행주 공소와 두봉 주교

1991년 행주 공소에 주교 한 분이 찾아왔다. 전 안동 교구장 두봉(R. Dupont) 주교였다. 두봉 주교는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로 1954년 한국에 입국했다. 그는 1969년 5월 29일 안동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7월 25일에 주교로 성성되었다.30) 두봉 주교는 열심히 교구 사목을 하면서도 여러 차례에 걸쳐 교구장 사임 의사를 밝혔다. “한국인 교구장을 모셔야 한다”라는 신념 때문이었다. 교황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두봉 주교의 신념이 확고함을 알고 결국 1990년 10월 31일자로 교구장의 교체를 발표했다.31) 교구장에서 물러난 두봉 주교는 안동에 남아 있으면 후임자에게 부담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안동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서울 대교구장 김수환(金壽煥, 스테파노) 추기경에게 공소 한 곳을 맡겨 달라고 청해 허락을 얻었다. 그렇게 해서 두봉 주교가 머물게 된 곳이 바로 행주 공소였다.32)

두봉 주교는 옛 학교를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임시 사제관을 지은 다음, 성당의 보수를 시작했다. 사제관과 성당의 보수가 끝나자 성모동산을 단장하고 성모자상을 모셨다. 이처럼 두봉 주교가 오면서 행주 공소는 새롭게 단장되었다.33) 두봉 주교는 공소 신자들과 함께 생활하다가 2004년 11월 안동교구에서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도원리에 마련한 은퇴 사제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행주 공소를 떠났다.34)


다시 본당으로 승격

2000년대 중반, 행주 공소에 희망의 싹이 돋아났다. 2004년 6월 24일 서울대교구 관할 지역인 경기도 북부 지역이 분할되어 의정부교구로 설정되었다. 그리고 초대 교구장으로 서울대교구 보좌주교인 이한택(李漢澤, 요셉) 주교가 임명되었다. 신설된 의정부교구의 사제총회가 개최되고 있을 무렵, 두봉 주교는 이한택 주교를 찾아가 행주 성당이 간직하고 있는 역사적 가치와 교회사적 의의를 설명하며 본당 승격과 주임 신부가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두봉 주교의 의견에 공감한 이한택 주교는 본당의 설립을 결정하였다.35) 마침내 행주 공소는 2004년 11월 18일자로 다시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홍승권(洪承權, 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주임 신부로 부임했다. 관할 구역은 행주 외동과 내동 전역이고, 신자 수는 82가구 352명이었다.36)

다시 본당으로 승격된 행주 본당은 역사를 재정립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2007년 5월 27일에 열린 ‘100주년 기념사업 선포식’이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행주 본당은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부식되고 있는 성당 복원, 신자 재교육을 위한 피정센터 건립 등을 계획하였다.37) 2008년 5월 25일에는 설립 99주년을 기념하여 야외 십자가의 길을 축성하고 주요 연보 및 사진자료 등을 전시한 역사자료 전시관을 개관했다.38) 그리고 2009년 5월 31일에는 이한택 주교의 주례로 ‘100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하고 100주년 역사기념관 기공식 등 기념행사도 가졌다.39)

2010년에는 행주 성당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뜻깊은 일이 있었다. 문화재청이 2010년 2월 19일자로 행주 성당을 등록문화재 제455호로 지정한 것이었다. 최초의 건립 부분과 증축 부분이 잘 남아 있고, 변천 과정에 대한 기록 유지가 잘 되어 있다는 점이 고려되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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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인성, <개화기 · 일제시대 경기 북부 지역의 천주교>, “교회사연구” 31, 2008, 51쪽.
2) <두세 신부의 1898년도 연말 보고>, “성직자 사목 서한과 약현 관계 자료”, 천주교 중림동교회, 1991, 107쪽.
3) 양인성, 앞의 글, 48-51쪽.
4) <두세 신부의 1899년도 연말 보고>, “성직자 사목 서한과 약현 관계 자료”, 113-114쪽.
5) <약현본당 교세통계표 1899-1901>(한국교회사연구소 도서실 소장).
6) <두세 신부의 1901년도 연말 보고>, “성직자 사목 서한과 약현 관계 자료”, 143쪽.
7) 양인성, 앞의 글, 53-55쪽.
8) 양인성, 위의 글, 56쪽.
9) <1909년도 보고서>, “서울교구 연보” II, 명동천주교회, 1987, 77쪽.
10) 양인성, 앞의 글, 57쪽.
11) “뮈텔 주교 일기” 4(1906-1910), 한국교회사연구소, 2008, 480쪽.
12) 방상근, <해제 - 한국 교회의 회장>, “회장”,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13-14쪽.
13) 백병근, <왕림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9, 6516-6518; ---, <하우현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2, 9320-9321쪽.
14) <신부 차정>, “경향잡지” 382호(1917. 9).
15) 편찬실, <김휘중>, “한국가톨릭대사전” 2, 1235쪽.
16) <황 신부 차정>, “경향잡지” 422호(1919. 5).
17) <익명씨의 꽃방석>, “경향잡지” 409호(1918. 11).
18) <행주성당 강복식>, “경향잡지” 647호(1928. 10).
19) <경성, 평양교구에 신부 이동>, “경향잡지” 947호(1942. 6).
20) 양인성, <노기남 신부의 경성대목구장 착좌에 대한 연구>, “교회사연구” 35, 26-29쪽.
21) <서울교구에 신부 이동>, “경향잡지” 997호(1948. 4).
22) 편찬실, <김성환>, “한국가톨릭대사전” 2, 1186-1187쪽.
23) <연길지방 박해 진상 보고 강연>, “경향잡지” 993호(1947. 12).
24) “은혜의 60년”, 부산 성베네딕도 수녀원, 1995, 226-233 및 536-537쪽.
25) 편찬실, <김성환>, “한국가톨릭대사전” 2, 1186-1187쪽.
26) <서울교구에 신부 임명>, “경향잡지” 1029호(1953. 12).
27) “수색성당 100년사”, 천주교 서울대교구 수색성당, 2009, 234쪽.
28) <서울교구에 신부 이동>, “경향잡지” 1072호(1957. 7).
29) ‘능곡
· 미아5동 등 2개 본당 신설’, <가톨릭신문> 1982년 9월 12일자.
30) 이유림, <두봉>, “한국가톨릭대사전” 3, 1934-1935쪽.
31) ‘안동교구장 주교에 박석희 신부’, <가톨릭신문> 1990년 11월 4일자.
32)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 은퇴 사제의 삶과 신앙, 전 안동교구장 두봉 주교(7)’, <가톨릭신문> 2002년 5월 19일자.
33) 강종민, “행주성당 100년 이야기”, 아녜스 출판사, 2011, 262-270쪽.
34) ‘동정’, <평화신문> 2004년 11월 28일자.
35) 강종민, 앞의 책, 273-274쪽.
36) ‘의정부교구 본당 신설’, <가톨릭신문> 2004년 12월 5일자.
37) ‘고양시 행주본당, 100주년 기념사업 선포식 열어’, <평화신문> 2007년 6월 3일자.
38) ‘의정부교구 행주본당 설립 99돌’, <가톨릭신문> 2008년 6월 1일자; ‘행주본당 99돌 기념 미사 - 100돌 역사자료 전시관 개관’, <평화신문> 2008년 6월 1일자.
39) ‘의정부교구 행주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미사
· 기념식’, <가톨릭신문> 2009년 6월 7일자.
40) 문화재청 홈페이지(www.cha.go.kr)

[교회와 역사, 2012년 8월호,
양인성 대건 안드레아(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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