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종교철학ㅣ사상

아우구스티노를 만나다: 카시키아쿰 대화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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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3-23 ㅣ No.92

[아우구스티노를 만나다] ‘그리스도교 철학’의 탄생

카시키아쿰 대화편


구세사의 웅장한 산맥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주봉을 가운데 두고 저편 구약시대에는 모세라는 웅장한 봉우리가 자리 잡고 이쪽 신약시대에는 바오로라는 영봉이 우뚝 솟아있다. 그리고 바오로에 이어서 뻗어내리기 시작하는 그리스도교 산줄기에 단연 뛰어난 영봉은 성 아우구스티노다.


진리의 갈증

아우구스티노는 나이 열여섯 살에 고향을 떠나 카르타고로 가서 수사학을 공부하는데 학교에서도 급장이 되고, 카르타고 극시 경연대회에서 장원을 하여 총독에게 월계관을 받아 쓸 만큼 출중한 재능을 보였다. 또 그 나이에 그곳에서 사귄 여자와 동거를 시작하고 이듬해에는 아들을 낳아 ‘하느님께 받은 자(아데오다투스)’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어머니 모니카는 훗날 15년간이나 아들 수발을 해준 이 여자를 기어코 아프리카로 쫓아 보내고 양가집 열두 살 처녀와 아들을 약혼시키면서도 이 손자만은 끔찍이 귀여워한다.)

그 지경에서도 아우구스티노는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라는 철학서를 혼자서 읽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을 혼자서 독학하는 등 진리에 대해 타고난 그리움을 느꼈다.

“오, 진리여, 진리여! 저 사람들이 당신을 외칠 적에, 그렇게도 흔하게 그렇게도 다채롭게, 때로는 소리로만 때로는 많고도 커다란 책자로 당신을 말소리로 드러낼 때에, 내 영혼의 골수가 얼마나 당신을 속으로 사무치게 그리워했습니까!”(「고백록」 3. 6. 10)

정녕 그에게 진리는 학습하는 무엇이 아니라 날마다 먹고 마시는 음식이었으며, 그는 직업적으로 철학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철학을 살았고, 진리를 따진 것이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였다!

“인간은 그 목적에 이르지 못하는 한 완성을 볼 수 없습니다. 그 목적이란 전력을 다해 진리를 추구하는 데에 있습니다”(「아카데미아 학파 반박」 1. 3. 9).


카시키아쿰의 은둔과 사색

진리에 대한 이러한 열애는 청년으로 하여금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교 성경을 뒤지게 만들었으나 불가타 라틴어의 소박한 성서 문체는 수사학으로 세련된 그의 안중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그는 열아홉 살에 마니교에 빠져 10여 년을 헤매고 수많은 지인들을 마니교로 끌어들인다. 마니교의 주선으로 생활의 터전을 로마로 옮기고, 마니교의 추천으로 밀라노 황실의 수사학 교수직에까지 오른 그가 사상 전환을 하고 그리스도교로 입교하는 계기를 발견한 것은 플라톤의 철학, 특히 플로티누스의 저서를 읽으면서였다.

388년 가을, 아우구스티노는 로마 제국의 황실 수사학 교수직을 돌연 사임하고 밀라노 근교의 카시키아쿰이라는 동네로 물러가 은둔생활을 하면서 이듬해 부활절에 있을 세례를 준비하고 있었다. 상당수의 식솔과 문하생들이 그와 함께 머물렀다. 모처럼의 여가를 즐기는 중에 아우구스티노는 종종 문하생들과 한자리에 모여 여태 자기 지성을 고뇌하게 만들어왔던 철학 주제들을 하나씩 꺼내 토론을 벌였고 속기사를 불러 토론한 내용을 기록하여 책으로 만들어 남겼다.

그렇게 마련된 아우구스티노의 「대화편」이 중요한 것은 그리스 - 로마의 헬레니즘과 신구약 성경을 맥으로 이어온 헤브라이즘이 여기서 합류하여 중세와 근대로 이어오는 ‘그리스도교 사상’으로 정립되었기 때문이다. 인류에게는, “고대 그리스 로마 세계의 철학과 문학의 최후의 대가요 가장 위대한 라틴 사상가”를 얻는 순간이기도 했다.

철학사에서 ‘아우구스티노의 대화편’이라고 일컫는 작품들(필자가 원문 번역과 주해를 최근에 마쳤다.)은 「아카데미아 학파 반박」, 「행복한 삶」, 「질서론」, 「독백」, 「영혼 불멸」, 「영혼의 크기」, 「자유의지론」, 「교사론」 등 여덟 책이다. 이렇게 정리한 철학사상을 수년 뒤 한 권으로 정리한 교본이, ‘아우구스티노의 철학소전(哲學小典)’으로 부르는 「참된 종교」(성염 역, 분도출판사, 2011년[수정판])이다.


“내가 속는다면 나는 존재한다”

「아카데미아 학파 반박」은 마니교를 빠져나오자마자 그를 방황케 했던 회의론을 극복하는 과정이다.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면 철학적 구도적 노력은 다 헛것이다. 이 책의 주제는 뒷날 “내가 속는다면 나는 존재한다(si fallor, sum).”라는 유명한 명제로 간추려진다.

그리고 인간은 권위(하느님의 계시)와 오성의 탐구(철학)로, 곧 신앙과 이성으로 진리에 도달한다는 주장을 내세우면서도 “이해하기 위하여 믿어라!(crede, ut intellegas!)”는 외침을 일평생 지속한다. 이 교부 덕분에 가톨릭교회에는 철학과 신학을 한데 종합하는 전통이 만들어졌다.

「행복한 삶」은 진리를 찾는 탐구만으로도 행복한가, 진리를 획득해야만 행복한가를 토론하는데 “참된 철학자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verus philosophus amator dei)”라는 명제로 정립된다. 진리이신 하느님을 향유하는 사람만이 진정 행복하므로, 그는 사색과 종교를 결합시킬 줄 모르는 철학은 호기심에 불과하다고 지탄한다.

그리고 창조주 하느님이 만유와 역사를 섭리하시는 분이라는 신학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질서론」이다. 고대부터 제기한 ‘선악이원론’에 맞서는 그리스도교적 해법이 처음 시도되며, 인생과 자연계에서 경험하는 ‘무질서’의 원천과 책임 문제가 토론된다. 참지혜는 세계의 진선미를 관조하면서 그 원형이신 하느님께 동화하는 일, 결국 “하느님과 함께 있음(esse cum deo)”이라고 귀결된다.

「독백」은 “하느님과 영혼을 알고 싶다.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라는 문답으로 시작하여 “밖으로 나가지 말라! 그대 안으로 돌아오라! 그대 안에 진리께서 거하신다.”는 선언으로 끝난다. 아우구스티노를 실존철학의 원조라고 부르는 까닭도 이 책에 있다. 영혼이 섬세한 물질인가, 아니면 불멸하는 영인가 하는 토론과 영혼이 신체와 어떻게 결합해 있는가 하는 고전적인 토론이 「영혼 불멸」과 「영혼의 위대함(크기)」에 담겨있다. 인간이 죽음으로 소멸한다면 모든 종교는 일거에 붕괴된다.

위대한 지성 아우구스티노는 “나에게 순결과 절제를 주소서. 그러나 지금은 말고.”(「고백록」 8. 7. 17)라고 실토할 만큼 일평생 죄악의 문제로 고민하면서도, “복수의 하느님이자 동시에 자비의 샘이시여, 당신께서는 당신의 도망자들의 등 뒤를 바싹 쫓아가시면서 놀라운 방식으로 우리를 당신께 돌이키십니다.”(「고백록」 4. 4. 7)라고 수긍할 정도로 ‘하늘 사냥개’의 추격과 기어코 자기의 항복을 받아내고 마는 은총의 위력을 절감하였다.

그가 만유는 선한 하느님의 선한 창조물이라면서 이원론을 극복하고, 악의 출처를 인간의 선한 자유의지로 규정하고, 세상의 악을 ‘죄악’과 ‘죄벌(고통)’로 나눈 「자유의지론」(성염 역, 분도출판사, 1998년)은 개인적으로도 집단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악을 극복하는 용기를 인류에게 제공하였다. 악이 인간에게서 발생한다면 인간의 노력으로 척결할 희망이 보이는 까닭이다.

마지막 대화편 「교사론」은 아우구스티노의 언어철학서인데 덕분에 인류는 왜 하느님이 ‘말씀’으로 인간에게 계시하시는지, 어째서 영원한 말씀이 사람의 살이 되셔야 했는지를 수긍하게 만든다. “우리는 당신의 빛으로 빛을 봅니다(in lumine tuo lumen videmus).”라는, 아우구스티노의 조명설이 여기서 나온다. 인류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기” 때문이다(마태 23,10 참조).

* 성염 요한 보스코 - 1986년 교황청 살레시오대학에서 라틴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와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 주교황청 한국대사(2003~2007년)를 역임했다. 「하느님을 만난 사람들」 등의 저서와 「아시아인의 심성과 신학」 등 많은 역서, 「신국론」 「자유의지론」 등의 아우구스티노 주해서를 냈으며, 수십 편의 학술 논문을 발표했다.

[경향잡지, 2012년 2월호, 성염 요한 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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