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금)
(홍)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현대 영성: 오늘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길 - 관상(천국에서의 하느님 체험을 미리 맛보는 것)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2-12 ㅣ No.1757

[현대 영성] 오늘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길


관상: 천국에서의 하느님 체험을 미리 맛보는 것

 

 

교회에서 가르치는 관상에 대한 설명이 너무 어렵게 느껴져요.

하느님과의 일치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가능한가요?

 

영성신학에서는 관상을 ‘수득적(修得的) 관상’과 ‘주부적(注賦的) 혹은 순수한 관상’으로 나누어 설명을 해왔다. 수득적 관상은 개인의 노력으로써 직관의 능력에 도달하는 것으로 능동적 관상이라고도 한다. 가령 마음을 가다듬어 번뇌를 끊고 진리를 깊이 생각하여 무아정적(無我靜寂)의 경지에 몰입하는 불교의 선(禪)은 이에 해당한다. 반면, 주부적 관상은 하느님의 은혜로 인하여 신적(神的) 영역을 체험하고 신비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얻는 것으로 수동적 관상이라고도 한다. 일상생활 가운데 성령의 감화를 받아 하느님의 본성을 체험하는 경우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 이러한 구분에 대하여 과연 인간의 노력으로 관상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기도 하며, 이러한 인간의 노력 역시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견해도 있어, 두 가지로 관상을 구분하는 것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그리고 이렇게 수득적인 관상, 주부적인 관상 등으로 관상을 나누어 설명하다 보니 관상에 대해 처음 접하는 이들은 관상에 대해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관상은 수동적이고 조용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 혹은 가르멜 수도원이나 트라피스트 수도원과 같이 관상 생활을 하는 수도자들이나 체험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일반 평신도들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관상은 그저 앉아서 생각에 빠지는 것도, 초점을 잃고 멍하니 앉아 있는 것도 아니다. 관상은 기도를 잘하는 것도 아니요, 전례를 통해 평화와 만족을 얻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관상은 지적인 성취도 아니다. 책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에 관한 신학적 통찰력 이상의 것이며, 어떤 황홀이나 무아지경, 감정적 흥분이나 감미로움이 아니다. 관상이 가져오는 깨달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관상이란 과연 무엇인가?

 

현대 영성에서 관상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우선 서방교회의 여러 성인과 영성가들이 관상을 어떻게 정의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먼저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관상을 “진리를 알아차리어 기쁘고 감탄스럽게 바라봄”이라고 정의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깨닫고 기쁨과 사랑으로 바라보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지향해야 하는 길이다. 성 베르나르도는 “하느님 안에서 쉬고 있는 마음의 상승”이 관상이라고 묘사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고 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당신의 품으로 초대하신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랑을 낳게 하는 신적 진리에 대한 단순한 직관”이라고 다소 어렵게 관상을 설명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관상이란 영혼을 깨어나게 하는 하느님의 주입된 사랑의 지식이며 동시에 한 단계 한 단계 상승하여 창조주 하느님께 도달할 때까지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관상을 “사랑하는 하느님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은 상태”라고 표현했다. 13세기의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관상을 침묵 가운데 하느님과의 일치를 체험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관상의 토양에 우리가 심은 것은 활동의 수확으로 거둬들일 것이며 이것으로 관상의 목표가 성취된 것이다”라고 하면서 관상의 열매는 사랑임을 강조하였다.

 

요컨대 많은 영성가들이 말하는 공통된 관상에 대한 이해는 “사랑이신 하느님과의 친밀한 일치의 체험”이다. 사랑과 믿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삶의 신비를 바라보며 그분과 하나 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천국’ 혹은 ‘하느님 나라’이다. 우리 중에 하느님 나라, 천국에 살고 싶지 않은 이가 있겠는가! 우리 중에 진정한 사랑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지 않고 싶은 이가 누가 있겠는가! 그리고 이러한 당신과의 만남을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특정 신분의 사람들에게만 유보해 두셨겠는가! 관상은 천국에서 하느님을 직접 마주 뵙는 지복직관(至福直觀 1코린 13,12 참조)의 은총을 지금 여기에서 미리 맛보는 것이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우리 모두에게는 이미 그 마음 안에 관상의 씨앗이 심어져 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씨앗이 싹트고 자라고 잎을 내고 열매를 맺었는가 하면, 어떤 이는 아직 씨앗 그대로 있다. 관상기도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그 씨앗이 싹트기를 준비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에게 관상이 필요하며, 관상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

 

[2022년 2월 13일 연중 제6주일 가톨릭마산 2면, 박재찬 안셀모 신부(분도 명상의 집)]



650 1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