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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사목] 전통 가정과 가톨릭 가정4-5: 부모의 자애, 자식의 효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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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7-21 ㅣ No.1112

[전통 가정과 가톨릭 가정] (4) 부모의 자애, 자식의 효심 (상)


새 생명 축복하는 탄생의례… 가톨릭 가정의 유아세례가 본보기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키우셨네. / 쓰다듬어 기르시고 키우고 가르치셨네. / 거듭 살피시고 드나들며 안아주셨네. / 이 은혜 갚고자 하나 하늘처럼 그지없어라.’(「시경」 〈소아〉)

 

어떤 이들은 이 대목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한다. 아버지가 어떻게 나를 낳았단 말인가. 요즘처럼 아버지는 돈이나 벌어오는 존재라는 그릇된 인식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봉건질서 속에서의 가부장적 관념도 큰 문제였지만, 지금처럼 아버지가 가정을 이끌어가는 소중한 존재로 대접받지 못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사실 아버지는 자식에게 생명의 씨앗을 전해주었다. 그 정자는 난자와 결합하여 비로소 새로운 생명체가 되었다. 어머니는 그 생명체를 열 달간 뱃속에서 키운 뒤, 출산하여 젖을 먹여 키웠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자식을 낳았고, 어머니가 자식을 키웠다는 말이 그르지 않다.

 

지금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 하나만 꼽으라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숨을 들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평생 추구해온 재산과 지위와 명예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비로소 공수래공수거를 실감한다. 그만큼 생명은 그 무엇에도 견줄 수 없이 귀하고 소중하다. 그러므로 목숨 바쳐 어떤 일을 하였다는 것은 위대하다는 뜻과 통하게 된다. 목숨 바쳐 자신의 소임을 다한 순직, 목숨 바쳐 나라를 지킨 순국, 목숨 바쳐 궁극적 존재를 증거한 순교가 거룩하고 장엄한 까닭이다.

 

부부의 가장 큰 축복은 바로 그들의 분신과도 같은 자녀의 출생일 것이다. 부부가 나눈 사랑의 결실로서 태어난 생명이기 때문이다. 가정에 이보다 더 큰 경사가 또 어디 있을까. 남편과 아내로 시작한 가정이 부모와 자식이라는 가족으로 확대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호사다마라 했던가. 예전에는 영아 생존율이 지극히 낮아 출산과 함께 기쁨과 두려움이 교차하였다. 이에 따라 새 생명의 탄생을 축하하는 동시에 새 생명의 창성을 기원하는 탄생의례가 신중하고도 엄숙하게 치러졌다.

 

우리의 전통적인 탄생의례는 금줄을 대문에 거는 방식이었다. 남아가 태어나면 새끼줄에 숯과 고추를, 여아가 태어나면 숯과 솔가지와 흰 종이를 꿰서 문 앞에 걸었다. 그렇게 삼칠일간 걸어서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였다. 이는 곧 갓난아기를 일정 기간 동안 일정 장소에 격리시키는 행위였다. 불완전한 아이가 온전한 존재로 거듭나기 위한 의례였던 것이다.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고 경사로운 곳으로 나아가는 벽사진경(辟邪進慶)의 의미이자 상서롭지 않은 것을 물리치고자 하는 불제불상(祓除不祥)의 바람이었다. 삼칠일은 사람이 되고자 한 곰이 동굴에 들어가 웅녀로 변신한 시간이었다. 이러한 신화의 후래적 관습은 갓난아이가 사람으로 인정받는, 비로소 살았다고 한숨 돌리는 시간이었다. 오늘날 과학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면역력이 약한 갓난아기를 외부의 감염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격리조치이기도 하였다.

 

또한 금줄은 새 생명이 탄생한 것을 온 마을에 선포하는 상징이기도 했다. 이러한 의례를 통해 새 생명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불러일으키고자 한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이다. 금줄을 건 집안에서는 새 생명이 탄생한 것을 온 마을에 알려 자랑하고, 그 금줄을 본 이웃은 새 생명의 탄생을 부러워하고 축하해주었던 것이다. 그러한 축복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가 성장하면서 자중 자애하는 한편, 생명의 고귀함을 깨우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탄생의례가 중요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을 보이는 반면, 가장 높은 낙태율을 기록하고 있다. 더욱이 최근까지 시행되었던 산아제한정책은 새 생명의 출생을 도외시하거나 경원시하는 풍조를 만들었다. 그러다 저출산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당국은 역으로 산아촉진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는 데 급급하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무조건 자녀를 많이 낳으라는 독려가 아니라 생명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새 생명을 축복하는 한편, 온전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는 의례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가톨릭 가정에서 유아세례를 주는 것이 그 좋은 본보기가 된다. 그 기반에 생명의 고귀함과 인간의 존엄함이 전제된 생명의 문화를 펼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물질적 논리의 대박이 아니라 정신적 논리의 다복(多福)을 꿈꾸어야 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자식이 많은 것을 다복하다고 하였던 우리 선조들의 속 깊은 마음과 성경의 말씀이 다르지 않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창세 1,28)

 

김문태 교수(힐라리오) - 서울디지털대학교 교양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우리의 전통문화가 살아 숨 쉬는 현장과 강단에서 고전문학과 구비문학을 연구해왔으며, 중국선교답사기인 「둥베이는 말한다」등 다수의 저서를 펴냈다. [가톨릭신문, 2018년 7월 22일, 김문태 교수]

 

 

[전통 가정과 가톨릭 가정] (5) 부모의 자애, 자식의 효심 (하)


부모는 행동으로 본을 보이고 자식은 효도로 보답을

 

 

‘부모와 자식은 하늘이 정해준 친한 관계다. 따라서 부모는 자식을 낳아서 기르고 사랑하고 가르쳐야 하며, 자식은 부모를 받들어 뜻을 이어가고 효도하면서 봉양해야 한다.’(「동몽선습」 ‘부자유친’)

 

부모는 분신과 같은 자식에게 자애롭게 대하고, 자식은 생명을 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야말로 사람답게 사는 첫걸음이었다. 한국천주교회 초기의 신심서인 「사후묵상」(死後默想)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옛날에 어느 귀한 집 아들이 부귀공명만 사랑하는 부모와 달리 덕행이 범상치 않았다. 정결을 지키려 했던 그는 부모가 억지로 장가들이려 하자 가출했다가 칠 년 만에 돌아왔다. 부모와 노복은 초췌한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하인으로 행랑채에 기거하며 칠 년간 집안의 궂은일을 하다 죽어 승천했다. 그때 궁궐에서 성인이 났음을 알리는 북소리가 났다. 그러자 왕이 신하들에게 북을 두드려보라고 했는데, 그 아들의 아버지 차례에 이르러 북소리가 크게 울렸다. 놀란 그 아버지가 집에 돌아와 눈부시게 찬란한 행랑방에 들어가 아들의 편지를 보고 나서야 천주의 은혜에 감사했다. 그 후 그 부모는 행실을 고쳐 신심 깊게 살았다.

 

흔히 부모는 자식을 소유물로 여기거나 자신이 하지 못한 일을 자식이 대신 이루어주기를 바란다. 자신들이 낳았으니 그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한 관계 속에서 부자유친의 규범은 완성될 수 없다. 서로를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하고 존중할 때, 자애심도 효심도 온전하게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고 책임 있는 존재로 인정받을 타고난 권리를 지니고 있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이러한 권리를 존중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738항)는 교회의 가르침이 따끔하다.

 

자녀 교육에 있어서 최고의 덕목은 솔선수범이다. 부모는 말에 앞서 먼저 행동으로써 자식에게 본을 보여야 한다. 실제로 부모가 책을 읽는 가정에서는 자녀도 책을 가까이하고, 부모가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가정에서는 자녀도 봉사에 앞장선다. 부모는 TV를 시청하면서 자식에게 방에 들어가 공부하라는 말은 설득력이 없다. 부모는 남에게 어떠한 배려도 하지 않으면서 자식에게 선하게 살라고 하는 말은 감화력이 없다.

 

그래서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고 한다. ‘어린아이는 괴는 데로 간다’는 속담처럼 자녀는 부모를 따르고 본받기 마련이다. 백 마디의 말보다 본보기가 될 만한 하나의 행동이 자녀를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촉진제가 된다. ‘어버이들은 자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말고 주님의 정신으로 교육하고 훈계하며 잘 기르십시오’(에페 6,4)라는 성경 말씀이 지침이 된다.

 

한편 자식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낳아준 부모에게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마음을 효심이라 칭한다. 모자간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삼국유사」의 ‘진정사 효선쌍미’에 전해온다.

 

진정은 쇠솥 하나 달랑 남아있는 가난한 집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군대에서 복역하면서 틈틈이 일해 곡식을 얻어 봉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시주하러 온 스님에게 하나밖에 없는 솥을 내주고 말았다. 여느 자식 같았다면 그런 어머니에게 성을 냈겠지만, 진정은 어머니의 선행에 박수치며 좋아했다. 쇠솥이 없으면 흙으로 솥을 빚어 쓰면 그만이었다. 이번에는 어머니 차례였다. 외아들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에 출가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자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쌀자루를 톡톡 털어 모두 밥을 지었다. 한 그릇은 지금 먹고, 나머지는 모두 싸가지고 가면서 먹으라고 했다. 그 아들에 그 어머니였다. 진정은 눈물 흘리며 그 밥을 꾸역꾸역 삼키고는 출가했다. 그는 삼 년 뒤에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는 칠 일간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복을 빌었다. 이에 감탄한 의상법사가 제자 삼천 명을 이끌고 석 달간 「화엄대전」을 설법했다. 진정의 효심이 세상을 감동시켰고, 그 마음이 하늘에 닿아 마침내 그 어머니는 극락왕생했다.

 

부모는 자식을 자애롭게 대하며 본을 보이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심으로써 보답했다는 이야기가 오늘도 가슴에 파고든다. 사람은 누구나 부모는 될 수 없어도 반드시 누군가의 자녀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할 대목이다. 우리는 온갖 시련과 고통을 이기고 생명을 전해준 자녀를 어떤 심정으로 대하고 있는가. 또한 소중한 생명을 전해준 부모를 어떤 마음으로 봉양하고 있는가. 다른 집의 자식이나 부모와 비교하며 원망하거나 속상해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게 된다. 가정을 꾸린 부부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 자녀의 탄생이고, 자녀가 지니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생명 아닌가. 그래서 자신을 빼닮은 자녀, 자신과 흡사하게 생긴 부모를 보며 가슴 뭉클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보다. [가톨릭신문, 2018년 7월 29일, 김문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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