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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영화를 읽어 주는 남자: 어느 아침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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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7-29 ㅣ No.1113

[영화를 읽어 주는 남자] 어느 아침의 기억

 

 

스페인의 영화감독 호세 루이스 게린의 2011년 작인 「어느 아침의 기억」은 한 바이올리니스트의 죽음을 되짚어 가는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감독이 사는 집 발코니에서 바라본 풍경들로 영화는 시작합니다. 날씨의 변화와 나무의 순환을 통해 시간의 경과를 암시하는 짧은 컷들이 반복되며 관객은 이를 통해 맞은 편 건물의 사람들을 관찰하게 됩니다. 어느 날, 맞은 편 건물이 새 단장을 하고 카메라는 발코니를 떠나 그 건물 안으로 들어갑니다. 카메라가 묻는 것은 속옷차림으로 바이올린을 켜던 남자, 마넬의 죽음입니다. 건축 연대로 추정되는 1900이라는 숫자가 커다랗게 새겨진 그 건물에 사는 다양한 사람들은 대부분 마넬을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창밖으로 들려오던 바이올린 연주를 듣고 기억하고 추측할 뿐입니다. 친하게 지내던 소수의 사람들 역시 마넬의 죽음을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들은 매년 그 죽음을 기억하는 건배를 할 뿐입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마넬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를 통해 관객은 서서히 그를 알게 됩니다. 카메라는 마지막으로 마넬이 살던 방으로 향합니다. 방은 마지막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의 흔적들과 영화 속에서 그와 동일시되던 사람들의 시선은 죽은 마넬의 방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계속해서 누군가의 시점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카메라 뒤에는 주로 질문하고 관찰하는 감독이 있습니다. 따라서 영화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것은 감독의 시선입니다. 처음 영화의 주제를 찾아 자신의 발코니에서 건너편을 바라보는 감독의 눈이 마넬을 발견합니다. 감독은 단 한 번도 카메라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유리창이나 거울에 반사되는 모습으로 관객에게 감독이 카메라를 들고 있다고 인지하도록 만듭니다. 이를 통해 마넬의 기억을 추적하는 감독의 시선에 관객이 동참하게 됩니다. 감독은 계속해서 발코니의 창이 보여주는 이미지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건너편 건물의 또 다른 수많은 창들이 보여주는 이미지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삶에 대한 궁금증을 키워나갑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관음증적인 욕망은 ‘마넬이 왜 죽었을까?’라는 궁금증으로 전환됩니다.

 

마넬을 기억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넬이 스쳐 지나간 순간, 멀리서 보이던 모습, 연주하던 소리와 같은 단편적 기억을 갖고 있을 뿐 입니다. 그런데 마넬이 죽은 지 이년이나 흐른 시점에도 사람들은 마넬을 아주 자세히 기억합니다. 미용실에서 만난 한 사람은 ‘모든 죽음은 이야깃거리가 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마넬의 발코니를 바라보았거나 혹은 자신의 발코니로 들어오는 마넬의 연주를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마넬을 알게 되는 것은 마넬이 부재한 순간부터입니다. 사람들은 그제야 서로 마넬의 연주를 말하고 생전 모습을 기억하기 시작합니다. 음악가들은 마넬의 음악을 이야기하며 스스로와 동일시합니다. 바이올린을 하는 사람은 같은 악기를 한다는 이유로, 색소폰을 연주하는 사람은 스케일(화음 음계)을 연습하는 습관이 닮았다는 이유로 마넬에 대한 기억들을 자신에게 맞춥니다. 마넬의 죽음을 직접 본 사람들의 기억은 그들이 갖게 된 사건의 외상을 보여줍니다. 분수대와 바 사이의 공간에 떨어진 마넬의 마지막을 목격한 사람들에게 그 공간은 더 이상 그 전과 같은 곳일 수 없습니다. 그 공간을 마주할 때면 그들의 망막 뒤에서는 언제나 마넬의 죽음이 재현됩니다. 사람들은 그 기억을 떠올리며 “마치 영화 같았어요.”, “리얼리티 쇼를 보는 것 같았지요.”하고 말을 합니다. 매체가 다루는 비극, 죽음은 현실보다 더 강조되기 마련이고 그것이 사람들에게는 현실로 인식되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의 죽음이 매체가 구현한 현실을 상기시키는 역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호세 루이스 게린 감독은 영화의 매체성과 영화 그 자체에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이니스프리」에서는 영화 감독 존 포드의 「조용한 사나이」가 촬영된 마을을 찾아가 영화가 촬영될 당시의 이야기를 듣는 구조를 가지고 ‘영화가 기억하는 공간’, ‘영화를 통해 기억되는 공간’들에 대한 감독의 생각들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림자 열차」는 한 아마추어 사진작가의 유품인 가족 기록 필름에서 그에 대한 기억을 찾는 구조의 내용입니다. 이 영화에서도 감독은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라는 매체 자체를 탐구합니다. 「어느 아침의 기억」의 마지막에서 감독은 첼로 교습소 꼬마의 입을 통해 오르페우스 신화를 이야기합니다. 목이 잘려 떠내려가면서도 계속해서 노래해야만 했던 오르페우스, 게린은 영화를 만드는 것을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듯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마넬의 집에서 벽에 걸려 있는 그림과 카메라의 클로즈업이 의미심장하게 제시됩니다. 한 남자는 바이올린을 켜고 있고 다른 남자는 그것을 바라보며 좌절에 빠져 있습니다. 이 그림들의 클로즈업 사이에 감독은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삽입했습니다. 그 영화에서 채플린은 광적으로 바이올린을 켜다가 우스꽝스럽게 넘어집니다. 감독은 영화라는 것이 현실의 재현을 통해 비극적 상황에서도 그것을 넘어 극복하는 희망을 갖게 하는 것이라는 작가적 신념을 관객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 글을 쓰기 위해 영화를 다시 보면서 우리 사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라진 후에야 그것을 기억하게 되는 현실은 차치하고서라도 말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매체와 현실은 자주 뒤바뀝니다. 사람들은 매체를 통해 접하는 잔인한 사건들을 통해 점점 더 자극에 둔감해지고 가상연애나 극한의 생존을 보며 현실을 잊고 부조리를 인내하는 것에 익숙해집니다. 일상적인 선택에서부터 정치적인 결정까지 매체를 통해 정보를 얻고 매체가 알려주는 대로 믿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사회일수록 매체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책임과 윤리는 중요해지는 것이겠지요. 영화 제작을 업으로 살아가는 저에게도 그것은 막중한 임우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힘을 가진 자들은 블랙리스트, 화이트리스트로 나누어가며 예술가들을 길들이고 현실을 비참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목이 잘려 떠내려가면서도 계속해서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던 오르페우스와 같은 운명을 살아가는 이들이 신념을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오기를 소망합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7년 가을호(Vol. 39), 이창민 세례자 요한(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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