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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사목] 본당 공동체의 새로운 교회상: 가난한 이들의 교회, 가난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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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9-23 ㅣ No.882

[증언, 한국교회의 과제] 본당 공동체의 새로운 교회상


가난한 이들의 교회, 가난한 교회



한국교회에 많은 과제를 남기고 떠나신 프란치스코 교종이 한국을 방문하신지 1년이 지났다. 교종께서 방한기간 중에 하신 여러 연설과 강론은 우리에게 큰 위로와 희망과 깨달음을 주었지만, 무엇보다도 사회적 약자들을 만나 함께하시며 그들의 처지와 인격을 소중하게 대하시는 모습은 큰 감동이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교종의 확고한 신념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분이 남긴 한국교회의 과제 가운데 하나는, 그분의 표현대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이들의 교회,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라는 생각이 든다.

그분은 한국의 주교들에게 이러한 사도시대의 모습이 우리 한국교회의 첫 신앙 공동체에서 찾아볼 수 있음을 상기시켜 주셨고, 오늘날 한국교회가 계속 그 길을 걷도록 독려하고 강조하셨다(2014년 8월 14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주교들과의 만남 연설 참조).


새로운 본당상 : 중요하고 절박한 과제

오늘날 한국사회에 필요한 본당상은 ‘가난한 이들의 교회, 가난한 교회’로서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실현하는 것은 한국교회에 새로운 과제이자 절박한 문제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첫째, 교회로서의 본당 공동체와 이상적 목표로서의 ‘가난한 교회’상의 불가분의 관계는 종말론적 복음화 관점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올해로 폐막 50주년을 맞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따르면, 교회로서의 본당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가난하여야 하고 가난한 이들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에 현존하게 하는 복음화 사명을 갖는 공동체이다(교회헌장, 8항; 선교교령, 5항 참조).

본당은 교회 본질적으로 ‘순례하는 교회’(교회헌장, 8항 참조)의 가시적인 존재이고 성령께서 주시는 생명과 힘에 따른 친교가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장소(4항, 7항 참조)이다. 또한 이미 세상 안에 현존하면서 동시에 아직 충만하게 실현되지 않은(‘이미 그러나 아직 아니’) 종말론적인 교회(제7장 참조)로 이해되는 공동체이다. 이에 따라 본당은 이 사회의 모든 이에게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풍요로움을 전하는’(에페 3,8 참조) 사명을 완수하는 여정에 있다.

둘째, 새로운 본당상을 실현해야 하는 이유는 오늘날 이 사회에 대한 교회의 도리 때문이다. 광복 70년이자 분단 70년을 보내고 있는 지금 한국사회는 신자유주의 물결에 휩쓸리며 배금주의에 젖어 극단적 이기주의와 부정부패, 그리고 불의가 만연된 사회가 되었다. 그래서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심각한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은 더욱 많이 생겨나고, 이들의 삶은 양적 · 질적 고통의 무게를 점점 더 감당하기 힘들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존재는 이 사회에서 더욱 소외되고 무시되며 잊히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실 안에서, 본당은 그 주위에서 만나는 가난한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기쁨’과 ‘희망’이 되도록 부름을 받는다(사목헌장, 1항 참조). 지금 한국의 가난한 이들은 가까이에 있는 본당에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찾는 방법(마태 11,28-30 참조)을 절박하게 묻고 있다.

셋째,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이가 진단하고 여러 설문조사의 통계자료에서 드러나듯이, 지금의 한국사회처럼 한국교회도 가난한 이들과의 사이에 심한 간극이 있다. 그 책임은 오로지 우리 교회에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가난한 이들은 결코 교회에서 먼저 멀어지지 않는다. 그들이 교회를 떠난다면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모습에서 복음적 가난의 영성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당을 구성하고 주도적으로 봉사하는 평신도들의 사회적 계층 또한 지난날에 비해 더욱 중산층화 또는 중상층화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교구 차원은 더하다.

물론, 한국교회의 이러한 양상이 교회의 본질적 정체성에 비추어 볼 때 문제가 있다는 지적과 함께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로 쇄신되어야 한다는 자기반성이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온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동안 모든 교구와 본당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적 배려와 재정적 지원 등을 나눔과 섬김의 이름으로 체계적으로 실천해온 것도 사실이다. 이는 당연히 교회의 이웃 사랑 실천의 사명에 충실한 긍정적인 모습으로 충분히 존중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절박한 이 과제는 교회의 자선적 사목의 규모 확장이나 그 실천의 체계적 조직이라는 차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요청에 따른 열린 교회상의 구현에 있다고 본다. 곧, 구체적 교회인 본당이 그 자체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에서 ‘가난한 이들의 교회, 가난한 교회’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위해 노력할 뿐 아니라, 교회 자체가 가난해져 가난한 이들이 편한 마음으로 찾을 수 있는 새로운 교회상으로의 방향전환을 말한다. 이러한 방향전환은 한국사회뿐만 아니라 한국교회를 위해서도 참으로 중요하고 절박한 과제이다.


가난한 이들을 하느님 백성으로 보아야

새로운 본당상을 실현하려면 가난한 이들도 하느님의 한 백성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성경에서 하느님 백성은 소외나 차별 없이 그들이 최우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 이유로 가난한 이들을 구호사업이나 복지사업의 대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본당이란 ‘주고 베푸는’ 교회만이 아니라 ‘받고 함께 성장하는’ 교회이다.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처지와 삶의 자리, 그리고 그들의 사회적 위상에 관한 관심과 배려를 우선하면서 다음의 질문을 늘 해야 한다. 왜 가난한 사람들이 생겨나는가? 가난한 사람들이 놓인 비인간적 환경은 무엇인가? 어떻게 그들의 환경을 바꿀 수 있을 것인가?

프란치스코 교종은 현대적 맥락에서 오늘날 가난한 이들이 누구인지를 구체적으로 열거하며 그들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셨다(「복음의 기쁨」, 210-215항 참조). 이들은 모두 강요된 가난으로 말미암아 속박되어 그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불의하고 불합리한 사회적 구조의 희생자들이다.

가난한 이들의 교회, 가난한 교회로서의 본당은 사람들을 비인간화시키는 이런 강요된 가난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힘으로 극복하도록 노력하는 동시에 가난한 이들이 최대한 인간화되어 갈 수 있는 환경으로(자연환경만이 아니라 ‘인간환경’까지도) 개선시키는 본당이다(「복음의 기쁨」, 202항, 204항 참조).

“우리는 점점 더 세계화되는 세상 안에서 공동선과 진보와 발전을 단순히 경제적 개념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사람을 중심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 가난한 사람들과 취약 계층 그리고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각별히 배려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그들의 절박한 요구를 해결해 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인간적, 문화적으로 향상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2014년 8월 14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공직자들과 만남 연설).

교구나 본당에서 실천하고 있는 사회복지 차원의 노력은 매우 소중한 사명이지만, 그것이 정부나 지자체에서 해야 할 몫을 대신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입교의 의미가 아니라 가난한 이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만나 ‘새 인간’(에페 4,22-24)으로 변화되어 복음으로 풍요롭게 살 수 있게 하여야 한다. 이러한 목적이 없다면, 본당의 새로운 복음화 실천을 구호 · 자선사업으로 축소시켜 안주하려는 또 하나의 유혹에 빠질 수도 있다.


가난한 이들에게서 복음의 새로움을 배워야

“하느님께서 친히 ‘가난하게 되실’(2코린 8,9) 정도로 하느님의 마음속에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특별한 자리가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 역사 전체는 가난한 이들의 존재를 특징으로 합니다”(「복음의 기쁨」, 197항).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 가운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적 사건인 파스카의 신비 안에, 그리고 그분의 사도적 직무를 이어가는 교회 안에 언제나 가난한 이들의 특별한 자리와 역할이 있다.

“저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바랍니다. 가난한 이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들은 신앙 감각(sensusfidei)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고통 속에서 고통 받으시는 그리스도를 알아 뵙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복음화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새로운 복음화는 가난한 이들의 삶에 미치는 구원의 힘을 깨닫고 그들을 교회 여정의 중심으로 삼으라는 초대입니다…”(「복음의 기쁨」, 198항).

물론 본당 사명의 우선적인 자리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가난한 이들 안에 내재된 ‘신앙 감각’을 통해 복음의 역동적 힘을 본당 쇄신의 밑거름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가난한 이들에게서 드러나는 복음의 ‘새로움’을 깨닫고 경험할 때 세상의 모든 이가 하느님의 구세사에 동참할 수가 있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는 사목 구조

본당이 가난한 이들의, 가난한 교회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단순히 본당의 재화와 경제적 차원에서만 다루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사목적인 차원에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시각교정이 필요하다고 본다. 본당신부와 평신도들이 함께 사목할 때 가난한 이들의 존재와 처지가 사목의 대상(객체)이 아니라 사목의 주관자(주체)로서 동반자임을 공감해야 한다.

“본당은 그 지역에서 사는 교회의 현존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인 생활이 성장하는 장소이며, 대화와 선포, 아낌없는 사랑 실천, 그리고 예배와 기념이 이루어지는 장소”(「복음의 기쁨」, 28항)이다. 본당이 갖는 이러한 우선적 특성을 고려할 때, 새로운 본당상을 구현하는 본당사목은 가난한 이들의 현존과 위상에 따른 연대가 구체적으로 사목 구조 안에도 충분히 반영되어야 한다.

본당사목과 운영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예외가 될 수도 없고, 또 예외가 되어서도 안 된다. 한국의 그 어느 본당도 가난한 이가 없는 본당은 없다. 그래서 어느 본당도 가난한 이들의, 가난한 교회를 지향하는 사목과 운영에서 그들과 무관할 수 없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연대는 복음의 중심에 있고, 그리스도인 생활의 필수 요소로 여겨야 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주교들과의 만남 연설).

“복음의 시작과 끝에도 가난한 이들이 있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주교들과의 만남 연설). 가난한 이들과 함께 연대하는 본당의 소공동체 활성화, 그런 소공동체를 중심으로 가난한 이들도 함께 구성하는 본당 사목회, 본당 사목구 내의 다른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를 스스로 기획하게 하는 사목 방향 등이 필요하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본당을 통해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가 되고 그들의 삶의 자리와 환경을 발전시키는 연대의 새로운 방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가난한 이들의 본당, 가난한 본당, 가난한 본당사목, 가난한 사목자, 가난한 평신도 봉사자…. 이 새로운 본당상은, 늘 그러하셨듯이 하느님께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시고 우리의 우선적 선택과 결단이 있는 한, 이상향으로만 그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 조진무 도미니코 - 광주대교구 신부. 1992년 사제품을 받고 프랑스 파리가톨릭대학교에서 교의신학을 전공하였다. 지금은 순천 조례동본당 주임신부이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강의도 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5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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