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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영화를 읽어 주는 남자: 말해의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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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7-31 ㅣ No.1114

[영화를 읽어 주는 남자] 말해의 사계절

 

 

영화는 어느 무덤가에서 고사리를 뜯는 한 사람을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고목의 거친 껍질처럼 보이기도 하는 피부는 살아온 억센 세월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고사리를 따며 되뇌는 노랫가락은 회한이 담긴 듯 구슬프게 들립니다. 다큐멘터리 「말해의 사계절」(허철녕 감독, 2017년)은 90세의 여성 김말해가 경상남도 밀양시 상동면 도곡마을에서 살아 가는 이야기입니다. 감독은 그곳에서 태어나 결혼을 하고, 지금껏 살던, 밀양을 벗어난 삶을 단 한 번도 생각해 볼 수 없었을 것만 같은 한 인물의 이야기를 써 내려갑니다. 한국의 현대사가 그러했던 것처럼 노인의 삶도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혹독했다는 표현이 정확합니다. 보도연맹에 연루되어 남편을 떠나보냈고 그 과정에서 시어머니가 경찰의 총탄에 희생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홀몸으로 두 아들을 키웠습니다. 이후 큰아들은 아버지가 빨갱이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겠다며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 후유증에 시달립니다.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홀몸으로 견뎌내어야만 했던 노인의 일상은 가족을 건사하기 위한 노동의 반복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말년의 삶 역시 평온하지만은 못합니다. 바로 765Kv의 고압 송전탑이 노인이 사는 마을을 지나가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송전탑이 세워지기로 예정된 부지는 바로 시부모를 모신 선산입니다.

 

「말해의 사계절」은 주인공 김말해의 마지막 싸움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감독의 시선은 투쟁의 의의와 당위성에 향하지 않습니다. 그저 주인공의 일상을 묵묵히 보여줄 뿐입니다. 감독은 영화의 제목처럼 주인공의 사계절을 가만히 지켜보고 말해의 사연은 그 속에서 자신의 입을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관객은 그제야 말해가 처음 되뇌었던 ‘내가 글을 쓸 줄만 알았더라면 책으로 몇 권은 써냈을텐데’라는 말을 이해하며 말해의 사연을 점차 알아갑니다. 감독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주인공의 삶을 기록하는 역사가의 태도를 취한 것처럼 보입니다.

 

역사가라는 단어가 거슬리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토록 사적인 시선의 카메라에 역사가의 위치라는 서술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제가 다큐멘터리 영화를 처음 소개하면서 ‘다큐멘터리란 스크린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보게 하는 창’이라는 말씀을 드렸던 것을 기억하시나요? 고대 그리스 이래로 기록해 볼 만한 역사, 이른바 공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을 의미해 왔습니다. 수 천 년이 지나고 영화가 발명된 이후에도 다큐멘터리로 기록될 만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공적인 소재라고 흔히 믿어왔고 그렇게 행해져 왔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와 같이 시간과 돈이 많이 드는 방법으로 기록한다는 것은 권력과 자본의 후원이 필요한 것이었으니까요.

 

실존주의의 시대와 신사회 운동기를 지나면서 사람들은 개인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개인적이고 사적인 것들, 그러니까 정치 이외의 것들도 공적 영역에서 말해져야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영화를 만드는 것이 쉬워지자 다큐멘터리 작가들은 권력이나 자본의 의도가 아닌,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를 향해 창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관객들은 다큐멘터리에서 보이는 세계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이루고 있는 한 부분임을 인지하고 보기 때문에 그 안에서 더욱 새로운 통찰을 얻습니다.

 

영화 「말해의 사계절」 가운데 특히 두 부분이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첫 번째는 송전탑이 지어지고 그곳을 막기 위해 둘러쳐진 바리케이트에 선친의 무덤이 가로막혀 더 이상 그곳에 다가 가지 못하게 된 노인이 철망을 부여잡고 통곡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지난 시대의 가치관을 가지고 성장한 노인이 선대의 무덤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보 혹은 발전이라고 믿는 것이 진정 우리의 희망찬 미래를 보장하는 것인지,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말해의 전통적 가치보다 우선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 묻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2015년 세상을 떠난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 감독의 「힘의 한 세기」를 떠올렸습니다. 107세의 거장이 자신의 마지막 침상 앞에서 우리에게 남겨준 이미지는 1930년대의 희망에 가득 차 이제 막 수력 발전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표정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의 한 세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이 기술문명을 통해 얼마나 더 행복해졌을까요?

 

또 한 번 인상적인 부분은 바로 말해와 그의 이웃들이 예고 없이 전기가 단전되자 일어나는 해프닝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싫어하며 싸워온 한국전력에 전화해 언제 전기를 다시 연결해 주냐며 따지고 전기가 없으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고 푸념합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도 전기를 그토록 필요로 하면서 왜 희생하지 않느냐고 질문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장면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축약해서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들어와 있는 문명은 이제 없어서는 안 될 생활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누군가는 희생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후대와 함께 나누어 써야 하는 자연을 훼손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의식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내 불편의 크기로 인해 누군가의 희생을 작거나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기도 합니다.

 

영화는 송전탑이 완공되고 송전이 시작된 마을의 일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맺습니다. 마을의 일상은 예전과 같이 계속됩니다. 하지만 그곳의 풍경이 바뀐 것처럼 긴 싸움을 거치며 이웃들의 사이도 예전과는 달라진 듯 해 쓸쓸합니다. 스크린이 어두워지고 나면 자막을 통해 김말해가 마을의 마지막 협상안 서명거부자임을 알려줍니다. 그녀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들처럼 서명을 할지 모릅니다. 더 이상의 거부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도 알 수 없습니다. 말해는 무엇을 지키기 위해 그토록 고집스럽게 싸워야만 했던 것일까요. 어쩌면 「말해의 사계절」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현대사를 둘러싸고 있는 그 수많은 ‘무엇’들에 대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다큐멘터리 「말해의 사계절」 상영문의 : sensorcube@gmail.com(허철녕 감독)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7년 겨울호(Vol. 40), 이창민 세례자 요한(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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