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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유럽 성지순례: 몬테 카시노, 수비아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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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6-24 ㅣ No.1677

[유럽 성지순례] 몬테 카시노, 수비아코

 

 

몬테 카시노 수도원 전경. 해발 519m 산정에 세워진 이 수도원은 가로 100m, 세로 200m의 웅장한 건물이다.

 

- 수비아코 수도원 성당은 예수 그리스도오의 생애와 성 베네딕토의 일생을 그린 테라스코 벽화로 장식돼 있다.

 

- 몬테 카시노 수도원 대성당 내부는 온통 금으로 치장돼 화려함이 눈부실 정도다.

 

 

평화신문 주최 제1기 유럽 수도원 순례단 19명이 2월 20일부터 11박 12일 일정으로 로마와 이탈리아, 알프스와 도나우강 일원의 수도원을 순례하고 귀국했다. 성염 주 교황청 한국대사의 환영을 받으며 바티칸 대성전을 시작으로 장도에 오른 순례단은 대자연과 하느님을 찬미하는 장엄한 수도원 전례, 그리고 순례자들에게 주머니까지 털어주는 수도자들의 겸손된 삶 속에서 모든 이의 모든 것으로 오시는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었다. 평화신문은 6회에 걸쳐 유럽 수도원 순례기를 연재한다.

 

 

수도원을 방문한 이방인 순례자에게 한 노(老) 수사가 물었다. “곤 니찌와! 니혼진데스까?” “꼬레아노!”

 

단음절로 무뚝뚝하게 대답하자 노 수사는 미안한듯 “성베네딕도 왜관 수도원을 잘 안다”며 친밀감을 표했다. 그리고 나서 노 수사는 손짓과 함께 알아들을 수 없는 이탈리아어로 한참을 뭐라 말했다. 안내원이 아주 간단하게 통역해 주었다. “몬테 카시노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몬테 카시노(Monte Cassino).

 

어릴적부터 이 말만 들으면 묘한 환상에 잠기곤 했다. 유년시절 수도생활을 동경했던 내게 몬테 카시노는 유토피아 같은 존재였다. 검은 수도복을 입은 수도자들이 그레고리오 성가로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신비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은 수도생활에 대한 몽환적 최면에 걸리기에 충분했다.

 

몬테 카시노는 이탈리아 중부, 로마와 나폴리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다. 오전 10시30분에 아빠스가 집전하는 주일미사가 있다고 해서 새벽부터 서둘렀다. 로마에서 나폴리까지 뻗어있는 라티나 도로(Via Latina)로 2시간여를 달려가니 140km 지점에 ‘카시노’라고 큼지막하게 쓴 도로 표지판이 나왔다. 표지판을 따라 시 어귀로 접어들자 왼편에 우뚝 솟은 산정에 마치 중세 고성처럼 웅장한 수도원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해발 519m에 자리잡은 몬테 카시노 수도원이다.

 

몬테 카시노는 원래 라치오 지방 카시노시에 있는 산(Monte)이란 뜻이다. 평범한 이 산이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된 것은 성 베네딕토가 529년쯤 이곳에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생활의 이상과 목표를 제시한 <수도규칙>(Regula Benedicti)를 저술했기 때문이다.

 

성 베네딕토가 이곳에 정착했을 때는 그의 나이 50이 다 됐을 무렵이다. 베네딕토는 산 정상에 있는 아폴로 신전 자리에 수도원을 세우고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성 베네딕토가 활동하던 시대는 게르만 민족의 계속된 침입으로 서로마 제국이 패망(476년)해 정치체제가 붕괴되고 윤리적으로 퇴폐의 길을 걷던 불안한 시기였다. 교회 역시 이교 민족의 계속된 침입으로 존립에 위협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네딕토는 ‘순명’, ‘겸손’, ‘침묵’을 중시하면서 공동생활을 하며 ‘기도’와 ‘노동’을 하는 수도회를 창설했다. 노동은 노예와 같은 하층민들이나 하는 천한 일로 여겼던 시대였다. 당시 유럽인들의 일반적 사고와 생활방식에서 벗어난 베네딕토의 노동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고, 그가 설립한 수도회는 ‘중세 초기 암흑기’에 영적 중심지로서뿐 아니라 유럽 사회의 도덕과 윤리, 문화 중심지로도 자리잡았다.

 

전날 밤부터 하루 종일 내린 비 때문에 몬테 카시노는 산허리까지 안개로 덮여 있었다. 큰 글씨로 ‘팍스’(PAX-평화)라고 씌어 있는 수도원 정문 앞에는 우리보다 일찍 도착한 인도 수녀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화강석과 흰색 대리석으로 지어진 몬테 카시노 수도원은 그 크기가 가로 100m, 세로 200m가 되는 어머어마한 건물이다. 수도원을 비롯해 대성당, 성 베네딕토와 여동생인 성녀 스콜라스티카의 무덤, 박물관, 도서관, 문서보관소 등을 갖추고 있으며 방만 100개가 넘는다고 한다.

 

1066년에 주조됐다는 청동문을 열고 대성당으로 들어갔다. 제단과 천정은 금으로 화려하게 치장돼 있고, 벽과 바닥은 색색의 천연 대리석으로 장식돼 있다. 조명이라고는 제대 촛불뿐인데도 눈이 부실 정도다.

 

몬테 카시노 대수도원장 베르나르도 도노리오 아빠스를 비롯해 이곳에 살고 있는 20여명의 수도자들과 함께 주일미사를 봉헌했다. 수사들이 부르는 그레고리오 성가를 들으며 어릴적 몬테 카시노에 대한 몽환적 동경을 떠올렸다.

 

베르나르도 아빠스는 미사 후 한국 순례자들에게 서명한 상본을 하나씩 선물로 주면서 성지순례를 잘 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었다. 축복을 받은 후 다음 미사 시간 전까지 몬테 카시노 수도원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보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중앙 제대 밑에 있는 성 베네딕토와 성녀 스콜라스티카의 무덤에 모여 기도하고, 성당 곳곳에 있는 성화를 감상했다. 그리고 수도원 뜨락에 있는 하늘 높이 양팔을 뻗으며 임종했던 성 베네딕토의 동상을 보면서 "하느님께 자신의 죽음을 자신있게 내맡길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빗줄기가 더욱 강해지자 서둘러 수비아코(Subiaco)로 향했다. 수비아코는 로마에서 동쪽으로 약 73km 떨어진 아니에네 강변에 위치한 해발 410m의 마을로 성 베네딕토가 수도생활을 시작한 곳이다.

 

이탈리아 중부 누르시아의 자유 시민 가정에서 출생한 베네딕토는 청년이 되어 로마로 유학을 떠났다. 문학에 심취했던 그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당시 로마에 회의를 느끼고 23살 무렵 이곳 수비아코 산중으로 들어와 가파른 절벽 중앙에 나 있는 동굴에 들어가 3년간 기도와 묵상으로 은수생활을 했다. 이 동굴을 ‘사크로 스페코’(Sacro Speco) 즉 ‘거룩한 동굴’이라고 부른다.

 

구불구불 산길을 따라 수비아코의 사크로 스페코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4시쯤. 벌써 어둑어둑해졌다. 울퉁불퉁한 바윗돌 사이로 나 있는 가파른 돌계단을 따라 몇 분을 올라가니 안개 속에 숨어있던 사크로 스페코 수도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절벽을 따라 올라가면서 지은 수도원 건물은 말 그대로 사크로 스페코였다.

 

벽화로 장식된 회랑을 지나 수도원 성당으로 들어갔다. 성당 안쪽에는 성 베네딕토가 기도하던 동굴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좁은 동굴 안에는 흰 대리석으로 조각한 청년 베네딕토상과 돌로 만든 십자가, 빵 바구니, 그리고 장궤틀 하나가 놓여 있다. 성당 내부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 베네딕토의 일생을 그린 프레스코 벽화로 온통 장식돼 있다. 동굴 밖에는 베네딕토가 이곳에서 은수생활을 하던 중 육정을 이기기 위해 알몸으로 딩굴었던 장미 정원이 그대로 있다.

 

겨울이라 볼품없는 앙상한 줄기밖에 없는 장미 정원이지만 사크로 스페코보다 더 오래 머물게 발목을 잡았다. 베네딕토는 자신의 육정보다 세상의 화려함을 짓누르고자 알몸으로 장미밭에 뒹굴지 않았을까? 솔로몬의 영화보다 더 화려함을 자랑하던 들꽃들을 온몸으로 짓이기면서 세상과의 단절을 스스로에게 선언한 것은 아닐까?

 

이런 저런 생각에 머리가 복잡한데 순례단 중 최고령자인 김만술(가타리나,70) 할머니가 손뼉을 치며 노래를 흥얼거리며 다가왔다. 조용히 하라는 표시로 검지 손가락을 입에 대며 왜 그렇게 즐거워하느냐고 묻자 “감사합니다. 여기서 천국을 보았습니다” 한다.

 

 

몬테 카시노(Monte Cassino)

 

성 베네딕토(480~547년경)가 마지막으로 정착해 <수도규칙>을 저술한 곳으로 성 베네딕도수도회의 요람이다. 베네딕토는 529년경 몬테 카시노 정상에 있던 로마 신전 자리 위에 수도원을 세워 이곳에서 지내면서 540년경 <수도규칙>을 저술한 후 정식으로 성 베네딕도회를 창설하고, 여동생 성녀 스콜라스티카와 함께 이곳에 묻혔다.

 

581년경 롬바르드족 침략으로 파괴된 후 약 140여년간 방치됐다가 717년 교황 그레고리오 2세(715~731)에 의해 복구. 이후 1349년 지진으로 다시 한번 파괴됐고, 교황 우르바노 5세(1362~1370)에 의해 1362년 재건립됐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무렵 독일군이 로마와 나폴리 중간 지점에 있는 수도원을 점령해 요새화하자 로마 진출을 꾀하던 연합군의 융탄 폭격으로 초토화됐으나 전후 이탈리아 국민들이 낸 성금으로 재건립됐다.

 

교황 바오로 6세(1963~1978)는 1964년 10월24일 완공된 몬테 카시노 수도원을 방문해 축성하고, 성 베네딕토를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한편, 몬테 카시노 수도원은 스테파노 9세(1057~1058), 빅톨 3세(1086~1087), 젤라시오 2세(1118~1119) 등 3명의 교황을 배출했다.

 

 

수비아코(Subiaco)

 

성 베네딕토가 처음으로 은수생활을 하던 곳. 수비아코는 네로 황제의 별장 ‘수블라궤움’(호수 아래)에서 유래한다. 베네딕토는 수비아코 뒷산에 있는 동굴에서 3년간 은수생활을 하고 이곳에서 12개의 수도원을 세웠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수도원은 베네딕토 성인의 여동생 이름을 딴 스콜라스티카 수도원과 사크로 스페코 수도원뿐이다.

 

오늘날 수비아코 수도원을 모원으로 하는 수비아코 연합회는 성 베네딕도회 21개 연합회 중 가장 큰 연합회다.

 

 

성 베네딕토와 성녀 스콜라스티카

 

성 베네딕토(480년~547년경)와 성녀 스콜라스티카(480년~547년경)는 이란성 쌍둥이로 이탈리아 움브리아 지방의 누르시아에서 부유한 자유시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오빠인 베네딕토가 로마 유학을 접고 수비아코로 가서 3년간 은수생활을 할 때 동생 스콜라스티카도 오빠를 따라서 수비아코의 한 수도원에서 생활했다.

 

이후 몬테 카시노 수도원을 설립한 베네딕토는 수도원에서 약 8km 떨어진 피우마롤라에 수녀원을 설립하고 이곳을 동생 스콜라스티카에게 맡겼다. 이로써 베네딕토는 가톨릭 수도회의 아버지이자 성 베네딕도수도회의 창설자가 됐고, 스콜라스티카는 성 베네딕도수녀회 첫 수녀이자 원장이 됐다.

 

베네딕토와 스콜라스티카는 매년 한 차례씩 만나 영적 담화를 나누었는데 주로 스콜라스티카가 오빠를 찾아왔다고 한다.

 

스콜라스티카가 마지막으로 베네딕토를 방문했을 때 일이다. 성녀는 예년과 같이 오빠를 방문하였지만 수도원에 들어갈 수 없었기에 베네딕토가 몇몇 수사들을 데리고 나와 인근 어느 집에서 만났다. 그들은 늘 하던 대로 함께 기도하고 영적 대화를 나누었다. 밤이 되자 스콜라스티카는 오빠에게 다음날 아침까지 함께 있기를 간청했으나 베네딕토는 수도규칙에 충실해야 한다며 거절했다.

 

스콜라스티카가 이에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자 곧 세찬 비바람이 몰아쳐 베네딕토 일행이 한 발짝도 밖으로 나갈 수 없어 그대로 머물게 돼 밤새도록 영적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이 만남이 있은 지 3일 후 베네딕토는 여동생의 영혼이 육신을 떠나 비둘기 모양으로 승천하는 환시를 보고 스콜라스티카의 죽음을 알게 됐고, 동생 시신을 수도원으로 옮겨 자신을 위해 마련해 둔 무덤에 안장했다. 베네딕토도 얼마 안돼 선종, 동생 스콜라스티카가 묻혀 있던 자신의 무덤에 안장됐다.

 

성 베네딕토는 유럽 전체 수호성인으로, 성녀 스콜라스티카는 성 베네딕도수녀회 주보성녀로 공경받고 있다.

 

[평화신문, 2004년 3월 14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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