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3일 (월)
(백)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내 마음의 성지(聖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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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7-06 ㅣ No.410

[레지오 영성] 내 마음의 성지(聖地)

 

 

어릴 적 ‘이담에 커서 뭐가 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안 받아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 다들 훌륭하고 위대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한다. 야무진 꿈들이다. 하지만 커가면서 그 꿈은 조금씩 작아진다. 내 나이 다섯 살 쯤 되었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일을 다녀오신 아버지께서는 저녁진지를 드신 후 거의 매일 저녁 나를 오른쪽 무릎에, 동생을 왼쪽 무릎에 앉혀놓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르코는 신부가 되고, 루치아는 수녀가 되고 …” 어쩌면 더 일찍부터 그리 하셨을지 모르지만 기억은 거기까지다. 

 

1959년 내가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우리 집안은 부모님, 형님, 누님 둘 해서 모두 세례를 받고 부산 범일성당을 다니기 시작하였다. 현관을 들어서면 마루 위쪽 벽 가운데 십자가는 물론, 좌우에 예수성심상본과 성모성심상본이 걸려있었다. 가톨릭신자가 거의 없던 우리 동네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똑똑히 쳐다보라는 뜻이었다. 

 

매사를 엄하고 확실히 하셨던 아버지께서는 영세한 후부터 식구들과 함께 아침 저녁기도를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바치셨다고 한다. 혹시 늦게 집에 돌아오시는 날에나 약주를 하셔서 곤드레가 되셨더라도 이미 기도를 드리고 잠자리에 들었던 우리들을 모두 깨워서 다시 기도를 바치게 하셨다. 그렇다고 짜증을 낸 적은 없지만 반쯤 졸면서 기도한 적은 많았다. 물론 기도를 드릴 때는 항상 꿇어앉아야 했다. 어쩌다 묵주까지 돌리는 날에는 다리가 저려 쥐가 날 정도였다. 

 

어릴 적 소꿉놀이를 할 때면 각기 놀이의 배역을 맡는다. 누구는 아빠가 되고 누구는 엄마가 되며, 또 누구는 아이가 된다. 그러나 난 한 번도 아빠의 역을 맡은 적이 없다. 신부는 결혼하지 않기 때문에 아버지가 될 수 없다는 단순한 논리와 신부가 되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늘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서면성당에서 첫영성체를 한 후부터는 복사단에 들어 미사복사를 서기 시작하였고, 복사들로 구성된 소년 레지오도 중학교를 마칠 때까지 하였다. 개금동 집에서 성당까지는 걸어서 40분, 돌아올 때는 버스를 탔지만 그래도 새벽미사의 복사를 도맡아 하였다. 

 

레지오 활동을 위해서는 주례동에서 개금동으로 올라오는 가파른 도로에서 야채를 실은 리어카를 자주 밀어주기도 했다. 고맙다고 아저씨가 돈이라도 주시면 당연 거절했다. 돈을 받으면 활동이 도루묵이 되니 말이다. 집에서는 담요를 제의삼아 어깨에 덮고는 동생과 함께 미사놀이를 자주했다. 성체로는 당시 건빵이 최고였다. 

 

 

어머니의 기도가 태운 촛불은 지금까지 셀 수도 없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부모님과 함께 부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진해로 갔다. 놀러가는 줄 알았는데, 가서 보니 진해통합병원이었다. 넓고 긴 병실에 들어서니 온통 환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베드에 엎드려 얼굴 쪽에 구멍을 내고 그 아래에 놓인 식판에서 식사를 하는 환자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나보다 14살 위인 형님이셨다. 1년 전 멋진 모자에 눈알도 보이지 않도록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손가락이 벨 정도로 주름을 잡은 군복을 입고서 바짓가랑이 끝에 베어링을 찰랑거리며 휴가를 다녀가셨던 해병대 형님이셨다. 

 

월남전 파병을 위한 줄타기 훈련 중에 추락하여 척추를 심하게 다치신 것이었다. 형님은 결국 휠체어를 타고 의가사 제대를 하셨다. 그때부터 어머니의 기도 지향은 내가 신부되는 것에 더하여 형님 몸이 조금이라도 낫게 되는 것이었다. 매일 새벽과 밤이 늦도록 촛불을 켜고 따로 기도하시던 어머니! 어머니의 기도가 태운 촛불은 지금까지 셀 수도 없다.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 정들었던 집을 떠나 건너편 마을로 이사를 했다. 방 두 개에 조그만 부엌 하나를 가진 아담한 집 한 채와 앞 뒤 마당이 제법 넓은 곳이었다. 마당 한 가운데는 우물이 있었다. 이사하던 날은 무던히도 추웠다. 아버지와 나는 고장 난 문짝들을 수리하고 마당을 정리했었고, 어머니와 누나는 마당에서 방과 마루를 닦느라 이내 더러워진 걸레를 빨기에 정신이 없으셨다. 

 

제법 정리가 된 저녁 늦게 우리 다섯 식구는 둘러앉아 입주파티를 했었다. 갑자기 아버지께서 어머니 손을 덥석 잡으시더니 “여보, 오늘 손 많이 시렸지? 손이 많이 텄네. 너무 고생을 시켜 미안해!” 하시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고생은 무슨 고생이라고… !” 하며 짧게 대꾸하셨다. 두 분께서 가끔 그러셨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들 앞에서는 처음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이튿날 새벽 다른 방에서 잠을 자고 있는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새벽녘에 아버지께서 고혈압으로 쓰러지신 것이었다. 어머니는 칠흑 같은 어둠속을 뚫고 당시 침례병원에 근무하시던 인근 친구 분께 연락하여 급히 아버지를 병원으로 옮기셨다. 아직도 새벽이었는데 병자성사를 위해 신부님께 연락하러 가신다면 다시 집에 오신 어머니는 출가하여 계신 형님 댁에 기별하라고 하셨다. 나는 반쯤 투덜거리면서 찬바람을 헤치고 30분이나 뛰어가 형님께 비보를 전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참으로 긴 아침이었다. 

 

오전 11시쯤 앰뷸런스의 사이렌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리더니 아버지는 싸늘한 시체가 되어 돌아오셨다. 세 살 어린 동생은 집이 떠나가도록 울어댔으나 내 눈에는 눈물 한 방울도 나질 않았다. 도무지 믿겨지지가 않아서였다. 아버지는 어제 저녁이 당신의 마지막 저녁인 줄 알고 계셨던 것일까.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면에서 분가한 가야성당의 첫 신학생으로 당시 소신학교였던 서울 성신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때 형수님의 반대가 만만찮았다. 형님은 기적적으로 휠체어에서 일어나 목발을 짚고 다니셨다. 그 덕분에 결혼도 하셨고 두 아들을 두셨다. 

 

나는 소신학교,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독일 유학을 거쳐 1988년 2월6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구포성당에서 첫 미사를 드릴 때 나는 성찬전례를 시작하면서 성반에 빵을 들고 하늘을 우러르며, “온 누리의 주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하고 외는 순간 그동안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아내고 말았다. 맨 앞자리의 식구들과 성당을 꽉 메운 모든 신자들도 함께 울었다. 지금도 미사 때마다 그때의 순간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적신다. 

 

다음날 아침엔 집에서 식구들과 함께 돌아가신 아버님 연미사를 드렸다. 그때야 나는 비로소 돌아가신 아버님을 생각하며 한없이 울었다. 속으로 아버님께 말씀드렸다. “아버님 소망대로 제가 신부가 되었습니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아버님께서 먼데로 가신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내 가슴속에 계시면서 나와 함께 살아왔다는 것을. 어머니의 끊임없는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셨다. 아니, 이 기도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하신 기도였다. 우리 식구가 이사했던 그 날 저녁, 뜻밖에 마주 잡았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이 이루어낸 기도였다. 

 

 

어머님, 아버님은 고인이 되셨지만 내 가슴속에 살아계셔 

 

중앙성당 보좌신부 2년을 마치고 다시 한 번 유학길에 올랐다. 독일 뮌헨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돌아와 1995년부터 5년간을 부산 신학대학에서 교수로, 그리고 또 5년을 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으로 일하였다. 10년 정도 독일생활을 했던 나에게 학교에서의 10년은 가르치는 보람도 많았지만 가끔씩 어머님을 뵈옵는 기쁨도 컸다. 

 

2005년부터 5년간 미국 LA 한인교포사목을 하던 중 2008년 10월에 어머님께서 세상을 하직하셨다. 조짐이 좋지 않다고 동창신부가 연락을 줘서 서둘러 왔는데, 인천에 도착한 그 시각에 눈을 감으신 것이었다. 장례미사를 치루고 아버님과 어머님을 화장하여 36년 만에 두 분을 함께 납골묘에 모셨다. 삼우를 지내고 어머님께서 태우다 마신 큰 초 하나를 챙겨 미국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내가 기도하며 태우리라는 마음으로 … 

 

하루는 이층 방이 침실이었던 사제관에 들어서자마자 피곤한 나머지 소파에 꼬꾸라졌다. 원래 사막지역이었던 LA는 낮엔 덥지만 밤에 온도가 내려가 자칫 아무데서나 잤다간 풍을 맞는 수가 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현관문을 두드리며 “신부요! 신부 있소?” 하고 외치는 어머님 소리를 듣고 깨어났다. 또 한 번은 2층까지 올라갔으나, 바닥에 쓰러져 자고 있던 나에게 어머님이 나타나시어 “신부요! 사람 좀 보내주소. 여긴 천당인데 사람들이 너무 없소!” 하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아버님과 어머님, 눈으로 볼 수는 없는 고인이 되셨지만 두 분은 내 가슴속에 살아계시다. 그분들을 지금도 나의 훌륭한 조언자시며, 전구자시다. 첫미사를 드렸던 그날 밤 어머님께서 흐느끼시며 저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마르코 신부가 사제로 세상의 큰 산을 넘어야 하고, 사제로 무덤에 가는 그날까지 내가 남아서 기도해 주어야 할 터인데, 그러지 못할까봐 걱정이 된다. 그것이 슬프구나.” 

 

하지만 두 분은 내 가슴속에서 끊임없이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심을 오늘도 느낀다. 두 분은 내 마음의 성지(聖地)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5년 7월호, 박상대 마르코 신부(부산교구 온천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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