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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조숙(베드로) · 권천례(데레사)의 결안(結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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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1-09 ㅣ No.614

조숙(베드로) · 권천례(데레사)의 결안(結案)


1. 결안이란?

결안은 조선시대 사형 죄를 범한 죄수의 자백을 받아 중앙에서는 형조(刑曹)가, 지방에서는 관찰사가 국왕에게 올리는 최종 결과 보고서이다.1) 여기에는 죄인의 나이 · 출생지 · 거주지 · 가계(家系) 등을 기재한 신원조사서[根脚]와 범행에 대한 죄인의 자백 및 그것에 대한 죄인의 다짐 등이 기록되어 있다.

천주교 신자도 박해 과정에서 처형된 사람들은 결안을 작성했고, 결안에 기재된 신자들의 인적 사항, 입교 과정, 교회 활동은 교회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따라서 “일성록”에 수록된 조숙 · 권 데레사 · 고 바르바라의 결안도 이들과 관련된 새로운 사실들을 알려 준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이에 필자는 지금까지 활용되지 않은 3명의 결안과 체포 기록을 통해 조숙 · 권 데레사 · 고 바르바라와 관련된 몇 가지 새로운 사실들을 정리할 것인데, 특히 권 데레사의 이름을 새롭게 밝힌 점은 커다란 성과라고 하겠다.


2. 교회측 기록 속의 조숙 · 권 데레사 부부

조숙과 권 데레사는 한국 천주교회에서 유중철(柳重哲, 요한) · 이순이(李順伊, 루갈다) 부부와 함께 동정 부부로 유명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1817년에 체포되어 1819년에 순교했지만, 오늘날에도 신자들의 중요한 신심 모델로 역할하고 있다.

이들에 대한 교회측 기록으로는 다블뤼 주교가 작성한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ee)과 “조선 순교사 비망기”(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ee)2)가 있고, 이를 토대로 서술한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3)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알려진 조숙과 권 데레사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4)

조숙(趙淑)은 ‘조명수’로도 불리며,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1751-1792)의 사위이자 조동섬(調東暹, 유스티노, 1739-1830)의 친척이다. 그는 경기도 양근의 양반집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신앙을 받아들였고,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강원도 외가로 피신하여 여러 해를 살았다.

조숙은 종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또 박해의 공포 때문에 결혼하기 전에는 냉담 상태에 있었다. 그러다가 1804년경 권 데레사와 결혼하면서 부인의 영향으로 신앙심을 되찾고 평생 동정 부부로 살기로 결심하였다.

조숙과 결혼한 권 데레사는 권일신의 딸로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천주교의 가르침을 받았던 그녀는 7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1791년 신해박해 때에는 아버지까지 잃었다. 그 후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1752-1801)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고 동정을 결심한 권 데레사는 신유박해가 끝난 다음 조카 1명과 함께 서울로 와 은거하다가 주위의 권유로 21세 때에 조숙과 혼인을 하였다.

신유박해의 여파가 가라앉고 평온한 상태가 되자 조숙 부부는 서울로 이주하여 기도와 묵상에 전념하며 전교 활동에 힘썼다. 그리고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1795-1839)을 도와 성직자 영입 운동에도 관여하였다. 그러다가 1817년 3월 말(음) 조숙이 천주교 신자임이 밝혀져 체포되자,5) 권 데레사도 자진하여 남편을 따라가 투옥되었다. 이들은 혹독한 고문과 회유에도 끝까지 신앙을 지켰는데, 특히 권 데레사는 배교를 권유하는 관장에게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시고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신데, 제가 어떻게 그분을 부인합니까? 자기의 부모를 부인하는 자를 세상은 용서하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모든 사람의 부모 되시는 분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단 말입니까?”라며 신앙을 증거하였다.6)


3. 결안을 통해 밝혀진 새로운 내용들

1) 권 데레사의 이름과 조숙의 한자명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교회측 기록에는 조숙의 부인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다. 그리하여 그녀에 대해서는 보통 세례명을 붙여 ‘권 데레사’라고만 칭하고 있다. 그런데 “일성록”에 수록된 이들의 체포 기록과 결안을 보면 권 데레사의 이름은 ‘권천례’(權千禮)로 명기되어 있다.8)

조숙의 경우도 지금까지 그의 한자명은 ‘숙’(淑)자로 표기되었다. 물론 ‘숙(塾)으로도 나온다’는 언급9)이 있었고, 또 “승정원일기”에 조숙(趙塾)으로 나온 기사도 소개되었다.10) 하지만 조숙의 ‘숙’자는 대체로 ‘淑’을 공식적인 한자명으로 써 왔는데, 아마도 이만채의 “벽위편”에 조숙의 한자명이 ‘趙淑’으로 나온 것을 따른 듯하다.11)

그러나 이번에 참고한 조숙의 체포 기록과 결안을 보면 조숙의 ‘숙’자는 ‘淑’이 아니라 ‘塾’자로 되어 있다.12) 그리고 “승정원일기”의 기록도 이와 동일하다. 따라서 조숙의 한자명은 ‘塾’자로 바꾸어 표기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2) 조숙과 조동섬의 관계

조숙과 조동섬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기존의 교회측 기록에는 두 사람이 같은 집안, 혹은 손자로 소개되어 있었다. 그런데 “일성록”의 기록 중 형조에서 조숙이 진술한 내용을 보면, 조동섬은 그의 종조부(從祖父)이며,13) 그의 조부인 조동욱(趙東旭)과 형제간이었다.

3) 조숙의 신앙과 권 데레사 · 황사영

교회측 기록에는 조숙이 어려서부터 천주교를 배웠으나 박해로 인해 냉담하다가 권 데레사와 혼인하면서 부인을 통해 신앙을 되찾았고 동정부부로 살았다고 하였다. 그런데 조숙의 결안과 체포 기록을 보면, 그는 어려서부터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 1775-1801)에게 천주교 서적을 배웠으며, 그의 처를 가르쳤다고 했다.14) 그리고 권 데레사의 결안에도, 자신은 남편에게 배웠다고 진술하고 있다.15) 물론 조숙이 그의 처를 가르쳤다는 진술을 그대로 믿어야 할지는 의문이다. 그렇지만 냉담했던 조숙이 부인의 권면으로 다시 신앙을 찾았다는 내용도 재검토해 볼 여지는 있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조숙의 기록을 통해, 조숙과 황사영의 관계가 새롭게 드러난 것도 주목되는 사실 중의 하나이다.

4) 체포 시기와 장소

지금까지 조숙 · 권 데레사 부부는 1817년 3월 말(음)경에 체포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이들의 체포 기록을 보면, 조숙과 권 데레사는 1817년 3월 22일(음) 이전에 한성부에 체포되었고, 이후 형조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16) 따라서 이들의 체포 기록은 조숙 부부의 체포 시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준다고 하겠다.

이와 함께 같은 기록에는 조숙 부부가 ‘북부(北部) 사재감계(司宰監契)’에 거주한 것으로 나타난다. 즉 이 지역에 살다가 이웃에게 천주교 신자임이 탄로나 체포된 것이었다. 사재감은 왕궁에 어류 · 고기 · 소금 · 땔나무 등을 공급하던 관청으로, 오늘날 경복궁 서쪽 종로구 창성동에 위치해 있었다.

5) 순교 날짜와 나이

조숙 · 권 데레사의 순교일은 교회측 기록에 1819년 6월 13일(음) 혹은 5월 21일(음)로 나온다. 그러나 1819년 6월 20일(음)에 형조에서 이들이 참수와 관련된 계(啓)를 올린 사실에서,17) 이들의 처형은 음력 6월 20일 이후에야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의 순교일도 수정되는 것이 마땅하다.

이와 함께 조숙과 권 데레사의 생몰 연대도 정확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즉 지금까지는 교회측 기록에 따라 조숙은 33세, 권 데레사는 36세에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왔고, 이를 토대로 조숙은 1787년에, 권 데레사는 1784년에 태어나 1819년에 사망한 것으로 계산되었다. 즉 교회측 기록에 나타난 33세와 36세를 한국식 나이로 생각하고 이들의 생몰 연대를 계산했던 것이다.

그러나 1817년의 결안을 보면, 그 당시 조숙의 나이는 32세였고, 권 데레사는 35세였다.18) 그러나 두 사람은 이때 처형되지 않고 2년 후인 1819년에 참수되므로, 순교 당시 이들의 나이는 각각 34세와 37세가 된다. 물론 이것은 한국식으로 계산된 나이이다. 따라서 이를 토대로 두 사람의 생몰 연대를 계산해 보면, 조숙은 1786년에, 권 데레사는 1783년에 태어난 1819년에 사망한 것이 된다. 결국 교회측 자료에 기록된 아니는 ‘만’으로 계산된 나이였음을 알 수 있다.


4. 동료 순교자 고 바르바라(혹 막달레나)

1819년 조숙 · 권 데레사와 함께 순교한 인물로 고 바르바라가 있다. 그녀에 대해서는 조숙 · 권 데레사와 마찬가지로 교회측 기록에 소개된 내용만이 알려져 있다.19) 그 결과 고 바르바라의 이름과 정확한 생몰 연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일성록”에 수록된 고 바르바라의 결안을 보면, 그녀의 이름과 나이를 알 수 있다. 즉 고 바르바라의 이름은 고동이(高同伊)이며 1817년에 57세였던 것으로 나타난다.20) 따라서 순교 당시 고 바르바라의 나이는 59세가 되며, 그녀의 생몰 연대는 1761-1819년이 된다.


1) 심재우, <‘심리록’을 통해 본 18세기 후반 서울의 범죄 양상>, “서울학연구” 17, 서울학연구소, 2001, 63쪽.

2) 조숙 · 권 데레사에 대한 다블뤼 주교의 자료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에서 간행한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 시복자료집 제4집”(2007, 377-405쪽)에 한글로 번역 수록되어 있다.

3) 달레 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89-96쪽.

4) 이들에 대한 기존의 약전으로는,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2003, 234-239쪽)와 “한국가톨릭대사전” 10권(한국교회사연구소, 2004, 7695-7696쪽)에 실린 내용이 있다.

5) 다블뤼 주교의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에는, “그 즈음에 교회력 하나를 도적들에게 빼앗긴 적이 있는데, 그것은 베드로가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얼마 전부터 베드로가 가르치고 있던 한 비신자가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포졸들이 포위망을 좁히고 베드로를 붙잡으러 왔다”라고 조숙의 체포 상황을 설명하고 있고, “조선 순교사 비망기”에는 “조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축일표를 압수당했다. 어떤 이들은 조 베드로가 가르쳤던 신입 교우의 몸에서 그것이 발견되어 압수당했으며, 그가 조 베드로를 밀고했다고 주장한다”라고 되어 있다.

6) 이와 관련하여 권 데레사의 문초 기록에도 “생전의 고초는 한때의 일에 불과하고 사후에 승천하는 것은 무궁한 즐거움인즉, 어찌 형륙이 몸에 미치는 것을 두려워하여 천주를 배반하겠는가? 죽는 것은 실로 마음에 달게 여기는 바이다”(生前苦楚不過一時之事死後昇天乃是無窮之樂則何可畏刑戮之及身背馳天主乎一死實所甘心云, “일성록” 순조 17년 5월 7일)라고 신앙을 증거한 내용이 있다.

7) 다블뤼 주교의 기록에는 6월 13일, 달레 신부의 기록에는 5월 21일로 되어 있다.

8) “權女千禮年三十五根脚則父不知父之父不知母安召史母之父不知竝故…”(“일성록” 순조 17년 5월 7일).

9) “한국천주교회사” 중, 89쪽의 주 15.

10) “한국천주교회사” 중, 415쪽의 주 112.

11) “李景彦(潤夏之子)段其兄景陶之伏法其師趙淑之就戮…”(이만채 편찬 · 김시준 역주, “천주교 전교 박해사 - 벽위편”, 국제고전교육협회, 1984, 원문 98쪽).

12) “趙塾年三十二根脚則父尙羽父之父東旭母柳召史母之不?之竝故…”(“일성록” 순조 17년 5월 7일).

13) “刑曹啓言邪學罪人北部趙塾招內渠從祖東暹誦習邪書之罪被逮於持忠之獄…”(“일성록” 순조 17년 5월 7일).

14) “渠自幼學得邪書於嗣永處沈惑誦習滅絶倫常而敎授渠妻…”(“일성록” 순조 17년 5월 7일).
15) “學得邪書於渠夫處口誦手?多年蠱惑…”(“일성록” 순조 17년 5월 7일).

16) “漢城府啓言北部司宰監契居趙塾與其妻權召史聚會黃海道安岳金麗兌及同郡居金召史一室居住邪學狼藉綻露於隣里至被捉於禁?…現捉男女四人竝其邪書等物移送秋曹以爲嚴?”(“일성록” 순조 17년 3월 22일).

17) “該曹啓言邪學罪人趙塾權女千禮高女同伊不待時斬事報議政府詳覆抄啓矣請幷不待時斬敎以依律”(“일성록” 순조 19년 6월 20일).

18) “趙塾年三十二根脚則父尙羽父之父東旭母柳召史母之父?之竝故…權女千禮年三十五根脚則父不知父之父不知母安召史母之父不知竝故…”(“일성록” 순조 17년 5월 7일).

19) 황해도 재령 출신이며, 그녀의 남편이 무산으로 유배 갔을 때, 그곳에서 조동섬을 만나 천주교를 배웠고, 남편이 사망하자 서울로 와 조숙의 집 가까이에 살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1817년 조숙이 체포될 때 함께 잡혀가 신앙을 증거하다가 1819년 60여 세의 나이로 조숙 부부와 함께 순교하였다.

20) “高女同伊年五十七根脚則父振明父之父太允母李召史母之父不知竝故…”(“일성록” 순조 17년 5월 7일).

[교회와 역사, 2010년 3월호,
방상근(석문 가롤로, 한국교회사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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