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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친 사랑: 김휘중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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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2-02 ㅣ No.1340

[한국교회사가 밝힌 등불]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친 사랑


김휘중 요셉 신부

 

 

김휘중 신부(심순화 作).

 

 

새로운 한 해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올해만큼은 왠지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아마도 코로나19가 종식될 것인지에 대한 기대와 걱정이 교차하기 때문이겠지요. 사상 초유의 팬데믹으로 기록될 이 시기는 먼 훗날 어떻게 기억될까요?

 

사실 팬데믹 현상은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1918년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A’(H1N1), 흔히 말하는 ‘스페인 독감’(Spanish flu)으로 당시 세계 인구의 1/3인 5억 명이 감염되었고, 5천만 명 안팎의 사람들이 숨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1918년 인플루엔자로 인해 가장 피해가 컸던 나라는 1천만 명 넘게 사망한 인도를 포함하여 아시아의 여러 국가였습니다. 특이한 점은 코로나19와는 달리, 젊은 층의 사망률이 높았다고 합니다. 사망자 대부분의 연령층은 65세 이하였고 20~45세가 전체 사망자의 60%를 차지한 겁니다.

 

우리나라 역시 1918년 인플루엔자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일제 강점 당시 한국에서는 이 유행병을 ‘무오년 독감(戊午年毒感)’ 또는 ‘서반아 감기(西班牙感氣)’라고 불렀습니다. 독감은 1918년 겨울부터 1919년 봄에 이르기까지 본격적으로 유행했습니다. 1919년 3월, 당시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조선휘보」에서 발표한 내용을 살펴보면(김택중, 2020) ‘1918년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로 인해 조선의 전체 인구 1759만 명 중 755만 6천 명의 감염자가 발생했고, 그 가운데 14만 527명이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천주교 측 피해를 살펴보고자 했더니, 아쉽게도 이렇다 할 정도의 자료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를 중심으로 당시 교회 잡지의 관련 기사를 검색해보았습니다. 『경향잡지』 1919년 기사에서 당시 서울대목구의 김휘중(요셉) 신부가 ‘1918년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로 선종했다는 기록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신부님의 ‘선종 기사’를 찾아 읽어보는데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습니다.

 

김휘중 신부는 1884년 음력 3월 7일 6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신학교에서는 독자(獨子)는 입학을 허락하지 않을 때였는데, 연세가 많은 김 신부 부모님의 신앙이 아주 훌륭하신 관계로 1902년 9월 13일에 소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몸이 약했던 그는 입학 후 15년 뒤인 1917년 9월 22일에 사제 서품을 받게 됩니다. 첫 부임지는 경기도 고양의 행주성당이었습니다. 곧 신부님은 본당 교우들의 숫자는 많지 않고, 냉담하는 교우들도 많다는 사실을 파악하였습니다.

 

그길로 신부님은 지역 내 교우들 집을 일일이 방문했습니다. 심지어 비오는 날에도 나막신을 신고 가정 방문을 다니곤 하였는데 그때 많은 냉담자들이 회심하였다고 합니다. 때로는 먼 지역에 있는 교우들을 만나기 위해서 봇짐을 메고 방문하여 그 지역 신자들이 성사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1년 4개월 동안 헌신적으로 본당 사목 활동을 하신 신부님은 병환 중에 있는 아홉 명의 신자들에게 병자성사와 영적인 위로를 주게 됩니다. 그런데 거기서 신부님이 안타깝게도 인플루엔자에 걸리고 만 것입니다.

 

이삼일을 지독하게 앓던 신부님은 마지막 미사를 드리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선종 전날 밤은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홀로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린 후 기진맥진한 채로 성당을 나온 후, 한기근 신부에게 종부성사를 받고 하느님 품으로 떠나셨습니다. 그날은 1918년 11월 12일 오전 7시 30분으로 사제 서품 받은 지 1년 4개월 만이었습니다.

 

강원도에 살고 있던 가족들은 김휘중 신부의 장례 미사를 11월 16일로 정합니다. 그런데 당시 교구장인 뮈텔 주교는 전염의 위험성 때문에 14일에 장례를 치르고,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학생들도 장례에 참석하지 말라고 명합니다. 이에 신부의 부친과 친척들이 강원도에서 도착하기 전 용산 신학교 교장인 기낭 신부와 한기근 신부, 그리고 신부의 조카 신학생 정 루카 등이 행주성당에 가서 장례 미사와 모든 예절을 치렀습니다. 장지도 행주산성 근처의 마을 공동묘지로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이었습니다. 신부님의 유해는 1년 뒤 용산 성직자 묘지로 이장됩니다.

 

사제로 발령받은 첫 본당에서 1년 반도 안 되는 짧은 기간 사목활동을 펼치다 병자성사를 주는 도중 유행성 독감에 감염되어 하느님 품으로 가신 김휘중 신부님의 부고 소식은 잡지를 통해 널리 알려집니다. 기사를 접한 전국의 많은 신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는 마음으로 신부님의 연미사를 드려주었다고 합니다.

 

1918년 인플루엔자로 고통 속에 잠긴 본당 환우들의 집에 병자성사를 주러 가신 신부님의 마음을 헤아려봅니다. 사실, 1919년 초는 일제의 무단통치 시절이었고, 일본 경찰들은 전염병 환자를 찾아내겠다는 명목으로 집집마다 쳐들어가 강압적이며 폭력적인 방식으로 환자 색출을 시도했습니다. 그래서 조선인들은 일제의 이런 방식에 비협조적으로 대응해오던 터였습니다. 그처럼 1918년 인플루엔자가 모두를 불안에 떨게 할 때에, 또한 전염병으로 인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질병에 대한 고통이 엄습하던 때에 아픈 신자들의 집을 직접 찾아 나선 신부님의 모습은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묵상케 합니다.

 

신부님이 생전에 지은 천주가사 <폐헌가>에 착한 목자의 삶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규칙적인 4·4조로 ‘그리스도교적인 자연관’(강영애, 2011)이 잘 드러난 이 가사를 묵상하며 자연과 인간을 사랑했던 한 젊은 사제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또다시 새해가 선물처럼 주어졌습니다. 우리도 신부님이 즐겨 불렀을 <폐헌가>를 읊조리며 코로나19의 종식과 살아갈 지혜를 청해보면 어떨까요? 어쩌면 이 순간, 하늘나라에 계신 신부님도 유행성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우리를 위해 간구해주실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허우리 청취자여 일심으로 합의하여 / 주대전에 들어서서 결속노래 하여볼까

들어가세 들어가세 사시장톤 하강하는 / 수중반열 도원중에 화륙차로 들어가서

비무장의 꽃구경을 가지가지 노래할까 / 봄바람은 슬슬불고 가는비는 슬슬오니

복숭아의 꽃방울은 봉울봉울 피어있고 / 살구나무 행화잎은 불그스레 웃음웃고

 

* 글 강석진 -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소속으로 전북 고창의 심원 공소/개갑 성지 담당 신부이며, 저서로 『순교, 생명을 대변하는 증거』 등이 있다.

 

* 그림 심순화 - 가톨릭미술가회 회원. 성화 작가로 활동 중이며 성당, 성지, 수도원 등에서 작업하고 있다.

 

[생활성서, 2021년 1월호, 글 강석진 신부, 그림 심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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