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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사목] 가톨릭농민회, 50년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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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1-03 ㅣ No.1240

[알아볼까요] 가톨릭농민회, 50년의 길

 

 

가톨릭농민회의 모태는 가톨릭 노동 청년회(JOC)입니다. 1964년 가톨릭 노동 청년회 안에 농촌 청년부의 신설이 한국 가톨릭농민회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5.16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의 독재 정치 기반의 강화로 경제적으로 농업 등 국내 기초 산업의 희생과 저임금을 토대로 한 해외 종속적인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여 이농대열이 매년 급증하는 등 농민 노동자의 희생이 강요되는 시기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천주교 도시 노동자들의 모임인 가톨릭 노동 청년회 회원들은 자신들의 열악한 노동조건과 ‘왜 농촌을 떠나오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고, 노동 문제가 농민 문제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가톨릭 노동 청년회는 농촌 청년부를 설치하고 농촌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966년 천주교 왜관 감목대리구 오도 하스 아빠스의 도움으로 농촌 청년부 전국본부를 경북 구미에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농민 문제 해결 활동이 노동 청년회 일개 부서로서는 효과적인 활동을 추진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농촌 청년부를 완전 분리하기로 결정, 한국 가톨릭 농촌 청년회를 창립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현재 가톨릭농민회입니다.

 

당시의 활동은 농촌 계몽운동, 야간학교 운영, 협업 양계, 협동 농장 운영, 신용협동조합, 협업 양돈 경영, 양송이 재배 등 소득 증대 활동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1970년대에는 공업 위주의 수출 주도형 경제 개발과 새마을운동 등 고도성장 시대였는데 세계적으로 석유파동과 식량파동 등으로 미국의 잉여농산물 원조가 무상에서 유상으로 전환되는 시기였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주곡자립과 저곡가 정책 유지를 위해 통일벼 보급과 녹색혁명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강제적인 행정지도로 농업증산정책으로 일반벼 재배를 막고 종자 선택권도 없는 시기였습니다.

 

 

교회와 함께 농민권리를 위한 투쟁 계속해

 

협동조합은 정부의 시녀가 되어 조합장 선출권도 박탈당해 정부에 의해 임명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가톨릭농민회는 농협민주화운동을 필수과제로 정하고 농협 조합원 실태조사를 통해 농협의 문제점 해결에 앞장서고 강제출자거부, 비료․농약 강제판매 거부와 추곡수매 대금 강제예치 거부 운동, 농협 조합장 직선제를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97년 함평고구마피해보상 투쟁 중 오원춘 농민을 한 달간 납치, 감금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에 가농은 교회와 함께 농민권리를 위한 투쟁을 벌였고, 이 사건을 통해 유신정권의 본 모습을 밝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농지 임차 단계 조사를 통해 소작농의 문제, 농지세 시정운동, 수세폐지운동, 협동운동으로 공동작업, 공동구매, 공동판매 활동, 효소농법 실천, 농기계 공동이용 등 생명공동체 운동의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1980년대, 개방농정과 산업구조조정으로 외국 농산물이 도입되는 시기였고, 5.18 광주민주항쟁과 신군부가 등장하는 시기였습니다. 미국산 쌀 25만 톤이 들어오고 한미통상협상의 타결로 전면 개방되었습니다. 상품, 자본, 서비스 시장개방으로 소고기 수입, 광고, 보험 자본시장 개방으로 비교 우위론에 의해 농업 인구가 감소되는 시작이었습니다.

 

이에 가톨릭농민회는 외국 농축산물 수입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소 값이 83년 대비 85년 60~80%나 폭락하여 농가부채로 연결되어 소 값 피해보상투쟁(소몰이 투쟁)을 벌였고, 수입쌀로 인해 수매가 동결로 이어지자 수매량 확대를 요구하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또한 부채를 현물상환투쟁으로 피해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또 반핵운동, 반공해운동을 펼쳤고, 비료와 농약 대신 효소 농약을 장려하며 효소 농법으로 무공해 자연농법을 보급하였습니다.

 

1990년대에는 세계화 신자유주의 시대에 농업이 붕괴되고, 소련 및 사회주의가 해체되고 미국의 패권주의가 강화되는 시기였습니다. 92년 문민정부가 출범하고 96년 UR(우르과이라운드 협상, GATT 다자간 협상) / WTO(세계 무역 기구)의 출범, 쌀 시장 개방과 OECD 가입, 금융 토지실명제 실시, 지방자치 전면선거와 5.18특별법제정과 전두환, 노태우 구속으로 형식적 민주주의가 확정되는 시기였습니다. 97년 IMF 구제금융과 자유무역협정(FTA)를 통한 WTO 체제가 강화되었고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추진으로 한국 농업이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 가톨릭농민회는 90년 전국농민회총연맹이 출범하며 대중운동을 하고, 가농은 생명운동으로의 전환을 결정하였습니다. 91년 ‘우리밀살리기운동’을 전개하고, 94년 UR 타결로 한국농업이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이때 한국천주교회가 농업․농촌․농민을 위해 ‘우리농촌살리기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95년에는 주교회의에서 매년 7월 셋째 주를 농민주일로 제정하여 일 년에 한번, 농민들을 위한 주일을 제정하였습니다. 우리콩살리기, 귀농운동본부를 창립하였고 환경농업육성법을 제정, 환경농업단체연합회를 창립하는 등 대안 실천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기후위기, 토지문제, 농가소득 등 당면과제 산적

 

2000년대, 6.15남북정상회담, 참여정부의 출범, 개성공단 건설, 이명박 정부의 출범, 노무현, 김대중 대통령의 서거가 있었습니다. 농가부채경감을 위한 특별법 제정도 이루어졌습니다.

 

이때 가톨릭농민회는 금산에 폐교를 구입하여 생명학교를 기획하고, 창립40주년 행사로 학술대회와 기념대회, 국제가톨릭농민운동연맹(FIMARC)의 총회를 한국에서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물류사업의 효율화를 위해 물류사업위원회를 구성하고 우리농 유한회사를 설립하였습니다. 새로운 CI(통합기업이미지), BI(통합상표이미지)와 제규정을 정비하였습니다. 전국생산자실태조사를 실시하였고, 도시생활공동체도 전국을 조직화, 활성화하는 시기였습니다.

 

국제 연대를 위하여 멕시코 칸쿤과 홍콩 각료회의 저지 투쟁을 위해 회원들을 파견하였고, 남북교류사업으로 2007년 금강산에서 가농․우리농 총회를 개최하였습니다.

 

가톨릭농민회는 남북교류사업으로 통일쌀 보내기 운동과 4대강 사업 저지 투쟁, 팔당 유기농지 보존활동과 제주도 해군기지 반대, 원전 반대운동, 백남기 농민의 쾌유와 국가폭력 규탄 범국민대책위원회 활동, WTO 개도국 지위포기 반대, 공익형직불제 개편 등 많은 활동을 진행하였습니다.

 

식량자급률 21.7%, GMO농산물 900만톤 수입은 세계1위입니다. WTO개도국 지위에 대해 이해당사자인 농민의 의견은 무시된 채 포기선언하고, 코로나19 상황과 54일이라는 폭우로 인한 수해피해에도 정부 추경에는 농업예산이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한국형 그린뉴딜에도 농업은 배제되어 있습니다. 이 외에도 기후위기 대책, 재해대책, 토지문제, 종자문제, 식량주권, 지속가능한 먹거리 시스템 구축, 농가소득 등 당면한 과제가 참 많습니다.

 

2020년은 특히 코로나19로 일상과 신앙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코로나19가 주는 교훈은 사람들이 자연에 순응하여 살아가라는 메시지일 것입니다.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복음 15장, 1절)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11월호, 정한길 베네딕토(가톨릭농민회 전국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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