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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교토(京都) 천주교 성지 (12) 바람은 교토에서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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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2-08 ㅣ No.1527

교토(京都)에서 분 바람 - 교토천주교성지 ⑫ 바람은 교토에서 불었다



1593년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선교사들이 바다를 건너 그 당시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천주교를 허용하며 선교사들을 받아들였던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로부터 교토 시내 구 묘만지 자리에 광대한 땅을 받아, 그 자리에 수도원과 성당, 그리고 교토에서 최초가 된 서양식병원인 성안나병원, 성요셉병원이 줄지어 세워졌다. 하지만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 의해 천주교 금교령이 내려지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고 교토 시내에 있던 성당이나 병원들은 모두 다 파괴되고 말았다.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난 1986년 프란치스코회의 루카 홀스팅크(Luca Horstink) 신부가 그 자리에 있던 일본식 가옥을 사들여 일본의 천주교 역사를 알아볼 수 있는 역사관으로, 또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복음적인 삶을 전하며 인종이나 종교와 관계없이 남녀노소 누구나 찾아와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그런 장소를 만들기 위해 게라르드 살레밍(Gerard Saleming) 신부와 함께 그 집을 개축하며 “프란치스코의 집”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이 “프란치스코의 집”은 오래된 전통가옥을 개축하여 지은 건물이기 때문에 내진설계가 미흡하다는 이유로 건축법에 걸려 안타깝게도 최근에 기존 건물을 무너뜨리고 다시 재건축을 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개축 전의 프란치스코의 집에는 그리스도교 문화자료관과 다다미(疊: 짚으로 만든 판에 돗자리를 붙였던 깔개)를 깐 일본식 방 형태의 성당이 있었고, 문화자료관에는 고난의 시대를 살아왔던 키리시탄들(그리스도인)의 수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유물들 중의 몇 가지를 여기에서 소개하고자 한다.


1) 후미에(踏み繪)

천주교가 박해를 받은 에도시대(江戶時代)에 에도막부(江戶幕府)가 키리시탄들을 색출해내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으로, 거기에 사용했던 목조판 또는 금속제의 판을 말한다. 처음에는 종이에 예수 그리스도나 성모마리아가 그려진 것을 사용했으나 얼마 못 가서 파손되기 때문에 목조판이나 금속판을 사용하게 되었다. 초기 단계에서는 키리시탄들을 잡아들이는데 효과를 나타냈지만 차후에는 ‘마음으로 믿으면 된다.’는 사상이 퍼지면서 포졸들 앞에서는 당당하게 그 그림을 밟고, 집에 가서 하느님께 용서를 빌거나 어떤 이는 보속으로 발을 씻은 물을 마시기도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에도시대 후기에는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2) 키리시탄 마경(魔鏡:요술거울)

키리시탄들이 박해를 피해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몰래 마경을 제작하여 간직하고 있었다. 보기에는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진 청동으로 된 그냥 거울인 것 같은데, 빛을 비추면 거울 내부에 숨겨진 예수 그리스도와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벽에 비추어진다. 키리시탄들은 아마도 어두운 동굴 같은 곳에 모여 누군가가 태양의 빛을 받을 수 있는 곳에 서서 이 거울을 들고 비추어진 십자가를 향해 기도를 바쳤을 것이다. 이런 유물을 보았을 때 남몰래 신앙을 지켜온 키리시탄들의 피나는 노력이 엿보인다. 그런데 이 거울의 이중구조는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데, 이 거울이 발견된 후 교토의 거울 장인이 수은을 유입하는 방법을 궁리해서 1973년이 되어서야 겨우 이 거울을 재현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2014년은 에도막부를 피해 숨어서 신앙을 지켜왔던 키리시탄들의 존재가 밝혀진 지 150년이 되는 해였고, 유럽에 파견된 시찰단(視察團)이 교황 바오로 5세를 찾아간 지 400년이 되는 해라는 것을 기념하며 그 해 6월에 이탈리아를 방문한 아베 수상은 거울 장인이 재현한 마경을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선물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밖에도 오카야마 세이쿄(岡山聖虛:1895-1977) 화백이 일본의 26성인 한 명 한 명을 그린 일본화 “일본 26성인화(日本 26聖人畵)”의 복제판이 있었는데, 이 그림들은 1931년에 족자(簇子)의 양식으로 교황청에 봉헌된 후 바티칸미술관 깊은 곳에 보관되어 있었다가 교황청에서 그림을 복원할 때 보내온 데이터로 다시 재현된 것이다. 비록 이 그림들이 복제품이라고 해도 이 그림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곳이 일본에서는 프란치스코의 집뿐이었다. 또한 일본식 화실(和室) 성당에 걸려 있었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 그림도 자세히 보면 사랑 ‘애(愛)’자로 나타낸 것이라 흥미롭다. 또한 박해를 피해 불교의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처럼 만들어진 성모상과 십자가가 새겨진 기와와 담뱃갑, 마구(馬具), 다기(茶器) 등등 귀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으나 재건축을 계기로 오사카(大阪)에 있는 수도원으로 보내어져 현재 프란치스코의 집(명칭이 “기도의 집”으로 바뀜)에서는 아쉽게도 이러한 유물들을 볼 수 없다고 한다.

교토 시내에는 예부터 5중 탑을 가진 토지(東寺)라는 유명한 절이 자리 잡고 있다. 교토를 대표로 하는 절이라 교토를 소개한 프로그램에는 늘 나오는 절이기도 한다. 천주교를 믿는 이는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로 보여주기 위해 교토 시내에서 잡힌 키리시탄들은 온갖 고문을 당하고 귀를 잘린 채 소달구지에 태워져 교토 시내 곳곳에서 조리돌림 당하였다. 그들은 고향을 떠나는 슬픔에 잠긴 채 이 절을 지나가며 교토를 떠나갔다. 그 때 끌려가던 베드로 밥티스타 신부에게 다가갔던 한 키리시탄이 “저도 당신들을 따라 가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자, 베드로 밥티스타 신부는 자신의 몸에 지니고 있던 십자가를 건네주면서 “이것으로 당신의 신앙을 지키십시오. 그리고 남은 신자들을 돌보아주세요.”라는 말을 남기며 아쉬워하는 키리시탄들과 이별을 하였다. 이 십자가는 그 후 몇 백 년 동안 일본에 잘 보관되어 있다가 바다를 건너 지금은 밥티스타 신부의 고향(스페인의 어느 마을의 성당)에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때는 추위가 혹독한 1월, 26명의 키리시탄들은 추위에 떨며 800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이동하던 중 함께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분명히 보고 있었을 것이다.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길도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한 은총의 길이었는지 모른다. 비록 그들은 천주교를 위해 나가사키에서 목숨을 잃었지만 시작은 교토에서였다. 바람은 교토에서 그렇게 불었던 것이다.(참고도서 : 스기노 사카에 저서 《교토의 키리스탄사적을 돌아보다》, 산가쿠출판)

* “교토(京都)에서 분 바람 - 교토천주교성지”는 이번 호로 끝을 맺습니다. 그동안 새로운 성지에로 우리를 초대해주신 이나오까 아끼 님께 깊이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월간빛, 2015년 12월호, 이나오까 아끼(쥴리아, 비산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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