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금)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 신미년 백서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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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3-26 ㅣ No.1461

[특별 연재] 이 시대, 순교신심에서 길을 찾다


《신미년 백서》와의 만남



삶의 푯대를 상실한 현대인들은 인문학, 심리학, 과학의 문을 서성이며 길을 찾고 있다. 여기, 한평생 순교신심을 연구해온 손골성지 윤민구 신부는 신앙의 유산이 담긴 순교신심에서 삶의 방향키를 찾아 우리에게 들려준다. 조선천주교회를 세우기 위해 평신도들은 돈을 모아 북경의 주교와 교황에게 ‘신미년 백서’를 보냈다.


흔히 백서(帛書)라고 하면 황사영(黃嗣永, 1775-1801)의 백서를 떠올린다. 하지만 원래 백서란 ‘비단에 쓴 글’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초기교회 신자들이 교황이나 중국에 있던 선교사들에게 편지를 보낼 때는 항상 비단에 썼다. 그러니 결국 그 편지들은 모두 백서였던 것이다.

신미년 백서는 1811년, 신미년(辛未年)에 우리나라 천주교 신자들이 쓴 백서를 말한다. 조선천주교회는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로 큰 타격을 받았다. 처음 천주교회를 세웠던 지도자급 신자들이 대부분 체포되어 순교하였거나 교회를 떠났다. 요행히 체포되지 않고 살아남은 신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개인적으로만 겨우 겨우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10년이 지난 1811년에 조선천주교 신자들은 마침내 교회를 다시 부흥시키기로 뜻을 모았다. 그리고는 북경의 주교와 교황에게 조선천주교회를 도와달라고 간청하는 편지를 각각 한 통씩 보냈다. 그런 다음 어려운 가운데서도 돈을 모아 신자 대표를 북경교회에 파견하여 그 편지들을 전하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보낸 두 통의 편지가 바로 신미년 백서인 것이다.

필자는 신미년 백서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 1983년 필자가 103위 시성청원인(諡聖請願人)으로 로마에서 일할 때 우리나라 초기교회 순교자들의 시복수속을 준비하기 위해 틈틈이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고문서고를 찾아가 자료를 찾곤 하였다. 한국교회와 관련된 자료를 찾는 일은 그리 용이하지 않았지만 꾸준히 작업을 해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나라 관련 자료가 뭉텅이로 발견되었다. 그것을 보자 필자의 가슴이 방망이질 하였다. 참으로 오랜만에 한국교회 관련 자료를 한꺼번에 여러 쪽 찾았기 때문이었다.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니 바로 신미년 편지였다.

이 두 편지는 중국에서 먼저 포르투갈어로 번역되어 유럽에 전해졌고 이것이 다시 라틴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인류복음화성 고문서고에 들어와 있었다. 그런데 포르투갈어와 이탈리아어 번역본과 라틴어와 프랑스어 번역본은 서로 다르게 분류되어 각각 다른 곳에 정리되어 있었다. 이제부터 필자가 이야기하는 것은 라틴어와 프랑스어 번역본이 있는 “중국과 주변국들에서 주간회의에 보고한 원자료”(SCCina)라는 이름을 가진 자료 제3권에 대한 것이다.

필자는 번역본을 보다가 혹시 원문이나 적어도 한문 필사본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여 조심스레 찾아보았으나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혹시 다른 데에 있나 열심히 찾아보았으나 다른 데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을 지닌 채 언어별로 쪽수를 찾아 노트에 정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두 쪽이 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라틴어 번역본이 있는 836쪽과 839쪽 사이에 있어야 할 837쪽과 838쪽이 없었던 것이다.

누가 하필이면 우리나라 관련 자료에 손을 댔나보다 생각하니 처음에는 화까지 났다. 그런데 프랑스어 번역본과 라틴어 번역본을 일일이 대조하여 보고 편지 내용이 빠지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두 쪽은 라틴어 번역본과 상관없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필자는 자료철을 들고 고문서고 실무자에게 가서 두 쪽이 빈다는 사실을 알리고 그 이유를 물었다. 고문서고 실무자는 두 쪽이 빈다는 사실에 기겁을 하며 ‘도대체 무슨 내용이냐’고 필자에게 물었다. 필자는 ‘우리 조상들이 1811년에 교황과 북경주교에게 보낸 편지’라고 대답하였다. 고문서고 실무자는 ‘너무나 귀중한 것인데 큰일났다’며 책임자 메쯜러(J. Metzler, 1921-2012) 신부에게 함께 가자고 하였다. 이야기를 들은 메쯜러 신부는 ‘당신 조상들이 그 편지를 어떤 언어로 썼습니까’ 하고 물었다. ‘한문입니다’라고 답했더니 자리에 가 있으라고 하면서 자기가 찾아보겠다고 하였다.

자리에 앉았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건성으로 자료철을 넘기고 있는데 얼마 안 되어 메쯜러 신부가 와서 잠깐 나오라고 손짓하였다. 자료를 읽는 방에서는 이야기를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필자가 방에서 나오니까 메쯜러 신부는 ‘사라진 두 쪽을 찾았다’며 다른 방으로 가자고 하였다. 가면서 메쯜러 신부는 필자에게 그 두 쪽은 한문 원본이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원본도 그냥 자료철에 함께 철해서 보관하였지만 지금은 귀중본 보관소에 따로 보관한다고 설명해 주었다.

귀중본 보관소에 가보니 각국의 귀중한 자료들의 원본들이 따로 보관되어 있었다. 이런 귀중본들 가운데 신미년 백서 즉 신미년에 조선신자들이 교황에게 보낸 편지의 원본이 있었던 것이다. 이 편지 원본은 유리상자 속에 잘 보관되어 있었다. 처음 보는 순간 너무나 감격스러워 울컥 눈물이 났다. 200년 전 초기교회 신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교황에게 도움을 청하고자 애썼던 그 눈물과 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한참 동안을 멍하니 유리상자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필자를 메쯜러 신부는 유심히 본 것 같다. 메쯜러 신부는 필자에게 ‘귀중한 자료입니까’하고 물었다. 필자는 ‘그렇습니다’고 하며 신유박해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 박해 후에 신자들이 많은 어려움 중에 교황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쓴 편지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한국에서는 원본이 분실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렇게 원본을 보게 되어 너무나 기쁘고 또 이렇게 잘 보관해준 것에 깊이 감사한다고 하였다. 실제로 그때까지 달레(Ch. Dallet, 1829-1878)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 한국어 번역본 각주에는 ‘신미년에 조선신자들이 교황에게 보낸 편지의 원본이 분실되었다’고 되어 있었다.

그날 필자는 너무나 가슴이 벅차 다른 자료 찾는 것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다. 문을 닫는 시간이 되어 실무자와 메쯜러 신부에게 다시 한 번 고맙다고 인사하고 돌아오면서도 쉽게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이튿날 필자는 또다시 인류복음화성 고문서고를 찾았다. 메쯜러 신부가 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선물이라며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를 열어보니 어제 보았던 신미년 백서의 복사본이 그 안에 들어있었다. 메쯜러 신부는 자신이 조심조심하면서 복사하였다고 웃으며 말하였다. 필자는 너무나 고마웠다. 필자도 원본을 보는 순간 복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그 당장 그런 부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중에 기회를 봐서 부탁하려고 했는데 메쯜러 신부가 부탁하기도 전에 복사를 해주었던 것이다.

필자는 복사본을 다시 복사하여 국내에 보냈다. 그러자 국내 신문들은 필자가 신미년 백서 원본을 인류복음화성 고문서고에서 ‘발견’하였다고 썼다. 필자로서는 죄송한 표현이었다. 발견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시성청원인으로 일하면서 신앙의 조상들이 쓴 백서 원본들을 직접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어서 행복했다. 200년이라는 세월을 뛰어넘어 또 다른 백서를 쓰신 황사영을 만나고, 신미년에 백서들을 쓴 신앙의 조상들을 직접 만나는 것 같았다. 이 만남은 필자가 다시 윤유일 등초기 순교자들의 시복청원인이 되었을 때 자료를 찾기 위해 교황청뿐만 아니라 프랑스, 영국, 포르투갈 등의 고문서고와 도서관을 찾아다니는데 큰 힘이 되었다. 귀중한 자료를 찾을 때마다 신앙의 조상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북경주교에게 보낸 신미년 백서의 원본은 찾아지지 않는다. 대만의 보인대학 도서관에 사본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신미년 교황에게 보낸 편지 원본이 황사영 백서 원본과 함께 한국에 돌아와 현재 서울역사박물관에서 10월 31일까지 ‘서소문 · 동소문별곡’이란 이름으로 전시되고 있다. 많은 분들이 200년 전의 조상들을 신미년 백서를 통해 만나보시기 바란다.

* 윤민구 도미니코 신부 - 1975년 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탈리아 로마에 유학하여 1983년 라떼란대학교에서 사목신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2003년까지 수원가톨릭대학교에서 강의하였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무차장으로 일하였고 안성 대천동, 성남 수진동, 이천, 분당 야탑동성당 주임신부를 지낸 후 현재 손골성지 전담신부를 맡고 있다.

[외침, 2014년 10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윤민구 도미니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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