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가톨릭 영성 산책40: 세 가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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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2-23 ㅣ No.767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 산책] (40) 세 가지 길


애덕, 하느님을 향한 영적 여정의 종착지

 

 

가톨릭 교회는 전통적으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여정을 ‘정화’, ‘조명’, ‘일치’의 세 가지 길로 비유해 설명합니다. 물론 여기서 세 가지 길은 세 종류의 각기 다른 방향의 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의 길에서 발전 단계를 구분하여 일컫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적 여정 안에서 세 가지 길은 때로는 두 가지나 네 가지 길로 비유되기도 합니다.

 

먼저 현대 영성신학자들은 세 가지 길의 근거를 성경에서 찾아보고자 시도했고,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는 않더라도 유추해서 해석해 볼 수 있는 성경 구절을 제시했습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평화를 찾고 또 추구하여라”(시편 34,15). 즉, 악을 피하는 행동은 정화의 단계이며, 선을 행하는 행동은 조명의 단계이고, 평화를 찾는 행동은 일치의 단계라고 유추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즉, 자신을 버리는 행동은 정화의 단계며, 제 십자가를 지는 행동은 조명의 단계고, 예수님을 따르는 행동은 일치의 단계라고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대 교부들은 바오로 사도가 언급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1코린 13,13)에 먼저 관심을 가졌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첫 단계에서 믿음으로 열광을 억제하고 악을 피하며, 둘째 단계에서 희망으로 덕행을 실천하고, 마지막 단계에서 사랑으로 선을 실천한다고 제시했습니다. 또한 요한 카시아누스는 믿음으로 벌악(罰惡)의 두려움과 함께 악을 피하며, 희망으로 세상과 육체의 쾌락에서 고개를 돌려 상선(賞善)을 기다리고,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을 뜨겁게 한다고 언급했습니다. 계속해서 카시아누스는 믿음과 희망이 완덕의 탁월함을 완전하게 지니지 못한 반면에 사랑은 온전히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간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몇몇 성인들은 바오로 사도가 강조한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1코린 13,13ㄴ)이라는 데에 관심을 갖고 영적 여정의 모습을 살펴봤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초기 단계의 사랑, 상당히 진보한 사랑, 매우 큰 사랑, 완전한 사랑이라는 네 가지 단계를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단계별로 발전하기 위해서 늘 앞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잠시라도 쉬고 있다 보면 뒤로 퇴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 성인도 하느님 사랑에 도달하는 영적 여정을 네 가지 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했습니다. 즉, 인간이 자신을 위해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랑, 인간이 하느님의 은총을 얻기 위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랑, 인간이 하느님을 위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랑, 인간이 하느님을 위해서 다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랑 등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의 사랑에 도달하려면 하느님의 은총으로 특권을 지녀야 잠시나마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도 애덕의 영적 성장을 ‘초보’, ‘진보’, ‘완성’의 세 가지 단계로 구분해 제시했습니다. 즉, 초보자는 애덕을 잃지 않으려 죄를 피하고 욕정을 극복합니다. 진보자는 애덕을 강화하려 덕행을 증진하고자 노력합니다. 완성을 이룬 사람은 애덕의 최고 경지인 하느님과 기쁨의 일치를 이루고자 자신을 비우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기를 염원합니다. 결국 애덕은 인간이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야만 성장하고 완성됩니다.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영적 여정의 종착지가 애덕인 것은 의미하는 바가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도 언급하였듯이, 애덕은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인간에게 주신 하나의 초자연적인 선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애덕의 완성을 통해 하느님과 하나 되는 초자연적인 질서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단계는 인간 스스로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인도되어야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신비스러운 경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영적 여정 안에서 능동적인 노력이 수동적인 이끌림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잘 살펴야만 신비 생활을 올바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평화신문, 2016년 2월 21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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