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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사목] 전통 가정과 가톨릭 가정10-11: 시부모 · 처부모의 배려, 며느리 · 사위의 공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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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9-02 ㅣ No.1120

[전통 가정과 가톨릭 가정] (10) 시부모 · 처부모의 배려, 며느리 · 사위의 공경 (상)


전통 장례에서 죽은 자와 산 자, 삶과 죽음은 하나

 

 

‘옛날에 소련과 대련은 상을 잘 치렀다. 삼 일 동안 게을리하지 않고, 석 달 동안 태만히 하지 않고, 일 년 동안 슬퍼하고, 삼 년 동안 근심하였다.’(「격몽요결」 〈상제장〉)

 

23년 전 진달래가 붉게 피어오르던 봄날, 아버지가 선종했다. 맏상제가 되어 아버지의 시신이 있는 안방에서 조문객을 맞고 위령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염습하고, 입관예절을 했다. 이후 거친 베로 짠 굴건을 쓰고, 상복을 입고 죄인의 심정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했다. 돌이켜보면 임종부터 안장까지 한순간도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은 셈이었다. 생전의 아버지와 함께 있는 듯해 그 슬픔이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올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3년 전에 빙모가 선종했다. 가족들은 병원 영안실에서 조문객을 맞았다. 남자들은 검은색 양복에 베로 짠 완장을 팔에 두르고, 여자들은 검은색 치마저고리를 입었다. 제단에는 국화꽃 장식에 둘러싸인 영정사진만 있었고, 정작 추모의 대상인 빙모는 그 자리에 없었다. 병원 지하 냉동고에 격리돼 있었던 것이다. 영안실 밖을 거닐며 묵주기도를 올리는 것이 오히려 빙모가 가는 길을 곱게 쓸어드린다는 느낌이었다. 세태가 변하고 장례풍습이 달라진 것이다.

 

고대 신화 주인공들의 죽음은 참으로 극적이었다. 신라 시조인 혁거세는 재위 62년 만에 승천했는데, 7일 만에 사체가 다섯 조각으로 땅에 떨어졌다. 사람들이 놀라 시신을 수습해 한 데 매장하려고 하자 큰 뱀이 나타나 방해했다. 하는 수 없이 시신이 떨어진 다섯 곳에 따로 묘를 만들고 오릉(五陵) 또는 사릉(蛇陵)이라 칭했다. J. 프레이저의 「황금의 가지」에 따르면, 농경 문화권에서 곡신으로 여겨지던 존재는 종종 곡물 파종의 신화적 방식으로 분산 매장됐다. 신화 주인공이 살아있을 때처럼 죽어서도 산 자를 위해 풍요를 보장해주리라는 신념에서 나온 장례방식이었던 것이다.

 

한편 신라 4대왕이었던 탈해는 재위 23년에 죽어 시신을 소천 언덕에 매장했다. 그러나 훗날 그의 계시로 뼈를 부숴 소상(塑像)을 만들어 궁궐 안에 안치했다. 그 후 다시 통일신라를 수호하는 산신이 거처하는 오악 중의 하나인 토함산에 봉안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시신을 매장한 다음, 일정 기간이 경과한 후 뼈를 부숴 소상을 만들어 궁궐에 안치했다는 점이다. 즉 죽은 자와 산 자가 가까이 머무르며 끊임없이 교류했던 것이다.

 

이러한 신화 주인공들의 장례는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다섯 달 이상 집안에 안치하던 부여의 풍습, 시신을 집안에 두었다가 삼 년이 지난 뒤 길일을 가려 장사하던 고구려의 풍습, 시신을 가매장했다가 뼈만 추려서 집안에 가족의 뼈가 안치된 곽에 넣던 동옥저의 풍습과도 일맥상통한다. 최근까지 시신을 집 옆에 가매장했다가 산 자의 운기가 좋을 때 뼈만 수습해 정식으로 장례를 치르던 초분(草墳) 풍습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즉 죽음과 더불어 죽은 자와 산 자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를 산 자의 곁에 머물게 하면서 새로운 통합을 꾀하는 의례를 행했던 것이다. 산 자는 죽은 자를 살아있을 때처럼 여겼고, 죽은 자는 또 다른 생명으로 재생하는 계기가 됐다. 이처럼 우리의 전통적인 장례에서는 죽은 자와 산 자가 하나였고, 삶과 죽음이 하나였다.

 

우리의 신앙선조들은 죽음, 심판, 천당, 지옥에 대한 사말교리(四末敎理)를 깊이 묵상했다. 특히 천주존재, 삼위일체, 강생구속과 더불어 천주교의 4대 핵심교리인 상선벌악을 통해 현세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묵상했다. 죽음 이후에 올 개별심판과 최후심판을 염두에 두며 하느님의 자녀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온전히 살고자 했던 것이다. ‘보라, 내가 곧 간다. 나의 상도 가져가서 각 사람에게 자기 행실대로 갚아 주겠다.’(묵시 22,12)는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오늘날 사말교리에 대한 믿음은 상당히 약화됐다. 현세에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믿음이 강해지면서 상대적으로 사후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지향이 퇴색한 것이다. 이에 따라 죽음 이후에 맞이하게 될 천국과 지복직관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리게 됐다. 살아서 맛보는 하느님 나라의 기쁨이 지나치게 강조되다 보니 가톨릭 가정의 상장의례 역시 산 자와 죽은 자가 부활신앙 안에서 하나가 되리라는 믿음에서 멀어지게 된 것은 아닐까. 또한 죽은 자와 산 자가 기도 안에서 영적 도움을 주고받는다는 믿음이 약화된 것은 아닐까. 죽음 이후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를 맛볼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죽음이 종말이 아니라 부활에 이르는 길이라는 믿음을 되새기게 된다. 장례를 치르며 죽은 자와 산 자, 삶과 죽음을 통합의례로 변모시켰던 우리 선조들의 조화로운 삶의 태도가 교회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김문태 교수(힐라리오) - 서울디지털대학교 교양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우리의 전통문화가 살아 숨 쉬는 현장과 강단에서 고전문학과 구비문학을 연구해왔으며, 중국선교답사기인 「둥베이는 말한다」등 다수의 저서를 펴냈다. [가톨릭신문, 2018년 9월 2일, 김문태 교수]

 

 

[전통 가정과 가톨릭 가정] (11) 시부모·처부모의 배려, 며느리·사위의 공경 (하)


며느리도 사위도 생명 전하는 고귀한 소임 맡아

 

 

‘아버지가 딸을 시집보낼 적에 훈계하기를 “경계하고 공경하여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의 명을 어기지 말라”고 한다. 어머니가 훈계하기를 “힘쓰고 공경하여 집안일을 어기지 말라”고 한다.’(「소학」 <내편>)

 

오늘날 친족은 민법상 8촌 이내의 혈통 관계가 있는 겨레붙이 혈족, 그리고 4촌 이내의 혼인으로 맺어진 인척과 배우자를 칭한다. 따라서 시아버지·시어머니와 며느리, 장인·장모와 사위는 각각 아들과 딸이 혼인함으로써 맺어진 인척관계이자 친족관계다. 시부모와 며느리, 그리고 처부모와 사위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혼인을 통해 하루아침에 가족이 된 것이다.

 

시가와 처가는 혼인해서 인척이 된 집안이므로 며느리와 사위의 입장에서는 낯설고 어색한 것이 당연하다. 두 집안의 문화가 다른 데에서 오는 이질감이 종종 서로를 불편하게 하기도 한다. 인척간의 다사다난한 이야기는 처부모와 사위보다 흔히 한 집에 같이 사는 시부모와 며느리, 특히 하루 종일 살을 맞대고 사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져왔다. ‘고부간의 갈등’이라는 연원이 오래된 단어가 이를 입증한다. 이런 의미에서 친정부모는 혼인을 앞둔 딸에게 시부모를 공경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하는 것이 일상적인 가르침이었다.

 

예전에 친정부모는 혼인하는 딸에게 벙어리로 3년, 귀머거리로 3년, 장님으로 3년을 지내라고 일렀다. 알아도 모르는 체, 들어도 못 들은 체, 봐도 못 본 체하며 지내라는 말이었다. 이 말에는 며느리는 시집식구들에게 순종하고 매사에 순응하라는 봉건사회의 가부장적 위압감이 배어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새 식구가 된 며느리가 낯설고 이질적인 집안의 환경에 적응하도록 하기 위한 지혜로도 보인다. 친정과 다른 시가의 문화 안에서 사사건건 부딪치고 마음 상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호신책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며느리도 이와 같은데, 민며느리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민며느리는 성인이 된 다음에 며느리로 삼기 위해 미리 데려다 기른 어린 여자아이였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동옥저에서는 가난한 집의 딸이 열 살쯤 되면 부유한 집에 민며느리로 들어갔다. 시가에서는 민며느리가 성인이 되면 돈과 비단을 줘서 일단 친정으로 돌려보낸 뒤 다시 정식으로 혼인했다. 고구려와 조선에서도 이런 풍습이 있었다. 어린 며느리의 어려움과 고통이 얼마나 심했을까는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민며느리와 대비적인 존재로 데릴사위가 있었다. 딸을 친정에 데리고 있기로 하고 삼은 사위였다. 보통은 딸만 가진 부모가 가난한 집의 사내를 데릴사위로 들였다. 데릴사위는 처가에 들어가 일하며 살다가 성인이 된 후에 혼인하는 예서(豫壻)와 흡사했다. 그러나 처가 뒤편에 서옥이라는 작은 집에 살던 사위와 딸이 아이를 낳으면 시가로 가는 고구려의 솔서(率壻)와는 성격이 달랐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제도는 다소 달랐지만 사위들이 처가를 자기 집으로 알았고, 처부모를 친부모처럼 여기며 공경했다는 사실이다. 처부모 역시 사위를 친자식과 다름없이 여기며 배려했다. 그만큼 데릴사위는 민며느리에 비해 처가식구들과의 관계가 유연하고 친밀했던 것이다. 하지만 데릴사위 역시 민며느리와 마찬가지로 낯설고 이질적인 처가의 문화와 처가식구들과의 관계에서 겪어야 하는 불편함과 고통이 왜 없었을까. 오죽하면 ‘겉보리 서 말만 있으면 처가살이하랴’는 속담이 있을까 싶다.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사위도 반자식’이라는 속담처럼 며느리도 반자식이다. 친자식은 아니지만 아들과 함께 살며 손자·손녀를 낳아 키우는 며느리, 그리고 딸과 함께 살며 외손자·외손녀를 낳아 키우는 사위는 시부모와 처부모가 준 생명을 자손에게 전하는 고귀한 소임을 맡은 존재다. 손자·손녀와 외손자·외손녀가 사랑스럽고 소중하다면, 그들에게 생명을 전해준 며느리와 사위가 왜 사랑스럽고 소중하지 않을까. 반면에 사위와 며느리는 아내와 남편을 낳아 키워준 처부모와 시부모를 친부모처럼 공경하고, 그들이 세상을 뜨면 친부모와 마찬가지로 지극한 슬픔으로 장례를 치르고 정성으로 제례를 올려야 하는 것이 도리다. 이런 의미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를 흔히 갈등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고부’라는 단어보다는 ‘어이며느리’나 ‘시모녀’라 부르면 어떨까 싶다.

 

며느리를 딸처럼, 사위를 아들처럼, 시부모·처부모를 친부모처럼 여긴다면 집안이 화목하고 사회가 평안할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가정은 여러 세대가 모여 서로 도와주며, 더 충만한 지혜를 얻고 개인의 권리를 사회생활의 다른 요구와 조화시키는 곳이므로, 가정은 사회의 기초를 이룬다’(「사목헌장」 52항)는 교회의 가르침이 새롭다. [가톨릭신문, 2018년 9월 9일, 김문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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