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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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발칸: 모스타르, 그 다리를 건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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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5-23 ㅣ No.1485

[발칸의 빛과 그림자 속으로] 모스타르, 그 다리를 건너다


 

- 모스타르의 아침. 자세히 보면 건물 벽에 아직도 총탄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발칸 땅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생각하면 세 개의 다리가 떠오른다. 제1차 세계대전이 촉발된 라틴 다리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드리나 강의 다리’라고도 불리는 메흐메드 파샤 소콜로비차 다리, 그리고 또 하나의 유네스코 유산인 모스타르의 ‘스타리 모스트’다. 어느 것 하나 마냥 아름다울 수만은 없는, 발칸의 얽히고설킨 아픔이 서린 곳들이다.

 

이보 안드리치의 노벨 문학상 수상작 「드리나 강의 다리」의 배경인 소콜로비차 다리는 1516년 오스만 제국의 보스니아 총독 소콜로비치가 만들었다. 다낙 우 크르비 제도(danakukrvi, 8-12세의 그리스도인 아이를 데려다가 모슬렘으로 개종시키고 능력에 따라 제국의 공무원이나 군주의 직속 부대로 편입시키던 제도) 때문에, 열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로 끌려갔던 그가 훗날 성공해 고향 마을의 강에 다리를 놓은 것이다.


- 네레트바 강에 놓인 다리 스타리 모스트. 모스타르의 모슬렘 지역과 가톨릭 지역을 이어주던 다리가 1993년에 끊어졌다가 전쟁이 끝나고 복원되었다.

 

 

다리 양쪽으로는 각각 터키계 모슬렘(이슬람교도)과 세르비아 정교인들이 살고 있었다. 몇 해 전 이 다리 위에서는 보스니아 내전(1992-1995년) 당시 학살당해 강물에 던져졌던 모슬렘들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인공호수를 보수하느라 물을 빼내는 과정에서 잊혔던 죽음이 세상에 드러나자, 살아남은 이들은 또 다시 그날의 악몽에 몸서리쳐야 했다.


그 내전의 기억이 더 선연하고 참담하게 남아있는 다리가 바로 모스타르의 스타리 모스트(오래된 다리)다. 본디 나무로 만들어졌다가 1557년 쉴레이만 대제 때 하얀 돌로 재건되었다. 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모스타르의 정교인과 모슬렘의 가교가 되었던 이 다리는 1993년 11월 크로아티아 민병대의 폭격으로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다.

1992년 3월 보스니아의 모슬렘과 가톨릭 세력(크로아티아인)이 마음을 모아 유고 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세르비아계가 이를 거부하면서 내전이 시작되었고, 유고 연방군이 18개월 동안 모스타르를 포위하고 공격을 퍼부었지만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계의 저항에 밀려 결국 물러났다. 그런데 이번에는 크로아티아 정부를 등에 업은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이 보스니아 모슬렘(보스니악)을 몰아내려고 모스타르를 공격했다. 그들은 모스타르 서쪽에 살고 있던 수천 명의 보스니악을 학살하고 추방했다. 그 와중에 스타리 모스트도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다리를 이루고 있던 천여 개의 돌덩이가 네레트바 강물 속으로 쏟아져 내렸다. 수백 년의 따뜻한 기억들도 강물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 1,088개의 하얀 돌로 만들어진 스타리 모스트와 모스타르의 옛 시가지는 ‘다양한 문화적 · 민족적 · 종교적 배경을 가진 사회가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보편적 상징’이라는 의미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내전이 끝나자 사람들은 그제야 세계 각국에서 문화와 종교가 다른 민족 간의 상징이자 아름다운 유산이었던 다리가 파괴되었다는 불행에 주목했다. 잠수부들이 강으로 쏟아진 돌조각들을 모두 건져 올렸고, 터키 건축가들이 1,088개의 돌을 재배치해 완벽하게 재건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의 지위도 회복했다.

모스타르 신시가에서 묵던 밤, 한밤중인 두세 시쯤에 느닷없는 함성이 계속되어 놀라 깼다. 젊은이들의 시위나 축제 같기도 한 함성이었다. 여행자들의 특권일 수도 있는 그런 일탈이 모스타르라서 마음에 좀 걸렸다. 모스타르의 아픔은 이미 먼 얘기고 지금 여기, 나의, 우리의 문제는 아니다. 사람이란 늘 그런 것 아닌가. 우리 또한 여전히 고통받는 누군가의 현재에 대한 공감과 이해 없이, 즐거이 소리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에 씁쓸했다.

- 이슬람 구역에 있는 브라체 페지카 거리는 오랜 오스만 제국의 영향으로 터키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른 아침, 고요히 텅빈 브라체 페지카(Brace Fejica) 거리의 돌들이 예쁘게 반짝였다. 모퉁이를 돌아 한 구역을 들어갔더니 마치 그 옛날 같은 마을이 있었다. 길가 모스크와 묘지 사이로 길게 이어진 계단 한 쪽에 폐허가 된 성당의 첨탑만 무심히 높았다. 하늘을 향해 뻥 뚫린 창틀의 흙더미 속에 빛깔 예쁜 풀꽃이 피어 있었다. 젊은 처자가 위에서 내려오고 한 남자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갔다. 그날도 그랬을 거다. 그렇듯 평화롭게 하루를 열고 무료한 일상이 계속 되었을 거다. 그런 시간이 박살났던 것이다, 그날.

로마가 동서로 나뉘었을 때(395년), 그 경계에 있던 보스니아에는 가톨릭과 동방교회가 다 전파되었다. 그러다가 오스만투르크 지배 때 많은 사람이 이슬람교로 개종을 했는데, 그것은 살아남으려는 선택이기도 했다. 지배자와 지주들에게 착취당하던 민중이 새로운 정복자에 의지해서라도 살아보려고 한 것이다. 종교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발칸의 역사에서 보스니아는 늘 고통을 겪는 쪽이었다. 그리고 20세기 들어서는 정교회 세력인 세르비아와 가톨릭인 크로아티아 사람들에게 ‘집단학살, 인종청소’까지 당하게 된 것이다. 모스타르에 살던 세 민족 중에서도 가장 무력한 것이 보스니아 모슬렘이었다. 결국 약자들의 죽음이요 수난이었다. 그래서 모슬렘의 하얀 묘비가 좀 더 아프게 다가오는 것이다.

- 모스크와 함께 있는 모슬렘들의 하얀 묘지. 대부분 내전으로 세상을 떠났다.


내전이 끝난 지 이제 스무 해가 지났다. 어느 날 느닷없이 들이닥친 이웃의 총부리로 폐허가 되어버린 삶의 자리에서, 그들은 어떻게 상처를 싸매며 살고 있을까. 마을에 남아있는 총탄 자국들은 아직 피 흘리는 상처를 보라고, 멈추지 않은 피눈물을 봐달라고 호소하는 듯했다. 고통에 눈감지 말아달라는 탄원 같았다.

다리 한쪽 모퉁이에 놓인 작은 돌 역시 그랬다. 묘비명처럼 “DON’T FORGET ’93”이 새겨진 돌은 그날을 기억하고 함께해 달라는 끝없는 청 같았다. 그 돌을 가슴에 담으며, 난 산 자들을 생각했다.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그들의 ‘기억’이 삶을 살리는 것이 되기를 바랐다. “사람이 본능적으로 세우거나 만든 모든 것 가운데 다리보다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은 보지 못했다.” 이보 안드리치의 이 말처럼, 다리는 여전히 너와 나를,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고 있다. 그 다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학살과 분열과 혼란스러운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부정할 수도 지울 수도 없는 과거와 진실로 화해하고 현재를 살아가기를 바랐다. 부디 그들이 평화로워지기를, 그리고 다리를 복원했듯이 삶도 복원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다리를 건너왔다.

* 이선미 로사 - 가톨릭교리신학원 성서영성학과를 수료했다. 여러 차례 해외성지를 순례하다보니 가까운 성지와 우리 전통에도 눈이 뜨여 조금씩 관심을 기울이는 중이다.

[경향잡지, 2015년 5월호, 글 · 사진 이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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