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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동양고전산책: 우리는 남이다 -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조화를 이루어 가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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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1-21 ㅣ No.241

[최성준 신부와 함께하는 동양고전산책] “우리는 남이다” -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조화를 이루어 가는 삶

 

 

“우리가~” “남이가!” 연말연시를 맞아 곳곳에서 송년회다, 신년회다 모임이 많습니다. 회식자리마다 빠질 수 없는 것이 또 건배사입니다. 매번 기발한 구호로 멋있게 건배를 제의해야 모임의 분위기도 달아오릅니다. 수많은 건배사 중에서 모임 구성원의 단합과 일치를 위하는 자리에서 많이 들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남이가!”라는 구호일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는 하나다, 모두들 한 마음으로 같은 목소리를 내며 일치단결해서 훌륭한 공동체를 만들어보자, 이런 마음이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엄연히 “남”입니다. 나와 너가 똑같을 수는 없지요. 내가 너와 다르고, 네가 나와 다르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무조건 나와 뜻을 같이 해야 하고, 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독선적인 이기주의입니다. 나와 너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데서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이 생기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공자(孔子)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군자는 조화를 이루려고 하지, 같아지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같아지려고 하지, 조화를 이루려고 하지 않는다.”1)

군자는 각자의 의견이 다르면서도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서로 조화를 이루지만, 소인은 각자 자기 이익에 맞는 사람들끼리 서로 모여서 뭉치기는 잘 하지만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손해가 되거나 의견이 맞지 않으면 화합을 이루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일치로 나아가는데 아주 중요한 “조화(和)”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조화는 고대로부터 동양에서 참 중요한 개념이었습니다. 조화는 비단 다른 사람과의 관계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나 내면의 근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유가(儒家)의 대표적인 철학서라고 할 수 있는 『중용(中庸)』에서는 “조화(和)”의 의미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희노애락과 같은 감정이 아직 내면에서 일어나지 않은 상태를 중(中)이라 하고, 감정이 밖으로 드러나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한다. 중(中)은 천하의 큰 근본이고, 화(和)는 천하에 두루 통하는 도(道)이다.”2)

우리 마음은 수많은 감정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기쁘기도 하다가 화가 나기도 하고, 슬픈 감정에 휩싸이다가 어느새 즐거운 감정이 일어나기도 하지요. 그런데 그런 감정이 일어나기 전의 고요하고 맑은 마음의 상태를 “중(中)”이라고 합니다. 이 상태에서는 누구나 선하고 거짓이 없으며 맑습니다. 하느님의 목소리인 양심(良心)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 중(中)의 상태를 잘 유지한다면 우리의 감정이 드러날 때 자연스레 모든 것이 절도에 맞고 조화롭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기쁠 때 기뻐하고 슬플 때 슬퍼하는… 그야말로 거짓 없이 진실하며 모든 것이 서로 조화를 잘 이루는 상태입니다. 이런 경지를 “화(和)”라고 합니다.

이야기가 너무 어렵게 갔나요? 아무튼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며 잘 지내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이 먼저 올바른 조화(和)를 이루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나의 마음이 중심(中)을 잘 잡고서 모든 감정들이 상황에 맞게 조화(和)를 이룰 때 우리는 다른 사람도 잘 받아들일 수 있고 조화를 이루며, 더 나아가서는 일치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 신앙은 세상 끝 날에 모두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로 일치될 것을 믿으며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치로 나아가려고 하지만 아직 때가 차지 않았기에 완전한 일치를 이루지는 못합니다. 그러기에 먼저 나와 다른 타인을 인정하고 다름을 받아들이며 서로 맞추고 조화를 이루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요한 17,21)

“때가 차면 이 계획이 이루어져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하나가 될 것입니다.”(에페 1, 10 : 공동번역)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때 이루어질 하느님과 모든 이의 완전한 일치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부터 사랑하고 기도하며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일치를 향한 노력은 무조건 하나의 구호를 두고 목소리를 합치는 것도 아니고, 하나의 목표를 두고 다른 이들을 끌어당기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먼저 다른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것, 그리고 나의 목소리나 뜻을 조금 낮추어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조화를 이루는 데서 일치를 위한 노력은 시작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은 노자(老子)에게서 들어볼까 합니다. 공자와 동시대를 살면서 중국철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노자도 자연의 ‘길(道)’을 따르는 성인이라면 조화를 이루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합니다.

“그 빛을 부드럽게 하여 먼지와 하나가 된다.”3)

자신이 성인이라 하여, 다른 사람보다 덕이 뛰어나거나 재주가 많다 하여 환하게 빛을 뿜어낸다면 일반인들이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울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밝은 빛으로 남을 눈부시게 어지럽히지 않고 적당히 빛을 낮추어 먼지나 티끌과도 같은 일반인들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은 자신이 돋보이고 남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는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노자의 이 구절을 접하게 되면, 우리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하느님이시면서도 먼지와 같은 나약한 존재인 인간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도 가장 낮은 자의 신분을 취하셔서 낡고 더러운 구유에 누워 계시는 아기 예수님을 보며 “화광동진(和光同塵)”의 가장 완벽한 형태는 바로 주님의 강생(降生)신비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맞았습니다. 새로운 한 해가 밝았습니다. 올해는 나의 빛을 줄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로 관심을 돌릴 수 있었으면 합니다. 나의 뜻에 맞춰주기를, 내 생각대로 되기를 바라지만 말고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주며 그 사람에게로 다가갈 수 있는 조화로운 삶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빛을 낮추면 비로소 다른 사람의 빛이 보일 것입니다. 나의 목소리를 줄이면 비로소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
최성준 신부는 북경대학에서 중국철학을 전공하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동양철학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1) 『논어(論語)』, 자로(子路) 13편, 23장.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2) 『중용(中庸)』, 1장.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3) 『노자(老子)』, 56장. “和其光, 同其塵.”

[월간빛, 2015년 1월호, 최성준 이냐시오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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