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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29: 배론에서 영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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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5-09 ㅣ No.1619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29 · 끝) 배론에서 영면하다


베르뇌 주교의 선견지명이 최 신부 유해와 묘지 지켰다

 

 

- 배론성지 산 중턱에 조성돼 있는 최양업 신부 묘. 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을 찾아 기도하고 있다.

 

 

“저는 그(최양업)의 장례 준비로 매우 바쁩니다. 장례식은 며칠 후 저의 산의 한 작은 언덕에서 거행될 예정인데 주교님이 오셔서 하실 것이고, 두 동료 신부도 참석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1861년 6월 15일 최양업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집전하고 그의 임종을 곁에서 지켜봤던 앙투안 푸르티에(1830~1866) 신부가 1861년 11월 2일 사목지인 배론 교우촌에서 동료 아브라이여 신부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다. 이 글에 따르면 최양업 신부 시신은 약 5개월가량 어디에 매장됐다가 1861년 11월 초 오늘날 충북 제천 봉양읍 배론 성지로 이장됐다.

 

푸르티에 신부가 개인적으로 최양업 신부의 묘지 이장을 결정했을 리는 없다. 당시 조선대목구장이던 베르뇌 주교가 배론으로 와서 이장 예식을 주례한 것으로 보아 이 일을 주도한 이가 베르뇌 주교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베르뇌 주교는 왜 최양업 신부의 묘 이장을 계획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해진다. 사실 배론성지는 최양업 신부의 주요 사목지가 아니었다. 배론 교우촌에 신학교를 처음 세우고 그 지역을 사목한 이는 조제프 암브로이즈 메스트로(1808~1857) 신부였다. 최 신부가 1855년 10월 8일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사목 보고서 형태의 편지를 배론에서 쓸 당시 이곳을 일시적으로 관할했을 것이다. 하지만 1856년 곧바로 푸르티에 신부가 신학교 교장으로 부임해 이곳을 사목했다.

 

배론성지 최양업 신부 묘지로 올라가는 길 초입에 세워져 있는 최양업 신부상.

 

 

배론은 이처럼 조선인 사제 양성의 못자리로 프랑스인 선교사들이 직접 관장하는 조선 교회의 핵심 장소였다. 배론 신학교 설립자인 메스트르 신부조차 1857년 12월 20일 충남 덕산 황무실 교우촌에서 선종해 그곳에 묻혔는데 베르뇌 주교는 왜 5개월 만에 그것도 겨울이 시작되는 11월 초 최양업 신부의 시신을 배론으로 이장했을까?

 

한국천주교회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선 최 신부의 묘를 배론으로 이장한 것을 두고 ‘임시 매장설’을 내세우는 이들이 있다. 돌림병을 예방하기 위해 복통과 고열 등 티푸스 증세를 보이다 선종한 최 신부의 시신을 임시로 땅에 매장했다가 “시신의 물이 다 빠진 다음” 배론으로 옮겼다는 주장이다. 이 견해에 관해 교회사 전문가는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 돌림병이 무서웠다면 최 신부의 묘를 그대로 두면 되지 굳이 5개월 만에 묘를 도로 파서 시신을 문경 혹은 진천 배티에서 68~170여㎞ 떨어진 배론까지 들고 옮겨야 할 이유가 없다. 거대담론처럼 복잡한 논리와 구조 속에서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나 첫 매장지를 추론하기보다 상식이 통하는 단순한 사고로 바라봄 직하다.

 

박해 시대 조선 교회 역사상 성직자나 순교자의 시신을 임시 매장 상태로 뒀다가 묘지에 안장한 사례는 여러 차례 있었다. 그 대표적인 곳이 바로 서울 용산의 왜고개이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 신부 그리고 1846년 병오박해 때 순교한 김대건 신부, 188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베르뇌 주교와 남종삼, 최형, 홍봉주 등이 이곳에 임시로 매장됐었다. 이처럼 박해 시대 순교자들의 시신을 처형지에서 신자들이 사는 교우촌으로 모셔와 무덤을 세우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처형 장소 인근에 묻어둔 사례는 있어도 돌림병을 막기 위해 가매장하는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 단 한 번 언 땅을 팔 수 없어서 임시로 시신을 둔 경우가 있다. 바로 페레올 주교다. 페레올 주교는 1853년 2월 선종했으나 한겨울 꽁꽁 언 땅을 팔 수 없어서 그의 시신을 매장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블뤼 신부는 주교의 시신을 한 신자에게 2개월간 맡겨 두었다가 그해 4월 언 땅이 녹자 고인의 생전 뜻에 따라 미리내 교우촌 김대건 신부 묘지 옆에 묻혔다.

 

배론성지에 재현돼 있는 옛 소신학교. 이곳을 사목하던 푸르티에 신부가 최양업 신부의 위독 소식을 듣고 배론에서 약 68㎞ 떨어진 어떤 교우의 집으로 가서 최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주고 임종을 지켜봤다.

 

 

베르뇌 주교가 최양업 신부의 묘를 배론으로 이장한 결정적 이유는 아마도 최 신부의 매장지를 교우들이 안전하고 지속적으로 관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칫 최 신부의 묘를 유실할 수 있는 위험이 크다고 판단해 배론으로 이장했을 것으로 본다.

 

최양업 신부의 시신이 처음 묻힌 장소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아무도 모른다는 얘기이다. 최 신부가 돌아가신 곳에 분명 묻혔을 터인데 선종지에 대한 이견이 지금까지 분분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최양업 신부가 배론에서 약 17리외(lieues- 프랑스 거리 단위로 1리외는 약 4㎞) 떨어진 어떤 교우집”(푸르티에 신부)에서 선종했고 그곳에 묻혔다는 것이다. 최양업 신부의 선종 일을 유일하게 “6월 15일”이라고 기록한 페롱 신부는 “신학교에서 약 12리외 떨어진 한 작은 교우촌”에서 최 신부가 선종했다고 한다. 그는 최 신부의 복사인 조화서(베드로)로부터 이 말을 직접 들었다. 조화서 역시 최양업 신부의 임종과 매장을 직접 지켜본 목격 증인이다. 최양업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주고 그의 임종을 지켜보고, 최 신부의 시신을 매장한 푸르티에 신부와 또 그와 함께 있던 조화서의 말을 직접 들은 페롱 신부의 증언대로라면 최 신부의 선종지와 묏자리는 결코 우리에게 잘 알려진 큰 교우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실 최양업 신부의 묘는 배론으로 이장된 이후에도 상당 기간 버려진 상태였다. “그 귀한 시체는 배론학당 뒷산 중턱에 안장한 후 병인년 군란 후 수십 년 동안은 실전(失傳)되었더니 10여 년 전에 다시 찾은 때에는 무주고총과 같이 그 분묘 위에 수목이 성립한 것을 벌목개초하여 지금까지 그곳에 계셔 부활 기약을 기다리시더라.”(정규량(1883~1952) 신부의 증언을 주재용(1894~1975) 신부가 기록해 「배론성지」에 수록한 글)

 

이 글을 읽을 때마다 가슴을 쓸어내린다. 베르뇌 주교의 선견지명과 용단이 없었다면 최양업 신부의 시신은 어찌 됐을까. 아마 ‘배론에서 17리외 떨어진 어떤 교우집’이라는 기록만 남아서 전해질 뿐 최양업 신부의 묘는 흔적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5월 7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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