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종교철학ㅣ사상

종이책 읽기: 어머니, 나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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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5-21 ㅣ No.107

[김계선 수녀의 종이책 읽기] 어머니, 나의 어머니


“제일 먼저 부르고 가장 나중까지 남는 이름, 무수히 밟히고 지나가고 잊혀지는 살 속 뼛속 골수에 박혀 나를 따라오는 내가 따라가는 나의 그림자 같은 그 이름 어·머·니!”

‘어머니’는 누구인가? 누구나 있는 ‘어머니’이지만 누구라도 ‘어머니’에 대한 글을 쓰라면 기나긴 밤을 새도 가슴에 간직했던 그 이름을 풀어내는 데는 부족하리라. 제일 먼저 부르고 가장 나중까지 남는 그 이름 ‘어머니’에 대해서 원로시인 홍윤숙 시인은 이렇게 첫머리를 풀어내고 있다. 그런데 그 풀어내는 품새가 예사롭지 않다. 그의 어머니는 소설에 나오는 인물이 아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천리 길도 마다않고 우유를 구하러 다니고 모든 어려움을 다 겪은 인고의 세월도 아깝지 않은 지극히 평범한 우리네 어머니이다. 그 ‘어머니’가 우리들의 어머니를 가슴으로부터 닫힌 빗장을 열고 걸어 나오게 인도한다. 그 어머니는 그렇게 평범한 어머니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사셨고 서리서리 품은 한을 한으로 갚지 않고 사랑의 깊이가 놀랍기만 한 그의 어머니는 소설에 나오는 어느 여인네보다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저자는 수필집을 9권이나 펴냈는데도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피상적이었던 것은 자신의 아픔과 부끄러움이 가득한 속내를 고백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의 수필집 「모든 날에 저녁이 오듯이」를 보면 간간이 어머니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는데 그 책에서는 주로 신앙단상들이 많았던 까닭에 어머니는 어릴 적 회고 정도로 나오는 것이어서 이 책을 통해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에 대한, 가족에 대한 저자의 내면과 풀어내기 힘들었던 과거를 너무도 솔직하게 만나게 되어 새삼 저자가 위대해 보였다. 어머니에 대한 회한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20년이 지났는데도 자신이 불효자식이라는 죄의식이 떠나지 않아 참회록을 써서 어머니의 영혼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에서 이 글을 썼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글은 어머니의 한보다 저자의 미처 지워지지 않은 아픔과 뒤엉킨 원망을 내려 놓고 용서를 청하며 한을 풀어 내려는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을 처음 잡으면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시대에 대한 호기심이 강하게 끌어당긴다.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듯 섬세한 필치로 그 당시의 골목들, 학교, 그리고 집들이 선명하게 떠오르고 ‘아, 해방되기 이전의 삶은 이랬구나.’ 하는 느낌에서 시대를 훌쩍 건너뛰어 그 시대의 거리를 걷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그려내고 있다.

평북 정주군에서 태어나 세 살 때 할머니 등에 업혀 고향을 떠난 저자는 열 살 때 아버지의 외도로 가족이 해체되는 상황 등 그 당시면 비일비재하게 겪었을 만한 가정사와 함께 어머니에 대한 기억들,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모두 기억해내어 조금이라도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잊히기 전에 알려 주어야 할 사명감이 있는 듯 독자들을 그 안으로 초대하고 있다. 독서의 마력은 무릇 공감대에 있는 법! 동시대를 살지 않아도 감탄사가 절로 나오고 마음이 아련하고 상실감으로 비통에 젖을 수 있는 것은 책이라는 공간이라서 가능한 까닭도 있겠지만 저자의 탁월한 묘사가 우리를 끌어 당기는 까닭이다. 그리고 우리가 어쩌면 그리 효도하고 살지 못했다는 어느 정도는 느끼는 죄책감과 송구함이 한 구석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 간접적으로나마 보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리라.

내가 알던 홍윤숙 시인의 시는 화려한 미사여구가 아닌 비애와 아픔을 체념이 아닌 달관으로, 고통과 상처에 허우적대기보다 차가운 ‘거리 둠’으로, 그리고 사유의 끝에서 만나는 신에 대한 경외와 응시로 현실적 삶과 지향하는 삶의 거리를 좁혀나가는 것으로 기억된다. 그래서 항상 범접할 수 없는 조금은 강하면서도 냉정하게 보이는 멋쟁이 인텔리였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마음껏 자신의 용렬하고 어리석음을 고백하고 그 철없던 시절에 안중에도 없던 어머니의 마음을 찾아 헤매면서 회자정리를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결국에 어머니와의 이별이 아닌 자신과의 이별이 아닐지 싶다.

“살 속에 뼛속 골수처럼 흐르며 감도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그것은 무엇일까? 어머니가 주신 절대적인 사랑·희생·헌신, 나를 이 세상에 나게 하시고 땀과 눈물과 기도로 키워주시고 그 한 몸 삭아 흙이 되기까지 자신을 돌보지 않는 신앙과도 같은 절대적이며 자폭적 자기투척(投擲)의 정신이 아닐까? 자신을 버리고 잊히고 사라지는 일에 초연한…. 나의 어머니는 평생을 그렇게 사셨다. 그러나 나는 그 어머니를 슬프게 하고 괴롭게 하고 아프게 하면서 살았고, 지금 내 아이들에게도 내 어머니 같은 희생, 헌신을 한 것 같지 않다. 그저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하는 그 정도의 어머니밖에는 안 되었다.”(본문에서)

우리는 이 책에서 그의 어머니를 만나면서 나의 어머니를 만나고 어머니와 나와의 관계를 돌아보고 그러면서 상처들을 치유 받고 그 어느 책보다 더욱 깊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어머니 없이는 내가 없고 하느님께서는 당신 대신 우리에게 어머니를 보내 주셨기 때문이다. 또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며 칼에 꿰찔리는 고통을 당하신 우리 모두의 어머니 성모님의 너른 품안에 언제든지 달아들 수 있는 5월에 다시 한 번 어머니를 만난 것도 행복이다. 우리 삶에서 필연적으로 만나는 맨 처음의 관계맺음에서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의 편린들까지 두루 만나고 마침내 영원한 행복에로 초대되었을 때의 감격을 미리 맛보는 책읽기가 기다리고 있다.

[월간빛, 2012년 5월호,
김계선(에반젤리나 · 성바오로딸수도회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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