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7일 (금)
(백)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 천주교회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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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환 [isdol] 쪽지 캡슐

2002-02-27 ㅣ No.11

1. 이땅에 처음 발을디딘 신부

 

1593년 12월 27일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고니시 유키나가(아우구스티노) 거느린

군인들을 위해 파견된 포르투칼인 세스페데스(cespedes) 군종신부 였다.

촤초로 이땅에 발을 디딘 신부이나 한국 교회를 위해 남긴것은 하나도 없다.

당시 일본군에 끌려간 한국인은 약5만명이며 포로수용소에서 2,000여명이

천주교에 입교였고 그 중 21명이 순교, 순교자중 9명은 일본 복자 205명중에

당당히 포함되어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것입니다." (야고 2.17)

 

2. 신앙의 빛 (한국가톨릭의 시작)

 

1783년 동지사의 서장관 이동욱의 아들 이승훈은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서

40일간 머무르는 동안 프랑스인 그라몽 신부로부터 그 이듬해에 세례를 받았다.

그에 세례명은 베드로이다,( 아마도 이땅에 초석이 되라는 뜻에서....)

하느님의 복음이 이땅에 처음 선포된 것은 이승훈(베드로)가 교리책, 십자가,

성화, 로사리오...... 그 밖에 귀중한 성물을 갖고 옴으로써 시작된다.

이승훈은 이벽.권일신에게(요한세자,프란치스꼬 사베리오)라는 세례명을 주었다.

이벽으로부터 당대 대학자育?세례자 요한)으로

그의 형 정약종은(아우구스티노)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또한 당시 작은 공동체 모임이 잘 이루어져 명동에 있던중인계급 출신인 김범우

집에서 모임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사실이(정조9년) 당시 형조에게 발각이어 모두들 잡혔다.

당시 잡혀간 대부분이 양반이어서 훈방 조치 되었으나 역관이었던 김범우만이

고문(태형)끝에 충청도로 귀향갔다가 귀향하던 길에 옥고로 숨을 거두었으니

비록 작은 규모였으나 한국 천주교에 최초로 가해진 박해이며 이를 일컬어

"을사 추조 적발(乙巳 秋曹摘發 事件)" 사건이라 한다 .추조:관아 형조벼슬

 

3. 가성직 제도의 시작 (한국 가톨릭의 박해)

 

이승훈은 북경에서 주교 신부들이 미사를 주례하고 고해성사를 행하는 것을 보고

주교와 신부가 없는 이땅에 권일신을 주교로, 이승훈 자신과 유항검, 최창현, 이단원

등 몇몇 사람을 신부로 뽑아 가성직 제도를 만들고 미사 집전과 고해성사도 행했다

참으로 어리석고 우수운 우스운 일이라 하겠다.(1787년 - 1789년)

교리 연구중 미심쩍은 생각을 품게된 그들은 일단 성무집행을 중지한뒤, 그 당시

북경 주귁 구베아 주교에게 문의하게된다.(유항검)

1790년 북경으로부터 회답은"세례성사 외 다른 성사를 집행할 수없다"

그래서 그들은 가성직제도를 폐지하고 이 땅에 성직자를 모시는 일에

큰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어리석고 무지에서 나온 가성직 제도는 그들이

얼마나 신앙에 굶주렸음을 알것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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