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11월 위령 성월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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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1-11 ㅣ No.424

[레지오 영성] 11월 위령 성월의 단상

 

 

어느 날 악마가 “왜 극악무도한 이들을 용서해 주십니까? 그리고 나는 왜 용서를 해주지 않으십니까?”라고 하느님께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은 “저들은 매번 용서를 청했고, 너는 천지창조 이래 아직도 단 한 번도 용서를 청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무엇을 선택해야 하겠습니까?

 

‘자연은 결코 헛된 일을 하지 않는다’고 위대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해 자연세계의 모든 존재는 본성에 의해 존재의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이 언젠가는 실현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이 시기에 철학자의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자연이 본성의 목적에 따라 아름다움을 선사하기 때문입니다. 

 

고개 들어 밝고 맑은 푸른 하늘과 풍성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바라보자. 아, 자연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노란 은행나무, 다홍의 울긋불긋한 단풍나무들, 그 외 크고 작은 나무들이 서로 조화롭게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한 해의 막바지에 와있는 지금, 11월 위령 성월에 헛된 일을 하지 않는 자연을 바라보며 묵상합니다. 

 

자연의 지혜가 인간에게도 실현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인생의 시간이 흐를수록 자연을 거스르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은 일이지 숙고하고 반성합니다. 질서에 순응하는 자연처럼 자기 존재의 본성에 따라 올바르게 수행하고 있는지? 인간 본성이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혹 그 도정에서 벗어나지 않았는지 살펴봅니다. 

 

우리 삶에 본성이 목적을 향하는데 방해하는 요소들이 얼마나 많은가? 특히 진리(眞)와 선함(善)과 아름다움(美)을 추구하고, 이를 실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하지만 삶을 반추해보면, 진리는 왕왕 왜곡되고, 선함은 악으로 점점 힘이 약해지고, 아름다움은 분장으로 과장되어 허풍과 거품이 많습니다. 빠른 시간 안에 거짓과 허풍과 과장이 제거되어야 인간성 회복될 수 있습니다. 

 

특히 성경에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 본성에 신성함(神性)이 내재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힘으로 아름다운 공동체를 구현할 수 있습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 진선미가 실천되면 얼마나 행복하고 평화로운가! 하지만 이도 여의치 않음이 현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청하신 말씀, ‘서로 사랑하여라’ 이를 실천하는 것이 인간성의 회복입니다. 지금 서로 사랑합시다. 이를 실천하는 삶이 하느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비우는 것이 채우는 것, 행복의 답

 

자연은 겨울 준비를 위해 ‘낙엽을 떨굽니다.’ 낙엽은 나무에 머물려(定住) 하지 않고, 비우고 떠납니다. 하지만 우리는 잘 비우지 못합니다. 사람에게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라고 물었던 톨스토이의 질문과 같이 필요한 것이 얼마만큼 있어야 만족하는가? 취하고 채우기 위한 노력에 만족을 모르면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는 기차와 같습니다. 부자청년이(마르 10, 17-22) 주님의 제자가 되지 못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지만 많이 갖고 채우기 위한 노력보다 비우는 노력이 더 가치 있고, 기쁨과 평화가 있다고 현자들은 말합니다. 즉 비우는 것이 채우는 것이라는 모순 명제가 행복의 답입니다. 인생이야말로 공수래공수거 아닙니까! 아름다운 자연의 단풍을 감상하며 노랑 단풍은 엘로 카드로, 빨강 단풍은 레드카드처럼 인생에 작은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습니다. 자신 안에 과거의 어느 시점이 현재화 되어 늘 용서하지 못하고 분노와 미움의 마음을 속절없이 떨어지는 낙엽처럼 떨구어야 자유롭습니다. 지금 비우고 떨구는 실천, 즉 나누고 용서하는 삶이 의미 있는 고귀한 삶입니다.

 

 

우리 생(生)에 영원한 것은 사랑, 지금 서로 사랑하고 감사해야

 

교회는 11월을 위령 성월로 지정하고,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며 동시에 죽음에 대해 사색합시다. 전도서의 말씀처럼 ‘무엇이나 다 돌아가는 정한 때가 있다.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다.’(코헬 3, 1-2).

 

어찌 죽음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언제일지, 아무도 모르게 언젠가 반드시 죽음을 맞이합니다. 신문이나 미디어를 통해 주변에서 죽음을 자주 목격하지만 나의 죽음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나와 가까이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면 먼 이야기로 죽음을 잊고 살아갑니다. 아니 죽음이 두렵기 때문에 기억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가족과 지인과의 이별이 아쉽고 두려움이 엄습하지만, 더 근원적으로 잘 살아 죽음을 맞이하고,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야 하는 원초적인 두려움입니다. 그렇다하더라도 한계성을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는 우리는 늘 죽음을 기억해야 합니다(Memento mori). 

 

교회의 묘원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습니다. ‘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네 차례’(HODIE MIHI, CRAS TIBI). ‘오늘은 내가 묻히기에 나의 장례를 위해 여기 왔지만 내일은 당신의 차례로 당신이 여기 묻히게 되리라’고 죽은 이들이 전하는 소중한 침묵의 진리입니다. 이 말은 냉소적이거나 힐난의 의미가 아니라, 앞으로 남은 삶과 주어진 시간을 후회함 없이 살라는 적극적인 당부의 격언입니다. 

 

죽음에 대한 사색과 묵상은 우리 삶을 정화하는 힘이 있습니다. 영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비우지 못하는 욕심들, 쓸데없는 걱정과 애착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합니다. 어제 죽은 이들이 갈구하는 오늘 영원히 기억될 자선과 사랑을 실천하며, 깨어 기도하게 하며, 감사한 삶을 살게 합니다. 또 덧없는 세상의 즐거움에서 벗어나 외롭게 혼자 죽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보낸 사랑하는 이웃을 통해 내가 사랑받는 존재라고 느끼면, 죽음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여정이기에 두려움을 희망으로 바꾸는 영원한 생명의 길입니다. 

 

11월의 어느 날 스산하고 외로움을 느낄 수 있는 날에 죽음에 대한 사색은 외롭고 무거운 분주한 마음이지만 사랑하고 사랑 받는 존재로 더불어 살기에 영생을 향한 새로운 희망으로 힘을 얻습니다. 

 

이제 조금 지나면 날씨가 점점 추워집니다. 다가오는 추위를 이기는 것은 사랑입니다. 혼자는 춥지만 함께하는 사랑이라면 어떤 추위와 고통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랑의 힘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생(生)에 영원한 것은 사랑입니다. 따라서 지금 서로 사랑하고 감사합시다. 또한 하느님 나라로 먼저 가신 분들을 기억하며 영원한 영복을 누릴 수 있도록 기도하며 우리도 그날을 선취합시다. 자연이 헛된 일을 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헛된 삶을 살지 않고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고 기도 합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5년 11월호, 김춘오 힐라리오 신부(대전교구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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