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 북경의 남천주당과 우리나라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3-26 ㅣ No.1463

[특별 연재] 북경의 남천주당(南天主堂)과 우리나라



삶의 푯대를 상실한 현대인들은 인문학, 심리학, 과학의 문을 서성이며 길을 찾고 있다. 여기, 한평생 순교신심을 연구해온 손골성지 윤민구 신부는 신앙의 유산이 담긴 순교신심에서 삶의 방향키를 찾아 우리에게 들려준다.


한국 천주교회가 시작된 1784년 북경에는 동천주당(東天主堂), 서천주당 (西天主堂), 남천주당(南天主堂), 북천주당(北天主堂)이라는 이름을 가진 4개의 성당이 있었는데 줄여서 동당, 서당, 남당, 북당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 중 남당은 주교좌 성당이다. 남당은 북경의 선무문(宣武門) 가까이에 있다. 남당은 북경의 성당 중에서 제일 먼저 지어졌다. 그런데 남당은 오래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중요성 때문에 우리나라와 그리고 한국 천주교회와 가장 연관이 많은 곳이다. 조선시대 사신이 북경에 가게 되면 남당을 들리는 경우가 많았고 우리나라에 천주교회가 탄생한 이후에 신자들은 남당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을 만나 교류하며 도움을 받았다.

남당이 지어지게 된 이야기는 재미있다. 중국선교 길에 오른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 신부는 1582년 마카오에 도착하여 1599년에는 남경까지 진출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601년 북경에 도착하였다. 리치 신부는 한문으로 된 많은 저서와 번역서를 간행하였는데 그중에는 교회에 대한 책도 있지만 천문학과 수학에 관한 책이 많다. 그리고 지도도 만들었다. 그런데 리치 신부가 북경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매우 재미난 인연에서 였다. 북경에 들어가면서 리치 신부는 명나라 황제 신종(재위 1572-1620)에게 여러 가지를 진상(進上) 하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성상(聖像)과 지도 그리고 크고 작은 자명종(自鳴鐘)과 양금(洋琴) 등이었다. 이중에서 특히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자명종이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매 시각마다 자동적으로 종을 치며 시간을 알리는 자명종은 황궁(皇宮) 안팎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신종황제는 자명종이 고장났을 때 수리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고, 리치 신부와 그 일행을 수리공으로 북경에 거주하도록 허락하였다. 그리고 선무문 가까이에 부지를 주어서 성당과 사제관을 짓게 하였다. 이것이 남당의 시작이었다. 1610년 리치 신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신자 수가 25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1644년 명나라는 멸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졌다. 청 황제는 서양 선교사들을 귀하게 여겨 아담 샬(Johannes Adam Schall von Bell, 湯若望, 1591-1666) 신부를 남당에 살게 하였다. 청의 순치(順治)황제(재위 1643-1661)는 1650년 당시 북경에서 활동하던 아담 샬 신부에게 리치 신부가 지은 성당과 붙은 곳의 부지를 희사하였다. 그래서 아담 샬 신부는 이 자리에 큰 성당을 짓고 당시 북경에는 성당이 이곳 하나밖에 없었으므로 “천주당”이라 이름 지어 불렀다. 그리고 성당 옆에는 선교사들이 살도록 사제관도 지었다.

1690년 마카오 교구에서 떨어져 북경 교구가 새로 생길 때 남당이 주교좌성당이 되었다. 이 성당은 성모님을 주보로 모시고 있다. 리치 신부를 비롯하여 아담 샬 신부 등 남당에서는 처음부터 예수회 소속 선교사들이 활동하였다. 예수회가 활동할 때는 국적을 따지지는 않았고 여러 나라 출신들이 함께 일하였다. 그러나 1773년 예수회는 해산 되었고 예수회원들은 더 이상 남당에서 활동할 수 없었다.

한국 초기교회 시절 남당에는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담당 수도회도 라자로회로 바뀌었다. 라자로회는 빈첸시오 드 폴(Vincent de Paul, 1581-1660) 성인이 설립한 남자 수도회로 정식이름은 ‘선교 수도회’(La Congre gation de la Mission)이다. 그리고 구베아(Alexander de Gouvea, 湯士選, 1751-1808) 주교가 북경 교구장으로 있었다. 구베아는 포르투갈 에보라 (Evora) 출신으로 프란치스코 제3회 회원이었다. 1782년 주교로 선출되었고 1785년 1월에 북경에 도착하여 북경교구장으로 활약하였다. 아울러 궁정 수학자로서도 활동하였다.

남당과 우리나라 사신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로 미루고 남당과 우리나라 천주교회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하려 한다.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1756-1801)이 남당을 방문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이승훈은 남당이 아닌 북당에서 1784년에 세례를 받았다. 이승훈은 수학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북당에 있던 프랑스 출신의 예수회원들을 찾아갔던 것이다. 이승훈에게 세례를 준 그라몽 (Jean-Joseph De Grammont, 梁棟材, 1736-1812?) 신부는 수학자였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었다.

복자 윤유일 (尹有一, 바오로, 1760-1795) 순교자가 남당을 방문한 것은 확실하다. 윤유일 순교자가 1789년 서울을 떠나 1790년 1월(양력) 북경에 도착하였을 때 먼저 찾아간 곳은 북당이었다. 북당에 가서 이승훈에게 세례를 준 그라몽 신부를 찾았으나 그라몽 신부는 북경을 떠나 광동에 있었다. 그리고 북당을 담당하는 수도회는 더 이상 예수회가 아니었다. 북당도 역시 라자로회가 담당하고 있었는데 프랑스 출신 선교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윤유일 순교자가 북당을 찾아갔을 때 맞아준 사람은 라자로회 소속 로(Nicolas-Joseph Raux, 羅廣祥, 1754-1801) 신부였다. 로 신부는 윤유일과 필담을 나눈 후 윤유일을 남당으로 안내하여 구베아 주교를 만나게 하였다. 이미 「외침 2013년 11월호」에 <윤유일 순교자의 ‘미친 존재감’>이라는 이름으로 윤유일에 대한 글을 썼으므로 자세한 언급은 줄이지만 윤유일에게서 조선에 천주교회가 탄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구베아 주교는 마침내 1790년 가을 두 번째 북경을 찾아온 윤유일에게 우리나라에 선교사를 파견할 것을 약속하였다.

구베아 주교는 윤유일의 말을 믿고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1752-1801) 신부를 파견해 주었다. 그런데 주문모가 신품을 받기 위해 공부할 때는 아직 정식 신학교를 개교하지 않아 남당의 주교관에 머물며 공부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1794년 말 우리나라에 입국하여 활동하다가 신유박해(1801) 때 자수하였고 순교하였다. 그리고 124위 우리나라 복자 중에 유일한 외국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윤유일 이후 북경을 찾아간 우리나라 천주교 밀사들은 모두 남당을 방문하였다. 신유박해 이전은 물론이고 1814년부터 거의 2년에 한 번 꼴로 북경을 찾았던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1795-1839) 성인을 비롯한 신유박해 이후의 밀사들도 모두 남당을 방문하였다.

한편 병자호란(1636) 때 볼모로 잡혀 갔던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는 청나라 군대가 북경에 입성한 후 순치황제를 수행하여 1644년 9월에 북경으로 거처를 옮겼다. 소현세자는 그해 11월 귀국이 허락될 때까지 약 70일간 자금성 안 문연각(文淵閣)에 머물게 되었는데 흠천감정(欽天監正)으로 일하던 아담 샬 신부와 친교를 맺고 천주교와 서양 학문에 대해 알게 되었다. 아담 샬 신부는 귀국하는 소현세자에게 자신이 번역한 서양의 천문학, 수학에 대한 책과 천주교에 관한 여러 종류의 책 등을 기증하였다. 소현세자와 아담 샬 신부와의 만남이 어디에서 이루어졌는지 알려진 것은 없으나 남당에서의 만남도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남당이 크게 다시 지어지기 전의 일이다.

요새 중국과 교류가 빈번하여 북경을 찾는 천주교 신자들도 많을 것이다. 기회를 만들어 필히 북경의 네 성당, 특히 남당을 찾아갈 것을 권하고 싶다. 물론 현재의 남당은 1900년경 있었던 의화단 사건 이후에 새로이 지어진 것이라 복자 윤유일 순교자나 정하상 성인이 본 그대로의 모습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 자리에 옛 모습과 거의 같게 복원한 것이니 남당에 찾아가서 박해시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며 그곳을 찾은 신앙의 선조들과 복자 주문모 신부님의 숨결을 느끼고 오면 좋을 것이다.

* 윤민구 도미니코 신부 - 1975년 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탈리아 로마에 유학하여 1983년 라떼란대학교에서 사목신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2003년까지 수원가톨릭대학교에서 강의하였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무차장으로 일하였고 안성 대천동, 성남 수진동, 이천, 분당 야탑동성당 주임신부를 지낸 후 현재 손골성지 전담신부를 맡고 있다.

[외침, 2014년 12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윤민구 도미니코 신부]



2,557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