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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친교의 해와 사회교리: 외로움의 시대와 친교의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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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9-18 ㅣ No.1958

[친교의 해와 사회교리] 외로움의 시대와 친교의 공동체 (1)

 

 

인간은 처음부터 외로운 것이 아니다

 

경희대 김만권 교수의 논문 「한나 아렌트와 외로움, 그리고 ‘대화형’ 인공지능」(2022)은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사유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겪는 외로움의 문제를 성찰합니다. 논문에 따르면 ‘외롭다’(Lonely)라는 말은 적어도 영어문화권에서 16세기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 이전에는 없던 표현이었습니다. 셰익스피어 당시만 해도 유럽 사람들은 홀로 있음을 표현하는 ‘홀로됨’(oneliness)을 부정적으로 보기보다 하느님을 더 가깝게 여기고 마주하는 기회로 여겼다고 합니다. 셰익스피어가 묘사하는 ‘외로움’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주변과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고 고립된 상태를 뜻하는데, 이런 부정적인 의미의 외로움은 17세기까지도 그다지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자아, 타인, 세상의 상실

 

그런데 18세기부터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유럽에서 외로움이 본격적으로 확산된 계기에 대해 한나 아렌트는 산업 혁명에서 비롯된 산업화와 이에 따른 도시화라고 주장합니다. 18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유럽의 인구가 약 2.5배 이상 불어나자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늘어난 인구만큼 일자리가 증가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리를 잃고 불필요한 존재로 전락했으며 대규모 실업 위기 속에서 인간의 가치는 바닥을 칩니다. ‘당신이 아니어도 이 돈을 받고 일할 사람 많으니 잔말 말고 일하든지 아니면 나가든지!’ 식의 윽박지름은 오늘날에도 낯선 것이 아니지요.

 

하여간 한나 아렌트는 이 ‘뿌리뽑힘’(uprootedness)과 ‘쓸모없음’(superfluousness)의 경험이 유럽에서 있었던 온전히 새로운 현상이라 강조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고 보장해 주는 장소가 없는 상태, 그리하여 세상에 속할 곳이 없어진 상태는 먼저 자신의 삶 자체를 회의하게 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립니다. 자아를 잃어버린 사람이 다른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여유가 있을 리 없고, 그렇게 사회적 관계를 상실한 사람에게 세상은 의미 있는 곳일 수가 없지요.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되었을까, 내 삶은 왜 이리 외롭고 고통스러울까’ 하며 고민하던 사람들은 자기혐오의 화살을 견디다 못해 더 나쁜 선택을 합니다. 자기혐오에서 타인에 대한 혐오로 옮겨 가는 것이지요. 오늘날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혐오 현상, 그러니까 빌미만 잡았다 싶으면 마구 분노와 증오를 쏟아 붓는 현상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 인간의 또다른 얼굴일 수 있습니다.

 

 

사회적 문제인 외로움에 대처하는 해외 사례

 

이렇게 외로움이 그저 한 사람의 내면의 문제가 아니라 커다란 사회 변동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면 해결책 또한 혼자 마음을 다스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함께 고민하고 공동의 해결책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면에서 눈에 띄는 것이 지난 2018년 ‘외로움부 장관’(Minister for loneliness)를 임명해 국가적 차원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영국의 사례입니다.

 

외로움부를 신설한 계기가 되었던 2017년 ‘조 콕스 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영국 인구의 약 14%에 달하는 9백 만 명이 외로움을 경험한 것으로 추정되며, 17~25세 청년층 43%, 장애인 50%, 아이를 기르는 부모 가운데 절반 이상이 고립감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 가운데 38%는 불면증에 시달린 경험이 있고, 3분의 1가량은 참기 힘든 외로움을 느낀 적이 있다고 응답합니다. 마음이 괴로우면 몸도 힘들어집니다. 외로움을 겪을수록 사망 위험과 심혈관 질환, 우울감, 인지 능력 저하, 치매 등을 겪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외로움은 하루 담배 15개비를 피우는 것과 같이 몸에 해롭다고 합니다. 외로움 때문에 초래되는 사회적 비용만 해도 한 해 약 50조 원에 이른다고 하지요. 

 

이렇게 심각한 사회적 문제인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영국 정부는 먼저 세 단계의 계획을 실행합니다. 첫째, 사회적 고립과 외로움에 대한 객관적인 실태 조사와 척도 구축. 둘째, 펀드 조성. 셋째, 범정부적 민관 합동의 대응 전략 수립의 과정을 거쳐 종합대책을 수립했습니다. 이 대책의 골자는 개개인 사이의 사회관계망을 강화하고, 특히 생애주기에 따라 고립되어 외로워하는 취약계층을 포용하고 지지할 수 있는 지역사회를 건설하는데 있습니다. 공공과 민간을 가릴 것 없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 줄 수 있는 수단들을 동원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든다는 것이지요. 영국의 이런 움직임과 흡사하게 유럽 연합과 미국에서도 여러 가지 대책을 세우며 해결책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외로움

 

우리나라도 외로움 문제에 대해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2018년 4월 한국리서치가 외로움에 대한 여론 조사를 한 결과, 한국 사회의 외로움 문제도 심각하다는 결과를 얻습니다. 여기서 특징적인 것은 우리나라의 경우 20~30대가 가장 외로운 세대이고, 1인 가구일수록 외로움을 느끼며, 일정 소득 이하(가구 소득 200만 원 미만)일 경우 더 외롭다는 것입니다. 2017년 OECD의 ‘더 나은 삶 지수’(Better Life Index ) 조사에서 우리나라는 ‘곤란한 상황에서 도움을 청할 가족이나 친구가 있는가?’ 라는 질문에 OECD 41개국 가운데 눈에 띄는 꼴찌를 차지한 것도 유심히 볼 만합니다.

 

그래서 우리 정부와 지자체에서도 1인 가구 고독사 방지 사업, 홀몸어르신 살피미 서비스, AI 생활관리 서비스, 반려 동물 추천 및 돌봄 서비스와 같은 다양한 사업을 벌입니다. 또한 우리 교구도 사회복지회를 통해 한몫하고 있지요. 하지만 이런 사업들이 과연 외로움의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있는지는 따져 볼 일입니다. 여러 사업과 활동에 앞서 그보다 더 중요한 가치관과 삶의 태도를 바로잡는 일이 함께 따르지 않으면 사업은 사업으로 그칠 가능성이 큽니다.

 

더구나 지금 우리나라에서 시행되는 많은 대책은 어르신들을 돌보기에도 급급해 다양한 계층과 성별, 세대를 아우르기에는 벅찬 감이 없지 않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청년들의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기댈 곳 없이 스스로 미래를 개척해야 하는 많은 20~30대 청년들이 겪을 외로움의 깊이는 얼마나 두려운 것일까요? 대구 서구만 해도 1인 가구의 비중이 46%를 차지하고, 그중에서 중장년이 46%입니다. 나름의 사정으로 가족과 가정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 많은 이들은 어디서 그 외로움을 달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뿌리뽑힘’과 ‘쓸모없음’의 어려움을 덜어 낼 수 있을까요?

 

 

교회의 자리

 

그런 면에서 작년 11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바티칸 커뮤니케이션 부서 총회 참석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줍니다. 교황님은 이날 연설에서 교회의 임무가 ‘마지막과 함께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교회가 있어야 할 자리는 세상의 ‘실존적 주변부’라고 강조하십니다. 여기서 실존적 주변부란 인간이 ‘경제적 이유로 사회 변두리에 놓여 있는 곳일 뿐만 아니라 빵은 풍부하지만 의미가 없는 곳, 가족의 실패, 또는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 개인적인 사건이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소회된 상황에서 살아가는 곳’을 말합니다. 세상이 삭막하고 각박하여 외롭기 그지 없을 때 삼위일체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친교의 삶으로 초대된 교회가 그 외로움을 달랠 곳이 되고 있는지 살펴보라는 말씀 같습니다. 

 

올 9월은 한가위 명절이 있는 달입니다. 어쩌면 외로운 이들을 더 외롭게 하는 날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먼저 명절을 홀로 맞아야 하는 이들을 생각하고 마음과 노력을 기울여 봅시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해결해야 할 외로움의 문제를 두고,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봅시다. 다음 달에는 외로운 시대에 친교를 증언해야 할 우리가 어디서부터, 또 어떻게 ‘실존적 주변부’를 포용할 수 있을지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월간빛, 2023년 9월호, 박용욱 미카엘 신부(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친교의 해와 사회교리] 외로움의 시대와 친교의 공동체 (2)

 

 

우울과 외로움

 

2020년 기준 OECD 회원국 가운데 우울증 유병률이 가장 높은 나라는 바로 우리나라였습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우울증 환자는 해마다 평균 6.8%씩 증가하고 있지요.

 

우울증은 일상에서 흔히 외로움의 감정으로 나타나곤 합니다. 최근 한 연구는 50대 이상 성인 4,211명을 대상으로 12년에 걸쳐 조사한 결과, 우울증 환자의 18%가 외로움 때문에 마음의 병을 얻었다고 보고합니다. 역으로 외로움이 우울증을 키웁니다. 외로움 때문에 우울한 것인지, 우울증 때문에 외로운 것인지 따지는 것은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라는 논쟁과 비슷하겠지요. 문제는 어떻게 외롭고 우울한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정신의학과에서 받는 정신 치료와 약물 치료입니다. 선입견과 달리 요즘 항우울제들은 예전에 문제가 되었던 부작용들을 상당 부분 낮추었고 효과도 좋습니다. 이제 정신의학과 방문을 마냥 꺼릴 일만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학적 접근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외롭고 우울하게 만들었던 환경 자체가 변하지 않으면 증상이 호전되도 언젠가는 다시 우울증에 빠질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의학적 접근 방법은 이미 일어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지 예방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로움을 덜 수 있는 공동체가 그래서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느슨한 인간관계

 

사람이 혼자 산다고 모두 외로움을 겪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나타난 수많은 은수자들의 삶은 홀로 사는 것이 오히려 신앙의 신비에 몰입하는 하나의 방법임을 보여줍니다. 역으로 공동체에 속해 있다고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지요. 인간관계에서 느끼는 소외감과 상처, 배신감은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 생기는 것이니까요. 사람 때문에 상처 받고 마음의 문을 닫은 나머지 차라리 외로움을 선택한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게다가 연세 있는 분들이 어릴 적부터 형제들 사이에서 부대끼고, 또 집안 대소사를 통해 여러 가지 의무를 당연한 듯 받아들이면서 공동체 중심으로 살아왔다면, 나이가 적을수록 그런 경험이 줄어듭니다. 이제 사람들은 많은 의무와 끊임없는 비교,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관과 입장이 존중되지 못하는 현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적당한 간격을 두고 필요할 때만 모임에 참여하는 ‘느슨한 인간관계’가 대세가 된지 오래입니다. 성당이나 기관에서도 한 번씩 모이는 일회적 행사나 봉사에는 참여자가 모이지만 정기적이며 장기간 해야 하는 일에는 손을 빌리기가 어려운 것이 그런 현실을 방증합니다.

 

 

접촉 포비아

 

최근에는 느슨한 인간관계에서 더 나아가 ‘접촉 포비아’를 우려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포비아(phobia)’는 공포증을 말합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의 2020년 연구 「비대면 사회의 변질: 접촉 포비아 사회, 기회와 위협」은 사람들이 비대면 접촉을 통해 편리함을 추구하던 단계에서 아예 접촉을 회피하는 접촉 포비아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고 보고합니다. 원래 이 보고서가 말하는 접촉 포비아는 코로나19 감염병으로 인한 대인 접촉을 기피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감염병 사태가 3년을 넘어가면서 무시할 수 없는 사회 변동의 한 흐름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관계를 지원해 주던 여러 가지 기술이 이제는 인간을 대체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혼자라서 외롭지만 사람들과 얽히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는 피하고 싶은 요구에 맞추어 이른바 SNS라고 불리는 소셜 미디어가 발달하고, 사람이 대면으로 하던 많은 일을 무인화 기기가 대신하게 된 것입니다.

 

보고서는 이런 변화가 통상/수출 및 일자리 등 경제 위축, 시장의 집중 및 산업생태계 교란, 식량 및 의료 안보, 격차/소외 및 배달노동자 등 사회문제, 알고리즘의 일자리 대체와 플랫폼 노동자 양성 등의 위협을 동반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렇다면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대체하는 기술의 발달이 ‘혼자지만 외롭지 않은 삶’을 살 수 있게 해 줄까요? 적어도 현재까지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개인 간을 원격으로 연결하는 여러 가지 서비스가 실제 인간관계의 깊이를 따라갈 수 없는 점은 외로움 지수만 봐도 드러납니다. 김용섭의 저서 『라이프 트렌드 2020』에 실린 한 조사에 따르면, 외로움의 지수가 Z세대(18-22세) 48.3%, 밀레니얼세대(23-47세) 45.3%, X세대(38-51세) 45.1%, 노인층(72세 이상) 38.6%으로 SNS를 잘 이용하는 Z세대가 전 연령층에서 가장 외로움을 많이 느낀다고 합니다. 하루 종일 스마트폰을 주시하면서 누군가와 소통하는 척 하지만 사실은 대화 대신 서로 독백만 주고받는 뒤틀린 관계의 실상입니다.

 

 

인간관계의 단물과 쓴물

 

사정이 이럴진대,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되었다고 해서 저절로 친교의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코로나19 사태 동안 교회 공동체를 떠났던 많은 이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는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어쩌면 ‘혼자라서 느끼는 외로움은 덜고,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피할 수 있는 공동체’는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 상상 속의 공동체를 막연히 동경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런 상상 속의 공동체에 대한 갈망이 크면 클수록, 오히려 실제 공동체에 참여할 때 느끼는 실망감과 좌절도 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 이전과 이후에도 여전히 교회 공동체에는 인간 관계가 동반된 갈등과 상처가 존재합니다. 애당초 인간관계의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회피하면서 오직 단물만 빨아 먹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인생의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옵니다. 그 어려움 안에서 의미 있는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공동체도 그렇습니다.

 

 

함께 의미를 읽어가는 공동체

 

교회 공동체는 처음부터 인생의 여러 불안과 위험을 피하기 위해 모여드는 ‘안전지대’가 아니었습니다. 세상 속에서 고달픈 일을 겪더라도 교회에만 오면 그 고달픔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방공호도 아니었습니다. 교회는 오랜 기간 박해라는 외적 위협과 함께 교회 구성원들 간의 갈등과 분열도 이겨내야 했습니다. 신약 성경의 많은 서간들, 예컨대 코린토 1서가 교회 내의 갈등 속에서 일치를 호소하는 내용으로 이뤄져 있는 것을 봐도 그렇습니다.

 

친교의 공동체는 ‘외로움도 덜고, 스트레스도 없는 꿈의 공동체’를 찾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거룩한 공동체라고 해도 갈등과 상처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친교의 공동체는 그 갈등과 상처의 의미를 제대로 읽고 함께 대처하며 화해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함께 의미를 읽어가는 공동체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뤄 가야 할지는 다음 호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월간빛, 2023년 10월호, 박용욱 미카엘 신부(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친교의 해와 사회교리] 외로움의 시대와 친교의 공동체 (3) 누구나 있는 그대로를 인정받는 공동체

 

 

히키코모리에서 8050 문제까지

 

은둔형 외톨이는 일본에서 먼저 나타난 현상입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청소년의 ‘이지메’와 등교 거부 현상이 문제가 되고, 1990년대 중반 이른바 ‘취업 빙하기’를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히키코모리’, 즉 장기간에 걸쳐 집안에만 틀어박혀 다른 이들과 교류하지 않고 고립된 생활을 하는 젊은이 문제가 관심을 끕니다.

 

히키코모리 현상이 본격화된지 30여 년이 흐른 오늘날, 일본 사회는 40세에서 64세까지 중고령 히키코모리가 등장하면서 이른바 ‘8050’ 현상이 목도되고 있습니다. 8050 현상은 80대 부모가 50대 비혼 자녀와 동거하며 경제적인 지원을 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런 생활 형태가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은 뻔한 사정입니다. 연로한 부모가 언제까지 장성한 자녀를 돌볼 수는 없으니까요. 일본 후생성은 8050 문제가 악화되어 조만간 9060 문제까지 나타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고독사가 늘어나고, 부모의 연금과 생활보조비를 계속 받기 위해 돌아가신 부모의 시신을 유기하는 등의 극단적인 사례가 증가할 것이라고 내다봅니다.

 

 

비교, 경쟁, 기대

 

그렇다면 이런 일들이 일본만의 현상으로 그칠까요? 일본의 사회적 병리 현상들이 우리나라에도 시차를 두고 나타난 선례가 많습니다. 은둔형 외톨이 현상도 그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일본이 먼저 겪었던 저성장과 고령화 문제가 우리나라에서도 대두되는 가운데, 은둔형 외톨이의 문제 또한 간과할 수 없는 사회적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스스로 사회적 관계를 단절한 은둔형 외톨이, 자기 뜻과 관계없이 고립된 생활을 하고 있는 독거노인, 그리고 사회관계가 없는 1인 가구 같은 ‘사회적 고립인’ 경우까지 더하면, 외롭게 단절된 생활을 하는 사람은 갈수록 더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나라에서도 2000년대 초부터 은둔형 외톨이에 관련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원인을 규명하고 대처 방법을 제안하는 논문들도 많습니다. 그 많은 논문을 읽다 보면 공통적인 단어가 몇 개 있는데 ‘비교’, ‘경쟁’, ‘기대’ 같은 말들입니다.

 

우리나라의 은둔형 외톨이나 일본의 히키코모리 중에는 남성이 여성보다 훨씬 많고, 또 형제 가운데 맏이인 경우가 많은 인구학적 특성을 보입니다. 아무래도 남성의 경우 여성에 비해 사회적인 지위나 성취욕 면에서 심한 경쟁에 몰리고, 비교를 당하며 높은 기대를 받는 경우가 많다 보니 그만큼 세상으로 나아가서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는데 어려움을 크게 느끼는 것이지요.

 

비교와 경쟁, 과도한 기대 같은 심리적 압박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예도 많습니다. 고신대 연구팀의 2019년 연구를 보면, 은둔형 외톨이 청소년의 등교 거부 이유가 학교에 가기 싫고, 밖에 나가기 싫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해서가 아닙니다. 학교에 가고 싶고, 나가고 싶고, 혼자 있기 싫지만 사회 속에서의 고통이 집안에서의 고통보다 크기 때문에 은둔을 택했다고 합니다. 부모 세대에 비해 물질적으로 좋은 조건 속에서 성장한 청소년들이 두려워 집 밖을 못 나가겠다고 말할 정도로 비교와 경쟁의 부작용이 큰 것이지요.

 

2021년 광주광역시 조사 결과 청년들의 은둔 생활의 주된 계기가 취업 실패로 나타났고, 대부분은 대인 관계 트라우마를 경험했다고 보고합니다. 주위의 높은 기대를 채울 자신이 없고, 끊임없는 경쟁에 지치며 늘 비교 당하느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내보일 수 없는 젊은이들이 차라리 안전한 ‘내 방’ 속에 칩거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로 존재할 자리를 잃어버린 이들, 남들의 비교 속에서 존재 가치를 계속해서 입증해야만 한다고 믿는 이들에게 있어 이웃은 경쟁 상대요 비판자 그 이상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는 그런 심리적 위기 속으로 아이들을 몰아왔고, 이제 그 댓가를 치르기 시작합니다. 비교와 경쟁에서 뒤떨어질까 두려워 급기야 자기 방문을 걸어 잠그고 은둔하는 이들이 앞으로 늘면 늘지, 줄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이런 현실 속에서 어떻게 ‘기쁨과 희망’을 주는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 해답의 실마리를 옛 교회 공동체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친교의 외적인 표현, 환대

 

교회가 처음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로마 시대는 철저한 신분 사회요 계급 사회였습니다. 소수의 사회적 엘리트와 서민들, 그리고 노예들 사이의 간격은 지금 보다 훨씬 넓었습니다. 교회 또한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차이와 그로 인한 갈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특히 박해 때문에 성당을 가지 못하고 교우들의 가정을 전전하며 미사를 드렸던 가정 교회 시대에는 갈등의 소지가 컸습니다. 미사 장소와 식사를 제공할 수 있는 집주인 신자와 매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신자들 사이에 알게 모르게 갈등과 알력이 있었겠지요. 사람 사는데가 다 그렇듯 말이죠.

 

하지만 교회는 세상이 알지 못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가 서로 다르지만 하나를 이루며 서로를 향해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 주는 친교(코이노니아)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친교를 믿고 증거하는 공동체로서 교회는 친교를 친목이나 사교적인 마음가짐 정도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재채기와 사랑은 숨길 수 없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친교와 사랑을 마음으로만 간직하지 않고 외적으로 표현했는데 이를 ‘환대’라고 부릅니다. 로마 시대, 특히 박해 시기 동안 그리스도교 환대의 전통은 다섯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첫째, 선교사들과 이방인들을 대접하고 둘째, 죽은 이의 매장을 도우며 셋째, 박해 중에 신앙을 고백한 이들을 돌보는 한편 넷째, 죄수들과 포로들의 석방을 위해서 노력하고 다섯째, 병자들을 돌보는 일입니다. 이 다섯 가지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선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정성이 모여야 하고, 다음으로 환대를 베풀면서 그 보답을 바라지 않아야 합니다. 선교사들과 이방인, 죽은 이, 박해 받는 이들과 감옥에 갇힌 이들, 그리고 병자들은 하나 같이 환대의 댓가를 치를 수 없는 사람들이 었습니다. 지나가면 그만일 뜨내기손님들과 죽어도 자기 몸을 뉘일 무덤 조차 가지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수인과 포로의 신분을 전전하거나 병상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이들이 무슨 보상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함께 들으며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미사를 거행했습니다. 그리고 이 미사와 더불어 사랑의 잔치, 곧 아가페를 실천했습니다. 아가페 잔치를 위해 재산이 있는 사람들은 가진 바를 기꺼이 내놓았지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대계명은 미사를 통해서 실현되었습니다.

 

여기까지라면 교회가 다른 자선 단체와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 공동체에는 물질적 나눔 이외에도 특별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가페 식사에 초대받은 가난한 이들이 축복의 기도를 바치게 함으로써 누구든 각자 형편대로 이웃과 공동체, 나아가 하느님께 봉사할 기회를 준 것입니다. 재산이 있는 사람은 재산으로,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기도로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거룩한 교환’의 전통 덕에, 교회 공동체는 일방적으로 베푸는 사람과 도움을 받는 사람으로 갈라지지 않았습니다. 다른 이들을 위해 한푼의 정성도 낼 수 없는 가난한 형제자매들도 거리낌 없이 미사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가난한 이들의 기도를 더 잘 들어 주신다며 그들의 기도에 의지하는 교우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환대하는 공동체

 

오늘날 교회가 하던 많은 일이 사회 복지의 영역으로 넘어 갔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물질적 도움을 베풀고, 약한 이들을 돕는 일은 이제 국가와 다른 기관들도 함께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하든 부유하든 차별하지 않고 각자 형편대로 공동체에 기여하던, 그리하여 누구라도 공동체 안에서 자기 역할과 자리를 발견할 수 있었던 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우리가 포기할 수 없고, 포기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도덕적으로 흠 없는 사람들만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또 물질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만이 참여할 수 있는 공동체도 아닙니다. 교회는 누구나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 이해받으며 환대를 베푸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서로 비교하지 않고 경쟁하지 않으며 누구나 어떤 처지에서든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있는 공동체, 그것이 친교의 공동체 교회여야 합니다. [월간빛, 2023년 11월호, 박용욱 미카엘 신부(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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