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 (일)
(홍) 성령 강림 대축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교의신학ㅣ교부학

[성령] 성령과 기: 교회론과 성사론 안에서의 성령의 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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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1-10 ㅣ No.204

성령과 기(氣) : 교회론과 성사론 안에서의 성령의 망각 (1)

 

 

교황 레오 13세는 정당하게 자기 시대의 ‘성령의 망각(Geistvergessenheit)’을 비판하였다. 성령에 대한 회칙 〈Divinum illud munus(1897)〉에서 그는 “그리스도인이 종종 성령에 대한 빈약한 인식만을 가지고 있음”을 유감으로 생각하며, “그의 이름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심행위 안에서 그렇게 자주 입술에 오르내리지만, 성령에 대한 신앙은 짙은 어둠으로 덮여 있다!”1)라고 말했다. 이런 시대의 흐름 속에서 사람들은 이제까지 신학 안에서 간과되었던 성령론의 특수한 위치를 인정하게 되었으며, 이렇게 해서 성령의 망각은 그리스도교 신학들의 운명적인 주제로 여겨지게 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새로운 신학 논문들 또한 신학과 교회 안에서의 이러한 성령의 망각을 드러내고 있다. 먼저 미국에서 잊혀진 성령을 뜻하는 《The Half-Known God(반만 알려진 하느님)》이란 제목의 책이 출판되었는데, 여기에서 성령은 그리스도교 신학 안에서 소홀히 취급된 의붓자식으로 여겨졌다. 성령론은 1957년에 이르러서는 소홀히 여겨지다 갑자기 유명하게 된 주인공 신데렐라에 비유하여 신데렐라 이론(a Cinderella Doctrine)으로 표현되기도 했는데, 사람들은 성령이 성령강림 때처럼 교회력의 한 주일에만 중심에 서 있기 일쑤라는 것과 교회에 오가는 신자들 스스로 성령이라는 주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잘 모르고 있으며,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의 일상적인 생활에 있어서 성령은 특별히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을 유감으로 여겼다.

 

교회는 그리스도론을 너무 강조하였고, 또한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성령론적인 국면을 소홀히 하였다. 그 때문에 교회는 성부, 성자, 성령 골고루 관계되어 이해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도와 대리로서 그리스도 한쪽으로만 치우쳐 이해되었다.

 

다음의 글들은 우선 교부학에서 시작하여 트리엔트 공의회를 지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까지 신학 안에서의 성령에 대한 이해를 개략적으로 고찰한다. 이 글들은 특별히 교회론과 성사론 안에서 성령에 대한 주의가 부족하였음에 주목한다. 왜냐하면 성령에 대한 교회의 이해는 특별히 이 두 영역 곧 교회론과 성사론 안에서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성령론적인 관점에서의 교부들의 교회론

 

하나의 체계적인 교회론을 교부들에게서 찾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들은 교회론적인 글들을 썼으며, 그 글들은 언제나 우선적으로 교회에 대한 성서적인 관념들과의 관련 안에서 작성되었다.

 

교부들은 교회를 전체 그리스도교적인 구원경륜의 지평 안에서, 특별히 삼위일체적인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서 바라본다. 결론적으로 말해 교부들은 성령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 글은 몇몇 교부들의 교회론적인 사고들 중에서 성령에 관련된 사고들만을 다룬다.

 

1) 희랍교부들의 교회론

 

가) 리옹의 이레네오

 

리옹의 이레네오(Irenaeus, +202년경)는 자신의 교회론을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의 일치된 영역 안에서 전개한다. 그가 말하는 교회는 “매일 매일 체험되는 실재이고, … 로고스의 계시 안에서 예수의 구원업적과 하느님에게 돌아가는 세상의 회귀 안에서 앞서 주어진 현실이며, … 프노이마(Pneuma), 곧 영과 성부와 성자에 대한 직접적인 인식 안에서 정립된 공동체”2)이고, “하느님 자체이신 성자께서 손수 모으신 하느님의 모임”3)이다. 이러한 성령께서는 오로지 교회 안에서 활동하신다.(하지만 성령께서는 교회 밖에서도 활동하시는 분이시다.)

 

스스로 교회로부터 멀어진 자는 영의 공동체와 아무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교회가 있는 곳에 하느님의 영이 있고, 하느님의 영이 있는 곳에 교회와 모든 은총이 있기 때문이다. 영은 진리이다.(1요한 5,6 참조) 성령과 관계없는 자는 어머니의 가슴에서 영양분을 받지 못하는 젖먹이와 같으며, 그리스도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샘물(묵시 22,1; 요한 7,37-38 참조)도 얻을 수 없다.”4) 그러므로 성령은 마치 어머니이신 교회처럼 양분의 원천이고 제공자이다.

 

나) 로마의 히뽈리토

 

서방에서 활동한 마지막 희랍교회 작가인 로마의 히뽈리토(Hippolytus, +235)는 교회를 구원사(救援史)의 범위 내에서 고찰하였는데, 그에 따르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일치를 이루시고 강화하시는 성령의 힘 안에서 그리고 당신의 고통 안에서 그리스도 자신이 지으신 혼례복”5)이다. 이 영이 사도들에게 넘겨지고 계속해서 교회 안에 전달된다. 이렇게 영은 주교들과 사도들의 후계자들에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교회의 교계제도는 영과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다) 테오도르의 몹수에스티아

 

테오도르의 몹수에스티아(Mopsuestia, +428)는 성령의 신성을 부정하는 성령 피조설파 (聖靈被造設派, pneumatomachi)6)를 반대하여, 성령을 제한 없이 삼위일체적인 영광송(Doxologie)으로 칭송할 것을 주장한다. : “영이 성부와 성자와 불려지고 고백된다는 것은 옳다. 왜냐하면 성령도 저 창조되지 않은 본성으로 있기 때문인데, 그 본성은 영원으로부터 존재하고 모든 사물의 원인이며, 모든 피조물은 이 본성에만 영예를 기울여야 한다.”7)

 

영은 변화시키는 힘이며 그리스도의 구원경륜에 있어서의 동행자이다. 성령 덕분에 교회는 사도들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을 보존한다. 그러므로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의 활동 없이 교회적인 일치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 “바울로는 모든 신자들이 미래적인 희망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이 성령의 한 힘 안에서 한 몸이라는 것을 알려준다.”8)

 

몹수에스티아에 따르면 직무의 구원적 의미는 영의 협력 없이 적당하게 묘사될 수 없다. 이렇게 교회적인 직무는 성령론적인 기초를 갖는다.

 

라)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Cyrillus, 444)에 따르면 교회의 구성원은 성령에 연관됨으로써 서로 간에는 물론이고 하느님과도 하나이다. : “우리 모두가 하나이시고 같은 분이신 영, 곧 성령을 모셨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서로와 또 하느님과 연결되어있다. 자신을 위해 사는 우리가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우리 각자 안에 성부의 영을 살게 하시는데, 이 영은 또한 그분 자신의 영이시다. …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안에서 하나이고, …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과 유일하신 성령과 함께 하는 영성체를 통하여 하나이다.”9)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사람들의 영혼 속에 살기 위하여 교회에 선사하신 것이 성찬례이다. 따라서 만일 사람들이 성찬례를 통하여 성령에 연관된다면 그리스도와 그리고 상호간에 하나가 된다. 영과 성자를 통하여 중재되어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이 되며, 모든 것은 영으로부터 성자를 통하여 성부에게로 인도된다. 이렇게 치릴로는 모상으로 만드는 신적인 본성에의 참여를 명백하게 성령의 내적 거주로 확정한다.

 

마) 대 바실리오

 

대 바실리오(Basilius, +379)는 삼위일체에 대한 전체적인 고백에서 특별한 지위의 성령론을 이끌어낸다. : “하나의 영혼은 … 가장 순수한 창조의 영역 안에서, 성자와 성부가 계시는 그곳에서 성령을 보게 된다. 이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같은 본성과 본질을 지니며 선함과 정의, 거룩함과 생명과 같은 모든 특성을 갖고 있으니, 성서가 ‘착한 영’, ‘올바른 영’, ‘거룩한 영’에 대해 누차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 … 한 분이 성부이시고 한 분이 성자이신 것처럼 그렇게 한 분 또한 성령이시다.”10)

 

성령(聖靈), 곧 ‘거룩한 성령’(마태 3,11 참조)이라는 이름은 영에 대한 원래적이고 고유한 명칭으로써 전적으로 특별히 영적인 것, 순수하게 비물질적인 것과 불가분적인 것을 표현한다. 성령께서는 스스로 생명의 시여자이고 성화의 원천이시며, 그분은 자신의 도달할 수 없는 본성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선하시기 때문에 인간에게 파악될 수 있다. 성령께서는 오직 자신을 모시기에 합당한 사람들에게 전하여지신다. 그렇지만 그분이 전하여지시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같은 정도가 아니라 개개인의 신앙에 상응하여 전하여지신다. 즉 성령께서는 신앙이 큰 사람에게는 아주 충만하게, 신앙이 적은 사람에게는 그만큼 부족하게 전해지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령이해 하에서 바실리오는 교회들이 “그 지체들이 오직 하나의 호흡으로부터 혼이 불어넣어진 유일한 몸으로서 성령 안에 뿌리를 박고 사랑 안에 일치되었던” 시기를 그리워하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이 영이 하늘에 있고, 땅을 채우고 있으며, 또 어디에나 있고, 그 무엇도 그를 제한할 수 없다. 그는 온전히 각 사람 안에 있으며 온전히 하느님과 함께 있다. 그는 종으로서 은사들을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독단적으로 은총들을 하사한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이 “성령께서는 이렇게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나누어주시기” 때문이다.(1고린 12,11) 그는 중개자로 보내지지만 자신의 힘으로 활동한다. 그가 우리 영혼들 안에서 살고, 그가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결코 떠나지 않도록 기도하자.”11) [월간 빛, 2003년 11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의신학 교수)]

 

 

성령과 기(氣) : 교회론과 성사론 안에서의 성령의 망각 (2)

 

 

2) 라틴교부들의 교회론

 

가) 떼르뚤리아누스

 

떼르뚤리아누스(+220년 이후)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교부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207년 경 몬타니즘(Montanismus)이라는 엄격주의적이고 종말론적인 이단운동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떼르뚤리아누스는 교회를 삼위일체 하느님이 사시는 곳으로 이해하며 말하길,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이 계시는 곳에 또한 교회도 있는데, 이 교회는 세 분의 몸을 구성한다.” 하였다.

 

그는 교회를 심지어 성령과 동일시하는데, “교회는 원래 그리고 본질적으로 영 자체로써, 그 안에 한 유일한 신성의 삼위일체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계신다. 그분께서 주님을 따라 세 위격 안에 존재하는 교회를 모으신다.(마태 18,20 참조) 그러므로 교회는 주교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영이 불어 넣어진 인간을 도구로 하는 영으로서의 교회로 죄악을 분명히 사면한다.”고 하였다.

 

나) 카르타고의 치프리아노

 

카르타고의 치프리아노(+258)에게 있어서 교회는 구원을 위한 유일한 방주이고, 유일한 양우리이며, 그리스도의 유일한 양떼이고, 솔기가 없이 짠 의복이며, 그리스도의 유일한 신부이고, 유일한 비둘기이며, 어머니(Ecclesia Mater)이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성령은 아가서에서 주님의 인격으로부터 하나의 교회를 암시하며 말하기를, ‘티없는 나의 비둘기는 오직 하나뿐, 낳아 준 어머니에겐 둘도 없는 외동딸.’”(아가 6,9)이라 했다.

 

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치 안에서 결합되어 있는 백성”이다. 교회는 홀로 성령을 소유하고 있으며, 세례의 물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생명을 낳는다. “풍부하게 흐르는 영은 그 어떤 경계 안에도 가두어 넣어지지 않으며, 어떤 공간적인 지역 위에서 속박하는 울타리로 제한될 수도 없다. 영은 지속적으로 흐르고, 풍요롭게 흐르며, 우리 마음은 단지 목말라하고 열려져 있어야 한다. 우리가 받아들이는 신앙을 세례에로 함께 가져가는 그만큼, 넘쳐나는 은총을 우리는 긷는다.” 그러므로 교회의 구성원들은 교회가 하나의 영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 마음과 한 감각을 가져야 한다.

 

다) 암브로시오

 

암브로시오(Ambrosius +397)에 따르면, 세례지원자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지 않으면 죄들의 사함을 받아들일 수 없고 영적인 은총의 선물을 얻을 수 없다. 또한 세례자는 ‘영의 날인(signaculum spirituale)’을 받는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는 것이다. : “성부 하느님이 당신을 날인하셨고, 주님이신 그리스도가 당신을 강하게 하셨으며(confirmativ), 사도의 편지(2고린 1,21-22)에서 읽듯이 영의 담보물을 당신의 마음에 주셨다.”

 

* 2고린 1,21-22 :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과 우리를 굳세게 해 주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어 사명을 맡겨 주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사람으로 확인해 주셨고 그것을 보증하는 표로 우리의 마음에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암브로시오에 의하면, 말씀의 씨앗과 하느님의 영으로 충만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곧 그리스도교 백성을 낳는다.

 

라) 아우구스티노

 

바오로를 따라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430)는 교회를 그 머리가 그리스도인 몸으로 규정한다. 교회와 그리스도가 함께 그리스도 전체를 구성한다. 교회 자신은 ‘columba(비둘기)’라 불릴 수 있다.(마태 3,16) 왜냐하면 교회 안에 성령의 힘이 활동하시기 때문이다. 교회는 영이 불어 넣어진 존재로서 자신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낳을 수 있다. 은총을 통하여 몸에 생명이 주어졌고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셨으며, 성령 자신이 은총이시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이 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 곧 교회 안에 있으면, 그러면 그는 그리스도의 몸으로부터 살아가는 것이다. 이 교회 안에는 성령만이 사시는 것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도 사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지극히 높은 삼위일체 전체의 성전이다.

 

아우구스티노는 교회 안에서의 성령을 인간 몸 안의 영혼과 비교해서 말하기를, “영혼이 인간의 몸 안에 있는 것처럼 성령은 전 교회 안에 계신다. 성령께서는 전 교회 안에서 영혼이 한 몸의 모든 지체 안에서 행하는 그것을 행하시는 것이다.” 하였다.

 

그는 또한 인간 안에서의 성령을 양심과 비교해서, 타인 안에도 있는 양심이지만 우리는 그 양심을 우리 안에서 보듯이, 우리 없이도 계실 수 있는 성령을 우리는 우리 안에서 알아본다고 말하였다. : “즉 우리 안에 있는 우리의 양심도 우리에게 그렇게 보여 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얼굴은 보지만 우리의 얼굴은 볼 수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양심을 본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양심을 보지 않는다. 양심은 항상 우리 안에만 있는 것이다. 성령께서도 역시 우리 없이 계실 수 있다. 하지만 그분 또한 참으로 우리 안에 계시기 위해서 주어져 계신다.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시지 않으면, 그분이 보여 지고 인식되어야 하시는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지고 인식될 수 없는 것이다.” [월간 빛, 2003년 12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의신학 교수)]

 

 

성령과 기(氣) : 교회론과 성사론 안에서의 성령의 망각 (3)

 

 

그리스도 중심적인 관점에서의 중세 서방 교회론

 

‘제국으로서의 교회’라는 교회상으로부터 도출되는 교회론에 의하면, 교회와 제국은 공동으로 그리스도교 사회를 건설하며, 그 사회 안에서는 교회와 국가권력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1054년 동·서방교회의 분열 이후에 동방에서는 삼위일체론·그리스도론·성령론과 밀접히 결합된 교회관이 발전하였고, 제국이 동방에서 존속하는 반면에 서방에서의 제국의 붕괴는 ‘세계적’이고도 ‘영적인’ 새로운 질서를 이끌어내었다. 또한 교회의 제도적인 특성은 더 폭넓게 강화되었으며 그 기본질서는 유대교적인 범주 안에서 형성되었다.

 

11세기에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은 교회를 위한 자유와 고유한 권리를 요구하였고, 이완된 교회규율을 다시 세우고 교회를 평신도들의 힘(정치적인 힘)으로부터 구해내는 것을 목표로 교회를 개혁하였다. 이로써 교회는 당연하게도 국가적인, 실로 군주국적인 특징을 지니게 되었다. 교계제도, 특히 교황으로부터의 자주적이고 완전한 사회로 파악되는 것이 교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노가 작업한 신학적 주제들은 계속해서 교회론에 영향을 끼쳤는데, 여기에서의 교회는 아직도 계속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과 성사들을 통해 하나가 된 신자들의 전체로서 그리고 영이 불어넣어진 몸으로서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12세기부터 교회론에 변화를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초기 스콜라 신학자인 롬바르두스(Petrus Rombardus +1160)와 빌헬름(Wilhelm von Auxerre +1237)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개념을 새로운 방향으로 제시함으로써 시작된다. 새로운 방향이란 그리스도의 몸을 성체가 아닌 교회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제시한다는 것이다.

 

4세기에 ‘신비적인 몸(Corpus mysticum)’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는데, 이는 성체성사 안에서의 주님의 몸인 성체 혹은 성사적으로 숨어계시며 현존하시는 주님의 몸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신자들은 이 몸을 통하여 (영성체로써) 그리스도의 참된 몸(Corpus verum)인 교회로 변화된다는 것이 이와 관련한 생각이었고, 이는 9세기까지 서방교회의 신학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다. 그러나 11세기에 베렝가르(Berengar von Tours)가 성사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을 순전히 상징적으로 파악하려는 견해를 보이자, 이에 대한 반응으로 신비적인 몸이라는 단어는 성체성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즉 교회를 그리스도의 참된 몸으로 보는데 비해, 성체를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몸으로 보는 견해는 위험하게 여겨져 더 이상 그리스도의 몸을 신비적이라는 단어로 표현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서 이제 개념의 교체가 일어난다. 12세기 중엽에는 성체성사 안에서의 그리스도 현존의 실제를 강조하기 위해서 성체성사적인 몸이 그리스도의 참된 몸으로 표현되고, 교회는 순전히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몸으로 표현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3세기에는 이 새로운 용어가 두루 사용되게 되었고, 이제 사람들은 신비스런 몸이라고 했을 때 (성체성사와 관련된) ‘Corpus Christi mysticum(신비스런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성체성사와 무관한) ‘Corpus Ecclesiae mysticum(신비스런 교회의 몸)’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되었다. 즉 교회는 이제 신비스런 몸으로서 그 머리가 교황인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된 그리스도인들의 몸을 뜻하게 된 것이다.

 

교회는 신비스런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이 개념은 결과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영을 망각한 교회론을 촉진하게 되었다. 역사적인 상황 안에서의 교회의 근본적인 변화가 자신의 주된 관심을 세계적이고 사회적이고 정치적이고 제도적인 면으로 돌려놓았던 것이다. 교회는 자기 자신을 주제로 삼는다! 하지만 이러한 불가피한 자기주제화와 더불어 법제적으로 방향지워진 교회론이 기초되고 전개되었고, (안타깝게도!) 아직 이 교회론에서 중심이 되어 있었던 것은 교회의 (영적인 면은 소홀히 한) 교계제도였던 것이다.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서의 교회론 개략

 

르네상스(문예부흥), 자유주의, 산업혁명 등에 이은 19세기의 정신적인 혁명은 교회를 새롭게 자극하는 새로운 운동을 일으켰다. 권위라는 표지 안에서의 복구를 주장하는 전통주의(Tradotionalismus)1)와 교황지상주의(Ultramontanismus)2)가 그것인데, 이들 운동은 이미 뿌리를 내린 교황직을 새로이 견고케 하고, 교황체제군주국(Pontifikalmonarchie)으로서의 교회라는 이데올로기를 전개코자 하였다.

 

이와 병행하여 한편으로는 재발견된 중세기적이고 교부적인 신학이, 다른 한편으로는 독일 낭만주의에 뿌리를 둔 쇄신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튀빙엔 학파(T  binger Schule : J. A. M  hler +1838, J. H. Newman +1890)’와 소위 ‘로마 학파(R  mische Schule : G. Perrone +1874, J. B. Franzelin +1876, M.-J. Scheeben +1888)’는 교회를 다시금 Corpus mysticum Christi로, 즉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몸으로 파악하게 되었다. 이 말은 이제 전처럼 (성체성사와 무관한) 신비스런 교회의 몸이 아니라 (성체성사와 관련된) 신비스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에 주목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그들의 생각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계속되었던 것은 오히려 교회를 가시적이고 교계제도적인 사회라는 외적인 요소들을 통하여 정의한 벨라르미노(Bellarminus +1621)적인 노선이며, 가시적이고 교계제도적이라는 이러한 교회론적인 이원론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까지 유지되었다.

 

교회론 안에서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이래로 가시적이고 제도적이고 직무적인 면에 더 많은 가치를 두게 된다. 1943년 비오 12세의 회칙 ‘Mystici Corporis’는 성서적인 언명을 받아들임으로써 교회를 순전히 법제적으로 이해하는 것에 반대한다.

 

서방신학의 교회론은 그 원천을 그리스도 중심주의에 둔다. 그리고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주의 안에서 최종적으로 성령의 망각의 뿌리도 보여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J. Brinkrine이 지은 교회론(Die Lehre von der Kirche, Paderborn : 1963)의 목차는 (내적이고 영적인 면을 소홀히 한) 그러한 교회론의 결과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의 ‘신론(神論)’은 (약500쪽 중에서 26쪽만을 할애한) 성령에 관한 유일한 장(章)에서 (‘성자의 발출’이라는 장 다음에) 성령의 발출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즉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교회론 성령에 대해서는 단지 조금만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영을 망각한 이러한 상황은 교회가 지역 공동체와 쇄신운동과 카리스마(은사)를 주목하고 그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인정함으로써 조금씩 개선되었다. 이를테면 교회론에 있어서 아주 소홀히 여겨진 은사적인 국면은 성령의 위치가 강조됨으로써 교회의 중심에서 다시 보여지게 된다. 그리고 비로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신중심적이고 성령론적인 교회론이 발전하기 시작한다. 이런 관점에서 K. Richter라는 학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이제) 교회는 일종의 성령론적인 교회론 안에서 영이 불어넣어진 운동으로 이해되며, 이는 제도적인 요소보다도 믿음과 소망과 사랑 안에서의 공동체를 더 강조하는 운동이다.” [월간 빛, 2004년 1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의신학 교수)]

 

 

성령과 기(氣) : 교회론과 성사론 안에서의 성령의 망각 (4)

 

 

1) 교부시대 초기의 성사론

 

가) 아우구스티노

 

성사개념은 떼르뚤리아누스(+220?) 이후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430)를 통하여 결정적으로 발전하였다. 그에게 성사는 하느님의 보이는 말씀으로서 구원을 선사하고 신앙을 불러일으키는 거룩한 표지이다. 성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하시는 보이지 않는 말씀을 보이게 하는 것으로서 거룩하다. 그리고 하느님이 선물하시는 이 성사는 무엇보다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으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더 굳세게 한다는 말이다. 무엇보다도 세례와 성체성사에 관련되어 조직적으로 전개된 아우구스티노의 성사이론은 그 이후의 세기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성령에 대하여 논할 때에도 아우구스티노는 이미 그에 앞선 교부들과 마찬가지로 현저하게 성사와의 관련 하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성사는 감춰져있는 실재의 운반자인데, (성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은 우리를 볼 수 있는 사물의 상징을 통하여 볼 수 없는 실재들에로 이끄는 것이다.

 

성사를 집전할 때 자신 안에 성령을 모신 전 교회가 활동을 하는데, 성사들은 성인들의 마음 안에 성령으로 완성된 효과(일치[unitas]와 사랑[caritas])를 목표로 한다. 즉 교회 안에 성령이 사시며, 이렇게 성령을 모신 교회가 전체로서 성사를 집전한다는 말이다. 그의 말대로 어떤 개별 성사는 단순히 몇몇 신자가 받는 성사만이 아닌 것으로, 전체 교회의 신앙 안에서 우리는 성사를 받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신자들은 서로 일치하고 친교를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며, 성사는 이렇게 신자들을 거룩하게 하여 성인들의 공동체를 목표로 하는 것이다.

 

나) 세빌라의 이시도로

 

아우구스티노를 따라 세빌라의 이시도로(Isidor von Sevilla +636)는 물, 빵, 포도주와 기름 같은 자연적인 요소들이 성령의 내려오심을 통하여 구원을 가져다주는 힘을 갖고 있다고 강조하였다. : “빵과 포도주는 성령의 활동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사가 된다. 창조의 시작에 물위를 떠돌던 영은 물을 치료하고 거룩하게 하며, 물에 죄로부터 정화하는 신비스런 힘을 부여한다. 죄녀가 예수님의 발에 기름을 발랐다는 것에 관련하여 이시도로는 기름의 구원하는 힘을 설명한다.”

 

이시도로는 객관적인 품위와 성사들의 효력은 개인적인 거룩함 혹은 집전자의 죄성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성령은 그들의 풍성한 교회적 집행에 있어서 감춰진 방법으로 활동하시기 때문이다. 성사의 객관적인 효과, 즉 성사가 유효하게 이루어지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집행자와 수령자의 성성(聖性)과 죄성(罪性)과 신앙정도와는 무관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주관적인 효과, 즉 성사의 은총이 개인에게 얼마나 풍성하게 주어지는가에 대한 문제는 그렇지 아니하다.

 

2) 중세에서 트리엔트 공의회까지의 성사론

 

가) 베드로 롬바르도

 

베드로 롬바르도(+1160)는 7성사를 은총의 표지요 원인으로 고찰한다. 그는 성 빅토르의 후고(Hugo von St.-Viktor +1141)와 연결하여 표지적 특성과 함께 원인적 특성도 강조하면서 인과관계 개념을 도입하였다. 그는 개념을 정의하면서 후고로부터 요청된 그리스도를 통한 제정과 연결하여 성사의 수를 이전의 많은 수에서 일곱으로 줄였다.

 

이렇게 하여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는 마침내 일곱 숫자를 정의하게 된다.(DH 1601) 곧 오늘날 우리가 7성사라고 부르는 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 고해성사, 병자성사, 성품성사, 혼인성사가 교회의 공식적 성사로 확정되었다.

 

나) 토마스 데 아퀴노

 

토마스 데 아퀴노(+1274)는 베드로 롬바르도를 따라서 하느님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설립된 은총을 부여하는 표지를 성사로서 파악한다. : “표지와 원인은 동일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표지임은 (원인보다) 효과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사는 은총의 표지이며, 따라서 성사는 (은총을 드러내는 효과이지) 은총의 원인이 아니다.” 하지만 성사는 “거룩한 사물의 표지인데, 그것은 거룩한 사물이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는 데서 그러하다.”

 

그는 말하기를, “성사의 내면적인 효과는 사람이 죄악에서 정화되고 은총을 통하여 조명된다는 데 있다. … 성사의 힘은 유일하게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에, 하느님 홀로 성사들을 제정하신다는 결론이 나온다. …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성사들’(베드로 롬바르도)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는 세워졌다.”고 하였다. 즉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간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파스카가 성사의 원천이 되며, 이렇게 하느님의 힘에서 유래하는 성사는 신자를 죄악에서 정화하고 은총으로 거룩하게 한다는 말이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성사들을 ‘질료’와 ‘형상’에서 합성된 효과를 내는 원인으로 정의한다. : “두 가지 방법으로 무엇인가 성사 안에 있다는 것이 요청된다. 성사의 필연성에 속하는 것으로든지, 아니든지. 그런데 만일 무언가 부족하다면 성사는 완성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만일 필요로 하는 형상 혹은 필요로 하는 물질이 부족할 때도 그러하다.”

 

그러나 토마스는 성사 안에서 신앙이 가지는 본질적인 의미를 강조하는데, 표지의 구조를 위해서는 물론이고 수령자의 태도를 위해서도 그러하다. 즉 성사를 받는 사람의 신앙 정도에 따라서 은총은 다르게 주어진다는 뜻으로 성사수령에 있어서 열심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또 그에 따르면 말씀은 성사들 안에서 말해지기 때문에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기 때문에 활동하는 것이다. 즉 성사 안에서의 하느님의 말씀은 단순히 읽혀짐으로써 그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신자들이 듣고 믿음으로써 그러한 것으로, 성사를 받을 때 신자들은 읽혀지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또 그 말씀에 응답해야 한다는 말이다! [월간 빛, 2004년 2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의신학 교수)]

 

 

성령과 기(氣) : 교회론과 성사론 안에서의 성령의 망각 (5)

 

 

다) 종교개혁가들

 

일반적으로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의 신앙상의 차이는 개신교회는 말씀의 교회이고, 가톨릭교회는 성사들의 교회라는 점을 든다. 종교개혁가들에게 성사는 무엇보다도 사람이 신앙 안에서 응답해야만 하는 선포말씀의 형식으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성사가 아니라 성사의 신앙이 정당한 것이다.”라고까지 한다.

 

* 루터

 

루터(Luther)의 언명에 따르면 성사들은 “하느님 자신이 설립하시고 제정하신 가장 높은 예식들이다. 그 예식들 안에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은총을 보증한다.”사람은 성사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신앙은 성사를 통해서 강화된다.

 

그런데 루터의 성사론은 로마(가톨릭)교회와 벌인 그의 전 논쟁을 통해 전개된다. 그에 따르면 성사를 도구로 하여서는 의화에 도달하는 것은 믿음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그는 ‘opus operatum’, 즉 성사는 집전자의 성덕으로 이루어진다는 ‘성사의 사효성(事效性)’을 격렬하게 비판한다.

 

그러면서 그는 성사를 하느님의 말씀에 부속시키고, 성사와 하느님의 말씀 둘다 은총의 관리자로 파악한다. 때문에 그는 (설교 안에서) 선포되어진 하느님의 말씀이 성사와 마찬가지로 죄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내주하심과 마침내 영생에로 이끄는 효과를 가졌다고 확신한다.

 

그는 본래적인 성사들의 수를 세례성사와 성체성사에 한정시키는데, 이때 고해성사를 세례성사에 귀속시킨다. : “나는 사람들이 기름들을 복음에 맞게 쓴 경우(마르 6,13; 야고 5,14) 괜찮다고 여겼다. 하지만 거기에서부터 하나의 성사를 만드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성사도 혼인과 사제직에서 만들어질 수 없다. 게다가 그것들은 그 자체로 충분히 거룩한 것들이다. 과연 그렇게 참회는 세례의 실습과 힘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세례성사와 성체성사 두 성사가 남는다. : 성령은 복음 안에서 죄의 용서를 충분히 나타내시는데, 이 복음과 나란히 있고 행해지는 것은 세례와 주님의 만찬이다.”

 

* 쯔빙글리

 

쯔빙글리(Zwingli)와 칼빈(Calvin)은 루터의 견해에 비하여 성사를 하느님의 말씀에 더 종속적인 것으로 여긴다. 루터가 성사를 하느님의 말씀에 부속된 것으로 보면서도 성사와 하느님의 말씀 둘다 은총의 관리자로 파악하였던 반면, 쯔빙글리와 칼빈은 성사는 하느님의 말씀처럼 은총을 전하는 관리자가 아니라 단지 은총을 표현하는 도구라고 생각하였다.

 

쯔빙글리는 성사개념이 그 개념을 통해 표시된 실재에 충분하게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세례와 성찬례만 성사에 속한다고 여긴다. 그에게 성사는 은총을 선사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 은총을 명백하게 하는 도구이고 표현이지 구원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 칼빈

 

칼빈도 역시 성사의 수를 세례와 성찬례에 한정시키지만, 성사에 대한 사상은 루터와 쯔빙글리의 중도적인 입장을 취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성사에 있어서 인간에게 하시는 (은총의 선물로서의)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께 대한 (신심으로서의) 인간의 응답을 중요하게 여긴다. 왜냐하면 성사는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신심의 증명과 더불어 외적인 표지를 통하여 증명된 인간 안에 있는 신적인 은총의 증언이기 때문이다. : “성사는 외적인 기념의 표(symbolum)로, 이 표로써 주님께서는 우리의 나약한 믿음을 도와주시기 위해 우리의 양심에 우리에 대한 당신 우정의 약속을 봉인하신다. 그리고 이 표로써 우리는 다시금 그분에 대한 우리의 신심을 그분과 천사의 면전은 물론이고 우리의 면전에서 증언한다.”

 

칼빈에 따르면, 성령의 업적이며 하느님의 말씀에 기초한 믿음은 성사수령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 : “그러므로 말씀은 물론이고 성사들 또한 우리에게 우리에 대한 천상 아버지의 선하신 의지를 눈앞에 둠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며, 그러한 인식을 통하여 우리 믿음은 견고하게 지속되고 힘을 더하게 된다. 그에 비하여 성령은 (말씀과 성사들을 통하여 작용한) 그러한 확신을 우리 마음 안에 심으심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고, 그로써 그 확신을 효과적으로 만든다.” 따라서 성사의 활동은 성령의 활동에 의존하는 것으로, 성령께서는 당신 빛으로 우리의 마음을 건드리시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원인은 성사들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성사들 안에서는 구원을 위한 작용인(作用因) 혹은 도구인(道具因)도 없는 것이다.

 

* 트리엔트 공의회

 

종교개혁 이론에 반대해서 또 가톨릭교회 내에서의 폐해를 제거하기 위해서 트리엔트 공의회는 성사일반론과 성사각론에서 전적으로 성사들에 있어서의 은총의 작용과 원인에 주의를 기울인다. 하지만 이로써 성사에 있어서의 인격성과 공동성의 전망에는 소홀히 하게 된다.

 

공의회는 아우구스티노에게서 유래하는 정의를 토대로 성사를 묘사하기를, “성사는 그 자체로 거룩한 사물의 명백한 표지, 즉 거룩하게 하는 은총이다. 성사는 - 하느님으로부터 제정되어 - 단순히 은총을 표시할 힘을 가진 것이 아니라, 은총을 생기게 할 힘을 가진 것이다. 성사의 명백한 것에는 두 가지 전망이 포함된다. 첫째, 눈에 보이는 것으로 물질의 특성을 소유한 요소들(물, 빵, 포도주, 성유, 기름), 둘째, 귀에 들리는 형상을 표현하는 말씀이다. 말씀을 통해서 요소는 비로소 말씀이 가진 원래의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의화의 원천은 하느님이신데, 이 의화의 도구가 성사이다. 성사는 인간을 성화시키는 신적인 은총의 통로”라고 하였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이 언명이 그 이후의 약 400년 간의 가톨릭 사상을 규정하게 된다. [월간 빛, 2004년 3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의신학 교수)]

 

 

성령과 기(氣) : 교회론과 성사론 안에서의 성령의 망각 (6)

 

 

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성사론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성사론은 개신교회와의 논쟁 속에서 더 다듬어지게 되었지만 그 스콜라적인 전통은 여전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교회론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당시 성사론 안에도 그리스도중심적인 경향이 남아 있었고, 성령의 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말이 없었던 것이다. 성사론의 관심은 여전히 그리스도를 통한 성사의 제정문제와 성사의 집전자와 수령자 그리고 유효성을 위한 조건들과 성사들이 작용하는 방식들에 있었다.

 

성령에 관한 일반적인 고찰들은 특별히 세례성사와 견진성사에 관한 가르침 안에서만 보일 뿐이었다. 예를 들어 G. L. Hahn의 성사론에서 ‘성령’이라는 개념은 색인(Index)에는 나타나도 목차에는 보이지 않는다. 또 J. Brinktrine의 성사론은 성령의 선물과 (성사들과 견진성사를 통한) 성령의 중재는 다루지만 성령에 관해서는 세례성사와 견진성사와 연관해서만 이야기 할 뿐이며, 색인 안에서도 ‘성령’은 보이지 않는다. F. Diekamp의 성사론도 비슷한 경향을 보이는데, 주목할만한 것은 ‘성령’이라는 개념이 세례와 견진을 다룰 때만이 아니라 고해성사에 관한 가르침의 영역에서도 다루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령은 어디까지나 ‘성령칠은’이라는 관점에서만 그리고 성품성사 안에서는 “Accipe Spiritum Sanctum(성령을 받으시오.)”라는 전례적인 언명과 더불어 성령의 시여(施輿)와 관련하여서만 언급될 뿐이다.

 

서방교회의 신학은 견진성사 말고는 대부분 성령에 관한 언급 없이 성사들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성사론은 트리엔트 공의회와 스콜라적인 전통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에 몇 가지 새로운 점을 보인다. 예를 들어 튀빙엔 학파의 J. A. M  hler (1796-1838)는 성사를 신앙의 수용을 위한 그리스도 구원업적의 선물로 파악한다. 그는 종교개혁적인 입장과의 생산적인 논쟁 안에서 전통적인 성사론에 새로운 강조점을, 경우에 따라서는 이전의 강조점을 두고 해설한다. 성사는 우리에게 구세주의 공로로 얻은 신적인 힘을 전해주는데, 이 힘은 그 어떤 인간적인 기분과 정신적인 상태를 통하여서도 얻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 힘은 그리스도의 뜻 때문에 하느님 홀로 성사에 주시는 것이다. 사람은 이 선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에 대한 감수성이 있어야만 한다. 이를테면 이는 죄악에 대한 후회와 아픔, 신적인 도움과 신뢰가득 찬 믿음 안에서 나타난다.

 

또한 M.-J. Scheeben(+1888)은 성사론의 영역 안에서 성령과 관계한 숙고를 전개한다. 그는 성사의 효과와 원인을 강조하는 스콜라 전통과 함께 다시금 옛 전통의 요소를 부활시켰다. 그에게 있어서 성사는 성령활동의 신비이다. 성령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성사 안에서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신적인 생명에 참여하도록 한다. 이렇게 성사는 신비가 되는 것이다. 성령활동에 대한 Scheeben의 특별한 강조는 동방교회의 전통만이 아니라 칼빈적인 성사이해의 요소에까지 확대된다.

 

성령에 관한 이러한 사고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성사론 안에서 일반적으로 많은 반향을 얻지 못한다.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비로소 가톨릭 성사론 안에서 새로운 신학적인 성향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O. Casel(1886-1948)은 성사에 관련된 성령에 관한 많은 성찰을 보인다. 교회는 영을 지니고 운반하는 자로서 성사를 위한 구체적인 환경을 여는데, 성령께서는 이 구체적인 환경 안에서 활동하신다는 것이다.

 

4) 현대의 성사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성사론은 이전의 교도권적인 가르침에서 보이던 성사와 그 은총에 대한 개인주의적이고 물질적인 관점보다 성사의 교회적인 국면에 대한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교회는 그 자체로 심지어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사로, “곧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교회헌장 1)로 나타나는 것이다.

 

공의회 이후의 시기의 성사론에는 성령에 관한 숙고가 더 많이 나타난다. 이를테면 A. Kirchg  sner의 ‘전례 안에서의 하느님의 영’이라는 책은 목록 안에서 성령에 관한 다음의 글들을 싣고 있는데, ‘성령 안에서’, ‘영의 열매들’, ‘사랑의 영’, ‘진리의 영’, ‘생명의 영’, ‘자유의 영’, ‘계몽의 영’, ‘영의 가시적인 주재(主宰)’가 그것이다. Th. Schneider(편)의 ‘교의학 해설서’에 있는 교회론의 색인은 ‘영’, ‘성령’, ‘프노이마(Pneuma) : 선물로서의 영’, ‘은사(Donum) : 영을 맞아들임’과 같이 더 분명한 성찰을 보인다. J.-M. R. Tillard 또한 성사 안에서의 성령의 선물을 언급하고 있다. : “성사는 전적으로 성령 안에서, 성령으로부터 살아간다. 성사는 성령의 힘을 통하여 완성되며 그분의 선물을 목표로 하고 있다. 성사는 오직 성령 안에서만 거행된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백성 사이의 끈이시기 때문이다. … 교회의 성사는 우리가 그 안에서 성령의 선물을 인지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성령의 선물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성사 안에서 또 성사를 통하여 부활사건을 체험한 공동체에 다다르기 때문에 성령의 선물인데, 이 부활사건은 회상의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상징적인 표현 안에서 현존한다.” 이와 같이 L. Lies도 자신의 성사신학 안에서 영의 파견을 더 상세히 다루고 있는데, ‘만남을 위한 아들과 영의 파견’, ‘영의 파견’, ‘성찬례 안에서의 영의 파견’, ‘영의 파견과 위격 안에서의 몸’, ‘영의 파견을 위한 장소로서의 성사들’, ‘영의 파견과 아들의 파견의 일치’ 등이 그 목차의 내용이다.

 

이제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는 ‘전례 안에서 성령과 교회’라는 제목 하에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도록 준비시키신다.” ;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상기시키신다.” ;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실현하신다.” “성령의 친교”와 같은 소제목의 글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H. Huthe(편)의 ‘성사들 안에서의 그리스도와의 만남(Christusbegegnung in den Sakramenten)’이란 책에는 ‘성령과 성체성사’, ‘성령과 견진성사’, ‘성령과 병자성사’, ‘성령과 죄의 용서’, ‘성령과 세례성사’ 등과 같이 성사각론과 관련한 성령에 관한 많은 고찰이 보인다.

 

그러할지라도 오늘날 교회론과 성사신학 안에서 성령의 활동에 대한 고찰이 아직 부족한 것은 분명하다. 그에 대한 현대신학의 성과에 대해서는 뒤에 언급하고자 한다.

 

이제까지 “교회론과 성사론 안에서의 성령의 망각”이라는 제목으로 오랫동안 살펴보았다. 과거에는 교회론과 성사론 안에서 성령에 대한 고찰이 풍부했으나 오늘날에는 부족하다는 내용이었다.

 

앞으로의 글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후의 성령과 교회이해”, “봉사하는 교회의 조력자로서의 성령”, “교회 건설의 협력자로서의 성령”, “교회와 인류를 위한 생명의 원리로서의 성령”, “성사들 안에서의 성령의 활동”, “교회성령이해를 위한 토착화개념으로서의 생명의 힘인 기(氣)”, “기개념의 도움으로 하는 그리스도교적인 영이해(靈理解)의 토착화 연구”라는 제목의 고찰들이다. [월간 빛, 2004년 4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의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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