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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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영화 속 인간과 세상: 화장 - 함께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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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8-10 ㅣ No.867

[영화 속 ‘인간과 세상’] ‘함께한다’는 것



드라마 / 2015.4.9. / 94분 / 한국 / 청소년관람불가 / 감독 임권택

임권택 감독의 102번째 작품 <화장>은 ‘불가(不可)’에 관한 영화다. 누구도 타인의 죽음과 고통을 대신할 수 없다는 무력감, 외로움, 절망을 냉정하고 날카롭게 이야기한다. 살아가야 하는 자도, 죽어가는 자도 둘 사이의 그 아득한 거리만을 확인할 뿐이다. 그래서 더 슬프고 아픈 영화.

원작인 김훈의 소설부터가 한치의 양보도 없이 슬픔조차 과장하지 않았다. 그러니 임권택 감독이라고 섣불리 어설픈 동정이나 연민을 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소설도, 영화도 잔인하다. 어쩌랴. 그것이 삶의 진실인 것을.

<화장>은 죽음 앞에 선 평범한 인간에 대한 섬세하고 솔직한 묘사다. 뇌종양 말기인, 그래서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는 아내를 둔 50대 중반의 화장품회사 중역인 한 남자의 현실에 소설도, 영화도 솔직하다. 아니 인간에 대한 솔직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죽음을 알리는 심전도 계기판의 삐삐 하는 소리, 가파르게 드러난 치골, 배터리가 끊겨 휴대폰이 죽는 소리, 질긴 아내의 울음, 전립선이 부어 요도에 호스를 꼽고서야 쪼르륵 하고 오줌이 떨어지는 소리, 아내와 닮아있는 딸의 어깨의 둥근 곡선과 힘 없어 보이는 잔등, 염이 끝나 긴 나무토막처럼 보이는 아내의 몸, 희고 가벼워 보이는 흩뿌려진 뼈 조각들이 들려주고 보여 준다.

절규도 통곡도 없다. 죽어가는 아내(김호정)의 시선이 아닌, 살아가야 할 자인 남편 오장석(안성기)의 불안, 고통, 공포, 절망, 고민, 포기, 슬픔이 일상인양 무심히 지나간다. 매일 퇴근 후 병실을 찾아 아내의 냄새 나는 몸을 씻겨 주고, 고통으로 울부짖는 아내를 다독거려 주면서도 오장석은 결코 아내의 죽음이나 고통과 함께하지 못한다. 그는 결코 아내의 고통을 함께 느끼지 못한다. 오 상무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다. 아내의 고통을 보며 그로 인한 자신의 고통만을 확인할 뿐이다.

누구도 타인을 대신해 아프고, 죽을 수는 없다. 자신의 냄새 나는 몸을 씻겨주는 남편에게 “미안해.” 하다가 갑자기 발작하듯 “내가 죽었으면 좋겠지?”라는 아내의 절규가 생생한 칼날이 되어 가슴을 파고든다. 솔직히 두 번째 수술이 끝나고 오장석은 아내가 이제 그만 죽기를 바랐다고 고백한다. 그것만이 사랑이고, 진실일 것이라고 했다. 살아가야 할 자의 ‘현실’이다. 그러면서도 외로움과 고통과 절망, 두려움 속에서 죽음과 사투를 벌이며 눈물 흘리는 아내에게 “여보, 울지마… 내가 있잖아.”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있어서 뭘 어쩌겠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오 상무는 위선자인가. 비슷한 상황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공허한 줄 알지만 달리 해 줄 말이 없다는 사실을. 현실 삶에서는 기적은 없다. 기적이 있다면 소설이고, 영화이다. 오 상무에게 아내가 뇌종양으로 죽어간다는 것은 고통이다. 그는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과 그 고통을 나누지 못하는 무력감과 죄책감, 그래도 남편으로서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은 의무감 사이를 오간다. 그게 인간이다.

임권택 감독은 <서편제>에서 ‘진도아리랑’을 부르는 남녀 주인공들처럼 오 상무의 그런 모습들을 조용히 카메라에 담았다. 1인칭 독백의 편지 형식과 달리 회사 부하 여직원인 추은주(김규리)에 대한 오 상무의 욕망과 환상을 강렬한 이미지와 구체적 행위들로 묘사로 했지만, 그것은 영화적 특성을 고려한 변주일 뿐, 자신의 삶과 죽음, 운명에 관한 근본적인 시선과 마음을 바꾸려는 것은 아니다. 죽음에 대한 노(老)감독의 관조가 영화를 더 처연하고 애잔하게 한다.

소설과 달리 영화는 비록 죽은 자를 위해 산 자가 아무것도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진 둘을 기억과 사랑으로 연결해 준다. 아내가 죽은 후 “아빠는 언제가 제일 힘들었어?”라는 딸의 질문에 오 상무는 “아픈 사람이 제일 힘들었지.”라고 말하고, 아내의 유품을 태우다 낡은 옛 지갑 속에서 자신의 사진을 발견하고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으로 추은주와의 만남을 끊어버린다. 이런 것이야말로 산 자가 죽은 자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선택이라는 임권택 감독의 믿음 탓이리라.

감독의 그 마음을 모를 리가 없는 배우 안성기는 영화 <화장>에서 세 번의 눈빛으로 그것을 드러내 준다. 고통으로 발버둥치는 아내를 잠재우고 창 밖을 내다보는 뻥 뚫린 듯한 눈빛, 회식 후 아내가 있는 병원으로 가다가 추은주를 다시 만나러 술집으로 되돌아오면서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그만두고 골목길을 혼자 걸어갈 때의 자기연민의 눈빛, 마지막 죽은 아내의 지갑에 간직된 자신의 옛 사진을 보고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맨발로 길을 걸어가면서 하늘을 바라보는 그 회한의 눈빛. 안성기가 왜 안성기인지를 보여 주는 연기다.

그 눈빛이 오래 남아있는 것은 어쩌면 그것이 바로 ‘나’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감정이입만큼 강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없다. 그리고 영화의 감정과 언어들이 내 것과 너무나 닮아 있는 ‘경험의 공유’만큼 감정이입에 좋은 것도 없다. 영화 <화장>을 보면서 아프고, 부끄러웠다. 지난해 아내 역시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았다. 아내는 고통과 불안과 절망으로 눈물을 흘렸고, 그럴 때마다 난 그 고통에 함께할 수 있는 어떤 길도 모른 채 영화에서 오 상무처럼 “울지마, 내가 있잖아.”라는 말만 반복하였고, 아내의 고통이 주는 나의 고통에만 신음하였다.

지금도 아내는 항암치료 후유증과 최근 폐에서 발견된 작은 이상징후로 이따금 밤 늦은 시간 어두운 소파에 앉아 몰래 운다. 어느 신부님은 이렇게 말했다. “정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 기도하라. 그 기도가 어디를 향하든 상관없다.”고. 어쩌면 그것만이 나와 아내가 ‘함께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 물론 그 기도가 언제 어디서 서로 만날지는 주님만이 아실 것이다.

[평신도, 2015년 여름호(VOL.48), 이대현 요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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