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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공정하게 대접받기 위한 협연, 용봉 성신마을과 왜관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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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10-19 ㅣ No.1447

공정하게 대접받기 위한 협연(協演), 용봉 성신마을과 왜관 수도원

 

 

용봉의 역사는 성공한 사례다. ‘육지 안의 섬’으로 시작했지만, 밖에서 연결하는 다리를 놓았고, 따로 교육받던 분교를 없애고 일반 학교로 진학했으며, 마을 밖 사람들과 성당을 짓고 더불어 살게 되었다. 마을에서는 생활 환경 증진을 위한 사업도 꾸준히 전개하여, 상하수도, 지붕 개량 및 마을 안길 포장 등을 깔끔하게 해냈다. 또 마을회관, 간이 양로원, 도서관, 회의실, 쉼터, 운동기구 등을 차례로 갖추었다. 생존 문제가 해결되면서는 피정, 성지 순례, 질병에 관한 세미나 등 각종 교육과 다른 마을들과의 체육대회 등 다양한 행사를 수시로 마련했다. 한국의 농가 중에 이처럼 마을 단위로 경제, 신앙, 교양 생활을 하는 곳은 많지 않다. 게다가 그 수준도 상당하다. ‘죽을 일만을 기다리는 어른’이라는 인식을 ‘보통인’으로 바꾸는 노력은 처절했다.

 

 

경제적 자립으로 안착하기까지

 

‘정착 생활’이란 땅에 등이 붙은 것처럼 평생을 같은 공간에서 사는 일이다. 갈등도 있고, 더 좌절하는 이의 기운이 전염되기도 한다. 함께 사는 일이 쉽지만은 않음은 마을에서 자치적으로 운영해온 ‘마을 규약’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반면에, 긍정적인 에너지 급속하게 전염될 수 있다. 용봉에는 긍정적 에너지를 창출하는 인연들이 많았다.

 

용봉 사람들은 공동묘지가 있던 ‘땅골’이라는 밤밭에서 출발했다. 왜관 수도원에서는 마을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노력했다. 시초에 수도원에서 산비탈 땅을 구매해 주어 그들은 그곳에 채소를 심고 닭과 토끼를 키웠다. 당시만 해도 생활이 안정되려면 논농사를 지어야 했지만, 팔려는 논도 없었고 있어도 너무 비쌌다. 마을에서는 1962년 모두 합심해 마을 앞 백천에 둑을 쌓아 논을 조성했다. 그해 방죽이 터져 모든 작업이 허사로 돌아갔고 다음 해에는 가뭄으로 벼가 말라 버렸다. 1964년에는 도지사가 찾아왔고, 백천 개발 사업을 추진했다. 그러는 사이, 1963년 보건사회부로부터 정착지로 지정받았다. 정착 사업은 5.16 정부가 단행했다. 당시 주택 30동에 주민 97명과 어린이 46명이 있었다. 마을에는 소요도 있었다. 1965년과 이듬해에는 가뭄이 특히 심했는데, 계속되는 실패에 공산주의 이념을 가진 몇몇 젊은이가 교회의 지원을 뿌리치고 독립하겠다고 폭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후 수도원과 마을 사람들은 농사 이외 분야로 방향을 돌려 양잠업으로 시작하여 축산업으로 전환했다. 1970년 수도원에서는 마을에 닭 5만 마리를 주었다. 계사 신축 자재비 및 주택 개량 사업, 이후의 양돈 자금 등은 왜관 수도원이 대부분 담당했다. 1978년에는 왜관 감목대리구가 대구대교구로 사목권을 이관했지만, 마을은 아직 왜관 수도원과 연결되어 있었다. 김태규 신부, 함정태 신부, 김병조 수사 등이 차례로 ‘수도원사회사업정책부’를 맡았는데, 물품 조달, 융자, 생활 관리와 사건 해결 등을 주로 담당했다.

 

1980년에는 마을 축사 현대화 사업을 위해 수도원에서 현익현 신부 등이 현장 실사를 했다. 1982년에는 수도원에서 소유토지 특별조치법에 따라 각 개인에게 토지를 무상 증여했다. 마침내 1983년 마을은 수도원 관리에서 벗어나 자립 체제로 전환을 결정했다. 오늘날 마을에는 임야를 포함하여 공공소유 토지 약 8만 평, 개인 소유 토지 3만 7000여 평이 있고, 평균 중산층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2021년 현재 주민은 58명이다.

 

 

 

 

일회적 마을 역사를 화려하게 펼치며

 

1970년대 용봉에서는 10여 명의 청년이 중심이 되어 신용협동조합 및 축산조합을 세웠다. 그리고 성신원에서 ‘성신농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새 성당을 준공했다. 상하수도 시설, 마을 안길 포장, 이·미용소를 포함한 다목적 마을회관 건립 등 환경 개선에 주력했다. 새마을사업 기금들도 따냈다. 1970년대 후반 양돈단지 조성에는 왜관 수도원의 경제자립자금 지원과 성주군 축산업 협동조합 양돈지원자금 융자가 바탕이 되었다. 특히 1973년 성신교의 준공은 마을에 물자 수송 등을 수월하게 했다. 이렇게 삶의 바탕이 마련되면서 마을에서는 신앙 재교육, 축산 교육. 새마을 교육 등을 시작하며 품격 있는 삶을 향해 눈을 돌렸다.

 

1980년대에는 외부 행사가 늘었고, 자녀 교육이 주안점이 되었다. 용봉 사람들은 초전본당 설립으로 미사에 참여하기 위해 마을로 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신학생, 여러 본당의 청년들이나 신자들이 많이 방문하면서 마을 청소년들과 어울렸다. 어린이 놀이터를 준공하고, 마을회관 2층에 도서실과 회의실을 마련했다. 박미원, 강옥순 등 교리교사들이 부임했다. 또 왜관 수도원 주관으로 주일학교 산간학교, 순교자현양대회 등에 참여했으며, 어린이 합주 미사, 복사단 교육, 희망의 밤과 성모의 밤, 성지순례, 피정, 성탄절 행사가 활발해졌다. 선산본당, 삼청공소 등과 친선배구대회, 성주 지역 4개 본당 신앙대회도 열었다. 학생들은 국회의사당을 비롯하여 역사유적지 등을 답사했다. 이즈음 마을에서는 용봉공소 공원묘소를 조성했고, 왜관 수도원 관할 4개 정착촌 협의회를 조직했다. 1986년에는 ‘성신마을’로 불리던 마을을 ‘용봉 3동’으로 분동하고 동장을 선출함으로써 주민의 염원을 이루었다.

 

1990년대의 주된 행사는 영농조합, 축사에서 나오는 폐수처리 시설, 마을 공동체의 견학 야유회였다. 아이들은 외부 고등학교와 대학 등에서 공부했다. 2000년대가 되어서는 해마다 정착마을 연합신앙대회인 ‘한마음잔치’를 개최했고, 역사유적 답사, 성지순례, 피정을 했다. 간이 양로원을 새로 만들었고, 성당을 비롯한 기존 시설의 보수가 잇따랐다. 2010년대에 들어서는 마을 쉼터를 만들고 운동기구를 설치했다. 정착 마을 연합대회와 성지순례 등이 계속되었다. 마을에서는 축산구조 개선, 축사 폐수시설, 지하수 개발 등 다양한 공사를 했다.

 

용봉 사람들은 공동으로 행사를 마련하고 참여한다. 마을 설립 기념, 구성원의 회갑을 비롯한 경조사, 마을 은인들의 기념일 등을 함께 계획하고 실천한다. 우리나라 마을 중에 용봉처럼 공동체 활동을 누리고 사는 곳은 많지 않다. 구성원 사이의 특별한 협동력이 이런 역사를 일구었다. 모든 사람이 다 자기 몫을 했지만, 이점동, 임철순, 전의복, 구경주, 류선수, 강참모, 정상봉, 최정호, 이종수 등이 각 시기 대표를 맡아 그 불씨를 지펴왔다.

 

이 마을에서 시기마다 하는 일이 다르다는 것이 눈에 띈다. 마을 일을 이어서 할 젊은 세대가 없기 때문이다. 마을의 역사는 일회적이다. 마치 100여 명의 일생을 한 폭으로 펴놓은 듯하다. 그래서 그들이 ‘인간의 한계’를 더 철학적으로 보는지도 모른다. 이제서야 부모와 함께 식당에 갈 자신이 있다는 자녀들, 그러나 이젠 그들이 돌아가려 해도 돌아갈 고향이 없게 된다. 다행히도 일회성으로 끝날 용봉과 수도원의 협연은 1978년 김태규 신부와 김진국, 이창재, 강성배 등이 창립한 ‘5·8장학회’를 통해 일반 사회로 퍼져나가고 있다.

 

 

수녀와 함께 생활한 해맑은 어린이들

 

용봉은 소록도와는 달리 자녀들이 부모와 함께 살았고, 더 나아가 당시 농가 중에는 환경이 좋았다. 동네 안에는 성심의원이 있었고 상점과 놀이터도 있었다.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또래들과 천진난만하게 어울렸다. 수박 서리도 하고, 병원 등나무 아래에서 놀다가 수녀의 “조용하시오” 하는 불호령도 들었다. 수도원에서 신학생들이 봉사하러 오면 노래와 춤, 교리도 배우고 온 동네가 모여 성탄 연극제도 했다. 함정태 신부가 마련해 준 악기로 어린이들은 합주 미사를 봉헌했다. 방학에는 산간학교, 야유회 등을 떠났다. 무엇보다도 용봉의 어린이들은 마을에 디오메데스 수녀와 아네타 수녀와 함께 생활한 행운아들이었다. 울타리 안은 행복했다.

 

언제까지나 마을 안에서 행복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외부로 나가려는 ‘댓가’는 해맑은 어린이들이 감당해야 했다. 초기 어린이들은 ‘분교’를 다녔다. 분교에서 공부한 어린이는 마을을 벗어나기를 두려워했다. 그들은 어린 나이인데도 마을 밖의 사람들이 자신들을 ‘벌레’ 같이 본다고 느꼈다. 이후 분교가 폐교되고 본교로 다니게 된 어린이들은 학교에 가서 자신들이 다르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까웠던 친구가 “엄마가 너랑 놀지 말래”라고 하면, 그냥 결별이었다. 철없는 아이들은 정착 마을에 사는 아이는 냄새난다고 짝하기를 피했고, 도시락에 침을 뱉고 가기도 했다. 용봉의 어린이들은 그런 수모를 당한 날은 집에 돌아와 부모를 들볶았다. 그런 날이 하루만은 아니었다. 이후 중등학교를 도시로 나간 학생들은 혹시라도 자신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 봐 불안해 했다. 하지만 대학에 진학했을 때 그들은 자신감이 생겼고, 마을 동생들을 위해 일하려는 의욕이 넘쳤다. 왜관 수도원에서는 이 청년들을 교사로 임명해서 마을 후배들을 직접 가르치게 했다. 마을 선후배가 함께 성장했다.

 

 

마을의 역사와 김진국 회장

 

용봉에는 1969년 이후 자신의 이력 사항과 마을 역사가 거의 동일한 사람이 하나 있다. 마을의 모든 사업을 주도한 김진국이다. 해방둥이인 그는 13살 때 한센병 증상을 발견했다. 체육 시간에 냇가에서 손을 씻고 위생 검사를 받는데 오른손이 이상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대구 애락원에서 5년 동안 치료받고 경남 산청병원에서 1년을 지낸 후, 1967년 가을에 용봉으로 왔다. 그의 나이 22살이었다. 마을에 들어서면서부터 청년들과 함께 신협과 축협 설립 등 마을 일을 하기 시작했다. 마을에 정착한 지 10년이 넘은 1979년, 가톨릭 신앙을 거부했던 그는 김태규 신부의 끈질긴 권유로 ‘요한 사도’라는 세례명으로 하느님 자녀가 되었다. 1980년대부터는 교회 일도 아울러 하게 되었다.

 

김진국의 경력은 실로 다양하다. 그는 용봉마을 동장과 초전 본당 평협 회장 등 10여 개의 역할을 맡아왔다. 1984년 경북도지사 표창을 시작으로 대구대교구장, 보건사회부 장관 등 그가 받은 여러 단체장 표창과 감사패를 모으면 벽 한 면을 가득 메울 정도다.

 

김진국은 자신의 용봉을 넘어 모든 한센병 환우와 세상을 연결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모든 일을 자기 일인 양 여겼다. 의리있는 그는 공동체가 함께 하는 ‘힘’을 잘 알았다. 그가 밖에 사는 일반인이었다면 그 많은 사람을 자신의 공동체로 느끼며 에너지를 발산하고 살아왔을지 의문이다. 김진국은 “우리가 평생토록 길을 양보해도 백보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이웃 간에 밭두렁을 양보해도 한 마지기도 잃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말로 평생토록 나눔을 뜨겁게 실천한 자신의 삶을 요약한다.

 

(자료 도움 김진국 회장, 김태규 신부)

 

* 김정숙 소화 데레사 - 프랑스 파리 Ecole des Hautes Etudes en sciences sociales에서 역사인류학으로 박사학위 취득하였다. 영남대 국사학과 명예교수로 현재 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 운영위원, 대구가톨릭학술원 회원, 대구대교구와 수원교구 시복시성위원, 안동교회사연구소 객원연구원, 「교회와역사」 편집위원, 대구문화재위원,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에세이작가연대와 가톨릭문인회 회원으로 역사서 「대구 천주교인들 어떻게 살았을까」 외 다수의 공저와 수필집 「대신 생각해 드립니다」 등이 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21년 가을(Vol. 55), 김정숙 소화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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