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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조선후기 만물진원(萬物眞原)의 유통과 서학 비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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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10-20 ㅣ No.1448

조선후기 『만물진원(萬物眞原)』의 유통과 서학 비판론*

 

 

국문 초록

 

이 논문은 알레니(Giulio Aleni, 중국명 艾儒略, 1582~1649)의 『만물진원』의 조선에서의 출판과 유통 과정을 연구하고, 조선 유학자 홍정하(洪正河, 1731~1805)가 이 저술에 관해 기술한 서학 비판론을 검토하였다. 알레니의 중국에서의 활동, 중국에서 출간된 4종의 『만물진원』 초기 판본을 대상으로 선후 관계를 알아보았다. 또한 이 책이 조선에서 유통된 과정을 추적하였다. 새로운 자료에 의거하여 홍정하의 가계와 교유 범위를 추적하고, 그가 18세기 후반 남인계 서학 비판론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지녔음을 밝혔다. 마지막으로 홍정하가 저술한 『만물진원증의(萬物眞原證疑)』를 중심으로 서양의 자연학과 천문학에 대한 그의 비판론의 내용과 역사적 의미를 밝혔다.

 

 

1. 머리말

 

『만물진원(萬物眞原)』은 이탈리아 출신으로 중국에서 활동한 예수회 선교사 줄리오 알레니(Giulio Aleni, 중국명 艾儒略, 1582~1649)가 1628년 북경에서 출간한 그리스도교 교리서이다.1) 이 책은 총 11개 장(章)2)을 설정하여 ‘만물의 진정한 근원’이 천주(天主)라는 것을 논증한다. 이 책이 담고 있는 서양 지식은 17세기 초 중국에서 활동한 예수회가 의거한 서양 중세 및 르네상스 시기의 신학(神學)이 핵심적인 기초를 이루며, 논증을 위해 동원된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학은 신학적 원리와 주장을 지탱하고 보조한다. 나아가 이 책은 동아시아의 교양 있는 유학자를 독자로 설정하였기 때문에 효과적 논증을 위해 유학 특히 송명이학(宋明理學)의 각종 개념과 원리에 대한 문제 제기와 비판적 언급을 포함하고 있다.

 

이 책의 서명(書名)이 조선의 관찬 기록에 공식 등장하는 것은 1791년(정조 15) 무렵이지만, 이 책이 조선에 전래된 시기는 이보다 훨씬 이전일 것으로 생각된다. 1791년 진산사건(珍山事件) 당시 이승훈(李承薰, 1756~1801)과 권철신(權哲身, 1736~1801)의 신앙 및 포교 활동을 고변한 홍낙안(洪樂安, 1752~?)의 기록에 이 책이 등장한다.3) 이에 따르면, 천주교 신자들 특히 충청도 예산 지역의 신자들 사이에서 『만물진원』이 널리 읽히고 있었다고 한다.4) 나아가 이 시기에 이미 『만물진원』의 한글 번역본이 읽히고 있었던 정황도 감지된다. 신유사옥(辛酉邪獄, 1801) 때 김건순(金健淳)의 공초 기록에도 서명이 등장하는데, 당시 신자들 사이에서 널리 유통되면서 열독된 것으로 생각된다.5)

 

『만물진원』은 몇몇 유학자들의 개인 기록에서도 등장하는데, 그 수는 많지 않다. 18세기 중후반의 시인으로 알려진 남숙관(南肅寬, 호 八灘, 1704~1781)은 「원서애유략만물진원변(遠西艾儒略萬物眞原辨)」이라는 글을 저술하였는데, 『만물진원』 제11장에 대한 비판을 위주로 작성된 글로 확인된다.6) 정조 시대에 활동한 홍정하(洪正河, 호 髥齋, 1731~1805)는 『사편증의(四編證疑)』를 저술하였는데, 이 가운데에 『만물진원』의 주장을 비판한 『만물진원증의(萬物眞原證疑)』가 있다.7) 1791년 진산사건 직후에 저술된 것으로 추정되는 홍정하의 글에서는 『만물진원』 제10장의 주요 내용인 그리스도교의 천지창조 과정에 대한 비판이 전개되고 있다.

 

『만물진원』은 가장 평이하고 효과적인 그리스도교 교리서로 인정되어 왔다. 프랑스 출신 예수회 선교사 푸케(Jean-François Foucquet, 1665~1741)는 “이 책으로 인해 (그리스도교에) 귀의한 신도의 수는 책 속의 단어 수 심지어 글자 수보다도 많다.”고 했을 정도다.8) 18세기 후반 조선에서 널리 유통되고 한글 번역본까지 만들어진 사실 또한 조선의 신자들 사이에서 이 책이 누린 인기를 짐작하게 해준다. 현재 학계에는 2종의 한글 번역본이 보고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본은 1792년에 번역 및 필사된 것으로 추정된다.9)

 

『만물진원』은 18세기 후반 조선에서 널리 유통되고 열람된 책이지만, 교리서라는 특성 때문인지, 신유사옥 이후에는 관찬 및 사찬(私撰) 기록을 막론하고 서명조차 찾아보기가 힘들다. 19세기 중반 이항로(李恒老, 1792~1868)의 기록에 『만물진원』이라는 서명이 등장하지만, 그가 이 책을 직접 열람한 것은 아니다.10) 19세기 중반 허전(許傳, 호 惺齋, 1797~1886)이 홍정하의 『사편증의』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고,11) 또 허칙(許侙)과 곽한일(郭漢一, 1869~1936) 등이 1903년 『대동정로(大東政路)』를 간행하면서 홍정하의 『사편증의』를 수록하고 있으나, 이들 모두 『만물진원』을 직접 열람한 것은 아니고 홍정하의 저술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했을 뿐이다.

 

1791년 진산사건에 이어 상승하던 반(反)서학의 분위기, 그리고 1801년 신유사옥 이후 시행된 일련의 반서학 조치 등이 조선에서 이 책의 유통과 열람을 금기시하는 효과를 낳은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인지 현재 한국에는 19세기 말 이전에 간행된 『만물진원』의 실물이 남아 있지 않다.12)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소장하고 있는 1888년 연활자본(鉛活字本)이 한국에 남아 있는 유일한 실물이다.13) 학계에서는 조불수호조약(朝佛修好條約, 1886) 이후에 선교가 자유로워지면서 상해, 홍콩, 북경 등지에서 인쇄된 그리스도교 서적이 이전보다 쉽게 조선에 도입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14) 장서각 소장본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반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물진원』이 교리서로서 인기를 누린 데에 더하여, 18세기 말 조선에서 서양 자연학의 기초 개념을 접하는 통로 역할을 한 점은 특기할 만하다. 홍정하는 『만물진원증의』에서 서양의 ‘자연관 비판’을 위주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데, 이 점은 조선 후기에 저술된 다른 서학 비판서들이 교리 비판을 위주로 하는 점과 크게 다르다. 홍정하가 집중 비판하는 『만물진원』 제10장의 내용은 원래 천주의 창조 행위를 통해 그 전지전능함을 논증하는 것이다. 그런데 홍정하는 여기에 담긴 교리적인 주장보다는 논증에 동원된 천당천(天堂天)의 형태, 사원소설(四元素說, 흙 · 물 · 공기 · 불), 물[希微之水]로부터 공기[氣]와 불[火]의 생성, 지상계 4원소의 층서 구조, 천상계의 수정체 천구설(水晶體天球說) 등 서양의 자연학에 비판을 집중하고 있다. 『만물진원증의』는 서양의 자연 지식에 대한 18세기 후반 조선 지식인의 태도와 이해 방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 글에서는 홍정하의 『만물진원증의』를 주요한 분석 대상으로 삼아, 18세기 후반 조선의 유학자가 그리스도교 교리서에 수록된 서양의 자연 지식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비판했는지 논의하고자 한다. 본문에서는 먼저 『만물진원』을 구성하는 내용의 얼개와 초기 판본의 문제에 대해서 논의하겠다. 본문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이 책은 중국의 그리스도교 신자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 있는 책이었기 때문에 여러 번 중간되었다. 그리하여 여러 시기의 다양한 판본들이 현존하고 있지만, 초기 판본의 경우 간행 연차와 선후 관계가 여전히 혼란스럽다. 1791년(건륭 56) 중각본(重刻本) 이후로는 서술 내용이 거의 고정되지만, 그 이전의 판본 사이에는 일부 내용에서 출입이 크다. 이 문제는 특히 홍정하가 열람한 판본을 추정하는 일과 연관되므로, 각 판본의 간행 시기와 선후 관계를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이어서 『만물진원증의』의 저자 홍정하의 가계와 교유 범위에 관해 새로운 탐구 결과를 제시하고자 한다. 선행 연구에서 제시된 기초적인 정보15)에 필자가 새로 확인한 정보와 자료를 통해 홍정하의 가계를 밝히고, 그 교유 범위를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글의 중심 주제인 『만물진원증의』를 분석하여 서양 자연학의 여러 개념과 원리에 대한 홍정하의 이해 방식과 비판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알레니와 『만물진원(萬物眞原)』

 

알레니는 1582년 이탈리아 브레시아(Brescia)에서 출생, 1600년 예수회에 입회, 로마의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클라비우스(Christopher Clavius, 1538~1612)에게서 배웠다. 클라비우스는 당시 중국에 파견된 예수회 선교사들이 수학과 천문학 지식에서 가장 많이 의지한 과학자였다. 알레니는 1609년 중국으로 파견되어, 인도의 고아를 거쳐 1610년 마카오에 도착, 마카오에서 수학을 가르치면서(약 2년) 사제 수업(약 3년)을 받았다. 1613년에 내륙으로 들어가 북경에서 서광계(徐光啓, 1562~1633) 등을 만났다.16) 이후 주로 민(閩) 지역(복건성과 절강성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예수회 선교사 가운데 중국 고전에 관한 학식으로 인해 중국인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중국에 있었던 천주교 선교사 가운데 알레니만큼 학자들의 환영을 받은 사람은 결코 없었다.”고 평가될 정도였다.17) 그의 별칭인 ‘서양에서 온 공자(西來孔子)’도 그에 대한 중국인들의 존경과 호감을 보여준다.18)

 

알레니의 저술은 종류가 매우 많지만,19) 이 가운데에서 자연학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경우는 거의 없다. 『기하요법(幾何要法)』은 기하학적 내용을 전적으로 다루며, 『성학추술(聖學觕述)』은 의학적 내용을, 『서방답문(西方答問)』은 천문학적 내용을 일부 포함하고 있다. 알레니가 중국 학인들과 나눈 대화를 기록한 『구탁일초(口鐸日抄)』에서도 일부 천문학적 내용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들 몇 가지를 제외한 그의 저술들은 거의 모두가 그리스도교 교리에 관한 책이다. 연구자에 따라서는 『기하요법』만 과학 기술서로 분류하고 나머지는 모두 신학과 철학의 저술로 보기도 한다.20)

 

알레니의 활동은 크게 ① 항주(杭州) 체재 시기(1623~1625), ② 민(閩) 지역 활동 전기(1625~1637), ③ 민 지역 활동 후기(1638~1649)로 나눌 수 있다.21) 『만물진원』은 전교(傳敎) 측면에서도 ‘황금기’로 알려진 민 지역 활동 전기에 저술되었다.22) 알레니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에 근거하여 천주의 존재를 논증할 때, 이기(理氣)로 대표되는 중국 유학의 이론과 관념을 거론한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는 개종한 신도는 물론 서학에 관심 있는 유학자들에게도 크게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중국의 예수회 선교사들은 『만물진원』을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의 『천주실의(天主實義)』 이후 가장 중요한 책”,23) “알레니의 저작 가운데 가장 환영받은 책”으로 평가하였다.24)

 

현재 『만물진원』은 1628년에 간행된 수선당본(首善堂本)이 가장 빠른 판본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보다 앞서 항주에서 초각(初刻, 연도 미상)되었다는 의견25)과 1623년 무렵에 초각되었다는 의견26) 등이 있으나 확인하기는 어렵다. 다만 알레니가 『삼산논학기(三山論學記)』(1625년 初刻)에서 『만물진원』의 이칭(異稱)인 ‘물원지론(物原之論)’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27) 『만물진원』의 완성 시기는 1623년 무렵으로 추정할 수 있다. 『만물진원』은 명조(明朝)의 중신(重臣)이었던 섭향고(葉向高, 1562~1627)와 알레니가 나눈 대화에 기초한 것으로 추정되는데,28) 이것은 기술 방식에서 확인된다. 『만물진원』은 『천주실의』와 마찬가지로 예수회 선교사가 중국인 유학자와 특정한 주제에 관해 질문하고 대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대화에는 식물·동물·인간의 위계를 전제로 한 서양의 영혼론, 지상계와 천상계의 위계를 전제한 서양의 우주론과 천체운행론 등이 동원되는 것은 물론, 그리스도교의 옳음을 주장하기 위해 유가 철학의 이기론(理氣論)과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 대한 비판적 언급이 자주 등장한다.

 

『만물진원』은 서문에 해당하는 소인(小引)29)과 총 11장의 주제별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30) 대체로 전반부인 제1~5장에서는 만물이 모두 시작이 있다는 것과 만물이 스스로 존재할 수 없음을 주장하고, 후반부인 제6~10장에서는 천주가 만물을 창조하고 주재하는 존재임을 주장하며, 마지막 제11장에서는 천주가 만유의 근원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1) 만물은 모두 시작이 있음을 논함

 

알레니는 천지의 시작과 인류의 시작은 약 7천 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복희(伏羲) 등 전설적인 제왕들의 사적(事蹟)을 적은 중국 측 외기류(外紀類)의 기록은 믿을 수 없다. 반면 아담(亞黨)과 이브(厄襪)라는 두 사람에게서 인류가 나왔으며, 그들은 바로 천주의 창조에 의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경(聖經)』의 창세기에 의거한 주장임을 알 수 있다.

 

2) 사물은 저절로 생길 수 없음을 논함

 

이 장에서 알레니는, 우주의 모든 사물이 조물주의 창조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을 기초로 모든 운동에는 원인이 있어야 함을 주장한다. 특히 그는 천체들의 운동은, “조물자(造物者)가 아래의 백성을 가엽게 여겨 천신(天神, 천사)에게 명하여 그것을 돌리게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31) 사물의 운동에 관한 천문학과 자연학의 원리를 신학적으로 번안한 주장으로 볼 수 있다.

 

3) 천지는 스스로 사람과 사물을 만들어 낼 수 없음을 논함

 

알레니는 이 장에서 먼저, 천지에 가득한 인온지기(氤氳之氣)의 작용에 의해 우주가 생성되었다는 『역경(易經)』의 주장을 반박한다. 나아가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의 삼혼설, 즉 생혼(生魂), 각혼(覺魂), 영혼(靈魂)의 위계를 거론하며, 생물을 창조한 자는 반드시 생물이 지닌 능력보다 훨씬 높은 능력을 지닌 존재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유가 철학에서 천명(天命)에 의해 부여되는 천지만물의 본연지성(本然之性)을 천주(天主)가 부여한 것이라고 반박하는 한편, 천주는 우주의 모든 질서가 유지되도록 주재(主宰)하는 존재라고 주장한다.

 

4) 원기(元氣)가 스스로 하늘과 땅을 나눌 수 없음을 논함

 

이 장에서 알레니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의 원인론을 인용하여 동아시아 전통의 기(氣)에 의한 우주생성론을 강하게 반박한다. 우주의 모든 사물은 조물주(운동인)가 모든 존재의 목적을 위해(목적인), 재료를 이용하여(질료인), 목적에 부합하는 형태를 지니도록(형상인) 만들었다는 것이다.

 

5) 이(理)는 사물을 만들 수 없음을 논함

 

이 장에서는, 유가 철학의 이(理) 또한 창조주가 될 수 없음을 주장한다. 알레니는 ‘이’가 창조주가 될 수 없는 이유로 세 가지를 제시하는데, 근거는 모두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에 있다. 첫째 창조주가 되려면 자신이 창조한 사물보다 우월한 지각(知覺, 인식) 능력을 지닌 존재여야 하는데, ‘이’는 그렇지 않다. 둘째로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의 실체(自立者)와 속성(倚賴者)의 개념으로 보면, 이(理)는 실체에 부착된 속성에 불과하다. 셋째 ‘이’는 자립자가 의지하는 속성일 뿐이므로 스스로 무엇을 창조할 수 없다.

 

6) 모든 일은 이치에 의거해야 하며 시각에 의거해서는 안 됨을 논함

 

앞서 제5장까지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에 의거하여 유가 철학의 이기(理氣), 그리고 기에 의한 생성론 등을 반박하였다. 그런데, 제6장 이하는 그리스도교 신학을 전면에 내세워서 천주의 존재를 주장한다. 제6장에서는 천주는 오로지 인간의 이성(理性)을 통해서만 인식할 수 있는 존재라고 주장한다.

 

7) 천지와 만물은 대주재(大主宰)가 만든 것임을 논함

 

이 장에서는 천문학적 현상을 예시하면서 여기에 보이는 복잡성과 질서가 천주의 존재를 증명해 준다고 주장한다. 하늘에 있는 여러 천구(수정체 천구)의 운행과 일월성신의 다양한 운동에 일정한 규칙이 있다는 사실로부터 이를 창조하고 주재하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8) 천지만물의 주재자가 그것을 통솔하고 다스림을 논함

 

제7장과 연속하여 만물의 운동과 질서정연함으로부터 이들을 주재하는 존재, 즉 천주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늘이 땅을 둘러싸고 있는 우주의 안정된 구조, 천체들의 항상스런 운동, 계절의 순환을 예로 들어 이 모든 것이 그렇게 되도록 해주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알레니는 천체 운동에 대해 “영명(靈明)한 자가 있어 궤도를 돌게 하여 그러도록 하는 것”이라고 하여,32) 천체의 궤도 운동을 천주가 주재하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9) 조물주는 논리에 의거해서는 완전히 이해될 수 없음을 논함

 

이 장에서는 조물주는 인간의 이성으로도 완전하게 이해되지 않는 전지(全知), 전능(全能), 전선(全善)한 존재라고 주장한다. 알레니는, 천(天) · 지(地) · 인(人) · 물(物) · 신(神) · 귀(鬼) · 도(道) · 이(理) · 성(性) · 기(氣) 등 유가 철학의 다양한 개념을 거론하며, 이 가운데 어떠한 것도 천주와 일치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10) 천주가 천지를 창조하심을 논함

 

이 장에서 알레니는 천지창조의 구체적인 과정을 서술한다.33) 내용 속에는 우주의 창조 및 구조화 과정, 물질 원소의 변화, 천체 운동의 원리 등 자연학에 관한 내용이 많이 언급된다. 알레니는 천주가 우주를 창조할 때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원칙을 따랐음을 말한다. ① 재료에 전혀 의지하지 않았으며(絶不資物料), ② 도구에 전혀 의지하지 않았으며(絶不藉器具), ③ 시간을 전혀 들이지 않았으며(絶不待時刻), ④ 힘을 전혀 들이지 않았으며(絶不費心力), ⑤ 창조된 후에는 훼손되지 않는다(未嘗有損壞). 이 원칙에 따라 천주는 가장 먼저 네 가지 사물을 만들었는데,34) 첫째는 천당천(天堂天, 우주의 가장 바깥쪽에 있다)으로, 모양은 안쪽은 둥글며 바깥쪽은 모나다(內圓外方).

 

35) 둘째는 대지(大地)인데, 모양은 둥글지만 덕(德)이 모나다(形圓而德方). 땅속은 세 층의 지옥으로 나뉘어 있다. 가장 아래쪽 즉 지구의 중심에 영원히 고통을 받는 영고옥(永苦獄), 그다음 층이 죄를 씻어내는 연죄옥(煉罪獄), 가장 바깥쪽이 성자(聖子)들이 잠시 구원을 기다리는 잠후옥(暫候獄)이다. 셋째는 땅에서부터 천당 사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으면서 나중에 다른 사물을 만드는 재료가 되는 순일희미지수(純一希微之水)이다. 그리고 넷째는 아홉 등급으로 위계를 나눈 천사[天神]이다.

 

이후로, 천주는 지구 표면부터 천당천에까지 가득 차 있는 희미지수(希微之水)를 가지고 우주의 다른 사물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땅 위로 펼쳐진 희미지수를 가지고 위쪽에 공기층, 불층을 만드니, 네 가지 원소[四元行]가 모두 갖추어졌다. 네 원소는 층층이 쌓여 맨 아래에 흙[土] 그 위가 물[水], 그 위가 공기[氣], 그 위가 불[火]이 위치하게 되었다. 불의 층까지가 지상계이다. 천주는 다시 불 위로 층층이 천구들을 만들어 회전하게 하였는데, 이 공간이 천상계이다.

 

천상계와 지상계가 갖추어지자 천주는 지상계에 대해서는, 땅이 움푹 꺼지게 하여 여기에 물이 채워져 호수와 바다가 되게 하였고 여러 산과 들과 초목을 만들고 인간의 시조(始祖, 아담과 이브)가 살 공간을 만들었다. 또 천상계에 대해서는, 여러 각종 천체들을 만들어 일월(日月)과 오성(五星)은 각 천구에 소속되게 하고, 가장 바깥쪽 천구에는 항성이 소속되게 하였다. 각 천체와 그것이 속한 천구의 순서는, ① 월천(月天) → ② 수성천(水星天) → ③ 금성천(金星天) → ④ 일륜천(日輪天) → ⑤ 화성천(火星天) → ⑥ 목성천(木星天) → ⑦ 토성천(土星天) → ⑧ 열성천(列星天) → ⑨ 종동천(宗動天)으로 모두 9층이다. 특히 각 천체들은 판자에 옹이가 박혀 있는 것과 같이 자신이 속한 천구에 붙어 있다.

 

알레니는 제10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주의 창조가 왜 현재(1628년)로부터 약 7천 년 전이라는 특정한 시기에 이루어졌는가, 하는 유학자로부터 제기될 수 있는 의문을 거론한다.36) 그리고 그는 이런 식의 의문은 창조를 계속해서 더 먼 과거로 소급하는 무한 반복에 빠지게 되므로 이런 의문은 쓸모없는 것이라고 일축한다.

 

11) 천주가 모든 존재의 ‘근원 없는 근원’이심을 논함

 

제11장에서는 제목 그대로 천주는 ‘근원 없는 근원’이므로, 천주의 근원을 묻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수목(樹木)에서는 뿌리가 근원이고 수(數)에서는 일(一)이 모든 수의 근원이듯이, 천주는 더 이상의 근원을 물을 수 없는 최초의 근원이라고 주장한다.37)

 

 

3. 『만물진원』의 판본

 

현재 로마 바티칸 도서관에서는 1628년 초간본을 비롯하여 총 6종의 『만물진원』 판본을 소장하고 있다.38) 이 가운데 명말 숭정 연간(1628~1644년)에 간행된 초기 판본으로 추정되는 4종은 간행 연차와 선후 관계를 보다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39)

 

① 수선당본(首善堂本)40)

 

이 판본의 내제(內題)는 “艾思及先生原本, 萬物眞原, 崇禎元年皇城首善堂梓”로 되어 있다. 이어서 소인 4면을 두었고, 목록 2면(a, b)을 두었는데, 목록 b면에 “艾儒略 述, 同學 傅汎際, 龍華民, 費樂德 訂”으로 저자와 교정자를 표시하였다.41) 권수제(卷首題)에도 “崇禎元年艾儒略述”로 되어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내제와 권수제에 의거하여 이 판본을 숭정 원년(1628년) 초간본으로 인정한다.42) 이하에서는 이를 수선당본으로 부르겠다.

 

② 항주갑본(杭州甲本)43)

 

이 판본은 내제에 “思及艾先生著, 萬物眞原, 武林天主堂重梓”로 되어 있고, 이어서 “萬物眞原, 耶蘇會士後學艾儒略述, 同會傅汎際, 龍華民, 費樂德仝訂, 溫陵張賡轎梓”라는 주기 사항이 있다. 총 5면에 걸쳐 판각된 소인의 마지막에 “泰西艾儒略識”으로 알레니가 쓴 것임을 명기하였다. 그 바로 옆에 “景敎堂印”이 찍혀 있다.44) 무림(武林)은 항주의 다른 이름이므로, 이를 항주갑본으로 부르겠다. 뒤에서 언급할 또 다른 독립판본도 항주에서 찍힌 것인데, 이 항주갑본보다 판각 시기가 늦다고 판단하므로, 이를 항주을본으로 칭하여 두 판본을 구별하겠다. 이 항주갑본은 간행 시기를 확정할 수 없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숭정 연간으로 짐작된다.

 

③ 광주본(廣州本)45)

 

이 판본은 내제에 “思及艾先生著, 萬物眞原, 穗城大原堂重梓”라고 하였고, 또 “耶蘇會後學艾儒略述, 同會傅汎際, 龍華民, 費樂德仝訂, 溫陵張賡轎梓”라는 주기 사항이 있다. 이어서 총 8개 면에 걸쳐 판각된 소인의 끝에 “泰西後學艾儒略識”으로 소인의 필자를 명기하였다. 이어서 목록 2면을 두고, “泰西耶穌會士艾儒略述”로 다시 알레니의 저술임을 표시하였다. 수성(穗城)은 광주의 다른 이름이므로, 이 판본을 광주본으로 부르겠다.

 

이 판본의 인쇄 시기는 확정하기 어렵지만, 내제의 주기 사항으로 볼 때, 숭정 연간으로 추정된다.46) 광주본은 항주갑본과 판면 구성이 다른데, 항주갑본은 반 곽당 9행, 1행당 19자인 반면에 광주본은 반 곽당 10행, 1행당 20자로 되어 있다.

 

④ 항주을본(杭州乙本)47)

 

이 판본은 필자가 직접 열람하지 못했기에, 판본의 특징은 사휘(谢辉)의 연구에 의지한다. 그에 따르면, 이 판본은 내제 면의 표기가 위의 항주갑본과 동일하다고 한다.48) 그렇다면, 내제에 “萬物眞原, 耶蘇會士後學艾儒略述, 同會傅汎際, 龍華民, 費樂德仝訂, 溫陵張賡轎梓”라는 주기가 이 판본에도 있는 셈이다. 한편, 이 본의 판면 형식과 기술 내용의 일부는 항주갑본과 다르다고 하므로, 두 판본은 서로 독립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 판본을 항주을본으로 부르겠다.

 

필자는 이상의 4종 판본 모두를 숭정 연간에 간행된 초기 판본으로 추정한다. 우선 수선당본에는 “崇禎元年’이라는 간행 연차가 명기되어 있으므로 의문의 여지가 없다. 나아가 항주갑본, 광주본, 항주을본에 모두 “溫陵張賡轎梓”라는 주기 사항이 있는데, 이것이 이들 세 판본이 숭정 연간에 간행되었다고 보는 한 가지 이유이다. 장갱(張賡, 생몰년 미상)49)은 1597년에 향시를 통과하여 거인(擧人)이 되었고 진강현(晉江縣) 평호(平湖)의 교유(敎諭)를 맡았던 유학자였다.50) 양정균(楊廷筠, 1557~1627)의 문하생이었던 그는 1621년 세례 교인이 되었으며, 1630~1640년 사이에 알레니를 도와 천주(泉州)에 교당을 건립하기도 했다.51) 그는 알레니의 저술 출판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생몰년은 불분명하지만, 한림(韓霖, 1596~1649)과 함께 저술한 『성교신증(聖敎信證)』이 1647년의 저술로 알려져 있으므로, 대략 이 무렵까지 활동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52) 위의 세 판본은 장갱이 초판본을 교정하여 중각한 것이므로, 그가 알레니를 도와 왕성하게 활동하던 숭정 연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된다.

 

항주갑본, 광주본, 항주을본이 모두 숭정 연간에 간행된 것이라고 추정하는 또 다른 이유는 피휘(避諱) 때문이다.53) 『만물진원』 초기 판본의 간행 연대 추정을 위해서는, 천계제(天啓帝, 재위 : 1620~1627) 주유교(朱由校, 1605~1627)와 숭정제(崇禎帝, 재위 : 1627~1644) 주유검(朱由檢, 1611~1644)의 이름에 포함된 ‘由’자의 피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명말에 간행된 한문서학서에서는 ‘由’를 피휘하여 ‘繇’로 쓰는 경우가 많았는데, 1636년에 출판된 아담 샬(Johan Adam Schall von Bell, 중국명 湯若望, 1591~1666)의 『주제군징(主制群徵)』도 이런 피휘 원칙을 따랐다. 『만물진원』 또한 수선당본, 항주갑본, 광주본의 본문에는 ‘由’가 모두 ‘繇’로 피휘되어 있다.54) 그런데 특이하게도 수선당본의 소인에는 두 곳에서 ‘由’자가 쓰였다. 가장 이른 판본의 소인에서 ‘由’를 피휘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항주갑본, 광주본, 항주을본에 적힌 “온릉 장갱이 교정하여 새겼다.”는 말은, 장갱이 수선당본 소인의 피휘 오류를 교정한 뜻도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위 4종의 판본 가운데 수선당본은 皇城首善堂, 항주갑본은 武林天主堂, 광주본은 穗城大原堂, 항주을본은 武林天主堂으로 모두 간행처가 표기되어 있다. 이른바 당각(堂刻) 즉 예수회 교당에서 인쇄된 것이다.55) 천주당이나 대원당은 당시의 예수회 교당을 부르는 일반적인 이름이므로 간행처를 쉽게 확정할 수 있지만, 북경의 수선당은 명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왕신(王申)은, 북경에 있던 동서남북 네 곳의 대표적인 성당 가운데 북당(北堂)의 옛 이름이 수선당(首善堂), 황성당(皇城堂), 인애성소(仁愛聖所)라고 보고, 수선당은 ‘북당’이라고 단정하였다.56) 그러나 북당은 1693년(강희 32)에 강희 황제에 의해 건립지가 하사되고 1703년에 완성되었으므로,57) 이 단정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 수선당본이 간행된 시기(1628년)에는 북경에 남당(南堂)만이 존재하던 시기이므로,58) 수선당은 당시 남당을 가리키는 말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남당을 수선당으로 칭한 명백한 사례는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

 

이상 4종의 초기 판본 이외에 1791년 이후의 판본은 매우 많다. 학계에는 1791년(乾隆 56) 중각본,59) 1887년 상해자모당(上海慈母堂) 연인본,60) 1888년 홍콩 납잡륵정원(納匝肋靜院) 연인본,61) 1889년 · 1901년 · 1906년 · 1921년 · 1924년 · 1940년본 등이 보고되어 있다.62) 바티칸 도서관에도 1843년본63)과 1906년본64)이 소장되어 있다.65) 한 가지 특기할 것은, 『만물진원』이 이처럼 여러 차례 중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알레니의 소인은 4종의 초기 판본에만 있을 뿐, 1791년 중각본과 그 이후에 나온 판본에는 모두 소인이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초기 판본의 경우, 수선당본(1628년) 이외에 항주갑본 · 광주본 · 항주을본은 간행 연차가 표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간행 시기를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판본 상호 간에 기술 내용의 출입을 통해 선후 관계를 추정하는 것은 가능하다. 4종의 초기 판본 가운데 항주을본이 1791년본 및 그 이후의 판본들과 가장 근접하는 것으로 판단되므로, 이를 중심으로 항주갑본, 광주본과의 선후 관계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사휘(谢辉)에 따르면, 항주을본은 몇 곳의 기술 내용이 항주갑본과 차이가 있다.66) 첫째, 제1장의 기술 가운데 항주갑본은 “其三曰, 萬國典籍, 論天地之原, 本國之始, 皆必謂有初, 如中國記盤古以上, 更無人類.”로 되어 있는 반면, 항주을본은 해당 부분이 “其三曰, 萬國典籍, 論天地開闢, 人物自生, 皆必謂有初, 如中國記洪荒而上, 必無人類.”로 되어 있다.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이 부분의 기술은 수선당본, 항주갑본, 광주본이 모두 동일하다. 항주을본에 보이는 이런 수정 사항은 1791년본에 수록, 1888년본 등에서도 모두 동일하다.

 

둘째, 수선당본, 항주갑본, 광주본의 제10장에는 모두 “八列星天, 九與十皆洞明天, 亦曰水晶天, 十一宗動天.”이라는 동일한 기술이 있다.67) 하지만, 사휘에 따르면, 항주을본에는 해당 부분이 “八列星天, 九宗動天.”으로 수정되었고, 통명천(洞明天, 동서세차천과 남북세차천을 의미)에 관한 정보가 삭제되어 있다고 한다. 즉 초기 판본 가운데 다른 3종의 판본에서는 하늘의 층수를 ‘십일중천’으로 기술한 데 비해, 항주을본만 ‘구중천’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수정된 것은 1791년본, 1888년본 등에서도 모두 동일하다.

 

이상과 같은 특징을 기초로 수정이 이루어진 흐름을 유추하여 선후 관계를 추정하면, 수선당본 → 항주갑본 → 광주본 → 항주을본 → 1791년본 → 이후의 판본까지의 흐름이 된다. 이 선후 관계는 『만물진원』 제10장에 기술된 ‘지옥의 층수’와 ‘하늘의 층수’를 판본끼리 대조하는 것으로도 확인이 가능하다. 수선당본은 3층 지옥×11중천, 항주갑본은 4층 지옥×11중천, 광주본은 4층 지옥×11중천, 항주을본은 4층(필자 미확인)×9중천, 1791년본은 3층 지옥×9중천으로 되어 있다. 2종의 한글 번역본에서도 1791년본과 동일하게 3층 지옥×9중천으로 되어 있다. 필자는 항주을본을 직접 열람하지 못했지만, 이 판본을 열람한 사휘에 따르면, 항주을본에 기술된 지옥의 층수는 항주갑본과 동일한 4층이다.68) 그렇다면 수선당본(3×11) → 항주갑본(4×11) → 광주본(4×11) → 항주을본(4×9) → 1791년본(3×9)의 순서로 지옥의 층수와 하늘의 층수가 변화하는 흐름을 볼 수 있다. 후대 판본으로 갈수록 지옥의 층수는 3층으로, 하늘의 층수는 9층으로 고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홍정하가 옮겨 적은 『만물진원』 제10장의 기술에는 ‘4층 지옥×9중천’으로 되어 있다.69) 이제 이 두 사실을 연결하면 홍정하가 열람한 『만물진원』은 항주을본이었음이 드러난다.

 

 

4. 홍정하의 가계와 교유 범위

 

홍정하의 『사편증의』 가운데 『만물진원증의』는 『만물진원』의 주장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담고 있다.70) 이 논설은 18세기 후반 조선의 유학자가 서학, 특히 그리스도교 교리서에 포함된 서양 자연학에 대해 비판한 논설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하지만 홍정하의 가계와 교유 범위에 대해서는 최근까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19세기 중반의 허전은 홍정하에 대해 “健陵時處士(정조 시대의 은둔 선비)”로 적었는데,71) 이는 2000년대 초까지 홍정하라는 인물에 대해 알려진 유일한 정보였다.72) 다행히 2002년 차기진에 의해, 홍정하와 관련된 기록이 보고되면서 새로운 사실이 알려졌다.73) 이를 통해 홍정하의 활동 지역은 충주 및 원주 일대이며,74) 그가 정범조(丁範祖, 1723~1801), 강준흠(姜浚欽, 1768~1833) 등 남인계 공서파(攻西波)의 인물들과 교유한 것이 확인되었다.

 

정범조는 홍정하의 조부와 부친의 묘갈명을 지었는데, 이들 자료와 함께 족보를 참고하면 그의 가계(家系)를 확인할 수 있다. 홍정하는 고려조 국학(國學)에서 직학(直學)을 지낸 홍지경(洪之慶)을 시조로 하는 풍산(豐山) 홍씨 16세손으로 모당공계(慕堂公系) 장령공파(掌令公派)에 속한다.75) 광해군 때 대사헌을 지낸 홍이상(洪履祥, 1549~1615)이 10세(世)이며, 홍이상의 셋째 홍집(洪 , 1582~1638)이 11세,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홍주삼(洪柱三, 1621~1682)이 12세이다. 홍주삼은 원래 홍이상의 여섯째 홍척(洪𩆸)의 아들이지만 셋째 숙부인 홍집에 입양되어 뒤를 이었다. 홍주삼의 아들 홍만운(洪萬運, 1640~1691, 13세)은 이천부사(利川府使)를 지냈는데, 홍정하의 증조부이다. 홍정하의 조부는 홍중윤(洪重潤, 1675~1755, 14세)인데,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고 음서로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나중에 국가의 경사(敬事)를 맞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76) 홍정하의 부친 홍응보(洪應輔, 1702~1770, 15세)는 1742년(영조 18)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正字), 사간원 헌납(獻納, 정5품) 등을 역임하였다.77) 그는 만년에 경학에 전념하여, 유고(遺藁) 30권이 있었다고 한다. 홍정하(洪正河, 1731~1805)는 홍응보의 아들로,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로는 희명(羲鳴)과 희석(羲錫)이 있다.78)

 

차기진이 강준흠의 전언에 의거하여 추정한 바와 같이,79) 당시 홍정하는 충주에 거주한 것이 확실하다. 홍정하 조부 및 부친의 묘갈명에서는 이들 모두 충주에 장사지냈다고 하였으며, 족보에 따르면 홍정하 또한 충주 금가면(金加面) 장춘곡(長春谷)에 묻혔다.80) 홍정하는 정범조와 밀접하게 교류하였는데, 금강(琴江, 錦江) 부근에 여막(廬幕)을 짓고 정범조와 여러 날 함께 하였던 기록도 있다.81) 한편, 1782년(정조 6) 충청도 유생 약 2,600명이 연명하여 송덕상(宋德相, 1710~1783)과 홍국영(洪國榮, 1748~1781)의 죄를 성토하는 상소를 올린 일이 있는데,82) 이 상소의 연명부를 옮겨 적은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진사(進士) 홍정하의 이름이 보인다.83)

 

정범조는 채제공(蔡濟恭, 1720~1799)과 함께 정조 시대 남인계의 양대 지주로 알려져 있다. 채제공은 남인계의 정치적인 지도자로, 정범조는 문학적 사표(師表)로 평가될 정도84)로 두 사람은 남인계의 지도자였다.85) 황윤석은 정범조를 채제공, 신광수(申光洙, 1712~1775), 이헌경(李獻慶, 1719~1791), 목만중(睦萬中, 1727~1810)과 함께 근기남인계의 5대 인물로 꼽았다고 한다.86) 강준흠은 정조 18년(1794)에 정시에 급제하고 초계문신(抄啟文臣)으로 뽑힐 정도로 남인계에서는 촉망받는 인물이었다. 정조(正祖, 재위 : 1776~1800)의 총애를 받았으며, 신유사옥 이후에도 목만중, 이기경, 홍낙안 등과 함께 남인계 공서파에 속하여 반서학 조치 등으로 인한 정치적인 좌절은 없었다고 평가된다.87) 강준흠은 특히 순조대 이후 공서파의 대표 인물로 인식되었는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서 밝히고 있듯이, 강준흠은 정약용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그의 해배(解配)를 무산시킨 일도 있었다.88) 강준흠은 여와계(餘窩系), 즉 목만중(호 餘窩)의 영향권에 있던 사람들의 만사(輓詞)를 여러 건 지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홍정하를 위한 만사도 있다.89) 홍정하는 영조 시대 『탐라록(耽羅錄)』을 지은 신광수와도 교류가 있었다. 신광수는 홍정하 부친의 죽음을 애도한 시를 지어준 일이 있다.90) 이상과 같이 홍정하가 정범조, 강준흠, 신광수 등과 교류한 기록이 보여주는 것처럼, 그는 초야에 묻힌 선비가 아니라 남인계 공서파와 밀접한 관계 속에서 벽사론의 수립과 전개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봐야 할 것이다.

 

실제로 『사편증의』 전체에서 홍정하가 기술한 그리스도교 교리 비판론과 『만물진원증의』에서 특히 집중하고 있는 서양 자연학 비판론은 남인계 공서파의 벽사론에 튼튼한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홍정하의 『사편증의』는 남인계 공서파 인물들 사이에서 읽혔던 것으로 확인되는데, 다음과 같은 정범조의 기록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근래에 들어보니, 서양국의 사람들이 그들 책을 지니고 북경에 와서 스스로 중국에 선교(宣敎)를 하러 왔다고 말하는데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책을 사가지고 와서 젊은 사람들 가운데 왕왕 숭신(崇信)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나는 본래 그것이 이단사설이라고 의심했지만 온전한 책[全書]을 보지는 않았다. 내 친구 홍정하는 그들의 책 네 편을 얻어서, 조목을 따라가며 변척(辨斥)하였는데, 매 편마다 원문을 위에 적고 이어서 자신의 설을 덧붙여 세 권을 만들었다. 은밀하게 내게 보이면서, “자네에게도 서학을 공박(攻駁)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네.”라고 말하였다. 읽어보니, (서학서의 내용은) 모두가 기괴하고 허망하며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었다.91)

 

정범조는 이어서 홍정하가 논술한 요지를 소개하고, 이처럼 서학서의 주장이 황당무계하므로, “도학을 밝히는 길로 바르게 나아갈 뿐”이라고 결론을 맺었다. 남인계 공서파 인물들과 홍정하는 ‘보수적인 경학론’과 ‘벽사위정(闢邪衛正)의 입장’92)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93)

 

 

5. 『만물진원증의』의 서양 자연학 비판론

 

『만물진원증의』에서 취하고 있는 홍정하의 서학 비판 전략은 서학의 주장을 직접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장 속에 드러나는 모순을 지적하는 것이었다.94) 그에 따르면, 서학서 주장은 “일구일절 안에서도 상반되고 어긋나므로,” “저들의 학설로 저들의 학설을 공격하면 되는” 것이었다.95) 홍정하는 서학서의 주요 내용을 먼저 제시하고, 여기에서 발견되는 모순점을 지적하고 비판한다.96) 『만물진원증의』에는 총 14개의 문단이 설정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사원소설에 관한 것이다. 제6문단부터 제12문단까지가 모두 이와 관련된 것인데, 특히 서술 분량이 가장 많은 제12문단에서 동아시아 전통의 기 이론과 음양오행설을 동원하여 사원소설을 비판한다.97)

 

홍정하의 비판은 『만물진원』 제10장 첫머리에 제시된 ① 재료에 전혀 의지하지 않았으며, ② 도구에 전혀 의지하지 않았으며, ③ 시간을 전혀 들이지 않았으며, ④ 힘을 전혀 들이지 않았으며, 창조된 후에는 ⑤ 훼손되지 않는다는 다섯 가지 창조 원칙에 대한 것이다. 그는, 아무리 천주라고 하더라도 재료와 도구 없이 창조할 수 없으며,98) 창조 과정의 여러 단계를 말해 놓고 시간을 들이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모순이며,99) 천주가 피조물에 목적(의도)을 부여했다고 하면서 심력을 들이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100) 마지막으로 천지 창조된 후에는 손괴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이미 말하기를 “만들어진 후에는 한 번도 손괴하지 않는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영원히 지키고 보존해 준다.”고 하였다. 저 이미 손괴할 걱정이 없으면, 놓아두면 될 것인데, 왜 지키고 보존해 주는가? 당신들은 비록 세 치의 혀로도 끝내 개벽에 까닭이 없음[無故]을 말하지 못할 것이다.101)

 

동아시아 유학자의 입장에서 볼 때, 천지를 창조하려는 의지와 의도를 지닌 천주라는 존재와 그가 지닌 전지전능한 능력이 전혀 용인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홍정하는, 무(無)에서 우주를 창조하고, 그 우주에 질서를 부여하며, 이것이 파괴되지 않도록 보전해 주는 천주라는 초월적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홍정하가 힘주어 비판한 것은 천당천(天堂天)의 모양이 내원외방(內圓外方)이라는 주장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만물진원』에서는 우주의 가장 바깥에 있는 천당천의 모양은 안쪽은 구이고 바깥쪽은 정육면체라고 하였다.102) 이에 대해 홍정하는, 천당천을 본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이에 관해 기술한 것은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예수는 인간이면서 천주이므로103) 예수도 육체적 한계를 지닌 인간이다. 홍정하는 “예수가 이미 하늘의 바깥과 땅의 안쪽을 볼 수 없었으니, 하늘의 바깥이 모나고 땅의 안쪽이 둥글다는 것은 확실히 허황한 주장”이라고 천당천의 모양에 관한 주장을 부정하였다.104)

 

한편, 홍정하는 중국 고대의 『주비산경(周髀算經)』에서 지구설이 언급되었다는 것을 근거로 서양의 지구설을 긍정하였다.105) 하지만 그는 지구설을 천당천의 형태를 비판하는 근거로 활용하였는데, 그 논리가 독특하다.

 

대개 하늘의 모양은 둥그니, 하늘이 안에 품고 있는 것들도 그 모양이 둥글지 않으면 안 된다. 늘 보는 나무나 돌 가운데 외형이 둥근 것은 그 안의 무늬도 역시 둥글며, 외형이 모난 것은 그 안의 무늬도 역시 모나다. 이것이 그 증거이니, 하늘의 바깥쪽이 모나다는 설(天形外方說)은 틀렸다.106)

 

모든 사물은 안과 밖이 동형(同形)이어야 하므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은 천당천의 모양이 내원외방(內圓外方)이라는 주장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가장 바깥쪽 하늘, 즉 서양인들이 말하는 천당천도 둥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천지의 모양이 오로지 새알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노른자는 천지의 지(地)요, 흰자는 천지의 기(氣)요, 껍질은 천지의 천(天)이다. 알 껍질의 바깥이 둥그니, 하늘 껍질의 바깥도 둥글다는 것은 믿을 만하다.107)

 

새알의 노른자는 지구이고 흰자는 지구를 감싸고 있는 기라는 그의 주장으로부터, 그가 서양의 지구설을 긍정하면서도 이를 동아시아 전통의 기(氣)의 우주론에 연결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기의 우주론은, 뒤에서 볼 것처럼, 홍정하가 『만물진원』에 제시된 고체 천구의 개념을 부정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108)

 

홍정하는 동아시아 전통의 기의 우주론을 근거로 삼아 천지창조의 첫 단계에서 창조된 희미지수(希微之水)의 성질과 그 변화 과정에 대해 비판하였다. 『만물진원』에 따르면, 천주가 천지만물을 창조할 때에 가장 먼저 천당, 지옥, 희미지수, 천사를 만들었다. 희미지수는 지구와 천당 사이를 가득 채우고 있는데, 천주는 이 희미지수를 재료로 삼아 공기, 불, 그리고 하늘의 천구와 거기에 속하는 천체들을 만들었다. 천주의 창조물을 4원소와 대응시켜 보면, 지옥과 지구는 토(土, 흙)이고, 희미지수는 수(水, 물)이므로, 천주가 토와 수를 먼저 만들고 이 수를 가지고 기(氣, 공기)와 화(火, 불), 그리고 천구와 천체들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동아시아 전통의 기의 우주론과 오행설을 굳게 믿은 홍정하에게는 결코 용납될 수 없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기(氣)가 응결하여 수(水)가 된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수가 변화하여 기가 되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또 수가 변화하여 화(火)가 된다고 하니 더욱 이치가 없다. 수화는 부부(夫婦)이니, 서로 화합하고 어긋나지 않는 경우는 있다. 어떻게 남자가 변하여 여자가 되며 여자가 변하여 남자가 되는가? 전부 알 수가 없다.109)

 

홍정하가 동아시아 전통의 기 이론과 오행설에 근거하여 서양의 사원소설을 강력히 비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하늘에 다섯 개의 행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오행설이 옳다는 증거라고 생각한 홍정하는 이 사실을 다시 사원소설 비판의 근거로 활용하였다.

 

저들이 이미 금목(金木)을 오행 가운데서 제거하였는데, 어째서 천주는 구중천을 나누어 만들 때 오성에게 명하여 각각 하나의 천구를 주관하게 했을까? 만약 금목을 모두 토(土) 속에 귀착시켰다면 땅에서 형체를 이룬 것은 반드시 하늘에서 형체를 이루면서 금성과 목성 역시 토성천에 들어가 있어야 할 것이니, (이들은) 틀림없이 하나의 천구를 주관할 수도 없고 서로 통솔할 수도 없을 것이다.110)

 

동아시아 전통의 오행설에 의거한 사원소설 비판은 대기권에 설정한 세 층의 영역에 관한 설명, 즉 삼제설(三際說)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서양의 사원소설은 지상계의 원소가 무게와 귀천에 따라 층서를 이루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가장 아래가 흙(지구), 그 위가 물, 다시 그 위가 공기, 가장 높은 층이 불이다. 이 가운데 제3층인 공기층은 기온에 따라 다시 세 층으로 나뉜다. 지면 부근은 온제(溫際), 그보다 높은 곳은 냉제(冷際), 그리고 가장 높은 곳은 열제(熱際)이다. 맨 위층이 열제인 것은 바로 그 위에 불층이 있기 때문이다.111) 하지만 홍정하는 ‘기의 승강 이론’을 믿었기에112) 삼제의 기온이 고정되어 있다는 주장을 수용할 수 없었다. 그는, 땅에서 불이 상승해 간다고 하더라도 중간의 냉제를 거쳐 가는 동안에 완전히 차가워지므로 최상층에 열제가 존재한다는 주장은 성립할 수가 없다고 비판했다.113)

 

홍정하가 서양의 수정체 천구론을 비판한 근거도 역시 기의 우주론이었다. 『만물진원』에서는 “여러 별들은 마치 판자에 옹이가 박혀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는데,114) 이는 천구가 고체이며, 천체는 그 천구에 붙박혀 있다는 의미이다. 이에 대해 홍정하는 먼저 고체의 천구라면 투명할 수 없다고 비판하였다.

 

만일 별들이 하늘에 매달려 있는 것이 나무의 옹이가 판자에 (박혀)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면, 이 ‘별 옹이[星節]’가 매달린 곳에는 각각 실질적인 ‘하늘 판자[天板]’가 있을 것이다. (서양인들은) 비록 하늘이 판자와는 다르다고 말하지만, 이미 별자리가 매달릴 형상을 지닌 물체[形體]가 있는 것이니, 한 겹(천구의) 바깥으로 다시 투명하게 볼 수는 없다.115)

 

나아가 홍정하는, 고체의 천구라면 천체의 회전 운동을 구현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 나무 옹이가 판자에 (박혀) 있는 것과 같다면, 옹이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고, 반드시 판자 전체가 움직인 후에야 옹이가 비로소 판자를 따라 움직일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천체가 회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회전하는 것이다. … 그러나 내가 천문가(天文家)의 말을 들어보니, 한두 개의 천체는 앞뒤로 진퇴(進退)가 뒤바뀌고 일정한 도수(度數, 이동 각도 : 인용자 주)를 잃기도 하지만,116) 다른 별들이 모두 이들처럼 움직이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각 천체는 스스로 회전하는 것이지 하늘의 회전에 따라 회전하는 것이 아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117)

 

이상과 같은 홍정하의 서양 자연학 비판론을 종합해 보면, 그는 유가 전통의 기의 우주론에 의거하여 행성들이 기로 가득 찬 하늘에서 움직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때문에 그는 행성들이 고체의 천구에 붙박혀 있다면 “진퇴가 뒤바뀌고 일정한 도수를 잃는” 불규칙한 운동을 할 수 없다고 보았을 것이다.

 

 

6. 맺음말

 

이상이 『만물진원증의』에서 홍정하가 비판하는 서양 자연학 비판론 가운데 주요한 것들이다. 알레니의 주장과 홍정하의 주장을 대비하면, 한편에는 그리스도교 창조론과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이 있고, 다른 편에는 동아시아 유가 철학의 이기론(理氣論)과 자연학이 있다. 한편에서는 전지전능한 조물주가 무에서 우주를 창조하고 손상되지 않게 보존해 주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기(氣)의 운동을 이(理)가 주재하는 가운데 우주는 저절로 탄생하고 유지된다.

 

패러다임을 ‘한 시대를 지배하는 지식의 체계 혹은 세계관’이라고 정의한다면, 알레니와 홍정하는 서로 다른 패러다임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토머스 쿤(Thomas Kuhn, 1922~1996)은 서로 다른 패러다임은 공약 불가능(incomensurable)하고 패러다임의 전환은 종교적 개종과 같다고 하였다. 한마디로 서로 다른 패러다임 사이에서는 공유하는 이론적 영역이 없기 때문에 대화 자체가 불가능하다. 알레니가 홍정하를 설득하는 데 실패한 이유, 반대로 홍정하가 알레니를 설득하지 못한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알레니는 『만물진원』에서 천지에 가득한 인온지기의 작용에 의해 우주가 생성되었다는 『주역(周易)』의 주장을 비판하였다. 나아가 그는 유가 철학이 근거로 삼는 원리인 이(理)나 물질적 재료인 원기(元氣)가 스스로 하늘과 땅을 만들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알레니는 그리스도교 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으로 이루어진 패러다임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반면 홍정하는 알레니가 말하는 전지전능한 창조주는 존재할 수 없으며, 서양의 사원소설은 이의 원리와 기의 유행으로 운동하고 변화하는 우주를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홍정하는 동아시아 전통의 유가 철학과 기의 자연학으로 이루어진 패러다임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차기진은 서양의 수정체 천구론과 천당천의 모양에 대한 홍정하의 비판을 “서양의 천문·역법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온 결론”이며, “벽이단(闢異端)의 이론을 서양의 과학·기술에까지 넓혀 보고자 한 그의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규정한 적이 있다.118) 홍정하가 서양의 천문 · 역법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홍정하의 서양 자연학에 대한 비판의 원인은 과학지식의 부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알레니의 패러다임이 지닌 이질성에 있다고 해야 더 정확할 것이다. 알레니와 홍정하가 지니고 있던 패러다임 상호 간의 이질성을 전제한다면, 서양 자연학에 대한 홍정하의 의문과 비판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알레니가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 원용한 수정체 천구론은 천문학적인 견지에서 이미 수명을 다한 구식의 이론이었기에 홍정하에게는 더욱 불합리하게 보였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만물진원』과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 소개된 서양 천문학서에서는 천당천이 내원외방(內圓外方)이라고 주장하지 않으며, 고체천구도 주장하지 않는다. 숭정 연간에 예수회 선교사들이 편찬한 『숭정역서(崇禎曆書)』(1634)에 속하는 책으로 행성 운동을 전문적으로 기술한 『오위역지(五緯曆指)』에서는 “지금은… (천구는) 실체(實體)가 아니다.”고 고체천구의 개념을 완전히 부정하고 있다.119) 반면 『만물진원』에서는 천주의 천지창조 과정, 천당과 지옥의 위치와 모양 등을 설명하기 위해 고체천구의 개념을 주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리를 간명하게 설명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왜곡된 자연학 이론은 홍정하에게 더욱 모순투성이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다.

 

1628년 초간 이후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널리 환영을 받은 『만물진원』은 조선의 유학자 홍정하에게 불합리한 주장으로 일관하는 황당무계한 책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 원인은, 알레니가 지니고 있었던 패러다임이 홍정하의 그것과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홍정하의 『만물진원증의』는,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결합한 서양의 자연학이 유가 철학의 패러다임을 지닌 조선의 지식인에게 얼마나 불합리한 지식으로 보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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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리스도교 선교를 위한 알레니의 입장과 중국에서의 활동에 대해서는 다음 책을 참조. 潘鳳娟, 『西來孔子艾儒略 : 更新變化的宗敎會遇』, 臺北: 基督敎橄欖基金會·聖經資源中心, 2002 ; 費賴之 著, 馮承鈞 譯, 『在華耶蘇會士列傳及書目』, 北京: 中華書局, 1995, 132~142쪽 ; 方豪, 『中國天主敎史人物傳(上)』, 北京: 中華書局, 1988, 185~197쪽.

 

2) 원문에는 제일(第一), 제이(第二) 등으로 항목을 구분하고 있지만, 이 글에서는 서술의 편의를 위해 제1장, 제2장 등으로 표현하겠다.

 

3) 『정조실록』 15년 11월 3일(甲戌). “諺翻或謄書者, 卽付刑吏樻中, 而其中聖敎淺說, 萬物眞源二冊, 皆有證據云. 臣未知二冊, 則刊與謄之何居, 而至及於村氓, 其盛如此, 則暗地刊出, 亦非意外也.” 『승정원일기』와 『비변사등록』에도 같은 기록 있다. 조선의 기록에서는 萬物眞原과 萬物眞源을 혼용한다.

 

4) 진산사건 당시 충청도 지역의 천주교인을 단속하는 임무를 맡았던 충청도 관찰사 박종악(朴宗岳, 1735~1795)의 『수기(隨記)』(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에 따르면, 당시 충주에 살던 홍장보(洪章輔)가 자수하여 제출한 서학서 16종 가운데 『만물진원』이 있다(장유승, 「1791년 내포(內浦) : 박종악과 천주교 박해」, 『교회사연구』 44, 2014, 86쪽 참조).

 

5) 이상식 역주, 『추안급국안 : 전주대학교 고전국역총서 2, 제73책(순조 1, 1801)』, 흐름, 2014, 291~291쪽. 김건순(金健淳)이 진술하기를, “기유년(1789, 정조 13) 무렵에 이준신(李儁臣)을 통해 서양 책 『기인십편(畸人十篇)』과 『진도자증(眞道自證)』을 두 권씩 구해 보았습니다. 또 삼전동(三田洞)에 있는 사람을 통해 『교요서론(敎要序論)』과 『만물진원(萬物眞原)』을 구해 보았습니다.”라고 하였다.

 

6) 남숙관의 글은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19세기 초 이항로(李恒老, 1792~1868)가 남숙관의 글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간팔탄남공만물진원편소지(看八灘南公萬物眞原辨小識)」라는 글을 썼다. 이 글을 통해 남숙관이 제시한 『만물진원』에 대한 비판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이항로가 전하는 남숙관의 『만물진원』 비판에 대해서는 이원석, 「『만물진원』과 『벽사록변』 : 성리학·서학의 갈등과 도·기 구도의 출현」, 이봉규 등 편, 『서학의 충격과 접변 : 근현대한국총서 2』, 동과서, 2019, 197~201쪽을 참조.

 

7) 홍정하의 『사편증의』는 서두에 전체 논의를 개괄하는 「證疑要旨」와 4종 서학서의 주장을 각각 비판하는 「실의증의(實義證疑)」, 「만물진원증의(萬物眞原證疑)」, 「진도자증증의(眞道自證證疑)」, 「성세추요증의(盛世芻蕘證疑)」 등 전체 다섯 편의 논설로 구성되어 있다. 네 편의 논설은 각각 『천주실의』(利瑪竇[Matteo Ricci, 1552~1610]의 저술, 1607), 『만물진원』, 『진도자증』(沙守信[Emeric de Chavagnac, 1670~1717]의 저술, 1718), 『성세추요』(馮秉正의 저술, 1733)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이 글에서는 당시인들의 기록을 따라서 홍정하의 논설 전체를 가리키는 책의 이름으로 『사편증의』라고 쓰겠지만, 이 서명이 공인된 것은 아니다. 또한 「만물진원증의」는 이 책에 속하는 한 편의 논설이지만, 이 글의 제5절에서 이 논설의 내용을 인용하여 집중적으로 논의할 때에는 한 편의 책으로 취급하여 겹낫표를 붙여 서명으로 표기하겠다.

 

8) John W. Vitek S.J., “Principles of Scholarsticism in China : A Comparison of Giulio Aleni’s Wanwu Zh enyuan with Matteo Ricci’s Tianzhu Shiyi,” Tiziana Lippiello, Roman Malek, ed., “Scholar from the West” Giulio Aleni S.J. (1582-1649) and the Dialogue between Christianity and China, Sankt Augustin : the Monumenta Serica Institute, 1997, p.287에서 재인용.

 

9) 이 한글 번역 필사본의 표지에는 “崇禎元年初刻, 乾隆五十六年重訂”이라는 한문본의 간기가 있으므로, 1791년 중각(重刻)한 판본을 저본으로 삼아 번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 필사본의 내지에는 “텬쥬강일쳔칠구십이년”로 적혀 있으므로, 1792년에 번역·필사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와는 다른 한 종의 한글 번역 필사본 원본이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나, 필사본의 내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필자는 조현범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와 한국교회사연구소의 배려로 위 두 종의 한글 번역 필사본을 열람할 수 있었다.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는 순교자박물관본의 복사본을 소장하고 있다.

 

10) 『華西先生文集』 卷9 書, 「答金𥠧章」 ; 卷22 雜著, 「看八灘南公萬物眞源辨小識」 ; 卷25 雜著, 「闢邪錄辨」 ; 附錄卷7 語錄, 「洪在龜錄」 등에서 『만물진원』과 관련된 기록을 볼 수 있다. 본 연구에서 이용한 개인 문집의 기록은 모두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제공하는 한국고전종합DB(https://db.itkc.or.kr/)에 의거하였다.

 

11) 『性齋先生文集』 卷16 跋, 「書四編證疑後」.

 

12) 한국고전적 종합목록시스템(https://www.nl.go.kr/korcis/)에서 검색한 결과이므로, 아직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실물이 존재할 가능성은 있다.

 

13) 간기(刊記)는 “天主降生一千八百八十八年, 香港主敎若望高准, 香港納匝靜院活板”으로 되어 있으며, 『闢釋氏諸妄』(徐光啓 撰)과 『辯惑巵言』(李問漁 編)과 함께 총 3종의 책이 합본되어 있다.

 

14) 배현숙, 「조선에 전래된 천주교 서적」, 『韓國敎會史論文集』 제1집, 논문집간행위원회 편,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21쪽.

 

15) 차기진, 『조선후기의 서학과 척사론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269~275쪽에서 홍정하의 교유 범위가 남인계 공서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16) 費賴之 著, 馮承鈞 譯, 앞의 책, 132~133쪽 ; 谢辉, 「梵蒂冈图书馆藏艾儒略着作二种版本考略」, 『国际汉学』 總第4期, 2015, 180쪽.

 

17) 方豪, 앞의 책, 185쪽.

 

18) 韓霖, 張賡, 『耶穌會西來諸位先生姓氏』 ; 艾儒略 外 撰述, 『天主敎東傳文獻三篇』 제1책, 臺北: 臺灣學生書局, 1984, 311쪽.

 

19) 韓霖과 張賡은 「耶穌會西來諸位先生姓氏」에서 22종을 기록하고 있으며, 피스터(費賴之)는 33종을 거론하였지만, 최근의 연구에서 엽농(叶农)은 24종으로 정리하였다. 費賴之 著, 馮承鈞 譯, 앞의 책, 137~142쪽 ; 叶农, 「‘西来孔子’ : 艾儒略中文着述与传敎工作考述」, 『曁南学报』(哲学社会科学版) 总第142期, 2009, 118~123쪽.

 

20) 叶农, 위의 논문, 122~123쪽. 대표적으로 『萬國全圖(1623), 『職方外紀』(1623), 『西學凡』(1623), 『三山論學記』(1627), 『滌罪正規(略)』(1627), 『萬物眞原』(1628), 『幾何要法』(1631), 『出像經解』(1635), 『天主降生言行紀略』(1635), 『天主降生引義』(1635), 『西方答問』(1637), 『五十言餘』(1645) 등을 들 수 있다.

 

21) 潘鳳娟, 앞의 책, 44~45쪽. 알레니의 각 지역 체재 시기 구분은 연구자에 따라서 조금씩 달라지기도 한다.

 

22) 潘鳳娟, 위의 책, 52쪽.

 

23) John W. Vitek S.J., op. cit., p. 276.

 

24) 柯毅霖(Gianni Criveller) 著, 王志成 等譯, 『晩明基督論』, 成都: 四川人民出版社, 2001, 212쪽; 谢辉, 앞의 논문, 179쪽에서 재인용.

 

25) 費賴之 著, 馮承鈞 譯, 앞의 책, 138쪽 참조. 피스터는 1628·1694·1791년본은 北京刻本, 1906·1924년본은 上海土山灣刻本이라고 하였다. 方豪 또한 피스터를 따라 항주 초각(연대 미상)으로 적었다(方豪, 앞의 책, 194쪽 참조).

 

26) 徐宗澤, 『明淸間耶穌會士譯著提要』, 臺北: 中華書局, 1958, 474쪽.

 

27) 潘鳳娟, 앞의 책, 348쪽 및 363~364쪽의 각주 12) 참조.

 

28) Nicolas Standaert, ed., Handbook of Christianity in China, Volume one : 635-1800, Leiden: Brill, 2001, p. 614.

 

29) 인(引)은 저자가 문헌에 관해 소개하는 글이다. 왕신(王申)에 따르면, 천주당에서 간행한 문헌은 대부분 서(序), 발(跋), 인이 붙어 있는데, 이는 문헌의 권위를 높이는 효과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王申, 「明末淸初天主敎堂刻文献的特徵及价値」, 『國際漢學』 2020年 2期, 157쪽).

 

30) 이하 필자가 정리하는 『만물진원』의 개괄적 내용은 2020년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지원하고 필자를 포함한 4명의 공동 연구원이 함께 수행한 「『만물진원』 번역연구」(AKSR2020-C09)의 결과로 제출한 번역본에 의거하였다. 『만물진원』 각 장의 주요 내용을 필자와 조금 달리 정리한 다음 글도 참조할 수 있다. 이원석, 앞의 논문, 209~219쪽.

 

31) 『萬物眞原』 「論物不能自生第二」. “故天之運動, 必藉外有力者旋轉之. 此乃造物者, 哀憐下民, 命天神旋轉之, 以普照廣育萬民也.”

 

32) 『萬物眞原』, 「論天地萬物主宰攝治之第八」. “豈無有靈明者, 運旋而使之然乎.”

 

33) 이 제10장은 판본에 따라 기술 내용의 출입이 상당히 크다. 따라서 필자는 의거 판본을 고정하지 않고 홍정하가 요약하고 있는 이 제10장의 내용을 따라서 여기에 재구성하였다.

 

34) 앞서 언급한 대로 천주는 사물의 창조에 시간을 전혀 들이지 않았으므로, 이 네 가지 사물의 창조에 시간적 선후는 생각할 수 없다.

 

35) 천당천의 형태는 내부에 구(球)를 품고 있는 정육면체를 생각할 수 있다. 구는 물질적인 우주이고, 그 바깥 공간이 천당이다. 뒤에서 보는 것처럼, 홍정하는 안쪽은 둥글고 바깥쪽은 모나다(內圓外方)는 천당천의 형태에 대해 매우 강하게 비판한다.

 

36) 알레니는 제1장에서 우주의 창조 시기가 숭정 원년(1628)부터 7천 년이 조금 못 되는 과거에 있었다고 하였다. 『萬物眞原』, 「論物皆有始第一」. “自今崇禎元年, 直遡始有天地, 共不滿七千年.”

 

37) 『萬物眞原』, 「論天主爲萬有無原之原第十一」. “世無可比, 淺譬之樹木焉, 其葉花實, 必出於枝, 枝出於幹, 幹出於根, 至於根, 則爲花實枝葉本原, 又何復問根之根也哉. 又譬之數焉, 億出于萬, 萬出於千, 千出於百, 百出於十, 十出於一, 一也者, 億萬千百十之原, 諸數之始者也, 又何復問一之一者哉.” 이항로가 전하는 남숙관의 기록을 보면, 남숙관의 비판은 『만물진원』 제11장에서 알레니가 언급한 근원 중의 근원을 의미하는 수목의 뿌리와 숫자 일(一)에 관련된 논의를 계기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華西先生文集』 卷22 雜著, 「看八灘南公萬物眞源辨小識」. “遠西艾儒畧, 崇禎時人也. 與利瑪竇並稱爲達理, 作萬物眞源十一篇. 推明天地之造成萬物之化生者, 皆有其自有之源, 而爲天地之主宰. 如木之有根, 數之有一, 然根之根一之一, 不須問也.”

 

38) 이곳에 소장된 각 판본의 특징에 대해서는, 任大援, 「萬物眞原提要」, 張西平, 任大援, 馬西尼, 裵佐寧 主編, 『梵蒂岡圖書館藏中西文化交流史文獻叢刊』 제4책, 鄭州: 大象出版社, 2014, 2~4쪽을 참조.

 

39) 이하에서 지칭하는 수선당본, 항주갑본, 광주본, 항주을본은 학계에서 합의된 명칭이 아니며 필자가 임의로 판본을 구별하여 붙인 명칭이다.

 

40) 도서번호 : BORGIA CINESE 349.4.

 

41) 교정자는 費樂德(Rui de Figueiredo, 1594~1642), 傅汎際(Francisco Furtado, 1587~1653), 龍華民(Nicolas Longobardi, 1559~1654) 등 3인이다.

 

42) 任大援, 앞의 논문, 2~4쪽 참조. 이 판본은 해당 총서에 영인되어 있다. 한편, 사휘(谢辉)는 이 판본에서 玄자를 피휘(避諱)했다고 단정하고 이 판본을 강희 연간(1662~1722)에 인쇄된 것으로 본다. 하지만 인쇄 상태 불량 때문에 玄자의 피휘 여부를 확인하기가 곤란하고, 피휘의 일관성도 없어서 그의 주장은 수용하기 어렵다(谢辉, 앞의 논문, 180쪽).

 

43) 도서번호 : BARBERINI ORIENTAL 132.4 ; RACCOLATA GERALE-ORIENTE-III 222.11.

 

44) 이 판본은 프랑스국립도서관(BnF) 소장본(BnF6889)과 동일하다(PDF 공개). 이 판본은 이탈리아 로마 소재 예수회 문서보관소(耶穌會檔案館)에도 소장되어 있다. Albert Chan, S.J., Chinese Books and Documents in the Jesuit Archives in Rome, NY: M.E. Sharpe, 2002, p. 123.

 

45) 도서번호 : BORGIA CINESE 364.9 ; RACCOLATA GENERALE-ORIENTE-III 286.12 ; RACCOLATA GENERALE-ORIENTE-III 286.13.

 

46) 이 판본은 프랑스국립도서관, 독일 바이에른주 도서관(PDF 공개)에도 소장되어 있다.

 

47) 도서번호 : RACCOLATA GENERALE-ORIENTE-III 248.8.

 

48) 谢辉, 앞의 논문, 179쪽.

 

49) 包兆会, 「历史文化名人信仰系列之四十三 : 张赓」, 『天风』 2017年第7期, 54~55쪽에서는 장갱의 생년을 1570년으로 적었고, 장갱이 한림(韓霖, 1596~1649)과 함께 저술한 『聖敎信證』(1647)을 최만년 저작으로 열거하였다. 이에 따른다면 장갱의 생년은 1570년 몰년은 1647년 무렵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현재 중국의 학자들도 생몰년을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50) 刘英男, 「‘自我’与‘他者’之鉴 : 儒家基督徒张赓思想论析」, 上海师范大学硕士論文, 2004, 6쪽. 아울러 陆芸, 「艾儒略与张赓: 明末清初天主教在福建的传教策略」, 『福建论坛』(人文社会科学版), 2008年 第3期, 77~79쪽 등도 참조.

 

51) 潘鳳娟, 앞의 책, 90~915쪽.

 

52) 장갱이 향시를 통과한 1597년에 20세의 약관이었다고 가정하더라도 1647년에는 70세의 고령이다.

 

53) 사휘(谢辉)는 『만물진원』 본문에 쓰인 글자의 피휘에 착안하여 항주을본의 인쇄 연대를 강희 연간(1662~1722)으로 추정하였다. 그는, 항주을본의 제6장과 제9장에 보이는 炫, 眩 등의 글자가 강희제의 이름 玄燁의 玄자를 피휘하기 위해 마지막 한 획(丶)을 쓰지 않는 소위 궐말필(闕末筆)이 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그는 수선당본에 대해서도 동일한 피휘가 있었다고 보고, 이 판본의 인쇄 시기도 강희 연간으로 보았다. 강희 연간에 弦, 絃, 眩, 舷, 痃, 泫, 鉉, 炫, 衒 등 玄자 계통 글자의 마지막 획을 쓰지 않는 방식으로 피휘를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수선당본의 제9장에 나오는 眩자는 마지막 획이 완전하게 인쇄된 것을 보면, 사휘가 주장하는 피휘는 수용하기 어렵다(谢辉, 앞의 논문, 179~180쪽 ; 王新華, 『避諱硏究』, 濟南: 齊魯書社, 2007, 191쪽).

 

54) 『만물진원』 본문 전체에서 총 7회 繇자가 쓰였는데, 제2장에서 3회, 제4장에서 1회, 제5장에서 2회, 제9장에서 1회이다.

 

55) 예수회 문헌 가운데 당각본에 대해서는 王申, 앞의 논문, 155~160쪽을 참조.

 

56) 王申, 위의 논문, 156쪽. 남당은 선무문(宣武門) 안쪽에 있어서 선무문 천주당으로 불렸는데, 그 외 시태대당(始胎大堂), 성모영보당(聖母領報堂), 금대경교당(金臺景敎堂) 등으로도 불렸다.

 

57) 북당의 건립 내력에 대해서는 佟洵, 「‘北堂’的變遷」, 『北京科技大学学报』(社会科学版), 1999年 3期, 42~27쪽 참조. 원래의 북당은 북경 중해(中海) 서변(西邊)에 있었는데, 잠지구교당(蠶池口敎堂)이라고도 불렀다. 이곳은 명말에 황실의 창고가 있었던 곳으로 청조의 북경 점령과 함께 약 30여 년간 황폐화하였다가 강희 황제에 의해 창고가 복원되었고, 이곳에 다시 북당이 건립되었는데, 강희제는 친필 편액 ‘萬有眞原’을 하사하였다. 1838년 성당 철폐령으로 135년 만에 폐쇄되었다가, 제2차 아편전쟁의 결과 북경조약(北京條約)에 의해 동·서·북당의 재건이 추진, 1886년 건립을 시작하여 원래보다 훨씬 큰 규모로 중건하였다. 1887년에 현재의 서안문 안쪽의 서십고 천주당(西什庫天主堂) 자리로 이전되었다.

 

58) 马静静, 「试论北京南堂的建立及其历史地位」, 『中国市场』, 2011年 第9期, 118~119쪽.

 

59) 이 본은 미국 의회 도서관, 시카고대학 도서관, 대만 보인대학(輔仁大學)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 본은 鍾鳴旦, 杜鼎克, 黃一農, 祝平一 等 編, 『徐家匯藏書樓 明淸天主敎文獻』 제1책, 臺北: 輔仁大學神學院, 1996에 영인되어 있다.

 

60) 이 본은 倪懷淪(Valentin Garnier, 1825~1898) 編, 『道原精萃』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 판본은 다른 판본들과 달리 축약이나 삭제된 부분이 대단히 많다. 『道原精萃』의 수록 도서는 『萬物眞原』, 『天主降生引義』, 『天主降生言行紀略』, 『宗徒大事錄』, 『聖母傳』, 『宗徒列傳』이다. 『道原精萃』는 앞서 언급한 『梵蒂岡圖書館藏中西文化交流史文獻叢刊』 제1책에 영인되어 있다.

 

61) 이 본은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62) 그 외 2종의 만주어 번역본(프랑스국립도서관 소장)과 1886년 일본에서 간행된 훈점본(訓點本)도 있다.

 

63) 도서번호 : BORGIA CINESE 478. 이 본의 내제 면에 “救世壹千捌百肆拾參年較訂重梓, 崇禎元年京都首善堂藏板”라고 되어 있다.

 

64) 도서번호 : RACCOLATA GENERALE-ORIENTE-III 1197. 이 본은 1906년(光緖 32) 上海土山灣慈母堂 제5차 인쇄본이라고 한다. 高田時雄 編, 『梵蒂岡圖書館所藏漢籍目錄補編(京都大學人文科學硏究所 東洋學文獻センター叢刊)』 제7책, 京都: 京都大學人文科學硏究所, 1997, 7쪽 ; 伯希和 編, 『梵蒂岡圖書館所藏漢籍目錄』, 北京: 中華書局, 2006에 재수록.

 

65) 한편, 黃興濤, 王國榮 編, 『明淸之際西學文本』 제1책, 北京: 中華書局, 2008에 표점배인본(標點排印本)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의 편자들은 스스로 1694년(강희 33)본을 저본으로 삼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저본의 소장처를 밝히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 이 편자들 외에 1694년본을 언급한 예가 없다.

 

66) 필자는 항주을본을 직접 열람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판본의 특징에 대한 정보는 전적으로 사휘(谢辉)의 보고에 의지한다(谢辉, 앞의 논문, 179쪽).

 

67) 구중천설을 비롯한 서양의 천구설에 대해서는 전용훈, 「17세기 서양 세차설(歲差說)의 전래와 동아시아 지식인의 반응」, 『한국실학연구』 20, 2010, 361~371쪽을 참조.

 

68) 사휘(谢辉)는 항주을본에 기술된 지옥의 층수가 항주갑본과 “동일하다”고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항주을본 제10장의 기술 가운데 하늘의 층수만 항주갑본과 차이가 있다고 보고하였다(谢辉, 앞의 논문, 180쪽).

 

69) 『萬物眞原證疑』, 438~440쪽. “其二, 造成天地之體. 形圓而德方, 其中分別四層地獄.…. 今依中華所名名之, 一月天, 二水星天, 三金星天, 四日輪天, 五火星天, 六木星天, 七土星天, 八列星天, 九宗動天.”(밑줄은 필자) 한편 이 인용 구절의 서두에 있는 ‘天地之體’는 ‘大地之體’가 되어야 한다. 천주가 대지를 만든 것을 서술하는 것이므로 ‘天地之體’로 쓰면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70) 홍정하의 『사편증의』는 『대동정로(大東政路)』(1903)에 편집되어 내용이 널리 알려졌다. 『사편증의』에 관한 분석을 포함한 연구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박종홍, 「서구사상의 도입 비판과 섭취」, 『아세아연구』 12-2, 1969, 15~79쪽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천주교회사논문선집』 1, 한국교회사연구소, 1976, 11~107쪽에 재수록 ; 금장태, 「염재 홍정하의 서학비판론과 쟁점」, 『종교와 문화』 7, 2001, 23~57쪽 ; 『조선후기 유교와 서학』,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3, 141~189쪽에 재수록 ; 차기진, 앞의 책, 269~275쪽 ; 원재연, 「정조대 처사 홍정하의 천주교 교리서 비판과 천주교 인식 : 『성세추요증의』를 중심으로」, 『동국사학』 64, 2018, 183~218쪽 ; 전용훈, 「서양 사원소설에 대한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반응」, 『한국과학사학회지』 37-2, 2009, 413~435쪽.

 

71) 『性齋先生集』 卷16 跋, 「書四編證疑後」. “四編證疑者, 洪髯齋正河處士, 憂西洋邪術之滅天理悖人道, 而作也. 處士健陵時人也.”

 

72) 1903년에 『대동정로』를 편집한 허칙과 곽한일, 1960년대에 최초로 『사편증의』와 관련한 연구를 제출한 박종홍, 그리고 2003년에 『사편증의』에 관한 연구를 제출한 금장태 등이 모두 이 간단한 정보에 의지했다.

 

73) 차기진, 앞의 책, 269~270쪽.

 

74) 『三溟詩集三編』 詩, 「訪坪翁洪丈正河」. “江樓高卧鬂蒼蒼, 激烈商謌每自傷, 道直身能扶敎化, 【翁斥邪學, 有功於忠原間.】 才高世不愛文章, 方春桃李花爭豔, 已老梧桐韻更長, 晩泊孤舟門柳下, 滄浪白石是淸揚.”

 

75) 정범조가 남긴 두 편의 묘갈명과 풍산 홍씨 대종회에서 편찬한 족보에 따르면, 홍정하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洪之慶(1世)-侃(2)-侑(3)-演(4)-龜(5)-俶(6)-繼宗(7)-禹甸(8)-脩(9)-履祥(10, 이하 慕堂公系)-?(11)-柱三(12, 𩆸生, 出繼 ‘?’)-萬運(13)-重潤(14)-應輔(15)-正河(16)-羲

鳴, 羲錫(17). 洪履祥(10세)은 䨦, 雴, ?, 霙, 霮, 𩆸의 6형제를 두었다.

 

76) 『海左先生文集』 卷28 碣銘, 「僉知洪公墓碣銘」. 정범조는 이 직명을 따서 그를 첨지홍공(僉知洪公)으로 지칭하였다.

 

77) 『海左先生文集』 卷28 碣銘, 「獻納洪公墓碣銘」. 정범조는 이 직명을 따서 그를 헌납홍공(獻納洪公)으로 지칭하였다.

 

78) 이는 정범조의 기록에 따른다. 현재 풍산 홍씨 대종회에서 편찬한 족보에는 이와 달리 洪羲根(1774~1825), 洪羲淳(1786~1886)으로 적고 있다. 한국학자료포털(http://kostma.aks.ac.kr/)에서 제공하는 만가보(萬家譜)에서 홍정하 이하 홍희근(洪羲根)-홍순모(洪順謨)-홍일주(洪佾周)-홍우필(洪祐弼)까지의 세계를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대종회의 족보에는 홍우필(洪祐弼)이 홍우정(洪祐定, 1845~1889)으로 되어 있다.

 

79) 차기진, 앞의 책, 270쪽.

 

80) 묘갈명에서는 조부는 忠州 次山面 馬山里, 부친은 忠州 梅南里 佛堂谷에 장사한 것으로 나오며, 홍정하의 장지는 풍산 홍씨 세보에 忠州 金加面 長春谷으로 되어 있다.

 

81) 『海左先生文集』 卷13 詩, 「贈洪斯文源心正河」.

 

82) 『정조실록』 14권, 정조 6년 11월 2일(乙未).

 

83) 『승정원일기』 정조 6년 11월 2일(乙未).

 

84) 박무영, 「해좌 정범조의 기수론적 문학관」, 『한국한문학연구』 19, 1996, 325쪽.

 

85) 정범조의 정치 활동에 대해서는 한태민, 「정조대 정범조의 정치론과 정치활동」, 한국학중앙연구원 석사학위 논문, 2021을 참조. 이 논문에서는 정범조가 안동을 중심으로 한 영남 남인계 인물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도 확인하고 있다(32~34쪽 참조).

 

86) 한태민, 위의 논문, 9쪽.

 

87) 이현일, 「『삼명시화(三溟詩話)』로 본 18세기 한시사(漢詩史)」, 『민족문학사연구』 27, 2005, 42~43쪽.

 

88) 이현일, 「해제 : 강준흠(姜浚欽)과 『삼명시화』」, 강준흠 지음, 민족문학사연구소 한문분과 옮김, 『삼명시화」, 소명출판, 2006, 464쪽.

 

89) 차기진, 앞의 책, 283~288쪽.

 

90) 『石北先生文集』 卷12 書, 「與洪源心正河哀」.

 

91) 『海左先生文集』 卷37 說, 「四編證疑後說」. “近聞, 有西洋國人, 携其書至燕中, 自言欲宣敎於中國, 而我人購其書以來, 新進少年, 往往有崇信者. 余固疑其爲異端邪說, 而未及覩其全書矣. 余友洪斯文正河源心, 求得其書四編, 逐條辨斥, 而每編, 錄原書于上, 次附己說, 爲三卷. 袖眎余曰, 子亦有以助之攻也. 盖閱之, 則皆恠誕不經之說也.”

 

92) 차기진, 앞의 책, 288쪽.

 

93) 본 논문의 심사 과정에서, 홍정하의 『사편증의』의 저술 배경과 관련하여, 한 심사위원으로부터 시사하는 바가 큰 조언을 얻었기에 여기에서 밝혀둔다. 그에 따르면, 진산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충청도 관찰사 박종악(朴宗岳, 1735~1795)에게 충주에 살던 홍장보(洪章輔, 1744~?)가 자수하여 소지하고 있던 16종의 서학서를 제출하였다. 홍장보는 홍정하의 아버지 홍응보와 6촌 관계로, 이 사실은 당시 홍정하의 집안에 천주교 신자가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한편 박종악은 덕산 지역에서 활동하던 이삼환(李森煥, 1729~1813)을 압박하여 반서학 운동을 종용하였고, 이삼환이 이에 부응하여 자기 가문이 서학과 무관함을 주장하기 위해 가문의 척사론 저술을 편집한 『벽이연원록(闢異淵源錄)』(1792)을 편찬한 일이 있다. 이 두 사실을 연결해 보면, 홍정하가 『사편증의』를 저술한 이유도 집안에 서학 연루자가 있는 것이 드러난 상황에서 가문의 사상적 결백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었을 수 있다는 것이 이 심사위원의 추론이다. 필자는 이 추론이 개연성이 크다고 생각하며 향후의 탐구가 이런 방향에서 진행되기를 바란다(장유승, 「1791년 내포(內浦) : 박종악과 천주교 박해」, 『교회사연구』 44, 2014, 86쪽 ; 이명제, 「18세기 중반~19세기 전반 성호가문의 서학관 고찰」, 『동국사학』 64, 2018, 254~291쪽 참조).

 

94) 『證疑要旨』, 397쪽. “雖欲依俙捏合, 終是機牙各指, 是非相反, 抵觸交違, 互相疵疣. 此所以愚以爲, 不可以吾說攻彼說, 但當以彼說攻彼說.” 이하에서 홍정하의 『사편증의』를 인용하는 경우, 許侙 等 編, 『大東政路 : 朝鮮事大·斥邪關係資料集』 제6책, 驪江出版社, 1985에 편집된 영인본의 쪽수로 표시한다.

 

95) 『萬物眞原證疑』, 442쪽. “何爲尊駕之言語, 於其當句之內, 皆不成說, 於其當節之內, 皆相反悖也.”

 

96) 이러한 형식은 네 편의 증의에서 모두 동일하다.

 

97) 그의 사원소설 비판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전용훈, 「서양 사원소설에 대한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반응」, 419~428쪽에서 자세히 다루었으므로 본 논의에서는 생략한다.

 

98) 『萬物眞原證疑』, 442쪽. “縱曰, 有能造者, 不資物料, 純以無物化成云. 則旣曰不資物料, 又曰純以無物, 不知所化者是何物.”

 

99) 『萬物眞原證疑』, 443쪽. “旣曰, 絶不待時刻, 瞬息而天地卽立, 而又曰, 但萬有繁多, 其中更有次第. 夫先造次造件數至重, 一層二層九重十重, 定其次第, 寓其深意, 則安在其卽立也.”

 

100) 『萬物眞原證疑』, 443쪽. “旣曰, 絶不費心力, 又曰, 隨意而變. 夫意者心之所之也. 故古人謂之意馬, 言其心力之所往也. 旣曰意, 則已是心力, 何爲言不費心力乎.”

 

101) 『萬物眞原證疑』, 443~444쪽. “旣曰, 旣造之後未嘗損壞, 又曰, 永保持之. 夫旣無損壞之慮, 則置之, 可也, 何爲保持也. 尊駕輩, 雖舌長三尺, 終不得言開闢之無故.”

 

102) 『萬物眞原』, 「論天主造成天地第十」. “此天爲萬物之界, 其體內圓外方, 至高至大, 至光至精, 常靜不動.”

 

103) 『萬物眞原證疑』, 444쪽. “耶穌, 雖是人而天主, 當其定經之時, 肉身尙在, 猶是人也.”

 

104) 『萬物眞原證疑』, 445쪽. “耶穌, 旣不得見天外地內, 則外方內圓之爲荒說, 決矣.”

 

105) 서양과학의 주장이 대부분 중국 고대의 학설에서 유래하였다는 식의 주장을 서학중원설(西學中源說)이라고 부른다. 이지조(李之藻, 1565~1630)는 이미 『주비산경』에 기술된 개천설(蓋天說)이 지구(地球)를 전제하고 있다고 보았고, 서양의 지구설은 중국의 고대 학설을 취하여 성립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국과 조선에서 서양과학 중국 원류설의 성립과 전개 과정에 관해서는 다음의 연구를 참조(안대옥, 「『주비산경(周비算經』과 서학중원설(西學中源說) : 명말 서학수용 이후 『주비산경』 독법의 변화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18, 2009, 691~727쪽 ; 함영대, 「18-19세기 서학중원론(西學中源論)의 전개와 그 함의 : 서학(西學)에 대한 조선학자들의 대응논리」, 『漢文古典硏究』 40, 2020, 243~267쪽 ; 노대환, 「조선후기 ‘西學中國源流說’의 전개와 그 성격」, 『역사학보』 78, 2003, 113~139쪽).

 

106) 『萬物眞原證疑』, 446쪽. “盖天形旣圓, 則包於天之內者, 其勢不得不圓. 常見木石之外形圓者, 其內之文理亦圓, 外形方者, 其內之文理亦方. 此其驗也. 至於天形外方之說, 非也.”

 

107) 『萬物眞原證疑』, 447쪽. “愚則以爲天地之形, 惟鳥卵相似. 黃卽其地也, 百卽其氣也, 殼卽其天也. 卵之殼外圓, 則天殼之外圓, 信矣.”

 

108) 동아시아 유가 철학에서 가장 체계적인 기의 우주론은 주희(朱熹, 1130~1200)에게서 볼 수 있다. 주희의 우주론에 대해서는 야마다 케이지(山田慶兒) 지음, 김석근 역, 『주자의 자연학』, 통나무, 1991 ; 김영식, 『주희의 자연철학』, 예문서원, 2005 등을 참조.

 

109) 『萬物眞原證疑』, 448쪽. “且愚聞, 氣凝而爲水, 未聞水化而爲氣. 又以水化火, 則尤無其理. 水火乃是夫婦, 相和不相悖, 則有之矣. 安有男化而爲婦, 女化而爲男耶. 皆不可知也.”

 

110) 『萬物眞原證疑』, 451쪽. “彼旣去金木, 於五行之中, 則何爲天主之分造九重天時, 令五星各主一天也. 若以金木並歸於土中, 則在地成形者, 在天必成象, 金木二星, 固當並入於土星天, 而必不得各主一天, 不相統率矣.”

 

111) 『萬物眞原證疑』, 456쪽. “彼所稱三際者, 乃地面爲下際, 半空爲中際, 最上爲上際. 下際爲溫際, 中際爲冷際, 上際爲熱際. 下際之溫, 以人無疑者爲驗, 中際之冷以山巓之極冷爲驗, 上際之熱以爲雖不能躬驗, 火必有本處所爲驗.”

 

112) 『萬物眞原證疑』, 456쪽. “彼所稱三際者, 乃地面爲下際, 半空爲中際, 最上爲上際. 下際爲溫際, 中際爲冷際, 上際爲熱際. 下際之溫, 以人無疑者爲驗, 中際之冷以山巓之極冷爲驗, 上際之熱以爲雖不能躬驗, 火必有本處所爲驗.”

 

113) 『萬物眞原證疑』, 457쪽. “若自下亙上, 一直到上極處, 中間過了幾萬里冷際.….未到百里, 火之熱性, 已盡退, 何能直上極高處耶.”

 

114) 『萬物眞原』, 「論天主造成天地第十」. “諸星麗天, 如木節之在板.” ; 『萬物眞原證疑』, 464쪽. “然其所謂諸星之麗天, 如木節之在板云者, 似未爲然.”

 

115) 『萬物眞原證疑』, 465쪽. “若曰, 星之麗天如木節之在板云, 則是星節之所麗處, 各有眞箇天板也. 雖曰, 天如板異. 旣有星宿可麗之形體, 則一重之外, 更不可洞見.”

 

116) 화성, 목성, 토성은 태양계에서 지구 궤도의 바깥에 있어서 지구와의 위치 관계로 인해 순행(順行, 서→동), 역행(逆行, 동→서), 유(留, 한곳에 머묾) 같은 불규칙 운동을 보인다.

 

117) 『萬物眞原證疑』, 465쪽. “且如木節之在板, 則節不能自動, 必待全板之皆動然後, 節始隨板而動. 若然, 則非星旋也, 乃天旋也. … 然而, 愚聞天文家之言, 則或有一星二星, 凌躐進退, 失其常度, 而他星不以此皆動云. 然則, 乃星各自能旋轉, 非由天旋轉也. 未知何故也.”

 

118) 차기진, 앞의 책, 273쪽.

 

119) 『新法算書』(문연각 사고전서 제788책) 권36, 『五緯曆指』 卷1 「總論」. “古曰, 各星自有本天, 重重包裏, 不能相通, 而天體皆實體. 今曰, 諸圈能相入能相通, 不得爲實體.” 『역상고성(曆象考成)』에서도 천구는 고체가 아니라 기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曆象考成』(문연각 사고전서 제790책) 卷1 「天象」. “又宗動天, 以渾灝之氣挈諸天左旋.”

 

* 이 논문은 2019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HK+사업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19S1A6A3A03058791).

 

[교회사 연구 제58집, 2021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전용훈(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문학부 부교수)]

 

※ 본문 중에 ? 표시가 된 곳은 물음표가 있을 곳 외에는 현 편집기에서 지원하지 않는 한자 등이 있는 자리입니다. 정확한 내용은 첨부 파일에서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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