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무너져가는 집을 복구하여라13: 하느님의 구원경륜 (10) 고통의 신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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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2-27 ㅣ No.1772

[무너져가는 집을 복구하여라!] (13) 하느님의 구원경륜 ⑩ 고통의 신비 2


죄인을 위한 사랑이며 구원의 손길인 ‘하느님의 용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최후 만찬을 거행함으로써 자신이 겪게 될 수난과 십자가상 죽음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제자들에게 깨닫게 했다. 그림은 후안 데 후아네스(Juan de Juanes, 1510~1579) 작 ‘최후의 만찬’. 출처=가톨릭굿뉴스.

 

 

예수님의 최후 만찬을 기념하는 미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파스카 축제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요컨대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여, 누룩 없는 빵을 만들고 어린양을 잡아 만찬례를 거행하였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의 역사에 어떻게 개입하시고 자신들을 해방시키셨는지를 기억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벗어날 때, 가장 큰 걸림돌은 파라오의 완고함이었다. 하느님께서는 그의 완고함을 꺾어 놓고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을 위해 열 가지 재앙을 내린다. 그리고 열 번째 재앙이 바로 이집트 땅의 모든 맏아들과 짐승의 맏배들을 모조리 죽게 하는 재앙이었다. 이때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가정은 맏배를 앗아가는 재앙이 내리지 않고 거르고 넘어간다. 이집트 땅 전체에 내린 열 번째 재앙으로 파라오는 마침내 자기 고집을 꺾고,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땅에서 떠나도록 허락하였다.(탈출 12,21-32 참조) 이스라엘 백성들은 파라오가 다시 완고해지기 전에 서둘러 구속과 억압의 땅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이 때문에 누룩으로 발효시킨 빵을 만드느라 지체할 겨를이 없으며, 누룩 없는 반죽을 그대로 가지고 이집트를 떠났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죄의 용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파스카 만찬의 맥락에서 제자들과 자신의 최후 만찬을 거행함으로써 자신이 겪게 될 수난과 십자가상 죽음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는지 당신 제자들이 깨닫도록 했다. 요컨대 최후 만찬에서 누룩 없는 ‘빵’과 어린 양이 흘린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먹고 마실 때,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그 의미를 분명히 드러내셨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놓을 내 몸이다.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것은 너희와 모든 이의 죄의 사함을 위하여 흘릴 피다.” 예수님께서는 최후 만찬에서 사람들이 지은 죄와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서 ‘성사적으로’ 자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시면서 하느님 아버지께 파스카의 희생 제사를 봉헌하셨다. 그리고 최후 만찬이 끝난 후에, 당신의 몸과 피를 ‘실제적으로’ 내어주시며 십자가의 희생 제사를 봉헌하신다. 예수님의 수난 복음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내어 놓는지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올리브 동산에서 유다 당국자들에게 위험인물로 지목되어 체포되셨고, 신성 모독죄의 혐의로 대사제에게 밤새 취조와 고초를 당하셨으며,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져 모진 채찍질과 고문을 당하시고, 사형을 언도받고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파스카 축제의 어린 양이 도살된 것처럼 예수님도 십자가상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예수님께서 겪으신 일련의 수난과 십자가상에서 죽임을 당하신 이유는 지난 연재에서 피력하였듯이 우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기 위함이다. 마치 구약의 어린 양의 대속의 피를 통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재앙이 피해 갔듯이(탈출 12,13) 죄인들이 죄의 사함을 받을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는 파스카의 희생양이 되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를 통한 ‘죄의 용서’는 그 의미가 잘못 이해되거나 오용되곤 했다. 2007년 칸영화제 여우주연상 작품인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은 그리스도의 ‘죄의 용서’가 어떻게 오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은 자신의 초등학생 아들이 살해되는 아픔을 겪고 있다. 범인은 여주인공의 아들을 유괴하여 살해한 동네 웅변학원 원장이었다. 그녀는 절망의 심연에서 허우적거리며 방황을 하다가 마침내 자신의 아들을 살해한 가해자를 용서하기로 결심한다. 그녀가 다니던 교회 목사로부터 예수님의 용서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 그 가르침에 따라 살기로 결심한 것이다. 어느 날 그녀는 가해자가 수감되어 있는 교도소로 향하게 되고 그를 면회하면서 먼저 다음과 같은 말을 꺼낸다. “제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어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당신을 용서하려고 이곳에 왔습니다.” 이 말에 가해자는 옅은 웃음을 지으며 “저도 이곳 감옥에서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으로부터 이미 용서를 받습니다.” 이때, 피해 여주인공은 “내가 아직 용서하지 못했는데 이미 용서를 받았다고…”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넋이 나간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자기가 용서하지 않은 죄를 먼저 용서한 하느님을 증오하고 신앙을 버린다는 내용이다.

 

 

용서를 제대로 이해한 세관장 자캐오

 

이 영화에서 아이를 살해한 가해자는 ‘죄의 용서’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장본인이다. 예수님의 ‘죄의 용서’는 자기의 범죄로 발생한 모든 책임을 면제받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하느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았다고 해서 가해한 사람이 하느님이나 피해자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취해야 할 책임이 면책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용서’는 죄인을 위해 대속하는 사랑이며 구원의 손길로써 죄인이 올바로 자기 책임을 감당하도록 이끌어 주는 하느님의 은총이다. 루카 복음 19장에 나오는 세관장 ‘자캐오’의 이야기가 바로 하느님의 용서를 올바로 이해한 사람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난 후 이렇게 말한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19,8)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후에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범한 잘못들을 보다 더 적극적으로 보속하려는 마음을 지니게 되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2월 27일, 김평만 신부(가톨릭중앙의료원 영성구현실장 겸 의과대학 인문사회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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