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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철학 에세이: 현명함이 행복을 가져다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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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6-09 ㅣ No.109

[가톨릭 철학 에세이 - 철학이 던지는 행복에 관한 열 가지 질문 5]

현명함이 행복을 가져다줄까요?


“난 어느 곳에도 없는 나의 자리를 찾으려 헤매었지만 갈 곳이 없고 / 우리들은 팔려가는 서로를 바라보며 서글픈 작별의 인사들을 나누네 /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 해 넌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잊지 않을게 잊지 않을게 널 잊지 않을게”(브로콜리 너마저, ‘졸업’).

“현명함은 인간적인 좋음에 관계하며, 숙고할 수 있는 것이 관계한다. … 잘 숙고하는 사람은 인간적 행위로 성취될 수 있는 것들 중 최선의 것을, 헤아림에 따라 적중시키는 사람이다”(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6권 7장).

“글쓰기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는 나는, 앞으로 어떤 소설을 쓸 것인지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남들이 가는 길은 걷고 싶지 않았다”(마쓰모토 세이초[일본 사회파 추리소설의 시조]).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에 대한 논증의 요약

우리는 지금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에 관한 생각에 공감하면서 그의 논증을 따라왔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의 일상적 경험과 통념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분석하여 그 본질을 예리하게 드러냅니다. 그 결론으로 다다른 행복이라는 개념의 핵심적 내용들을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겠습니다.

행복은 순간적이고 사라지는 것들에만 의존할 수 없고, 또한 부분적인 목적을 위한 도구적인 유용성을 가진 것들을 얻는 것만으로 충족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행복은 삶 전체를 그 목적으로 삼고 그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때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행복은 ‘좋은 삶’ 자체를 뜻합니다. 여기서 좋은 삶은 삶의 한순간의 스냅사진 같은 것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뜻하지만 그것은 또한 특별한 순간에 체험되는 ‘생동감’이나 ‘기쁨’과 대립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좋은 삶은 살아있는 기쁨의 순간들이 파편이나 고립된 체험으로서 허무하게 흩어져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맥락 속에서 견고한 자리를 부여받고 지속적이고 항구히 발생할 수 있게 하는 샘이자 지평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전체적 관점에서의 좋은 삶은 정지된 추상적인 것이거나 단지 가능성으로서만 전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활동’ 자체를 말합니다. 비유하자면 꽃들이 한철 찬란하게 피었다가 속절없이 지는 것이 끊임없이 반복되지만, 전체적 안목에서 보면 언제나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정원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분명 각각의 꽃들 없이 정원의 근사함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꽃 하나하나의 ‘화양연화’가 정원의 아름다움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듯이, 인생의 폭죽 같은 희열의 순간들 자체를 숙고된 의미의 행복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행복의 숙고’에서, 비트런드 러셀의 표현을 빌린다면 ‘행복의 정복’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좋은 삶의 지속성을 가능하게 하는 삶의 방식을 발견하고 자신의 것으로 익혀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삶으로 가는 길 - 현명함

아리스토텔레스가 사회 안에서 행위하며 살아가는 공동체적 존재이자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로서의 인간에게 가능한 좋은 삶의 방식으로 제시하는 것이 ‘실천적 삶(bios praktikos)’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실천이란 마치 소수의 사회참여적인 사람들에게만 관련되는 삶의 방식으로 들리지만,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모든 자유인은 실천적 삶을 통해서만 자신의 가능성과 능력을 실현하고 행복이라 일컬어질 만한 ‘좋은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실천적 삶이란 공동체 안에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가지고 의미와 가치를 공유하고 나누며 자신과 타인을 위해 인간에게 고유한 좋은 활동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좋은 삶의 실현을 위해서 여러 가지 조건들이 요구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느 정도의 재화나 직업적 보장 같은 현실적인 기반이기도 하겠고, 건강이나 화목한 가정, 명예 같은 무형의자산, 그리고 인격으로 대표되는 윤리적 덕성들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조건들의 조화 없이는 좋은 삶으로서의 실천적 삶의 방식이 불가능하다고 보았고, 이러한 통합의 능력, 곧 실천적 삶의 영역에서 행복을 가능하게 하는 지적인 능력을 아리스토텔레스는 ‘현명함(프로네시스)’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적 ‘현명함’이 현대인들에게 자주 오해되는 것은 그의 개념이 포괄하고 있었던 실천적 삶의 현실적 조건과 윤리적 가치가 역사적 과정을 통해 점점 양립되기 어려운 상반된 선택지로서 이해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군주론」의 작가 니콜로 마키아벨리 이래로 자주 현명함은 생존과 성공을 위한 영리함과 책략의 기술로 환원되곤 합니다. 그리고 근대철학의 윤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 할 이마누엘 칸트의 입장처럼 자주 현명함은 도덕성과 구분되는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근본적으로는 이기적인 영역의 능력으로 폄하됩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현명함은 훌륭한 실천적 삶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세 가지 차원의 지적인 능력을 모두 아우릅니다. 그는 단기적으로 부여된 과제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명민함으로서의 그러니까 생존과 성공의 수완으로서의 현명함의 모습을 인정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세상 안에 살아남고 나의 자리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시작일 따름입니다. 그러한 능력은 더 높은 단계의 현명함, 곧 그때그때의 선택을 훌륭한 인생이라는 더 큰 맥락에서 수행할 수 있는 전체적 안목이 있을 때만 의미가 있고 사람을 행복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명함의 가장 심오한 능력은 다름 아닌 모든 덕을 덕이게 하는 도덕적 판단력입니다. 인생을 전체적으로 본다는 것은 사실 윤리적 가치가 체화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분명하게 견지하는 입장입니다.

그러기에 생존과 성공과 도덕을 대립시키는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결코 ‘현명한’ 사람일 수 없습니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하는 현명함의 개념은 곱씹을수록 인생에 대해서 행복에 대해서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깨닫게 합니다. 인간 삶의 현실을 냉철히 인정하면서도 이상을 간직하는 대단한 식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감탄하면서도 현명함만으로 행복을 해명하기에는 뭔가 허전한 데가 있습니다. 이처럼 모범답안으로 주어진 행복의 길에서 나의 자리는 정말로 있는 것일까요? 이런 질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객관적 행복만큼 나의 길을 걷는다는 주관적 의미가 중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이 의미를 묻는 순간 우리는 ‘자기 진실성’ 또는 ‘진정한 나’라는 개념과 대면하게 됩니다.

지난 세기 가장 중요한 철학자들이었던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 누구보다 심오한 사유를 하였고, 그러기에 그들은 행복의 윤리학을 의미물음의 인간학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 하는 이들에겐 매우 귀중한 대화의 상대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들과 또 다른 몇몇 현대 철학자들의 생각에 귀를 기울여보려 합니다.

* 최대환 세례자 요한 - 의정부교구 신부. 정발산본당 주임으로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과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연재하는 동안 행복에 대한 독자들의 견해와 질문을 열린 마음으로 기다린다(theophile@catholic.or.kr).

[경향잡지, 2012년 5월호, 최대환 세례자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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