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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영성의 대가들: 떼이야르 드 샤르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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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12-09 ㅣ No.347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떼이야르 드 샤르댕 (1) 생애


떼이야르 드 샤르댕은 과학과 신앙을 종합하여 일원적인 세계관을 구성한 신학자였던 동시에 과학자였다. 그는 하느님께 성실히 봉사한 사제였고 동시에 지구 안에 감춰진 것을 밝히고자 한 지질학자였다. 그는 또한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찾고자 한 신비가였던 동시에 체험한 하느님의 현존을 선포한 선교사였다.
 
삐에르 떼이야르 드 샤르댕은 1881년 5월 1일 프랑스의 끌레르몽 훼랑드에 가까운 오르닉이란 마을에서 평범한 가정의 열 한 자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지질학에 조예 깊은 아버지한테 떼이야르는 어려서부터 형제들과 함께 돌, 식물, 동물 등에 관해 많이 듣고 배우면서 그에 대해 크게 관심을 기울였다. 그가 겨우 여섯 살쯤 되었을 때 집안의 비밀스런 구석에 쇠붙이나 함석 조각, 각종의 돌들을 적지 않게 모아 쌓아 둘 정도였던 것이다.

그가 10살 되던 해 리옹 근처의 몽그레의 노뜨르담 예수회 학교에 들어가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가 1899년 18세 되던 해 애스 관구의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1904년 예수회가 프랑스에서 추방당하게 디어 그는 져지의 샤넬 섬에서 철학과 신학을 계속 공부하였다. 신학과 우주의 생물들의 현상 사이에 있는 관련성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진 그는 암석학에 매력을 느끼게 디었고 그에 대해 열심히 연구하였다. 야외에 나갈 때엔 언제나 지질학자들의 도구인 작은 쇠망치와 확대경을 지참하였다.

1905년부터 1908년 에집트의 이스말리아에서 물리학과 화학을 가르쳤다. 중동에서 지난 이 몇 년은 그에게 평생 열정적으로 지구에 대해 연구하게 하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며 진화론에 큰 관심을 기울이게 하였다.

1908년부터 그는 수세쓰에서 출중한 과학자들과 함께 일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특히 암석이나 진흙 속에서 화석의 생명, 그 존재 연한 등을 연구하였다.

1911년 떼이야르는 사제 성품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계속하여 화석에 관한 연구에 사명의식을 갖고 그에 몰입하였다.

1912년 그는 프랑스에 도아가 빠리의 국립 역사 박물관에서 탁월한 과학자인 마르쌜랭 블래의 지도를 받으며 연구에 열중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위생병으로 군 복무를 하였는데, 그 전쟁 중 여러 곳에서 겪은 험난했던 체험은 그에게 오히려 자연과학적으로 많은 경험을 하게 하는 소중한 배움의 기회가 되게 하였다.

대전이 끝난 후 1919년 말에 38세의 떼이야르는 빠리로 돌아와 「포유류의 진화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획득했고 이어서 빠리 가톨릭 대학의 지질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떼이야르의 진화론적 인간관과 우주적 그리스도론, 과학적으로 추론된 하느님에 관한 사상을 예수회 장상들은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여 그를 해외 주재 연구라는 구실로 중국으로 파견하고자 하였다.

1923년 예수회원인 동시에 지질학자인 리슨트가 그를 몽고에 초청하였고 그는 그 곳에 가 고고학 연구 자료들을 발굴하게 디었는데 이것이 바로 그에게 있어서 아시아 탐험의 출발이었다.

1924년에 그는 화석 살자들을 가지고 빠리로 돌아가서 다시 교수직을 맡게 되었다. 그는 우주에 대한 견해를 정리하였으며 또한 전쟁 체험과 아시아의 광활한 공간의 체험을 그의 저서의 「하느님의 영역」의 초고에 요악하였다. 그 원고가 나돌기 시작하자 그의 진화에 대한 이론이 원죄 문제에 대하여 교리적으로 건전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비판이 일어났다. 이에 장상들은 그를 가톨릭 학술 연구소에서 떠나도록 결정했고 오로지 과학 문제에 대해서만 출판하도록 허락하였다.

1926년 그는 다시 극동 지방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는 중국 정부의 지질학 연구회와 다른 나라의 연구 단체들과 협력하면서 많은 것을 발굴하였다. 1926년부터 2년간 떼이야르는 몽고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주로 황하 강변에서 연구하며 머물게 되었다. 중국, 미국, 스웨덴 학자들의 요구에 따라 그는 극동 아시아에서의 화석 발굴에 책임을 지고 일하였다. 1928년 12월 떼이야르에 의해 훈련된 ㅣ젊은 중국인 발굴대는 북경에서 가까운 저우커우톈에서 북경원인(北京原人)의 유골을 발견하게 된다. 이 발견은 20세기 고생물학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로 꼽힐 만한 것이었다. 그 결과로 떼이야르는 중국의 지질학 관찰단의 과학 고문에 정식으로 추대되었다.

이름이 널리 알려지면서 그는 미국을 비롯하여 여러 나라의 대학에 초빙되어 특강을 하였으며 세계의 여러 정기 간행물에 동물학, 고생물학에 대한 발굴 및 연구 결과를 계속 발표하였다. 1934년부터 인간과 진화론에 대해 신학적인 해석을 한 그의 저술과 논문은 프랑스의 지성인들 사이에 선풍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1939년부터 그는 북경에서 구금상태에 있었는데 그 기간에 그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인간 현상」의 원고를 썼다.

1946년 빠리로 돌아 온 그는 인발리데 근방 예수회 수도원에서 6년간 지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주변엔 늘 수많은 지성인들가 학자들이 모여들었으며 거의 매일 집회, 강연, 대화, 토론 등이 이어 전개되었다.

1948년 그의 주저서인 「인간현상」은 로마 교황청에서 서적 검열 중 문제점들이 지적되면서 출판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원고는 수많은 독자들에게 등사본으로 읽혔으며 그들 중엔 적지 않은 사제들과 신학생들이 있었다. 1950년 프랑스의 자연과학 아카데미 협회는 떼이야르를 그 회원으로 선출하였다.

교회와 수도회의 장상들은 떼이야르의 천재적 재능과 굳은 신앙을 조금도 의심하진 않았으나 교회의 가르침보다 앞서가며 많은 이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며 물의를 빚는닥 판단하여 그를 어딘가 멀리 보내려고 궁리하였다. 그 때 마침 떼이야르는 뉴욕에 있는 인간학 연구 단체인 뷘나 그렌 재단의 초청을 받아 그곳으로 가게 되었다. 그 때가 1951년 그가 고희(70세)가 되던 해였다.

그는 틈틈이 북남미 일대의 많은 자연 과학 연구소들과 박물관들을 방문하였다. 1951년과 1953년에 이 노 학자는 다시 남 아프리카에 가서 발굴 작업을 하였다. 원시 최초 인류들의 기원이 그곳에서 이루어졌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54년 봄 그는 다시 빠리로 갔다. 그는 거기서 남 아프리카에 대하여 순수 자연과학적인 연구를 발표하였다. 그의 강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의 저항으로 그는 결국 강의 계획을 포기했고 즉시 뉴욕의 연구소로 돌아갔다.

1955년 4월 10일 부활 주일 저녁에 74세의 이 노인 학자 사제는 조용히 숨을 거두며 이 세상을 마감하였다. 그는 바로 한 달 전 프라읏에 있을 때 프랑스 의회의 환영식에서 자신이 부활 주일에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말한 바 잇었는데, 주님께서 일생동안 유난히 무거운 십자가를 지면서 그 분을 따른 그의 소원을 기꺼이 들어주신 것이 아닐까. [가톨릭신문, 2001년 2월 11일,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본당 주임)]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떼이야르 드 샤르댕 (2) 영성


떼이야르는 자신이 연구한 과학적 결론과 그리스도교 계시의 자료를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하면서 「그리스도인의 현세참여」라는 통합적 영성을 수립하였다. 그의 사상은 다음과 같이 세 단계로 나뉠 수 잇는데 그것들은 동시에 발전하면서 통일된 세계관을 형성한다. 하나는 과학적 진화 현상론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론이며 셋째는 역동적 그리스도교 영성으로서 현세 참여와 정복의 적극성이다.


1. 그리스도론에 기초한 창조론, 진화론 및 그리스도론

떼이야르의 창조론은 그의 영성을 전개하는 데 있어 결정적이고 독특한 역할을 한다. 그레 의하면 창조란 하느님의 계속적인 창조 활동이며 우주의 점차적인 진화과정이다. 따라서 그의 창조론은 전통적인 창조론에는 진화적, 역동적 개념이 개입되지 못했고 「인간의 적극적 참여」란 개념이 포함될 수 없었다. 또한 스콜라 신학의 창조론에는 그리스도와 창조의 관계는 거의 언급되지 않으며 창조는 강생 및 구속과 관련된 것으로 고려되고 있지 않다.

떼이야르는 요한 사가와 특히 바오로 사도의 그리스도론에 바탕을 두고 창조론을 수립한다. 그리스도는 창조의 중심과 머리이며 창조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만물의 통일 과정이다. 「그리스도 충만」을 향해 진화하고 그분의 초자연적 영향 속에 잠입해 있는 우주는 오직 오메가이며 완성자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 존재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창조는 그리스도의 강생 및 구속과 밀접히 결부되어 있고 또한 인간의 적극적 참여를 요구한다.

창조가 만물의 통일 과정이라면 진화는 하느님이 전 우주를 자신과 합일시키는데 사용하는 유일 무이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진화는 창조의 표현이고 창조는 전우주의 충만을 향한 진화 과정이다. 떼이야르에게 창조, 강생 그리고 구속은 하느님의 단일한 세계구원 계획에 나타난 세 모습인 것이다.


2. 현세 참여 및 정복의 영성

1) 그리스도인의 역동적인 새로운 영성

그리스도인은 현세의 진보를 위해 부지런히 일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점차적으로 더욱 충만히 태어나시게 해야한다. 그리스도인은 인류의 의식을 키워가는 인간의 노력을 존중하고 증진시키도록 힘써야 한다. 과학적인 진리 탐구와 사회 구조의 발전을 위해 인간의 에너지를 충분히 개발하고 이용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 바로 새로운 형태의 윤리이며 영성이다.

이러한 영성은 인간의 자연적이고 능동적인 활력을 억제했던 전통적인 것과 달리 언제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개인적 및 사회적 차원에서 각자가 지닌 모든 힘을 활성화하고 극히 작은 가능성이나 잠재력마저 활용하는 자세이다. 이같이 역동적 차원에서 볼 때 하느님 섬김은 이전의 의미와 달라진다. 전통적으로 하느님 섬김이란 사물을 그분과 관련시켜 그분을 위해서 사물을 희생하는 것을 의미했으나 그에게 하느님 섬김이란 현세를 완성하기 위한 적극적 활동과 지적 탐구를 통해 자신을 창조 행위에 관련시키며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을 뜻한다.

2) 그리스도인의 현세 참여(집착)와 현세 초탈

세계 완성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헌신 활동은 두 가지 과정으로 간추릴 수 있다. 하나는 현세 참여(집착)이고 다른 하나는 현세 초탈이다. 이 둘은 분리하거나 대당시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현세적 직무에 전적으로 매진할 때 자아마저 망각하고 현세를 초탈한다. 그것은 더 큰 목적을 가지고 궁극적으로 하느님만을 믿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이러한 초탈은 전통적 의미의 토찰과는 크게 다르다. 전통적 영성에 의하면 초탈은 흔히 현세 도피 또는 전적인 관상 생활의 성격을 지닌다. 이러한 영성에 의한 현세 생활은 영원한 삶에 비교되면서 거의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지고 그로 인한 결과는 현세사에 관심을 잃게 한다. 그러나 떼이야르가 의도하는 초탈이란 현세의 과업에 충실히 매진하고 극기와 자아 포기를 통해 하느님께 도달하는 길이 된다. 그리스도인은 금욕적인 의미에서 세상을 싫어하지 아니하고 복음적인 의미에서 복음과 대당되는 세계를 싫어한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향해 전진하는 세계를 사랑하고 그것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 이 같이 자신을 바칠 때 그는 자신을 망각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적 자아 포기이며 초탈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세계 완성에 이바지하는 현세 참여는 그 자체로 힘들고 고통그러운 것이다.

여기에 계속적인 희생과 자아포기, 이기적인 나태 극복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떼이야르가 주장하는 영성은 현세 참여와 동시에 현세 초탈, 자아 발전과 동시에 자아 포기의 영성이다. 이러한 영성은 현세 도피가 아니라 적극적 활동을 통해 그것을 초탈하고, 정복하면서 하느님께로 도달하는 그리스도인의 역동적인 영적 자세이다.

3) 십자가의 영성

인간은 누구나 생활 안에서 수많은 악들과 대면하게 된다. 악들은 인생의 진로를 방해하고 때론 좌절시키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실패, 불상사, 육체적 정신적 결함, 질병, 늙음, 죽음 등이다. 이러한 악들은 존재의 모든 영역에 나타나고 있다. 악은 무기물에서는 분해로, 생물에게는 고통 및 죽으믜 형태로 그리고 인간 의식 영역에서는 죄로 나타난다. 무엇이든지 더 나은 상태, 더 높은 단계로 발전 내기 성장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즉 고통과 희생이 따라야 한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이 고통스럽고 힘겨운 것은 그것이 창조의 모든 부분의 짐을 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주의 완성자시기 때문에 자기 자신 안에서 만물을 통일시키기 위해 많은 고통을 겪으셔야 한다.

이러한 십자가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구속활동의 두 양상과 결부시켜서 두 가지 측면으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소극적인 측면으로 죄에 대한 보상과 속죄이고, 다른 하나는 적극적인 측면인 세계의 상승과 복귀이다. 전자는 전통적 십자가의 신학 및 영성에서 많이 부각된 것으로 고통, 희생, 속죄 등이 강조되었다. 이 영성을 수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정을 일으키도록 기여했지만 한편 세상사에 소극적이도록 영향을 미쳤다. 한편 떼이야르는 적극적 측면의 십자가에 대해 강조한다. 그도 십자가에서 속죄 행위를 간과하진 않지만 무엇보다 그리스도께 우주를 상승시키는 역동적인 능력과 정복을 십자가의 상징으로 본다. 그에게 십자가의 결정적 의미는 우선 창조이며 그것을 위해 불가피한 악을 거스려 싸우며 치르야 하는 대가이다.

4) 그리스도인의 성화

떼이야르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성화 혹은 완성은 그리스도의 우주 성화 활동에 협력하고 이에 따라 그분과 합일하는 데 있다. 그리스도는 진화의 궁극 목표로서 전 우주에 에너지를 발산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미치고 전 우주를 자신에게 이끌어 오는 진화의 제일 원동자이다. 그분으로부터 발산되는 이 에너지, 우주적 힘은 「사랑이다」. 사랑은 인격 상호간의 일치력 만이 아니라 진화의 보편 에너지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사랑엔 새롭고 더욱 폭넓은 의미가 담겨있다. 타인에 대한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거나 자선을 베푸는 것만이 아니며 이웃과 전 세계의 행복 및 발전을 위해 능동적으로 헌신하는 것이다. 현세의 진보를 위한 노력과 헌신은 그리스도 오메가(완성)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특별하고도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가장 능동적이고 완전한 진화의 동인이 되는 것이다. 사랑은 이같이 역동적인 힘이므로 그리스도께로 지향하고 그리스고께 대한 사랑으로 통합된다. 그리스도인 생활에 그리스도와 합일을 이루어 주는 사랑 외에 또 다른 기본적 덕들이 요청되는데 그것은 순결, 신앙 그리고 충실성이다. 이러한 덕들은 그리스도인 생활을 하느님께 끊임없이 집중시키는 데 특별한 효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가톨릭신문, 2001년 2월 18일,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본당 주임)]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떼이야르 드 샤르댕 (3) 영성사 안에서의 위치


1) 떼이야르는 당시 교회의 종말적 영성의 흐름에 육화(강생)적 영성을 보완함으로써 조화와 균형의 영성을 시사하였다.

종말적 영성은 종말 또는 주님의 재림을 잘 맞이하기 위하여 일상에서 준비하며 대기하는 삶이다. 이 영성은 인간의 본성이 원죄의 결과로 인해 하느님의 은총과 대립을 이루게 되었음을 전제로 하여 긴장 중에 현세적 삶에서 초탈하며 관상, 고행, 극기 등을 실천하도록 강조한다. 한편 육화적 영성은 그리스도의 육화의 신비로 구원되고 성화된 세계에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하려는 자세의 삶이다.

이 영성은 현세적 사물과 인간의 삶에 대한 긍정적 관점에서 출발하여 자연이나 인간 본성 능력이 초자연적 질서에 의하여 간화되고 거양되어 은총의 힘과 조화있게 합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생활은 종말적 영성이나 육화적 영성 중의 택일이 아니며 양 측면의 알맞은 조화와 균형의 모습이다.

떼이야르는 당시 교회의 생활에 드리워진 짙은 종말적 및 수직적 영성의 흐름에 육화적 및 수평적 영성이 보완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가 강조한 영성은 현세 참여와 현세 초탈, 자아 발전과 자아 포기의 조화의 영성이다. 이러한 영성은 현세 도피가 아니라 적극적 활동을 통해서 초탈하고 현세 정복을 통해 하느님께 도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이다. 육화 영성의 보완에 대한 그의 적극적 강조는 균형있는 영성을 고려했음에도 불구하고 종말적 측면이 미흡하도록 약화시켰다고 평가된다.

2) 떼이야르는 신학자인 동시에 과학자로서 진화론을 신학에 도입하고 과학과 종교를 통합하여 일원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세계관을 구성하였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현대 사상의 다양한 분야에 큰 공헌을 하였다. 무엇보다 종교와 과학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고 상화 관련중에 보완되어야 한다는 것을 새삼 일때워 주었다. 실로 과학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우주를 탐구하고 자연 법칙을 발견하여 인류의 복지에 응용해야 하며 종교는 과학적 업적을 인정하고 또한 과학의 진로와 목표를 제시해야 한다. 과학은 자연 현상의 일부분만을 탐구하기 때문에 우주 전체의 근원 문제나 인간 실존의 근본 문제에 대해선 답을 줄 수 없다.

그러한 문제는 종교의 영역에 속한다. 과학이 만일 자기 본연의 사명인 「행복한 세계 건설과 인류의 복지」에 전적으로 기여하지 않고 인류의 비극을 초래할 경우 종교는 과학의 횡포를 견제하고 그 본래의 사명으로 돌려놓기 위해 최선을 다 해야한다. 한편 종교는 과학의 직분과 능력을 충분히 이해하고 과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야 한다. 과학에 대한 경시나 무지는 결국 종교가 감당할 과학시대의 선교 사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3) 떼이야르는 낙관적 인간관 및 세계관을 제시하였다.

그의 인간학이나 영성이 이룩한 주요 공헌은 물질, 우주, 인간안에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 포함되어 있는 낙관적 의미와 희망을 발견하고 발전시켰다는 데 있다.

실존주의자들이 제기했던 바와 같이 생명과 죽음에 대한 비극적이고 부조리한 감정이 지배적이던 당시 전쟁 후의 상황에서 떼이야르의 인간적 낙관론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공기나 싱그러운 향수 같은 역할을 하며 참신한 희망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사람들에게 인간 실존을 이해하도록 하고 그들로 하여금 의망을 가지고 살며 일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해 준 것이다.

4) 떼이야르는 20세기의 그리스도교 신학의 여러 영역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가장 큰 기여점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세상에서 전개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역할과 키워야 할 영성을 자신의 생활 안에서 조심스럽게 전개해 나간 것이다. 그의 저서들 안에서 전개된 그의 영성은 그리 체계적인 것이 못되지만 그가 자신의 영적 깨달음과 삶을 나누고자 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그의 저서들은 그의 삶과 그의 영성의 반추이다. 그는 일생동안 지구와 세상 안에서 절대자를 찾았고 그분의 감추어진 뜻과 섭리를 알아내고자 하였다. 하느님 추구와 지구에 대한 그의 사랑은 사제인 동시에 지질학자로서의 성소안에서 함께 발전되어 나갔다.

그는 실로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찾아내고자 하던 신비가였다. 그는 자신이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전망에 대해 다른 이들이 이해 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열정적이었다.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밝혀내기 위해 활기차고 집요하게 노력한 선교사였으며 사도였다.

5) 떼이야르의 사상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저서들은 그의 죽음(1955년) 후에 출판되었다. 그의 책들은 곧 수많은 문화권의 언어들로 번역되었고 읽혔으며 그의 사상은 헤아릴 수 없는 잡지, 논문집, 책 등에서 주석되고 평가되었다.

그의 사상과 영성의 가치가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확인된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회기 중 그의 사상은 공의회 교부들에게 소개되었고 또한 자주 언급되었다. 떼이야르의 사상으로부터 가장 크게 영향받은 공의회 문헌은 「현대 세계의 사목헌장」이다. 인간관과 그리스도론에 대한 사목 헌장의 가르침은 여러곳에서 떼이야르의 주장과 유사병행구들을 이루고 있음을 명백히 발견할 수 있다.

6) 떼이야르는 20세기 쇄신적 영성에 있어 선각자였다.

떼이야르는 선각자로서 논문과 글들을 통해 그는 꾸준히 새로운 길, 새로운 지평을 열면서 전진해 나갔다. 한편 선구적 사상 때문에 그는 일생 동안 장상들로부터 의혹과 오해를 받고 반대에 부닥치며 많은 제재와 불이익을 당했다. 그러한 것들이 그를 매우 마음 아프게 했고 고뇌하도록 했지만 그는 겸손되이 순명하면서 극복해 나갔고 고독한 선구자의 길을 걷는 데 항구했다.

그의 사상은 그가 살아있던 동안엔 이설적인 것처럼 위험시 되었고 교회로부터 그의 원고들은 출판 금지되었으나 사후 그의 저서와 사상은 그리스도교 안팎에서 선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것은 현대 과학에서 지적, 윤리적 위기를 발견하고 인류의 미래에 대한 불안과 인류 멸망에 대한 공포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떼이야르가 자신의 과학적 진화론과 그리스도론에서 인류의 미래를 멀리까지 낙관적으로 예시했기 때문이라 하겠다. 이런 점으로 보아 그는 현대의 사상가와 신학자들 가운데 인류의 미래를 가장 장엄하고 희망차게 열어 보인 사상가 및 영성가라 할 수 있다.

7) 그의 인간관과 영성은 한편 아쉬운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

그의 신학 이론과 영성은 완벽하지 못하고 적지 않은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 죄, 인간적 소외, 회심, 하느님의 자비의 필요성 등에 과한 주제는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의 창조론은 「무로부터의 창조」를 믿는 그리스도인의 절대 신앙을 약화시킬 위험성을 내포한다. 육화와 부활의 교의를 강조하다 보니 십자가와 구원의 교의가 상대적으로 덜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참된 행복」(마태 5, 3~12 참조)에 대한 것은 그의 저서들 안에서 미미하게 다뤄지고 있으며 부활하신 그리스도, 총괄자로서의 그리스도가 강하게 부각되고 있다. 그리고 성서 말씀의 언급이 적은 편이다. [가톨릭신문, 2001년 2월 25일,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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