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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선교 베네딕도회의 한국 진출과 선교 활동: 일제시대 한국과 만주에서의 활동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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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3-12 ㅣ No.663

‘선교 베네딕도회’의 한국 진출과 선교 활동


- 일제시대 한국과 만주에서의 활동을 중심으로 -

 

 

1. 서론

2. 성 오틸리엔 연합회의 창립과 초기 선교 사상
3. 선교 베네딕도회의 한국 진출의 근원적 동기
4. 서울 수도원과 덕원 수도원, 그리고 연길 수도원에서의 선교 활동
5. 결론



1. 서론

한국 교회 최초의 남자 수도회로서 1909년 2월 25일 한국에 진출한 ‘선교 베네딕도회’1)는 곧 한국 진출 100주년을 맞게 된다. 본 회의 100여 년의 한국 선교 역사는 4개의 아빠스좌 수도원(Abtei)을 중심으로 펼쳐졌다(서울 수도원 1909~1927 / 덕원 수도원 1927~1949 / 연길 수도원 1922~1946 / 왜관 수도원 1952~현재). 이 가운데 왜관 수도원은 1952년 왜관에 정착하여 1964년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하였다. 오늘날까지 그곳에서 활동을 계속하고 있지만 왜관 수도원의 선교 활동 역사는 본 논문에서 다루지 않겠다.

근년까지 선교 베네딕도회의 한국 선교 역사에 관한 수준 높은 논문과 저술들이 국내외에서 다수 발표되었다.2) 본 논문의 목적은 기존 연구들을 토대로 선교 베네딕도회가 서울 수도원과 덕원 수도원, 그리고 연길 수도원을 중심으로 펼친 선교 활동의 방법과 특징을 밝히려는 데 있다. 이러한 목표 설정은 선교 베네딕도회를 선교 단체로 보기보다는 수도회로 인식하는 필자의 관점에 무게 중심을 두고, 그들이 수행한 베네딕도회적 선교 방법의 독창성을 찾아보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이러한 의도로 제시하는 세 가지 주요 논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성 오틸리엔 수도원과 성 오틸리엔 연합회의 창립 역사에 대한 고찰이다. 아울러 창립자인 안드레아스 암라인(Andreas Amrhein) 신부의 선교 사상과, 한국 진출 당시 최고 장상이었던 성 오틸리엔 수도원의 초대 수석 아빠스인 노르베르트 베버(Norbert Weber)의 선교 이념도 고려할 것이다.

둘째, 선교 베네딕도회의 한국 진출의 동기가 중요하다. 진출 당시 한국의 사회-정치적 상황과 교회 내적인 상황, 그리고 성 오틸리엔 연합회의 진출 당시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다. 한국 진출의 근원적 동기를 밝히는 것은 선교 베네딕도회의 한국 선교의 특징을 규명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셋째, 선교 활동의 방법과 특징의 분석이다. 선교 활동은 선교 베네딕도회의 선교 사상과 이념에 기초를 둔 것으로 수도 생활과 교육 활동과 전례 활동 등이다. 이는 선교 베네딕도회의 초기 40년 동안의 선교 활동에 나타난 베네딕도회적 특징을 밝히는 중심 내용이 될 것이다.


2. 성 오틸리엔 연합회의 창립과 초기 선교 사상

1) 성 오틸리엔 연합회의 창립 과정


성 오틸리엔 수도원 창립자 안드레아스 암라인(1844~1927) 신부3)는 1844년 2월 4일, 스위스 루체른 주 베로뮌스터(Beromunster) 인근 군쯔빌(Gunzwil)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후 루체른에서 김나지움을 다녔다. 1867년 성령강림 이후 사제직에 뜻을 두고, 루체른 대학교와 튀빙겐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1870년 성 베네딕도회 보이론(Beuron) 수도원에 입회하여, 1871년 12월 25일 ‘안드레아스’라는 수도명으로 서원한 후 1872년 7월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암라인 신부는 이미 보이론 수도원에 입회하기 전에 자신이 오랫동안 열망해 왔던 선교 열망에 대해서 수련장과 이야기를 한 바 있었다. 그는 수도원에 입회하여 보이론의 수도승으로서 살면서도 끊임없이 선교 열망이 점점 커져가 보이론의 관상 생활에 깊이 침잠할 수 없었다. 보이론 수도원의 마오로 볼터(Maurus Wolter)4) 아빠스는 암라인 신부가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고 온전히 수도 생활에 적응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5) 그러나 암라인 신부는 조금도 뜻을 굽히지 않은 채 자신의 선교 열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볼터 아빠스에게 지속적으로 청했다. 이때 암라인 신부는 수도 소명과 선교 소명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암라인 신부의 선교 열망은 그가 사제 서품을 받은 후 거의 10년 동안 자신의 아빠스의 반대를 받았으나, 마침내 아빠스의 허락을 받아 1882년 2월, 런던 근처 밀힐(Mill Hill)6)에 있는 성 요셉 선교원(Missionshaus)을 방문하였다. 암라인 신부는 3월 16일부터 10월 28일까지 그곳에 머물며 밀힐의 창립자인 보건 주교를 만났다. 이때 그는 사제들을 도우며 교사로 활동할 ‘평신도 선교사를 위한 신학원’(Institut fur Laienmissionare)의 설립을 생각했다.

이어 암라인 신부는 1883년 3월에서 11월까지 네델란드 슈타일(Steyl)에 머물었다. 그곳의 원장인 아놀드 얀센(Arnold Janssen)7) 신부와의 만남으로 암라인 신부의 계획은 진일보하게 되었다. 그는 이제 ‘평신도 선교사를 위한 신학원’ 설립 대신에 하나의 ‘성 베네딕도회 연합회’의 창립을 고려하게 되었다. 즉, 선교지에 평수사들을 충분히 가진 선교 수도원들을 설립하여 선교 활동의 중심지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때 얀센 신부가 보이론의 마오로 아빠스8)에게 보낸 추천장을 근거로 마침내 암라인 신부는 1883년 8월 30일, 포교성성에 소속되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는 수도 소명과 선교 소명 사이의 통합을 탐색하며 자신의 계획을 진척시켜 나갔다.

그 후 암라인 신부는 독일 레겐스부르크 교구의 게오르그 뎅글러(Georg Dengler) 주교 대리와 만났다.9) 뎅글러 주교 대리는 교구 내 라이헨바흐라는 곳에 버려진 옛 베네딕도회 수도원 건물을 암라인 신부에게 소개해 주었고, 암라인 신부는 계약을 체결하여 그 건물을 양도받았다. 마침내 암라인 신부는 1883년 12월 19일에 비공식적이지만 라이헨바흐에서 선교원을 출범시켰다.

그는 이제 국가와 교회의 인가를 받는 것이 필요하였다. 암라인 신부가 1884년 1월 6일 자신의 청원서를 레겐스부르크의 교구 사무국에 보내게 되었을 때, 교구장 세네스트레이(Ignaz von Senestrey, 1818~1906) 주교는 청원인에게 인증서를 수여하는데 사도좌의 승인이 필요하다고 요구했다.10) 암라인 신부는 즉시 로마로 가서 자신의 청원서를 포교성성에 제출했다. 청원서에는 자신의 선교 계획 발전 과정에 대해서 보고하면서, 자신의 수도 서원 면제 청원을 하였다. 이어서 이미 사제직 지원자들과 수사 지원자들이 자신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하며, 성소자들을 합당하게 교육을 시킨 후에 선교지에 파견하여 베네딕도회적인 방법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허가해 줄 것을 청했다. 청원서 끝에는 성 베네딕도의 규칙을 기초로 해서 작성된 지원자 교육 계획을 밝혔다. 마침내 교황 레오 13세는 1984년 6월 29일에 장차 성 베네딕도회 총연합 소속 13번째 연합회로 발전하게 될, 레이헨바흐의 선교원(Missionshaus)을 인가하였다. 이 날이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연합회의 공식 창립일로 오늘날까지 기념하고 있다.

암라인 신부는 국가로부터 인가를 받는 일도 동시에 추진하였다. 그는 당시 ‘문화 투쟁’ 시기의 반수도원적인 법령하의 독일에서 수도원을 설립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수도원과 다른 형태의 것을 숙고해야 했다. 1883년 12월 4일, 바이에른 주 문화부 장관 요한네스 루츠(Johannes Lutz)11) 박사를 직접 찾아가, 교사 양성소를 포함한 선교 신학교의 인가에 대한 청원서와〈외방 선교를 위한 독일의 신학교〉라는 제목이 붙여진 계획서를 제출했다. 국가의 인가에 직면하여 암라인 신부는 우선 수도원적인 형태 내지는 그와 유사한 모든 흔적을 피하여야 했다. 12월 7일, 암라인 신부는 장관으로부터 하나의 답변을 받았다. 보다 상세한 계획을 서술하고 정관을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암라인 신부는 요청받은 상세한 계획서와 정관을 완성하여 1884년 1월 1일, 문화부 장관에게 제출했다. 그러나 문화부로부터는 오랫동안 아무런 답도 오지 않았다. 암라인 신부는 1884년 12월 18일, 문화부에 제출한 그의 청원서를 새롭게 갱신하고 그것을 수정하였다. 그는 “신학교”(Seminar)라는 명칭을 포기했고, “지금도 이후에도 수도원은 아닐 것이다”12)라는 것을 강조했다. 청원서의 제출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경되어 ‘아프리카 내륙을 위한 독일 가톨릭 선교회’(Katholische Deutsche Missionsgesellschaft fur Inner-Africa)라는 명칭 하에 하나의 협회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1885년 4월 11일, 바이에른 정부는 마침내 이 설립 계획을 승인하였다. 여기에는 독일의 동아프리카 식민지 정책이 긍정적 역할을 하였다. 마침내 라이헨바흐의 선교원은 교회와 국가의 승인 절차를 완료하고 공식적으로 문을 열게 되었다.

2) 안드레아스 암라인 신부의 일곱 가지 기본 사상13)

교황 레오 13세가 1884년 6월 29일에 인준한 성 오틸리엔 연합회 회헌의 기초가 된, 암라인 신부의 일곱 가지 기본 사상은 그가 신학 공부를 시작한 1867년 이후 17년 동안의 숙고와 연구로 이루어진 결실이다. 기나긴 시간 동안 축적된 창립자의 선교 계획은 종교사, 수도회사, 그리고 宣敎史 등에 관한 연구와 여러 국가에서 이루어졌던 그리스도교 신앙 전파에 관한 서면 보고의 섭렵을 통해서 형성되었다. 최초의 동기는 그가 1868년에 튀빙겐 대학교에서 신학생으로서 들었던 카알 요제프 헤펠레(Karl Josef von Hefele)14) 교수의 교회사 강의였다. 그가 영감을 받은 강의 내용은 수도회와 수도회 창립자들 특히, 성 베네딕도회 수도승들의 중세 유럽의 그리스도교화에 관한 대목이었다. 그의 기본 사상은 자신의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소명 의식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가 베네딕도 회원의 일원으로서 시대사적인 요구와 선교지 국가로부터의 요청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또한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선교 계획의 실현을 위해서 수도 성소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틀림없이 긍정적인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일곱 가지 기본 선교 사상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 각각의 사상을 아주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기본 사상(5쪽 이하)은 선교의 동기와 목적이 나타나 있다. 전 세계 인구 중 절반 이상이 비신자인 현실에 대한 인식과 그 인식이 베네딕도회의 오랜 선교 전통의 부활 가능성을 감지하고, 유럽(독일)에 선교 베네딕도회 수도원들을 설립하여 그 중 하나를 모원으로 삼아 새로운 선교 베네딕도회 연합회 창립을 목적으로 한다. 두 번째 기본 사상(7쪽 이하)은 전통적이고 성 베네딕도 규칙에 충실한 베네딕도회 선교 방식의 근본 원칙을 제시한다. 선교 지역에서 수도원 설립이 최우선의 과제이며, 수도원은 선교 지역의 은총의 중심지이자 복음화의 원천이며 선교사들의 안식처이다. 그리하여 선교 소명과 수도 소명이라는 이 이중 소명은 상호 보완하며 승화 작용을 한다. 세 번째 기본 사상(14쪽 이하)은 수도원의 인원에 대해서 다룬다. 수도원의 인적 구성은 서원자(성직 수사와 평수사)와 수련자(성직 수사 지망 수련자와 평수사 수련자)와 수도원에서 공부하는 학생(신학생과 수공업을 공부하는 학생)으로 구성된다. 성소 식별의 신중성과 수도원 내의 교육, 그리고 선교 활동의 어려움을 이겨낼 건강도 식별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네 번째 기본 사상(17쪽 이하)은 선교 활동의 협력자로서 평수사 활동의 유용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선교 지역에서 성직 수사들이 할 수 없는 고유한 역할이 있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 성직 수사와 함께 평수사들을 파견하라고 지적한다. 다섯 번째 기본 사상(19쪽 이하)은 성직 수사와 평수사와의 관계를 다룬다.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며 신분의 차별 없이 평등하게 형제로서 사는 것이 성 베네딕도회의 수도 규칙의 정신이다. 여섯 번째 기본 사상(21쪽 이하)은 선교 활동의 협력자로서 선교 수녀들의 활동의 유용성을 언급한다. 효율적인 여성 선교를 위해서 선교 수녀들이 필요하다. 수녀원은 수도원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위치해야 하며, 자기 회의 규율에 따라 총원장 수녀의 지도하에 살 것이다. 일곱 번째 기본 사상(22쪽 이하)은 종합의 원칙으로 이 일곱 가지 사상의 권위에 대해서 논한다. 이 기본 사상은 취소할 수 없는 최소한의 토대이다. 따라서 청원서의 형태로 포교성성에 제출되어 심의 후 사도좌의 인준을 받게 되면, 연합회의 총회나 최고 입법 기관도 삭제 혹은 변경할 수 없고, 이를 무효화하는 법을 회헌에 넣을 수 없다.

3) 노르베르트 베버 아빠스의 선교 이념

교회의 공식적인 승인 후에도, 라이헨바흐의 선교원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암라인 신부와 레겐스부르크 교구장인 세네스트레이 주교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주교는 암라인 신부와 그의 계획들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15) 그 주교는 라이헨바흐 선교원의 지원자들에게 서품을 줄 용의도 없었다. 암라인 신부는 레겐스부르크 교구를 벗어난 지역에서 확고한 기반을 찾아야만 했다. 암라인 신부는 아우구스부르크 교구장 방그라시우스 폰 딩켈(Pankratius von Denkel) 주교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1886년 11월 엠밍(Emming)16), 즉 지금의 성 오틸리엔 수도원의 토지를 매입하였다. 그곳에는 맹인들의 주보인 성녀 오틸리아 순례 경당이 있었는데, 이런 연유로 성 오틸리엔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이때부터 암라인 신부는 자신의 주 거주지를 엠밍으로 옮겼다. 그는 그곳에서부터 공동체를 이끌었고, 엠밍-성 오틸리엔의 개조와 신축 활동을 주재했다.

마침내 독일 정부의 요청과 포교성성의 선교지 배정17)으로 신부 1명, 수사 9명, 수녀 4명으로 구성된 첫 선교 파견 그룹이 1887년 11월 11일 성 오틸리엔을 떠나 로마로 가서 서원을 하였다. 1888년 1월 말 동아프리카 독일령에 도착하여 항구 도시 다레스살라암(Dar-es-Salaam)에서 내륙으로 20㎞ 정도 지점에 수도원을 짓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곳을 푸구(Pugu)라고 불렀다. 푸구에서의 생활은 성 오틸리엔과 마찬가지로 아주 엄격하였다. 반년 만에 육체적 피로와 열대병으로 수사 1명과 수녀 1명이 죽었고, 다른 수녀들은 독일로 돌아가야만 했다. 1889년 1월 13일 아랍인들의 지도자인 부쉬리(Bushiri)가 독일 식민지 정부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부쉬리의 공격 대원들은 푸구를 습격하여 수사 2명과 수녀 1명을 사살하였고, 푸구 수도원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암라인 신부는 큰 충격을 받고 상황 파악을 위해 생존자들을 모두 귀국시켰다. 첫 계획은 불과 14개월 만에 불행하게 끝나고 말았다. 이 사건이 신문에 보도되자 성 오틸리엔은 더욱 유명해져 많은 지원자들이 모여들었다. 1889년 가을 암라인 신부는 보니파츠 플레슈츠(Bonifaz Fleschutz) 신부의 지도로 선발대를 잔지바에 파견하였다. 1890년 6월 9명의 수녀와 5명의 수사, 그리고 1명의 신부로 구성된 본대를 파견하였다. 그들은 다레스살라암에 수도원을 짓기 시작하였다. 1891년 1월 29일 보니파츠 신부가 흑수열병으로 29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반년 후에는 2명의 수사가 죽었으며, 선교사의 30~50%가 말라리아나 흑수열병을 앓고 있었다. 1891년 10월 21일 24세였던 프란치스 마이어(Francis Mayr) 신부가 사망했을 때 전 지목구 안에 3개월 전에 도착한 사베리오 바우만(Xavier Baumann) 신부 한 명밖에 없었다. 극심한 사제 부족 상황에서도 암라인 신부는 본 선교지에서 활동을 원하는 교구 신부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카시안 스피스(Cassian Spiss, 1866~1905) 신부가 1893년에, 마오로 하르트만(Maurus Hartmann, 1865~1905) 신부와 바실 페르스틀(Basil Ferstl) 신부가 1894년에 동아프리카에 도착했을 때는 선교지의 상황도 많이 개선되었다.18)

한편, 1896년 1월 4일 암라인 신부가 총장직을 사임하면서, 성 오틸리엔은 영적으로, 행정적으로 공백 상태가 되었다. 이때 성 오틸리엔은 독일 주교회의 산하의 한 기관으로 편입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포교성성은 보이론 연합회 소속의 한 아빠스가 성 오틸리엔을 얼마동안 도와주도록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896년 11월 30일 보이론 연합회 소속의 오스트리아 세카우 수도원의 일데폰스 쇼버(Idefons Schober, 1849~1918) 아빠스가 성 오틸리엔 수도원의 제2대 총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보이론 총아빠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이만한 업적과 거대한 건물과 훌륭한 작업 시설들을 우리 베네딕도회가 외부에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19) 쇼버 아빠스는 1902년 6월 28일 성 오틸리엔 수도원을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시키기까지 헌신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큰 은인이다. 1904년 11월 22일 성 오틸리엔 수도원은 성 오틸리엔 연합회로 세계 베네딕도 연합(Confoederatio Ordinis S. Benedicti)에 열세 번째 연합회로 가입하였다. 이로써 창립자 암라인 신부가 그토록 오랫동안 염원한 새로운 성 베네딕도회 연합회가 초기에 선교원으로 출범한 지 20년 후에 탄생하게 되었다.

1902년 12월 18일 초대 아빠스 선거에서 당시 부원장(Subprior)이었던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가 성 오틸리엔 수도원의 초대 아빠스로 선출되었다. 그는 1895년에 아우구스부르크 교구 소속의 새신부로 성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였고, 1896년 11월 1일에 유기 서원을 했다. 1903년 2월, 그는 아우그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 폰 링(Maximilian von Lingg, 1842~1930) 주교의 주례로 아빠스 축복식을 가졌다. 베버 아빠스는 이제 성 오틸리엔 수도원의 최고 장상이자, 1887년 이후 동아프리카에서 시작된 오틸리엔의 선교사들과 선교 활동을 책임진 총장이기도 했다.

그는 《온 세상으로 나가라》(Euntes in mundum universum)20)라는 제목으로 아프리카 선교 혁신 프로그램을 집필하였는데, 중요 이념들은 다음과 같다.

① 그동안의 선교 활동에 대한 회고와 의문이 저술 동기이다. 베버 아빠스는 아프리카 선교 지역을 시찰하기 위해 1905년 동아프리카 선교지를 시찰하던 중에 그해 8월 중순에 일어난 아프리카인들의 민중 폭동(Maji-Maji-Aufstand)21)을 직접 목격한 후 2년간 숙고하여 작성하였다. 유감스럽게도 그동안의 선교 활동이 베네딕도회의 전통과 원칙에서 벗어나 있었음을 지적하며 ‘수도승 선교사’라는 신원 의식 부족으로 수도원 중심의 활동에서 이탈하여 개별 본당을 세우는 것으로 활동 방향이 기운 점을 냉철하게 비판하였다. 이런 냉혹한 반성이 새로운 시작의 동인이 되었다.

② 선교지의 원주민들을 위한 종합 사회 개발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의료 활동, 기아 구제, 의류 분배와 같은 전통적인 사회 복지 사업으로는 부족하고, 교육 사업도 심각하게 표면에만 머물러 있다고 비판한다. 오직 경제적인 소생을 이뤄낼 수 있는 포괄적인 사회적 개선 활동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노동자들에게 쏟아 붓거나 위에서 명령해서 되는 일이 아니며, 오직 그들과 함께 삶을 나누며 모든 힘을 그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개발 활동에 집중할 때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22)

③ 경제적인 사고를 일깨우는 노동 교육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선교지의 국민들이 식민 상업주의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며, 청소년 교육에 있어 구원의 진리와 함께 노동 교육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소년들에게 가축 사육과 우유의 활용 방법, 경작, 과수 재배 등을 가르치고, 소녀들에게 원예와 작은 가축 사육과 자립을 위한 가사 노동을 가르치며, 그밖에 산수, 쓰기, 읽기, 종교 등을 가르쳐야 한다. 학교에 스와일리어를 도입하여 가르치게 한 것은 스와일리어가 오늘날 탄자니아의 공용어로 채택된 계기가 되었다. 요약하면 ‘농업 분야에 중점을 둔 본당 중심의 노동 교육’을 강조하고 있다.23)

④ 성인들을 위한 노동 교육에 있어 농업의 절대적 역할을 지적하고 있다. 성인들에게도 본당 혹은 샴바(Shamba : 경작지)에서 농산물 생산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그 목표는 실행 가능한 농업 구조의 개발이었다. 토지 개간, 농기구 개발, 낙농업을 겨냥한 축산업 강화, 원예와 과수, 고무나무 재배, 저장 산업 기술 등을 전수해야 한다. 유통은 식민지 무역인의 폭리를 방지하기 위해 본당을 통해서 하고,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아프리카인들의 유목 생활 양식과 유목 실패로 인한 농지 활용 미비와 그날그날 호구지책의 생활 형태를 개선하기 위하여 농업 교육을 중심에 두고 본당을 설립하여, 그 본당 중심으로 신자들을 정착시키는 일이 이 계획의 근간이다.24)

⑤ 선교사의 양성과 행동 양식을 밝힌다. 절대적으로 농업 발전에 근거를 두고 새로운 농업 경영방식을 터득한 ‘농업경영수사’(Okonomiebruder)를 양성하여 선교지에 파견하여야 한다. 당연히 독일 모원에서의 교육은 선교지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준비해야 한다. 전문 분야의 자격을 취득한 후에 선교지로 파견하여 주민들을 전문적으로 지도하게 해야 한다. 물론 베네딕도회적 삶과 정신으로 무장할 때 선교지의 생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인식과 이해가 깊어진다고 보고 있다. 선교 생활의 터전은 본당이며 바로 여기서 삶의 학교가 만들어 진다. 선교사들은 공동 생활을 해야 하며, 본당은 적당한 장소에 넉넉한 부지를 확보하여 신자들과 함께 마을을 이뤄 살면서 그들에게 그리스도교적인 가정 정신을 보여줘야 한다25)고 하였다.

⑥ 이 개발 프로그램 제안의 근거를 밝힌다. 역사적 근거는 유럽의 문화 발전과 사회 발전에 베네딕도회가 기여한 사실이며, 현실적인 근거는 아프리카인들의 토착적인 구조와 심성이다.


3. 선교 베네딕도회의 한국 진출의 근원적 동기

1) 한국 진출 시기의 사회 정치적 상황 : 교육 수요의 폭발적 증가


1905년 11월 한국은 일본의 보호령이 되었고, 1910년에는 결국 합병이 되고 말았다. 일본은 이제 한국에서 국가 운영의 전권을 가지고 정부를 대표하는 총독부를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인들은 단 기간 내에 관공서, 금융 기관, 철도, 우체국, 도로, 공공 사업, 산업, 교육, 상업, 농업, 의료 등을 창설하고 구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일본인들은 그들의 노력으로 한국이 사회적으로 향상될 것이라고 홍보하며, 특히 그들의 교육 활동이 다수의 한국인의 관심 속에 발전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외적이고 선의적인 의도에도 불구하고 다른 속셈이 있음이 분명했다. 다시 말하면 당시 희망적인, 미래를 꿈꾸며 서울로 이주한 일본인이 30,000명이 넘었다.26)

주변 국가들의 문화 정책 역시 세기의 전환기에 한국인의 삶에 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종교와 문화를 통한 자국의 위상을 높이며 다른 한편으로 국민 생활의 유럽화, 더 정확히 말하면 미국화에 관한 것이었다. 이때 교육 문제가 전면에 나타나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교육적 욕구를 장려하며 높은 수준의 공립 학교들을 세웠다. 그리하여 한국인들이 나이에 관계없이 학교로 몰려드는 사태가 빚어졌다.

2) 한국 진출 당시의 교회 안팎의 상황 :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도전

한국이 개방된 후, 1884년이 지나면서 미국의 프로테스탄트 선교 협회 역시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사회적 · 문화적 지원에 몰두했고, 그들의 활동은 급속히 국민들의 호응을 얻어냈다. 가톨릭 교회와 비교해 볼 때 프로테스탄트는 엄청난 재정 능력과 많은 유급 인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더욱이 그들은 오로지 설교와 세례에만 전념했던 것이 아니라, 숭고한 뜻이 있는 학교 제도를 통하여 그리스도교적 엘리트를 양성하려는 시도를 하였다.27) 그리고 영국과 미국의 다양한 프로테스탄트식 선교 활동은 절박한 학교 교육의 필요성과 맞물려 탁월한 성과를 거두었다. 《Korea Mission Field》(1907년 10월호)의 통계에 따르면, 장로교파에만 59,787명의 신자들과, 767개의 예배당, 그리고 7,504명의 학생들을 보유한 434개의 학교가 있었다.28) 그에 반해서 파리 외방전교회만 활동하던 가톨릭 교회는 불과 739명의 재학생을 보유한 72개의 학교만을 운영하고 있었다. 1908년 통계에 의하면 전국적으로 68,016명의 가톨릭 신자들과, 931개의 공소를 포함한 본당과, 46명의 유럽인 선교사, 그리고 10명의 방인사제들이 있었다.29)


56명의 사제들과 40명의 교리 교사와 52명의 수녀들을 보유한 가톨릭 선교 인력에 비해서, 프로테스탄트는 이미 317명의 목사들과 여전도사들이 있었다. 비록 68,000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52,000명의 신자 수를 가진 프로테스탄트보다 더 많긴 했지만 학생 수에 있어서는 22,000명을 보유하고 있는 프로테스탄트에 비해 10분의 1에 해당하는 2,200명의 학생이 있었을 뿐이었다.30)

가톨릭 교회에는 많은 학교를 세우고 우수한 교사를 채용할 재정적 능력이 충분하지 못했다. 당시 가톨릭 학교는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이나 비신자들, 심지어 일본 하사관 출신들조차 교사로 채용하고 있었다. 고등 교육 기관의 경우는 국립 고등 교육 기관 이외에 프로테스탄트 연합에 의해 관리되었던 22개의 고등 교육 시설이 더 있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에는 사제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고등 교육 기관도 없었다.

3) 한국 진출의 근원적 이유 : 교육 활동인가? 수도 생활인가?

선교 베네딕도회의 한국 진출 이유를 두고 두 가지 상이한 의견이 있다. 그것은 1970년대 초에 발표된 성 오틸리엔 연합회 소속 한국 파견 신부들의 두 논문에 나타난다. 빌리발드 쿠겔만(Willibald Kugelmann) 신부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진출의 목적과 목표는 우선 한국에서 수도 생활의 실현이었다. 그리고 부차적인 과제로 교사 양성 기관과 수공업 학교의 설립과 운영이다.

한편 올라프 그라프(Olaf Graf) 신부는 다른 것에 우선권을 두었다.

뮈텔 주교와 그의 조언자들, 그리고 교황청 포교성성은 서울의 선교 베네딕도회에 즉시 학교를 설립할 것과, 가능하면 가톨릭 신학교를 설립할 것을 기대했다. 어느 것이 실제적인 이유인가?31)

결론부터 말하면 학교 설립이 일차적이고 구체적인 이유지만, 한국 선교 활동의 역사를 보면 창립자의 선교 사상과 이념이 드러나는 수도 생활의 실현 역시 중요한 진출 이유였다고 볼 수 있다.

선교 베네딕도회가 한국에 진출하기 전까지, 가톨릭 유일의 선교 단체였던 파리 외방전교회는 이제 그들의 힘만으로 더 이상 프로테스탄트의 활동에 대응할 수 없음을 인식했다. 그래서 뮈텔 주교는 다양한 방법으로 한국 선교에 협력할 수 있는 교육 수도회를 초청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그는 마침내 1908년 유럽으로 떠났고, 포교성성으로부터 성 오틸리엔을 추천받아 서면으로 우선 한국 진출을 요청하였다.32)

당시 성 오틸리엔 역시 뮈텔 주교의 청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성 오틸리엔은 1905년 8월에 발생한 마지-마지-폭동으로 폐허화된 독일-동아프리카의 다레스살라암 대목구의 재건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연유로 볼 때, 베버 아빠스가 뮈텔 주교의 서면상의 청을 즉시 거절했던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33)

하지만 뮈텔 주교는 베버 아빠스의 거절 편지를 받지 못한 채 1908년 가을에 직접 성 오틸리엔을 방문하여 활기차고 고무적인 희망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권유하였다.34) 그 결과 베버 아빠스와 수도원의 투표권 있는 회원들의 마음을 바꿔 놓을 수가 있었다. 뮈텔 주교는 우선 교육 사업에 협력해 줄 것을 청하였다. 실제로 성소자에 있어서 성 오틸리엔은 다행스럽게도 성 오틸리엔과 성 루드비히, 그리고 슈바이클베르크에 있는 선교 신학교가 만원을 이루고 있었고, 딜링겐과 뮌헨에 있는 신학원도 인원이 꽉 차 부족함이 없었다.35) 그리하여 베버 아빠스는 보니파시오 사우어(Bonifatius Sauer, 1877~1950)36) 신부와 도미니쿠스 엔쇼프(Dominikus Enshoff)37) 신부를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선발대로 한국에 파견하였다.38) 그들은 1909년 2월 25일 인천을 거쳐 서울에 도착하였다.

사우어 신부는 한국 선교에 있어서 중요한 과제가 무엇인지 명백하게 파악하였다. 즉, ‘이곳에 가톨릭 교사가 어느 정도로 부족한지, 그리고 가톨릭 교사 양성 기관의 조속한 설립이 얼마나 필수적인 일인지’39) 알게 된 것이다. 엔쇼프 신부 역시 그것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 “뮈텔 주교는 우리가 우선 서울에 가톨릭 교사 양성 기관과 하나의 김나지움, 또는 그와 상응하는 교육 시설을 세우기를 바라고 있다. 아마 직업 학교 역시 필수적일 것 같다”.40)

1910년에 사우어 신부가 서울에서 개교한 숭공학교의 목적과 목표를 4개 항목으로 요약했는데, 그 네 번째 항목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우리는 마땅히 이러한 직업 학교 또는 실업 학교에서 유능한 방인 평수사들을 양성해야 한다.”41) 이 표현에서 선교 베네딕도 회원들이 초기부터 학교 제도를 통해 방인 후진 양성을 생각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당시에는 이것이 아주 공공연하게 표명될 수는 없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역사적 측면은 이미 서울 수도원 초기에 ‘성 베네딕도회 수도 생활’을 한국 땅에 뿌리 내리기 위해서 방인 성소자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4. 서울 수도원과 덕원 수도원, 그리고 연길 수도원에서의 선교 활동

1) 일상에서 선교를 실행하는 수도자의 삶


(1) 선교 중심지로서의 수도원

수도 공동체로서 베네딕도 회원들은 선교 국가의 국민들에게 그리스도교적인 가족 정신의 모범을 제시하고자 했다. 한국과 만주에서의 선교에서 이러한 과제가 실현되었다는 것은 명백하며, 선교 센터로서의 수도원의 의미를 더해 준다. 수도원에서의 수도 생활은 비신자들이나 신 영세자들에게 참된 가정 생활의 모범을 보여줘야 했다.42) 날마다 미사와 저녁 기도, 그리고 다른 성무일도 시간에도 그들은 공동으로 노래를 불렀다. 또 잘 정리된 농장과 과수원과 작업장에서 수사들은 열심히 일하며 가르쳤다. 이렇게 서울에서의 공동체의 삶은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는 베네딕도회의 모토(Motto)에 일치했다.43)

수도원 성당에서 이루어지는 베네딕도회 전례의 화려함 역시 과소평가할 수 없는 요소로서, 그리스도교의 기본 원리를 실행하는 삶에 속했다. 전례는 “그것의 아름다움으로, 비록 비신자가 처음에는 그 의미와 내용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오인할 여지가 없는 인상을 그에게 줄 것이기”44) 때문이다.

수도원이 특별히 선교 중심지로서 어떠한 발전을 이루었는지는 본당에서 활동하던 회원들이 수도원에서 개최되던 월례회합(die monatliche Konferenz) 안에서도 드러났다. 거의 매달, 본당에서 살고 있던 신부들이 적어도 며칠 동안이나마 온전히 수도원에 머물며 평소보다 내적이고 영적인 삶과 기도, 그리고 성찰에 더욱 더 전념할 수 있기 위하여 한 데 모였다. 대체로 이 기간 동안에는 선교 활동의 현실성 있는 문제들에 대한 강의가 역시 행해졌다. 수도원은 그들이 언제고 다시 되돌아와서 육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원기를 되찾을 수 있는 제2의 고향이 되어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45)

(2) 방인 수도자 양성

선교 베네딕도회가 서울에 수도원을 설립했던 1909년 이래로, 그들은 한국인 수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애를 썼다.46) 이러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기 위해 모원인 성 오틸리엔 수도원에서처럼 서울에서도 미래의 지원자들을 위하여 작업장과 직업 학교를 세우고, 그들이 그곳에서 적절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그러한 지원자들이 유럽인 수도자들의 공동체에 받아들여졌다.

지방민들을 수도회 가족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성 오틸리엔의 아프리카 선교 현장과 달리 한국에서는 초기부터 고려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향에도 불구하고 입회는 신중하게 이루어졌다. 결국 1914년 숭공학교 출신 3명을 지원자로 받아들였다. 물론 그들의 양성 기간은 유럽에서보다 훨씬 더 길었다. 이들은 1919년 성령강림대축일에 착복식을 갖고 청원자가 되었다. 1920년에도 2명의 지원자를 받았다. 첫 그룹에 속했던 3명은 1922년 성령강림대축일에 수련을 시작하였고, 이들 중 황 보니파시오 수사(1894~1944)와 김재환(플라치도) 수사(1890~1962)가1923년 6월 9일 첫 서원을 하였다. 같은 날 2명의 청원자가 수련을 시작하였고, 1924년 성 베네딕도 축일에 첫 서원을 하였다. 1926년 8월 15일 한국인 첫 입회자들인 황 보니파시오 수사와 김재환 수사와 오 로베르토 수사가 종신 서원을 하였다.47)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덕원 수도원(1949)과 연길 수도원(1946)이 해체 되었을 때, 한국인 수도자들의 수는 4명의 신부와 8명이 신학생이 있었고, 평수사는 12명의 서원 수사와 4명의 수련자가 있었다.48)

(3) 평수사들의 활동

수도원의 장인들인 평수사들은 선교 현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평수사들의 활동은 단지 종교적인 선교 업무에만 국한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지역민들을 농업과 다양한 수공업 분야의 교육을 시키고, 그것을 통해 경제적으로 나아질 수 있게 하려는 시도를 했다. 선교지에 소재한 본 연합회의 수도원에서 수사들의 손길은 곳곳에 미쳤다. 덕원 수도원에는 방인 수사들을 포함하여 아주 많은 수의 수사들이 있었다. 선교 수도원에는 고국 수도원에서와 같이 모든 소임에 종사할 수사들이 필요했다. 한국에서의 수사들, 즉 평수사들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사우어 아빠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의 첫 번째 수사들이 동아시아로 왔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여기에서 수사들을 데리고 무슨 일을 하려고 하십니까? ··· 그리스도교는 노동의 가치가 존중되는 곳에서만이 깊이 뿌리를 내릴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노동의 원칙에 대한 존중 없이는 어떤 그리스도교도 없다! 성 베네딕도는 그의 시대에 노동의 도덕적인 위대성을 가르쳤다. 여기 동아시아에서는 그것이 두 배, 세 배로 필요하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수사들의 위치가 아프리카에서와 똑같지는 않다 하더라도, 사실 그들은 여기에서도 역시 아주 커다란 임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대체로 우리 신부들보다도 더 본래의 그리스도교 문화의 운반자들이었다.”49)

신부들이 사제직과 관련된 활동과 강의, 그리고 언어 연구에 애썼던 반면에 모든 평수사들은 그들의 작업장과 공장에서 열심히 일했다. 유럽인과 한국인 평수사들은 갖가지 다양한 사업장에 배치되었는데, 이를테면 목공소, 철공소, 재봉실, 제본소, 건축, 정원, 주방, 현관, 또는 건물 관리인으로 배치되었다.50) 어디든 새로운 선교 기지(본당) 설립이 결정되면, 평수사들은 필요한 건물을 짓기 위하여 벽돌공으로, 목수로, 금속공으로, 소목장이로 즉시 그 자리에 파견되었다. 그때 항상 한국인 평수사들도 언제나 함께 투입되었다. 그럼으로써 그들이 나중의 자기의 업무를 준비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들의 ‘언어상의 이점’으로 주민들과 쉽게 접촉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2) 교육 활동

(1) 숭신학교

한국에서의 선교 베네딕도회의 선교 활동에 있어서 가장 긴급한 과제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고등 교육 기관의 설립이었다. 한국 교회의 내적 상황은 프로테스탄트의 교육 활동에 균형을 맞출만한 어떤 고등 교육 기관도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가톨릭 신자 교사의 수도 아주 적었으며, 대부분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한 교사들이었다. 즉 사범학교의 설립이 가장 긴급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서울 백동에 베네딕도회 수도원이 세워진 후 즉시 학교 시설 건립이 시작되었다.

1911년에 가톨릭 교사 양성을 목표로 숭신학교가 설립되었다. 같은 해 9월 14일에 25명의 지원자들이 응시하러 수도원을 찾았는데, 장소 부족으로 그 이상은 받을 수가 없었다.51) 그들은 모두 소학교를 졸업한 15세부터 28세까지의 청소년과 젊은이들이었다. 다음날 입학시험이 치러졌는데, 두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가 합격했다. 그 다음날에 격식을 갖춘 입학식을 하였고, 장엄 미사도 함께 올렸다.52)

교과 과목으로, 종교는 아주 기본적인 것이었고, 도덕과 윤리, 즉 도덕 철학과 교육학 역시 중요하게 다루었다. 그 밖에 한국어 문법과 작문, 중국어문, 일본어, 세계사와 지리, 수학, 자연과학, 성악, 미술 그리고 체육 등이 있었다.53)

교사로는 한국어를 빨리 습득한 2명의 본회 소속 신부들과 2명의 한국인 교사가 활동하였다.54) 과정은 2년이었으나, 숭신학교는 첫 졸업생을 배출한 후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즉 불과 2년 동안만 존속했을 뿐이었다. 사우어 아빠스는 두 가지 현실적인 고려를 들어 사범학교의 폐쇄 이유를 설명했다. 하나는 많은 프랑스인 신부들이 첫 졸업생 교사들에게 월급을 지불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다른 하나는 합병 이후 미션스쿨의 수가 끊임없이 감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범학교를 계속하려면 ‘현재의 사범학교를 완전 해체시키고, 4개 학급의 중학교를 설립하며 거기에 1년 과정의 교육학 코스를 개설했을 때 가능하다’55)는 정부의 요건을 따라야 했다. 물론 사우어 아빠스의 계획은 국립학교와 같은 규모와 수준의 학교를 만든다는 것이었지만, “전쟁이 그 계획의 계속적인 속행을 막고 말았다.”56)

(2) 숭공학교

1910년에 직업학교가 서울 수도원 안에 설립되었다. 학교 이름은 ‘숭-공’이라 했는데, 그것은 기도와 일이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었다. 대략 30명의 한국인 학생들이 공부했는데, 그들 대부분은 견습생들이었다.57)

직업학교 자체는 이론과 실제의 수업을 두루 갖춘 실제적인 학교로 조직되었다. 그러나 이론상의 수업은 가장 필수적인 것만으로 한정을 지었다. 왜냐하면 학생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유능한 직공과 근면한 일꾼으로 교육되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들은 매일 2시간의 학교 수업에 對比하여 8시간의 작업 시간을 작업장에서 보냈다. 학교 수업은 주당 2시간은 종교, 3시간은 한문, 그리고 일본어도 3시간, 산수와 작문 4시간, 그리고 제도 4시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마지막 학년에는 매주 2시간씩의 상업부기 수업이 들어가 있었다. 그에 반해서 다른 과목들, 즉 역사, 자연과학과 같은 과목들은 교수되지 않았다.58) 견습 기간은 3년이었고 실습 시험으로 끝이 났다. 이어서 그 젊은이들은 2년을 더 기능공으로서 수도원 안에서 일하면서 머물렀다. 그때 그들에겐 그들 보수의 반이 지불되었는데, 그 나머지반은 2년의 기능사 기간을 마칠 때까지 저축되었다. 이는 그들이 나중에 자립할 수 있는 작은 밑천이 될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59)

이러한 직업 학교의 목적과 가치 및 목표를 사우어 아빠스는 다음과 같이 네 가지 항목으로 요약하고 있다 : “① 직업학교는 정부와 국민들에게 가톨릭 교회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한국에 있어서 그 문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보다 덜 시급한 것이 아니다. ② 직업학교는 독립적인 가톨릭 수공업자 계층을 형성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지금까지 소위 가난한 이들의 종교였던 가톨릭 교회가 꼭 필요한 버팀목이라 할 수 있는 중산층을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③ 직업학교는 신앙의 보급에 많은 공헌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젊은이들 모두가 나중에는 마이스터로서 계속 3~4명의 견습생들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 가운데는 틀림없이 매번 2~3명의 비신자들이 있을 것이다. 신자 가정과의 접촉을 통해서 이들은 그리스도교를 믿게 될 것이고, 그들의 부모와 가족들도 대부분의 경우 뒤따라오게 될 것이다. 그것은 어쩌다 있을 수 있는 우연한 입교가 아니다. ④이러한 직업학교 또는 실업학교에서 유능한 방인 평수사들이 양성되어야 한다.”60)

사우어 아빠스는 이와 같이 실업학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사범학교가 문을 닫게 된 후 실업학교를 더 발전시킬 계획을 갖고 있었으나, 재정적인 어려움과 무엇보다 선교 베네딕도회가 1920년에 북한의 원산 대목구를 맡게 됨에 따라 그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마침내 직업 학교는 1923년에 새로 설립된 신학교에 자리를 내주고 완전히 문을 닫았다.61)

(3) 소신학교와 대신학교

한국의 베네딕도 회원들은 1920년 독자적 선교 지역인 원산 대목구를 맡게 됐을 때 즉시 신학교의 설립을 결정했다. 그것은 교구 고유의 소신학교(Knabenseminar)와 대신학교(Priesterseminar)를 세우는 일이었다. 즉 이미 구체적인 성과를 냈던 직업 학교 출신의 평수사 양성과 같이, 방인 교구 사제 양성과 방인 수사 신부 양성을 동시에 고려하고 있었다.62)

사우어 아빠스는 원산 대목구가 설정된 해인 1920년, 서울 수도원에 있던 숭공학교의 일부를 소신학교로 개조하기 시작하였다.63) 물론 그 소신학교는 법적으로 원산 대목구 소속이었다. 처음에는 학생도 부족하고 교사들도 부족했기 때문에 2년에 한 번씩 입학생을 받아들였다.64) 그런 다음 1927년에 서울 수도원이 덕원으로 옮겨짐에 따라 신학생들 역시 그들의 새로운 거처를 덕원의 신축 수도원 옆으로 옮겼다.65)

공부는 14년 동안 계속되었다. 처음 2년 동안은 준비 기간으로 한국의 소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보완하는 과정이었다.66) 그 후 2년 동안은 라틴어 읽기와 쓰기를 배워야 했다. 그 다음 6년은 중학교 과정이었다. 이때 신학생들은 아주 집중적으로 라틴어와 종교, 기하학, 대수학, 국사와 세계사, 지리학과 자연과학 등을 배웠다. 수업의 목표는 실무적인 사목자를 양성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67) 마지막 2년 동안은 일반 교양과 유럽 언어를 더 배워야 했는데, 주로 영어와 독일어를 배웠다. 여기에 대신학교 과정인 철학과와 신학과 과정이 이어졌다. 즉 교회법적인 규정에 상응하게 2년간의 철학 공부와 4년간의 신학 공부까지 길게 이어졌다.68)

1936년에 처음으로 김충무와 한윤승 2명이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들은 덕원 신학교에서 배출되었지만 공부는 서울에서 시작했었다.69) 1937년 소신학교에서는 학생 수가 크게 증가하였다. 1923년부터 평양 대목구의 메리놀회 선교사들이 그들의 신학생들을 초기에는 2년에 한 번씩 보냈는데, 나중에는 1년마다 베네딕도회가 운영하던 서울 신학교의 중학교 1학년 과정에 보냈기 때문이었다.70)

3) 전례 활동

(1) 한국어 미사 경본의 발간과 전례 교육

신자들을 거룩한 전례에 활발히 참여시키는 일은 덕원 수도원과 연길 수도원 소속 베네딕도 회원들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요 과제 중의 하나였다.71) 그들은 “고국의 베네딕도 수도원들이 시작한 전례 개혁을 고국에서처럼 한국과 만주에서도 유용하게 성장시키려는”72) 시도를 했다. 한국에서 ‘신자 전례 교육 활동’(volksliturgisches Arbeiten)을 위한 절박한 과제는 미사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와 활발한 참여를 유도하는 일이었다.73)

이러한 요구는 그 당시 한국에서 미사드릴 때의 상황에서 기인한 것이다. 올라프 그라프(Olaf Graf) 신부가 기록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어떤 부인은 미사 시간 동안 로사리오 기도를 드리면서 미사에 참여했는데, 그런 경우 미사에 참여하긴 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 앞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서는 결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체 공동체가 본당의 교중 미사(Hauptgottesdienst) 때에 단지 그와 같은 방식으로, 즉 로사리오 기도를 드리면서 미사에 참여하였다.74)

베네딕도 회원들은 이런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우선 시험적으로 1931년 대림 제1 주일부터 주일 미사와 축일 미사의 클로스터노이부르크(Klosterneuburg)의 미사 경문(Meßformular)을 낱장 형태로 한국어로 번역 인쇄하여 신자들에게 배부하였다.75) 연길에서는 콘라트 랍(Konrad Rapp) 신부와 빅토린 차일라이스(Viktorin Zeileis) 신부,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신부들이 ‘전례 운동’의 도입과 실시를 위해 미사 관련 서적들을 한국어로 번역하였다.76) 이러한 사용 기간 동안에 베네딕도 회원들은 모든 미사 경본을 한국어로 완벽하게 번역하는 것이, 미사가 신자들의 품위 있는 공동의 축제가 되는 데에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77)

루치오 로트(Lucius Roth) 신부는 1932년 《미사 통상문》(Ordinarium Missae)을 한국어로 번역했다.78) 아펠만(Balduin Appelmann) 신부는 1932~1933 경본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소책자로 완성시켰다. 미사 기도문은 포괄적으로 《Ordinarium Missae》를 모범으로 삼고 있었다. 1933년 가을에 그것을 토대로 《미사 규식》(Missa Kyusik, Ordo Missae)79)을 덕원 수도원 인쇄소에서 발행했으며, 이후 이 책자는 여러 본당에서 자유로이 사용되었다.80)

몇 가지 사전 작업81)을 더 한 후에 1936년에 《미사 경본》(Missa Kiongpon)이 간행되었다.82) 그것은 로트 신부가 독일의 안셀름 쇼트 신부가 간행한 소위 “쇼트미사경본”(Schottmessbuch)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미사 경본의 주요 고객은 당연히 원산과 연길의 자체 본당 지역이었다. 아주 많은 수의 책이 메리놀회 신부들에 의해서도 주문되었으며,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들의 주문량도 적지 않았다.83)

그 외에도 1935년에 이미 몇 가지 특별한 미사책이 발행되었는데, 그것 역시 로트 신부에 의해서 개작되었다. 그것은 3권으로서 《주일 미사 경본》, 《聖人 미사 경본》, 그리고 《사순절 미사 경본》 등이다. 처음의 두 미사 경본은 위의 《미사 경본》이 발행된 이후 더 이상 새로 간행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미사 경본은 계속 출판되었는데, 이 부분이 《미사 경본》에는 빠져있었기 때문이다.84)

그 외에도 파비안 담(Fabian Damm) 신부는 천연색 그림이 수록된 《어린이용 미사경본》(Meßbuchlein fur Kinder)을 발행했다. 그 초판은 1936년에, 재판은 1937년에, 그리고 제3판은 1942년에 간행되었다. 처음 두 판본은 한국어로, 마지막 판본은 일본어로 되어 있는데, 그 까닭은 어린이들이 나중에 한국어를 더 이상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85)

(2) 성무일도의 발간과 신자들의 공동 성무일도

베네딕도 회원들은 그들의 본당 공동체에서 기도 생활 역시 풍성하게 했다. 팔도구 본당의 연대기를 보면 : “연길에서 발행된 《미사 규식》이 이미 오래 전부터 공동체 안에서 익숙해진 뒤에, 우리는 시험적으로 한국어로 하는 성무일도 일시경, 끝기도, 그리고 몇 가지 저녁 기도들을 본당에서 실시해 보려고 하였다. 우리는 한 주에 2번은 일시경과 끝기도를 노래로 드렸고, 반면 저녁 기도는 축제일에만 노래로 드렸다.”86)

한국인 수사들과 수녀들의 수도원 입회는 이제 통상적인 성무일도와 노래로 드리는 성무일도를 한국어로 개작하는 것을 불가피하게 했다. 개별적인 기도 생활에서와 같이 공동체의 기도 생활에서도 풍성한 충만함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선교사들은 다양한 판본의 성무일도 개편 작업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차일라이스 신부는 한국인 수녀들을 위해 《수녀 공과》(Offizium Divinum)와 《수녀 기구 예절서》를 간행하였다.87) 이 기도서는 평신도들에게서도 호응을 얻어, 신자들이 공동의 기도 시간을 갖기 위해 본당으로 모여 들었다. 그래서 베네딕도 회원들은 자기의 신자들에게 교회의 일반적인 기도를 가르치고자 하였다. 로트 신부는 1938년 한국 신자들을 위해 《성무일도》역시 한국어로 간행하였는데, 그것이 성 오틸리엔 수도원의 고유 성무일도를 번역한 것임을 머리말에 밝혔다.88)

그 외에도 《성탄절 성무일도》, 《성주간 성무일도》, 《주일과 부활절, 성령강림대축일과 사도 축일 저녁기도》와 《성녀 아가다와 성녀 체칠리아 축일 성무일도》가 있었다. 이 소책자들은 모두 아펠만 신부에 의해서 1934년과 1935년 사이에 발행되었다.89)

(3) 성가책의 발간과 학생 성가대원들의 구성과 역할

미사 경본을 편찬할 때, 매주일의 주일 미사의 경문들을 국어로 번역 인쇄하여 신자들에게 분배하였다. 그런 다음 신자들로 하여금 그 경문을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수많은 강론을 행하였고, 신자들과 함께 공동으로 텍스트를 낭독하는 연습에 들어갔다. 또한 정확하고 고른 발음에 도달하기 위해, 12명의 소년과 8명의 소녀로 구성된 학생 성가대원을 만들었다.90)

성가대를 편성하는 일은 베네딕도회의 전통으로부터, 그리고 수많은 전례 개혁 단체의 모범으로부터 착안되었다. 교황 비오 10세의 확실하고 단호한 전례 개혁 의지의 실현은, 모든 본당에서의 그레고리오 성가 대미사(Choralhochamt)의 실행을 가져왔다. 그 미사는 베네딕도 수도원의 라틴어 공동체 미사(Konventamt)와 완전히 일치했다.91) 무엇보다도 중고등학교 재학생 청소년이 베네딕도 회원들에 의해서 그레고리안 성가의 지극히 단순한 노래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미사 관련 서적과 마찬가지로 몇 개의 성가책 역시 한국어로 번역되어, 작은 소책자로 분류되어 발행되었다. 카니시우스 퀴겔겐(Kanisius Kugelgen) 신부는 그의 마음에 드는 성가 43곡으로 1934년에 임시로 《성가》(Liederbuch)라는 이름의 성가책을 만들었다. 신자들이 미사 때 사용할 성가책이 필요했던 것이다.92)

아펠만 신부는 1935년 연길에서 《성가집》(Katholisches Liederbuch)을 발행했다. 이 책은 원래 음표 없이 120곡의 노래 원문이 수록된 판본이었는데, 오팔의 문자(Opalograph)로 여러 부로 복사되었다.93)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 지역에서 현존하는 성가책이 부족함이 많아 베네딕도 회원들은 “가장 아름다운 독일 성가들의 멜로디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번역하기로” 결정하였다.94)

볼프람 피셔(Wolfram Fisher) 신부는 오랜 준비를 거쳐 1938년에 전례주년에 맞는 성가들을 골고루 담은《가톨릭 성가》를 덕원 수도원 인쇄소에서 발행하였는데,95) 전례주년에 따른 편성과 단순한 멜로디, 한글 가사, 그리고 인쇄 및 제본 등 다양한 관점들이 고려되었다.


5. 결 론

지금까지 선교 베네딕도회가 한국과 만주에서 1909년부터 1949년까지 펼친 선교 활동의 방법과 특성을 성 오틸리엔 연합회의 초기 선교 사상과 역사에 비추어 수도 생활 · 교육 활동 · 전례 활동이라는 세 가지 주요 활동 영역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사실, 서울 수도원 · 덕원 수도원 · 연길 수도원은 실제로 선교 활동의 중심지였다. 수도원이 곧 삶과 활동과 교육과 전례의 중심지이자 선교 현장이기도 하였다. 본당에서 활동하던 회원들은 4~6주에 한 번씩 어김없이 수도원에 모여 월례 회합을 가졌다. 그러한 월례 모임의 실천은 창립자 암라인 신부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기본 사상에 근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수도원은 항상 회원들에게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관점에서 공급과 휴식의 토대가 되어 주었다 또한 . 수도원은 선교 베네딕도회의 이중 소명, 즉 수도 소명과 선교 소명의 조화를 가져다주는 영적 유대의 장소이기도 했다. 이러한 생각은 초대 베버 아빠스의 선교 이념 안에서도 역시 발견되고 있다. 한국과 만주의 수도원 성당에서는 언제나 베네딕도회의 장엄한 전례가 거행되었다. 이는 인근의 주민들에게도 역시 대단한 호응을 얻었다. 베네딕도 회원들은 선교지 수도원에서 언제나 그리스도교 전례의 장엄함과 모범적인 그리스도교 가족 정신을 전수하고자 하였다.

교육 활동은 베네딕도회 수도원과 늘 잘 어울리는 활동 영역이었다. 특히 방인 후진 양성은 창립자의 세 번째 기본 사상에 근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방인 수도자 양성과 지역민의 교육은 직업학교와 소신학교와 대신학교를 통해서 실현되었다. 처음부터 베네딕도 회원들은 직업학교의 학생들과, 신학생들을 수도원적이고 베네딕도회적인 환경 안에서 교육시키고자 했다. 그러한 형태의 교육은 베버 아빠스의 선교 사상 중의 하나가 열망하고 있던 바와 같이, 결국은 주민들의 발전에까지 전체적으로 기여해야 할 것이었다.

끝으로 한국과 만주에서의 선교 활동에서 실행한 선교 베네딕도회의 전례 활동 역시 비중있게 다루었다. 그것은 선교 베네딕도회의 선교 방법과 특징에 대한 질문을 받게 될 때, 그들의 선교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전례 활동은 그 당시 특히 유럽의 여러 베네딕도회 수도원에서 출발했던, ‘전례 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본 논문은 동시대 유럽에서의 전례 운동이 한국과 만주의 선교 베네딕도회의 선교 현장에서도 역시 엄청난 영향을 발휘했다는 것을 밝히려고 노력하였다. 한국어 미사 경본과 성무일도와 성가책 편찬 사업은 본당 공동체 중심의 획기적인 전례 개혁을 의미한다. 베네딕도회의 전례 개혁 활동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오늘날 한국 교회 전례 발전을 위해 미리 초석을 놓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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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연합회의 명칭은 그들의 역사에 따라 여러 차례 변하였다. 초기에는 ‘St. Benedikt Missions=genossenschaft(성 베네딕도 선교회)’로, 후에 ‘Benediktiner-Missionare von St. Ottilien(성 오틸리엔 베네딕도회 선교사들)’ 혹은 ‘Missionsbenediktiner von St. Ottilien(성 오틸리엔 선교 베네딕도회)’로 불렸다. 한국에서는 ‘芬道會’ 혹은 ‘성 베네딕도회’로 불렸다. 오늘날 올리베타노 연합회도 한국에 진출한 터라, 본 논문에서는 ‘선교 베네딕도회(Missionsbenediktiner)’란 명칭을 사용하겠다.

2) 선교 베네딕도회의 한국 선교에 관한 글들은 다음과 같다. 백 쁠라치도, <한국에서의 초기 베네딕도회의 선교 방침>, 《한국교회사논문집》 I,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769~794쪽 ; 최석우, <한국 분도회의 초기 수도 생활과 교육 사업>, 《한국교회사의 탐구》 II,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 장정란, <독일 베네딕도회의 한국 진출과 교육 활동>, 《인간 연구》 제5호, 116~154쪽 ; 한국교회사연구소(편), 《함경도 천주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95; Frumentius Renner, Der funfarmige Leuchter, Bd. I, II, IV, St. Ottilien, 1971 1994 ; Adelhard Kaspar u. Placidus Berger(Hrsg.), Hwan Gab(이하 HG), 60 Jahre der Benediktinermission in Korea und in der Mansdschurei, Munsterschwarzach, 1973.

3) 그의 창립 활동과 선교 사상에 관한 정보는 다음을 참조하라. 백 쁠라치도, <하느님이 하신 일 - 오틸리엔 수족과 툿찡 수녀회의 출범>, 《옛 등걸에 새 순이》, 왜관성마오로쁠라치도수도원, 1984, 51~152쪽 ; P. Laurenz Kilger, “Die Missionsgedanken bei der Benediktinergrungung”, Zeitschrift fur Missionswissenschaft und Religionswissenschaft(이하 ZMR), 24, 1934, pp. 213~228 ; Abt Suso Brechter, “Beurons Beitrag zur Grundung von St. Ottilien”, Beuron 1863~1963. Festschrift zum hundertjahrigen Bestehen der Erzabtei St. Martin, Beuron 1963, pp. 231~267 ; P. Fritz Bornemann SVD, Ein Briefwechsel zur Vorgeschichte von St. Ottilien, Studia Instituti Missiologici SVD VI, Steyl, 1965 ; Frumentius Renner, “Vom Missionshaus Reichenbach zur Benediktinerkongregation von St. Ottilien”, Renner(Hrsg.), Der funfarmige Leuchter, Bd. I, St. Ottilien, 1971, pp. 1~336.

4) 마오로 볼터 아빠스는 1825년 독일 본(Bonn)에서 태어나 1850년 쾰른 대교구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1856년 로마의 성 베네딕도회 성 바오로 수도회에 입회하여 마오로라는 수도명으로 서원하였다. 1860년 로마를 떠나 1862~1863년에 독일 보이론에 수도원을 설립했다. 보이론 수도원과 보이론 연합회의 총아빠스와 총재로 일하다 1890년에 선종하였다.

5) Renner, 앞의 책, Ⅰ, p. 10.
6) 밀힐(Mill Hill)은 헬벗 보건(Herbert Vaughan, 1832~1903) 주교가 1866년 런던에 설립한 선교회이다.

7) 아놀드 얀센 신부는 1875년에 네델란드 슈타일에 신언회(SVD)를 설립하여 총장이 되었다(1975년 시복됨). 그는 1876년에 선교 인쇄소를 세웠고, 1877년에는 사제들과 평신도들을 위한 피정 과정을 개설했으며, 1878년에 선교 잡지 《하느님의 도시》를 발행하였고, 1879년에는 두 명의 선교사를 선교회 창립 이래 최초로 중국으로 파견했다. 암라인 신부는 아마 그로부터 비슷한 계획에 대한 영감을 받았을 것이다.

8) Renner, 앞의 책, Ⅰ, p. 15.
9) Ibid. p. 15.
10) Kilger, 앞의 책, p. 218.

11) 루츠 박사는 바이에른 주(뮌헨)의 법무부 장관(1867~1871)을 역임하였다. 1867~1880년에는 문화부 장관직도 겸임하였고, 1880~1890년에는 주 정부 수상을 지냈다.

12) Renner, 앞의 책, Ⅰ, pp. 31~36. 문화부에 제출한 변경된 청원서가 존재한다.

13) Andreas Amrhein, Die VII Grundgedanken der Eingabe zur Grundung der congregatio OSB pro missionsbus exteris(als Manusskript), Stuttgart, 1921. 교황 레오 13세가 승인한 로마의 포교성성에 있는 원본은 여전히 연구 목적으로는 공개되지 않고 있다. 여기서 소개하는 내용은 1921년 이름을 밝히지 않는 어느 편집자가 슈투트가르트에서 발행한 인쇄물을 기초로 한다(한국베네딕도회연합 편역, 《코이노니아》제9집, 73~91쪽, 1984).

14) 당시 튀빙겐 대학교에는 교회사 교수로 Karl Josef von Hefele와 교의신학 교수로 Johann Evangelist von Kuhn, 그리고 성서학 교수로 Moritz von Aberle 등 대단한 권위자들이 재직했다.

15) Renner. 앞의 책, Ⅰ, p. 72 이하.

16) 이때부터 암라인 신부는 자신의 거주지를 엠밍으로 옮겼다. 그는 엠밍에서 공동체를 이끌었고, ‘엠밍-성 오틸리엔’의 개간과 수도원 신축을 주재했다. 1904년 11월 2일에 ‘엠밍’(Emming)이라는 지역명은 국가에 의해 공식 명칭에서 소멸되고, 새로운 명칭인 ‘성 오틸리엔 수도원’이라 불리다가 나중에는 그냥 ‘성 오틸리엔’으로만 불리게 된다.

17) 당시의 독일 수상 비스마르크는 동아프리카 독일령에서 활동하던 프랑스의 성신 사제회(Holy Ghost Fathers)와 백의의 사제회(White Fathers)를 쫒아내 버렸다. 교황청은 1887년 11월 16일 남 잔지바 지목구를 설정하고 이를 성 오틸리엔에 맡겼다. 면적은 동아프리카 독일령 남부 전체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약 30만 평방 킬로미터 정도였다.

18) P. Godfrey Sieber, The Benedictine Congregation of St. Ottilien, St. Ottilien, 1992, pp. 18~24.
19) 왜관 성 마오로 쁠라치도 수도원 편, 앞의 책, p. 138.

20) 이 소책자는 100쪽 분량이다. 베버 아빠스가 1905년 동아프리카 선교지 시찰 중 직접 목격한 좌절의 경험을 근거로 기록한 것이다. 비록 그 계획이 아프리카의 선교 기지에 현존했던 구체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라 해도 한국과 만주에서의 선교 활동을 연구하는 데도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21) 베버 아빠스의 시찰 여행 진행 과정과 마지-마지-폭동에 대해서는 다음 책자를 참조하라. P. Cyrillus Wehrmeister, Vor dem Sturm. Reise durch Deutsch-Ostafrika vor und bei dem Aufstand 1905, St. Ottilien, 1906. 이 책에는 선교에 대한 매우 가치 있는 서술 및 보고와 함께, 선교와 식민지 정권에 대한 원주민들의 입장을 잘 설명하고 있다. 이 폭동 중에 카시안 스피스 주교와 수사들, 그리고 수녀들이 희생되었다.

22) Weber, Euntes in mundum universum, Stuttgart, 1921, pp. 2~4.
23) Ibid. pp. 63, 70, 77, 80.
24) Ibid. pp. 22, 28, 47, 51, 55.
25) Ibid. pp. 27, 47, 61.

26) Sauer, “Mein erster Sonntag in Seoul”, in: Missionsblatter St. Otilien(이하 MbO), 13, 1908~1909, pp. 136~138.

27) Katholische Mission(이하 KM), 36, 1907~1908, p. 190, 262 ; 37, 1908~1909, p. 116.
28) KM, 36, 1907~1908, 8번, p. 190. 이 통계는 1907년 10월호 게재된 정보에 근거한 것이다.
29) Ibid. 36호, 1907~1908, 6번, p. 142.
30) Ibid.

31) P. Ivo Auf der Maur, “Koreanische Benediktinertum”, in: Neue Zeitschrift fur Missionswissenschaft, Beckenried, 1945ff, Jg. 37, 1981, pp. 81~106.

32) Renner, 앞의 책, Ⅱ, p. 391 ; Enshoff, “Wie wir nach Korea kamen?”, in: MbO, 15, 1909~1910, p. 122.

33) Renner, 앞의 책, Ⅰ p. 392 ; Wilibald Kugelmann, “Grundungsberichte der Abtei St. Benedikt in Seoul, ihrer Verlegung nach Tokwon und Tatigkeit der Benediktiner im Apost. Vikariat Wosan”, in: HG, p. 80.

34) Kugelmann, 앞의 책, p. 80.
35) Enshoff, 앞의 책, p. 123.

36) 독일 모원 소속 딜링겐의 선교 신학교의 학장이었던 그는 훗날 서울 수도원과 덕원 수도원의 아빠스이자 원산 대목구장이 되었다. 한국명은 辛上院이다.

37) 뮌헨에 있었던 성 오틸리엔 신학원장이었던 그는 몇 달 후 독일로 귀국, 한국 선교를 도왔다.
38) Renner, 앞의 책, Ⅱ, p. 393 ; Kugelmann, 앞의 책, p. 81.
39) KM, 38, 1909~1910, p. 61. 1909년 9월 1일자, 사우어 신부의 편지에서 인용하다.
40) KM, 37, 1908~1909, p. 116 ; Enshoff, 앞의 책, pp. 121-136.

41) Sauer, “Jahresbericht der Benediktiner-Mission von St. Ottilien(1912)”, in: MbO, 17, 1913, p. 254 이하.

42) Anderas Eckardt, “Die Katholische Kirche in Korea”, in: Akademische Missionsblatter, 14, 1926, pp. 34~40.

43) Renner, 앞의 책, Ⅱ, p. 398 이하, p. 402 이하.
44) 성 오틸리엔 수도원 편, <덕원 수도원 연대기>, 1930년 1월~7월.
45) P. Phillip Lenz, “Benediktiner-Mission Yenki-Mandschurei”, in: HG, p. 178.

46) P. Laurenz Kilger, “Der einheimische Nachwuchs in unseren Missionen”, in: MbO, 46, 1942, p. 204.

47) 백 쁠라치도, 앞의 책, 784쪽.
48) Auf der Maur, 앞의 책, p. 93.

49) 사우어 아빠스의 편지. 다음의 책에서 인용하다 : P. Maurus Galm, DerBenediktinerbruder als Hilfsmissionare, Munsterschwarzach, 1929, p. 18.

50) 덕원 수도원 연대기. 1929~1932, 1935~1936 ; “Post aus St. Benedikt-Tokwon”, in: MbO, 43, 1939, p. 152, p. 154 ; Rudger Schaub, “Die Arbeit unserer Bruder in Yenki”, in: MbO, 48, 1944, pp. 174~175.

51) 서울 수도원 연대기. 1911년 8월~10월 ; Sauer, “Briefe aus unseren Missionen. Aus Korea ”, in: MbO, 16, 1911~1912, p. 104.

52) Ibid.
53) Ibid.

54) 에카르트 신부는 그뿐만 아니라 물리 화학 교재를 저작하여 수업에 활용하였고, 후에 한국어 문법책을 저술하였다. Kugelmann, 앞의 책, p. 83.

55) Renner, 앞의 책, Ⅱ, p. 404.
56) Ibid.
57) 서울 수도원 연대기. 1911년 1월~4월 ; Renner, 앞의 책, Ⅱ, p. 401 ; Kugelmann, 앞의 책, p. 84.

58) Sauer, “Jahresbericht der Benediktiner-Mission von St. Ottilien 1912”, in: MbO, 17, 1912~1913, p. 254.

59) Ibid.

60) Sauer, “Jahresbericht der Benediktiner-Mission von St. Ottilien 1912”, in: MbO, 17, 1912~1913, p. 254 이하.

61) Kugelmann, 앞의 책, p. 84.

62) P. Romuald Heis, “Der Priesterseminar St. Willibrord in Apost. Vikariat Wonsan in Korea”, in: Lumen Caecis, St. Ottilien, 1928, p. 270.

63) Kugelmann, 앞의 책, p. 105 ; Heis, 앞의 책, p. 270 ; P. Anselm Romer, “Unsere Knabenseminer in Tokwon”, in: MbO, 33, 1929, p. 263.

64) Kugelmann, 앞의 책, p. 105 ; Heis, 앞의 책, p. 270. 1941년부터 비로소 매년 새로 입학생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65) Kugelmann, 앞의 책, p. 105.

66) 당시 한국 초등학교에서의 교육이 많이 미비했던 것 같다. 그래서 신학교에서 좀 더 초등 교육을 보완해야 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비교. Heis, 앞의 책, p. 271.

67) Heis, 앞의 책, p. 271.
68) Heis, 앞의 책, p. 272.
69) 덕원 수도원 연대기. 1936년 상반기 반년 ; Kugelmann, 앞의 책, p. 108.
70) Kugelmann, 앞의 책, p. 106.

71) P. Beda Danzer, “Wie in Ryongdjong die Liturgische Bewegung Eingang fand”, in: KM, 64, 1936, p. 15; P. Olaf Graf, “Liturgische Missionsarbeit in Abtei-Vikariat Wonsan(Korea)”, in: Liturgisches Leben, 4, 1937, p. 225; P. Adelhard Kaspar, “Die Veroffentlichungen der Benediktinermissionare in Tokwon und Yenki”, in: HG, p. 113.

72) Graf, 앞의 책, p. 220.
73) Graf, 앞의 책, p. 225.
74) Graf, 앞의 책, p. 221.

75) 용정 본당 연대기. 1932년 5월~1934년 9월 ; 덕원 수도원 연대기. 1933년 1월~7월 ; Kaspar, 앞의 책, p. 113.

76) Kaspar, 앞의 책, p. 113. 베네딕도 회원들은 “당신들은 미사를 통해서 기도하거나 또는 기도하게 할 것이 아니라 미사를 행하여야 합니다”는 교황 비오 10세의 말씀을 연길에서 실현하고자 했다.

77) Graf, 앞의 책, p. 224.
78) 덕원 수도원 연대기. 1932년 1월~7월 ; Kaspar, 앞의 책, p. 113.
79) 이 소책자는 원산 대목구와 연길 지목구의 여러 본당에서 ‘신자 미사 교육’을 위해 만들어졌다.
80) 덕원 수도원 연대기. 1935년 상반기 반년.

81) 이미 1933년에 이 책의 일부가 인쇄되어, 미사에 참석한 신자들에게 배분되었다. 비교. 덕원 수도원 연대기. 1933년 1월~7월. 이러한 미사 경본(Missa Kiongpon)의 준비 작업을 연대기 저자는 “한국의 쇼트(Schott)”라고 명명했다.

82) 덕원 수도원 연대기. 1936년 후반기 반년.
83) Ibid.
84) 덕원 수도원 연대기. 1935년 상반기 반년 ; 비교. Kaspar, 앞의 책, p. 114 이하.
85) 덕원 수도원 연대기. 1936년 후반기 반년 ; 비교. Kaspar, 앞의 책, p. 115.
86) 연길 지목구, 팔도구 본당 연대기. 1933년 5월~1935년 5월.
87) Kaspar, 앞의 책, p. 118.

88) 이 책은 두 개의 판본으로 간행되었다. 하나는 한국어판으로 한국인 신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독일어와 한국어 대역판이었는데, 독일인 수사와 수녀들을 위해 제작된 것이었다.

89) 용정 본당 연대기. 1935년 5월~1936년 5월 ; Kaspar, 앞의 책, p. 117 이하.
90) Danz, 앞의 책, KM, 64, 1934, p. 15.
91) Graf, 앞의 책, p. 220 이하.
92) Kaspar, 앞의 책, p. 115.
93) Ibid. p. 115.
94) Ibid. p. 115.
95) 덕원 수도원 연대기. 1938년 6월~12월.

[교회사 연구 제29집, 2007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선지훈(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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