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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천주교와 사적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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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11-20 ㅣ No.330

한국교회사연구소 하반기 공개대학 ⑧ 천주교와 사적계시

영적 결실 없다면 정당성 없어
 

수십 년 전부터 성모 마리아의 환시나 성모상에서 피눈물이 흐르는 기이한 현상을 통해 성모 마리아의 메시지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이들, 이른바 '사적 계시'를 받았다는 이들이 자주 등장한다. 적잖은 신자들이 이들이 내세우는 환시나 기적, 예언의 환상에 끌려 이들 주장에 동조하기도 하고, 그들 중 일부는 교회 교도권과 마찰을 빚으며 거의 신흥종교와 유사한 조직체를 이루기도 한다.

사적 계시와 관련해 혼란이 가중되자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는 1997년 9월 「건전한 신앙생활을 해치는 운동과 흐름」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발간해 한국교회의 공식 입장을 정리해 발표했다.

이 책자는 우선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에 따라 '공적 계시'가 그리스도 도래 이후 사도들을 통해 종결되고 완성됐음을 밝힌다. 공적 계시는 이처럼 완결됐지만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삶의 구체적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깨우쳐주고 그리스도 정신에 상응하는 방향으로 인도하려면 공적 계시를 더욱 깊이 이해해야 한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사적 계시 혹은 '특별 계시', '특수 계시'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내용적으로 사적 계시는 공적 계시, 곧 "그리스도의 결정적 계시를 '개선'하거나 '보완'하는 게 아니라 역사의 한 시대에 따른 삶을 더욱 충만하게 살 수 있도록 돕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가톨릭교회 교리서」 67항). 주교회의 문헌은 사적 계시의 가능성과 의미를 인정하지만, 다른 한편 이것은 예외적 상황임을 명백히 한다.

주교회의 문헌은 사적 계시가 실제로 하느님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인지 식별하기 위한 세 가지 전통적 기준을 제기한다. 첫 번째 기준은 교리적 측면에서 사적 계시 내용이 교회의 공적 가르침에 따른 계시 내용에 부합돼야 한다는 점이다. 두 번째 기준은 심리적 측면으로 사적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주체가 균형 잡힌 인격체인지 아니면 병리적 경향을 지니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세 번째 기준은 사적 계시 주체 자신이나 그 주변 인물들 안에서 발생하는 영적 결실의 효과다. 바오로 사도가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5장 22절에서 언급한대로 성령께서 맺어주시는 열매인 참된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를 보인다면 일단 신뢰를 둬도 좋다. 하지만 이런 영적 결실을 거스르는 말과 행위를 보인다면 계시의 정당성을 부인하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가톨릭교회 공식 입장에 따르면, 사적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 안에서 완성된 공적 계시를 특정한 시대 상황에 결부시켜 더 깊이 이해하는데 그 정당성이 있다. 사적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그의 추종자들에게 신흥종교 교주처럼 섬김을 받는 것을 묵인하거나 더 나아가 은근히 조장한다면 문제가 된다.
 
또 사적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관련해 신기한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데 당사자와 동조자들이 이런 현상을 증거로 자신들이 정당하다고 인정받는데 집착하듯 매달린다면 이는 문제 있는 태도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신기한 현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추종이 더 중요하다.
 
성모상에 피눈물이 흐르거나 성체가 살과 피로 변하는 등의 신기한 현상에 매달리는 사람들 중에는 현실 삶이 너무 버겁고 힘겨워 작은 위로라도 얻으려다가 그렇게 된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렇다면 이들은 약하고 불쌍하고 병든 사람들이며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 한마디로 의사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의사가 필요한 사람을 위해서 왔다(마르 2,17)고 말씀하시며 소외된 이들을 돌보고 아픈 이들을 치유했다.
 
오늘날 이 의사의 역할은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가 해야 한다. 신기한 현상을 찾아다니며 거기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교회가 본연의 소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 아닌지, 교회공동체 신앙이 식어 그 안에서 더 이상 힘과 위로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지 반성해 봐야 한다. 교회 안에서 하느님 말씀이 힘 있게 선포되고 효과적으로 성사를 거행하며 서로 친교가 돈독해진다면, 그럼으로써 교회가 약한 이들에게 힘과 위로를 주고 병든 이들을 치유해주는 의사의 소명을 충실하게 수행한다면 신기한 현상에 목말라하며 그것을 찾아 헤매는 이들이 점점 더 줄어들 것이다.
 
[평화신문, 2011년 11월 20일, 
손희송 신부(가톨릭대 교수, 교의신학), 정리=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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